Four-Hands
Antonio Salieri, 1750.08.18. / 2024 살리에르
바야흐로 여름의 절정이다. 열린 창틈으로 후덥지근한 공기가 밀려들어 작업실 안은 온통 습하고 눅눅하다. 이래서야 악기가 망가지기 십상이겠군, 생각하면서도 살리에르는 당장 그것들을 손보려 서두르지는 않는다. 적당한 시일을 골라 조율사를 부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지금은 우선 맡은 바 작곡에 충실해야 한다. 살리에르는 한참 동안 내버려 두었던 깃펜을 집어든다. 곧 검은 잉크를 흠뻑 머금은 펜끝이 오선지 위를 강박적으로 미끄러진다. 그러나 잠시뿐이다. 살리에르가 그려낸 음표들은 선율로 엮이지 못하고 단지 파편으로만 남는다. 이게 아니야. 아프도록 움켜쥔 펜촉이 뭉그러지며 혈흔 같은 얼룩을 토해낸다.
저택은 더없이 고요하다.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생일 연회를 위해 채비해야 함에도 불구, 살리에르는 온종일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시곗바늘은 자정을 향해 가는 중이다. 작곡에 매진하겠다는 핑계로 저녁마저 걸렀으니 이 방의 문을 걸어잠근 지도 족히 일곱 시간은 되었을 것이다. 그에 반해 살리에르가 움켜쥐고 있는 악보의 오선은 열매 맺지 못한 겨울나무 가지처럼 터무니없이 앙상하다. 그러나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는 그저 기다릴 수밖에. 결코 쉽게만 살아온 시간은 아니건만 삶은 계속해서 험난한 쪽으로만 기울어진다. 피아노 앞에 앉은 살리에르의 손끝이 어떤 소리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허공을 힘없이 미끄러진다. 발치에는 엉망으로 찢기고 구겨진 종이 뭉치들이 구르고 있다. 예전 같았다면 기도나 고해를 읊조리며 소란한 마음을 다잡았겠지만, 이제 와 그런 일은 무용하다. 더 이상 비참한 구걸 따위 하지 않겠노라 결심했으므로.
협탁 위에 올려 놓은 메트로놈은 일정한 박자로 쉬지 않고 움직이며 살리에르를 재촉하고 있다. 그는 메트로놈을 집어던지고픈 충동을 애써 누르며 눈을 내리감는다. 가장 끄트머리에 간신히 매달린 무게추, 라르기시모Larghissimo. 여운이 잦아들 즈음 다시 명징하게 울리는 진동. 그것이 마치 누군가의 발걸음처럼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착각.
그는 자정 종소리가 멎은 직후 나타난다.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다는 듯 군더더기없고 자연스러운 태도로. 살리에르는 그것을 알면서도 돌아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질투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짙은 환희에 젖어 혼곤한 꿈결 속 같다.
온전히 당신의 날이네요. 축하드려요, 선생님.
살리에르는 조용히 입술을 말아 물 뿐, 그에게 대꾸하지 않는다. 그저 한밤중 성가신 환청쯤으로 치부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질투는 정말로 서운하다는 듯 눈매를 늘어뜨리고 다가와 살리에르의 손끝을 천천히 잡아 쥐고 끌어당긴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입술이 손등에 닿는다.
이 기쁜 날, 왜 그렇게 심술이 나셨을까.
소름 끼치는 감촉이다. 그러나 이토록 느긋한 속삭임에도 불구, 그의 숨결은 느껴지지 않는다. 미간을 잔뜩 찡그린 살리에르가 붙잡혔던 손을 거칠게 털어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순하게 눈을 내리깔고 질투는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난다. 그의 시선은 이제 버려진 악보 더미가 잔뜩 쌓인 바닥으로, 그리고 여전히 텅 비어 있는 건반 위의 오선지로 옮겨 간다. 그가 노래하듯 몇 마디 덧붙인다.
좋아요,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제가 준비한 선물을 드리죠.
살리에르는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를 쏘아본다. 그러나 질투의 손에 들린 것은 모차르트의 악보도, 익숙한 빛깔의 극독도 아니다. 두 뼘은 족히 넘을 듯한 보라색 꾸러미에는 카페 데멜의 상표가 찍혀 있다. 생일 케이크라도 마련해 왔다는 말인지. 그는 협탁 위에서 정확한 템포로 똑딱이고 있던 메트로놈을 붙잡아 멈추게 한다. 적막할 새 없이 바스락 소리를 내며 풀려나가는 포장 아래 온갖 달콤한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살리에르가 마른침을 삼킨다. 그는 이미 질투가 건넨 선물의 맛을 알고 있다. 여태 느끼지 못했던 허기가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살리에르는 이끌리듯 손을 뻗어 케이크를 움켜쥔다. 부드러운 스펀지 위에 얇게 덧씌워진 초콜릿 코팅이 그의 체온에 금세 녹아내린다. 단것이 혀에 닿아 부서지는 그 황홀한 순간, 살리에르는 체면 따위 모두 잊어버린다. 홍차를 준비할 인내심이나 식기를 챙겨 올 여유는 없다. 기실 다과의 맛을 느낄 틈조차 없이 그는 다급하게 집어삼킬 뿐이다. 손가락 사이 뭉개지는 시트의 질감, 입가에 가득 묻어나는 크림과 콩포트.
어느덧 소파에 늘어진 질투는 탐식하는 살리에르의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다. 손 닿는 대로 단것을 욱여넣던 그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진다. 다 삼키지 못한 케이크가 입술 바깥으로 비어져나온다. 살리에르는 문득 입안 가득 비에 젖은 진흙을 물고 있는 것 같다. 갑작스레 토기가 치밀어오른다. 살리에르가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질투는 헛구역질하는 그의 등을 다정하게 쓸어내린다. 더없이 서늘한 손길이다. 굽어진 척추를 따라 오소소, 전율이 인다.
그러게 욕심이 과하셨어요, 선생님.
당장이라도 뱉어내려던 것을 간신히 삼킨 살리에르가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든다. 열없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던 질투가 입꼬리를 끌어당겨 뒤늦게 미소한다. 그는 드물게 기뻐하는 것 같기도, 혹은 실망한 것 같기도 하다. 그가 손을 뻗어 살리에르의 뺨을 감싼다. 같은 색의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 본다. 하지만 질투는 그 이상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살리에르를 조용히 타이른다.
인내만한 미덕이 없다고 하잖아요.
살리에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맥없이 떨어져나간 질투의 손은 잠시 허공을 맴돌다가, 곧 그의 가슴 위에 얹힌다. 그가 정중한 태도로 고개를 반쯤 숙인다. 살리에르는 차라리 고함을 지르고 싶은 심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다. 그러나 아침이 온 뒤에도 질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 괜찮아요……. 제가 다시 가르쳐 드릴게요.
창백한 손이 또 다른 손을 그러쥐어 깍지를 낀다. 살리에르는 발치에 널브러진 다과의 포장을, 악보의 무덤을, 그리고 제자리에 멈춘 메트로놈을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정처없이 흔들리면서도 다만 등뒤를 향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날을 앞두고 무너질 수는 없다. 무너져서는 안 된다. 살리에르를 위한 연회장에는 황제와 귀족들과 사랑하는 아내와, 그리고 무엇보다 모차르트가 있을 것이다. 누구든 그를 얕잡아보는 것만은 견딜 수 없다. 살리에르는 눈을 들어 허공을 노려본다. 마치 거기에 그가 원망해야 할 누군가 있다는 듯이. 살리에르가 손안에 힘을 준다. 맞닿은 살갗에서 살갗으로 차가운 온도가 스민다. 그의 귓가에 낮은 웃음소리가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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