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마마돈크라이 백작

underwater by 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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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길다란 인영이 추락한다. 곧이어 요란한 파열음이 들리고, 선잠에서 깨어난 백작은 흔들리는 커튼 너머를 흘끗 쳐다본다. 그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을 살피는 대신 이불을 도로 뒤집어쓸 뿐이다. 졸지에 자살 명소가 되어버린 성벽에 붉은 얼룩을 덧칠한 이는 아마도 최근 며칠을 함께 보낸 남자였을 것이다. 보름이 되기 전에 죽어버리다니, 운이 좋기도 하지. 지난밤 잔뜩 화가 난 채로 찾아온 그가 뭐라고 지껄였던 것 같기도 하지만 좀처럼 잠들지 못해 무거워진 머리로는 도무지 떠올려낼 수 없는 기억이다. 백작은 몇 번이고 뒤척이며 편한 자세로 누우려고 애를 쓴다. 그래도 결국은 무용한 노력임을 인정할 수밖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앉는다. 창백한 낯, 형형한 눈동자가 은판 속에서 복제되는 상을 마주본다.

모처럼 사냥을 나가 볼까.

아직 보름까지는 며칠이 남았지만 슬슬 허기가 진다. 꼭 만월의 밤에만 피를 마셔야 하는 것도 아니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다. 백작은 서랍을 열어 분첩을 꺼내 든다. 얄따란 붓을 들어 눈가에 붉은 화장을 덧그리고 나면 외출 준비는 대강 끝난다. 너른 옷장에 걸린 것들은 무얼 꺼내도 화려하고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어, 겨우 셔츠 한 장을 걸치고 나가려다가도 백작은 금방 생각을 고쳐먹는다. 숲에서 헤매는 조난자에게 대뜸 달려들어 물어뜯는 것보다는 친절한 안내인을 자처하며 약간의 유흥을 즐기는 편이 나을 거라는 판단이다. 성가신 표정으로 커프스를 달고 크라바트를 매듭지으며, 백작은 영겁의 삶이란 지겹고도 지루한 것이라는 생각을 몇 번째인지도 모르게 한다. 그저 본능에 휘둘려 꼬여드는 인간들의 피를 마찬가지 본능에 따라 취하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는 온전한 한 명의 사람이었던 적 없다. 백작은 다만 기다릴 뿐이다. 언젠가 그의 심장에 은검을 박아넣을 자격과 집념을 갖춘 존재가 나타나기를. 그리하여 이 끔찍한 세월이 모래처럼 바스러져 마침내 달콤한 안식을 얻을 수 있기를.

요원한 꿈이다. 당장은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백작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선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포에나리의 복도에는 술과 약에 취해 너브러진 남녀의 육신이 발에 채이도록 많았다. 어차피 보름이 닥치면 한 명도 남지 않게 되겠지만. 이토록 넘치는 식량을 두고서 구태여 바깥으로 걸음하는 까닭은 오로지 시간을 낭비하기 위함이다. 그 무엇도 백작에게는 새로운 자극이 되어 주지 못한다. 인간들 틈에 섞여 살며 기회를 살피던 때도 있었으나 그것 역시 이제는 윤색된 옛날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삶이란 이다지도 피곤하고 귀찮은 것이구나. 모퉁이에 쓰러진 남자의 발목을 무심히 밟고 지나며 백작이 중얼거린다. 운이 좋아 새로운 객을 만나게 된다고 한들 며칠 이어지지 못할 유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백작은 방안에 틀어박혀 그저 온몸으로 시간을 만끽하고 싶지는 않다. 공기를 부유하는 먼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고통이다. 아무리 죽은 듯 누워 있어 봤자 ‘진짜’ 시체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고 있으니.

막 해가 저물어 어두컴컴해진 숲의 공기는 언제나처럼 시원상쾌하다. 울창한 초입에 가만히 멈춰 선 백작은 숨을 깊이 들이쉰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까운 곳에서 인간의 냄새가 난다. 백작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긴다. 어차피 남는 것이 시간이다. 그리고 이 숲에 한번 발을 들인 이 중에 무사히 돌아간 자는 누구도 없었으므로. 가련한 희생양에게 첫 인사는 어떻게 건네는 것이 좋을까, 그런 고민과 함께 백작은 숲 속으로 깊어진다. 잎사귀 사이로 얼룩지는 그늘이 백작을 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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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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