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 우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5
17세 - 산서 / 집단 폭행 묘사 有
“아이고, 선생 있어서 살았네. 제사 지낼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돈을 써야 하나 싶었어.”
“별 거 아닙니다…. 저, 그럼, 단주님. 제가 부탁드린 건,”
“아아, 그건 내 힘써보지. 마침 새 무역로를 트긴 해야 했거든.”
타지에서 맞는 두 번째 신년이었다. 북에서 불어온 찬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며 얼얼한 자국을 남겼다. 주희는 가만히 눈을 깜박이다, 숙소로 들어가는 상단주를 배웅하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중원의 모든 상단 중 서천상단만이 유일하게 새외를 돌아다녔다. 주희의 목표는 북해였다. 얼음과 눈만이 있다는 영구동토.
북해로 향하면, 그래, 북해는 새파란 하늘이 끝도없이 있다고 했다. 조사 차 영토 초입에 잠시 발 들였던 상단원들이 그랬다. 온통 하얗고 까만 곳에서 하늘만이 유일하게 파랗게 빛나더라고, 그 홀로 눈이 시릴 정도로 눈부시고 아름답다고 다들 그랬다. 그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얼어죽는 이도 종종 나온다고, 황실에서 대역죄인을 유배보낼 때 일부러 북해로 보내는 이유가 그것이라고.
그렇다면 이 끔찍한 사람도 그 시리고 평온한 땅 위에서 죽어가겠지….
이번엔 분명히, 누구도 신경 쓰이게 하지 않고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주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서천상단과 합류한 건 흑산 근처에서 주강 지류를 타고 올라가던 중이었다. 마침 총관이 풍토병을 심하게 앓아 알고 있던 지식으로 치료해주고 총관 업무까지 대리로 처리해주니 상단주가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며 물어봤고, 이젠 정말 하남과 산동만 아니면 어디든 괜찮았으므로 주희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중추절 한 달 전이었다.
총관의 고향이 산서성이었으므로 신년을 맞이해 돌아온 곳은 남쪽에 위치한 하남성의 영향을 받아 거리 곳곳이 밝고 떠들썩했다. 주희는 괜히 까맣게 물들인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가장자리로 걸었다. 뭐,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투레질 소리와 함께 관군이 아니냐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입니까?”
“서씨네 그, 총무 양반! 도련님도 구경 나왔나?”
“예, 안녕하십니까. 헌데 관군이라니요?”
“외지인이라 모르겠구나? 여기론 관군이 잘 안 와. 운성시(*하이저우 관제묘 소재지)는 더더욱 그렇지.”
“관제묘가 있으니까요?”
“그런 편이지. 한창 전쟁 때도 여긴 피해가 덜했어. 그래서 관군도 최소한으로만 두는데, 왜 저렇게 밀고 들어온담?”
“…….”
‘유’가 주를 찾는다는 소문이 퍼진 모양이다. 주희는 대답 없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두어 걸음 물러났다. 붉은 머리를 들킨 적은 없다. 신년이니 관군이 마을을 들쑤시는 것도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쥐죽은 듯 살면, 소란도 없이 다시 북해를 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들키지 않고….
“요즘 이상한 노래가 돌더라.”
“한두 번인가.”
“주 태조를 암시하는 노래는 이상하잖아.”
주희는 아무 말 없이 숙수가 내어준 국을 홀짝였다. 달그락대며 반찬을 골라내던 총관이 뒷말을 이었다.
“아, 그, 동요? 내용이 잔인하던데.”
“요즘 누가 그런 걸 부르고 다닌답니까?”
소단주가 웅얼거렸다. 연말정산이 아직도 안 끝난 낯이라 눈밑이 퀭했다.
“관군들. 가끔 어린애들도 부르고.”
“그거 교지를 안 받은 것 같던데? 보니까 송 군부 직인이 아니더만. 주나라 일은 이 장군이 진두지휘하는데 이 장군 직인도 없고.”
“와, 단주님.”
한 그릇을 비운 총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장군 직인은 또 언제 보셨어요?”
“내가 뭐랬냐, 언제 한 번 잡혀갔었을 거라고 했지.”
“이것들이 존경할 줄도 모르고.”
뭐라더라. 늑대의 목은 나랏님께 바치고 내장은 고아먹고 가죽을 벗겨 겨울옷으로 만들겠다고 하던가. 예로부터 붉은 털옷은 부유함의 상징이었으니 그럴만도 싶었다. 폭군 주희, 하면 불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들이니 그 가죽을 벗기면 불쥐의 털옷이라도 될 줄 알았나보지….
“… 봐, 이봐, 회암!”
“아, …. 아, 예. 부르셨습니까?”
“오늘 할 일 있어?”
“소단주님 연말정산을 도와드릴까 했는데요.”
“그건 황보 저 놈이 할 일이고. 너는 그냥 오늘 쉬어라.”
“저 사람 일중독이라 손에 뭐 안 잡혀있으면 불안해할걸요. 아무것도 하진 말고 그냥 잡무 좀 도와줘요. 우리 연휴 끝나기 전에 운성 나갈거라서.”
“물류품 확인해두겠습니다.”
“그래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춘절 연휴가 끝나기 전에 산서성을 벗어난다면 청명淸明(*4월 4일) 즈음엔 서남부 쪽에 있을 것이다. 주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는 단주를 배웅하다가, 총관과 소단주까지 일어나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종일 본관에 있어야할 성싶었다. … 정식 허가를 받은 상단을 관의 허락 없이 수색하는 것은 불법이다. 아마 마을에 주둔하는 상군 중 누군가가 수도에 파발을 넣었을테니 늦어도 이레 이내로는 파발이 돌아오던지 전서가 날아오던지 할 것이다. 그 전에 상단은 수도를 떠나겠지만.
들킬 일이 없으면 좋겠는데. 주희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사람이 없는 본관은 겨울 바람이 들이쳐 싸늘하고 조용했다. 어떻게 겨우 끼어들었는데, 어떻게 겨우 평화를 지켜내고 있는데…. 아, 그가 이런 평화를 바라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지. 그는 자조적인 웃음소리를 내뱉곤 걸음을 옮겼다. 잡히면 장부를 위조했다고 욕을 먹을까. 폭군 주제에 감히 상단의 주요한 문서를 봤다고 비난할까. 이 상단을 통해 주를 다시 세울 기반을 모으고 있다고 할까.
“짐승 새끼가 인간 흉내를 내면서 숨어있었네.”
금수 취급은 예상 외였다.
본관에 사람이 없는 건 또 언제 알았는지. 휘어잡힌 머리카락 탓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억세게 눌려 비틀린 어깨도 아팠고 팔도 저렸다. 고통에 빠르게 눈을 깜박이자 누가 보란듯 그의 앞에 염색약 병을 던졌다. 싸구려 유리병이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비산하며 그의 뺨에 얕은 생채기를 냈다.
… 저렇게 깨져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관군들이 비웃는 소리가 났다. 대답할 이유를 모르겠어서 숨을 죽인 채 눈을 깜박이니 또 누군가가 제 머리 위로 물을 들이부었다. 도랑을 깨고 퍼 왔는지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차가운 물이었다.
옷깃에 검은색이 물드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주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대장으로 보이는 치가 그의 머리채를 콱 잡아당겼다. 자연히 목이 턱 꺾였다. 애써 평정을 가장하려고 하는데도 아까부터 끊기지 않는 웃음소리가 거슬렸다.
“뭐, 여기 숨어서 송을 뒤엎을 생각이라도 하셨나?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잖아.”
“…… 그럼 진작에 세력을 모았, 겠지."
“모은 거 아닌가? 서천상단은 크잖아.”
“모든 수색 활동은 이 장군의 교지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들었는데, 교지는, 악!”
“교지는 무슨. 늙은 늑대 목 잘라가는데 교지도 필요하나? 사냥꾼이 사냥꾼 노릇만 잘 하면 됐지.”
고개가 홱 돌아갔다. 피부가 찢어지는 소리, 피와 물이 뒤섞여 흐르는 감각 따위가,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운 기분이……. 소리지르지 못할 걸 알고 하는 행동이다. 교지를 위조할 정도니 배짱만 대단하다 싶었는데 눈치도 어느정도 있는 모양이었다.
대답이 없자 심기가 비틀렸는지 구타가 이어졌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몇 번이나 울리고 귀가 멍멍했다. 아, 이 정도면 한쪽은 나간 것 같은데…. 입안 살을 잘못 씹었는지 마른 기침을 내뱉자 피가 한웅큼 쏟아졌다. 주희는 어지러운 시선을 붙잡았다. 상단 본관이 시가지에서 멀리 있는 것도 아닌데 주변이 이상하리만치 고요한 걸 보면 관군들이 공권력을 함부로 남발한 모양이었다. 말마따나 개봉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데 간도 크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는지 또 다른 누군가가 그를 걷어찼다. 숨 막히는 소리를 내자 늑대가 아니라 여우 같다며 저질스러운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웃는 것마저도 지긋지긋해지겠군. 주희는 몽롱한 정신으로 지긋지긋한 것들 목록에 웃음을 올렸다.
이제 제게 남은 것이라곤 끝도 없는 원망과 저주와, 또, 이런… 사소한 욕망과 이로 인해 비롯된 폭력들 같은 것만이 남았다.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안 익숙해지는 걸 보면 여전히 자신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라는 것이고. 어느샌가 손이 풀렸는데도 어깨 때문에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발길질이 끝나지 않는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걷어채인 등이나 배가 아파 앓는 소리를 내자 엄살 피우지 말라며 누가 또 물을 들이부었다. 언제 끓였는지 이번엔 뜨거운 물이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폐렴이던 폐혈증이던 걸려서 죽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 죽어도 괜찮은가? 중원에 제가 살기를 바라는 사람보단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더 많을테니 당연한가. 의식이 깜박였다. 누가 또 팔을 꺾어 잡았다. 반응할 틈도 없이 잇새 사이로 신음이 샜다.
“폭군은 통증 못 느낀다며?”
“아, 거 저잣거리에 걸린 모가지도 웃고 있었다니까. 엄살이겠지.”
“재갈 들고 온 놈 없냐? 이 세심하지 못한 새끼들.”
“가죽 벗기려는 새끼가 말이 많아. 필요하면 옷 찢어서 물리던지.”
“어차피 목 떨어질 놈인데 목소리는 안 나와도 되지 않나? 증언 들을 것도 없고.”
“그럼 배도 가르라고 하지 그러냐. 야, 양잿물 들고 와라.”
제 시체는 ‘유’가 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새 또 어딘가가 터졌는지, 쓸렸는지, 찢겼는지 몸 어딘가에서 뜨끈한 것이 흘렀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방에 있던 물건이며 서류 따위가 불타는 게 보였다. 검을 거기에 집어넣어 달구는 것도, 손바닥보다 작은 불투명한 병 안에서 찰랑거리는 소리도. 머리카락이 다시 휘어잡히고, 목이 꺾이고, 하순에 차가운 병목이 닿았다. 뭐, 적어도. 목이 내다 걸려도 눈이 없으면 ‘유’가 저를 알아보진 못할 것이다. 피가 그대로 굳었을테니 머리색도 지금보단 더 어두울 것이고. 몇 안 되는 다행 중 하나였다.
이들이 그대로 상단만 안 덮치면 괜찮은데. 입구를 막고 있던 마개가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생각보다 이르게 죽긴 하지만 이 정도면 괜찮았다. 정말로, 이 정도면-
“아니, 왜 저항 안 하고 거기서 그러고 있어요?!”
… 죽을 때가 아니었던 모양이지. 주희는 두어 번 숨을 내뱉고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 뒤로 기억나는 게 거의 없었다. 석궁을 쏴서 관군의 손을 맞춘 사람이 총관이었다는 것만 어렴풋하게 기억났다. 주희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완벽히 치료된 몸으로 숙소에 누워있었다. 바로 옆에 상단주가 앉아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은데 목이 사포에 간 것마냥 거슬렸다. 장부를 훑던 단주는 손 하나로 주희를 다시 눕히곤 말을 꺼냈다.
“관 교위가 다 잡아갔어.”
“… 관, 교위요?”
“아, 의원이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여기 상군 중에 파발 담당하는 애야. 운성시 출생이라 이쪽 길을 잘 안단 이유로 배정받았고.”
“그, 리고요.”
“뭐긴 뭐야. 이산 장군이 여기에 오고 있단 뜻이지.”
“…….”
“들키면 안 되지? 오늘 밤에 총관이랑 같이 나가라. 이번 달 급여는 말 한 필이랑 전낭으로 줄 테니 받아가고.”
태조가 살기를 바라는건가. 주희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여전히 시야 한쪽이 흐릿하긴 했다만 아예 망가진 것 같진 않았다. 소리나게 장부를 탁 덮은 단주가 몸을 일으켰다.
“더 자. 저녁에 총관이 식사 가져다 줄 테니까 그 전에 어디 갈 생각은 추호도 말고.”
“… 감사, 합니다, 단주님.”
“됐다. 자라.”
말에는 힘이 있다던데, 그래서 그런지 단주가 툭툭 내뱉는 말엔 주희가 거부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장지문이 닫히자 주희는 그대로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것밖에 없었다.
총관이 가져온 식사는 넘기기 쉬운 미음과 자극적이지 않은 나물 반찬 몇 가지가 끝이었다. 주희는 성의를 봐서 그릇을 싹싹 비웠다. 그새 피가 새어나온 붕대를 다시 갈고 먹을 환단 따위를 바리바리 챙겨준 총관은 마굿간에서 말 한 필을 끌고 나와 고삐를 주희의 손에 쥐여주었다. 주희도 그 말을 알았다. 상단이 소유한 말 중 가장 순한 말이었다.
“아직 덜 나았으니까 약 꼭꼭 먹어요.”
“예. … 감사합니다, 총관님.”
“됐네요. 이제 우리 사람도 아닌데.”
총관이 장난스레 웃었다. ‘우리’ 사람도 아닌데 친절하게 대해주는건가. 마지막 남은 정의 일말인가.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총관이 건네주는 봇짐을 받아들었다. 총관은 그가 말에 오르는 것까지 봐 주었다.
“얼른 가요. 이산 장군 금방 온댔어.”
“… 감사합니다.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봐요, 주희 씨.”
그는 한참 말이 없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예. …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서혜 아가씨.”
상단과의 연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맹자가 산서성에 들른 건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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