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지 사바하
클레사의 손이 파라이바의 손에서 빠져나간다. 이브는 손에 힘을 주지 못한다. 잡아채려면 잡아챌 수 있지만, 클레사가 뛰도록 둔다. 테키언이 뛴다. 뛴다. 파라이바는 가만히 그가 멀어지는 과정을 중계한다. 쫓아갈라면 쫓아갈 수 있지만, 클레사가 사라지도록 둔다. 딱딱하게 말한다.
임무 실패. 표적을 잃었다.
자신의 혀는 시멘트를 발라 굳힌 듯 꺼끌하고 딱딱했다. 파라이바는 뒤돌아 섰다. 파라이바와 테키언 클레사는 남이다. 더 관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소프 가문의 역겨운 권력질에 진절머리를 치며 탈출을 도울 것을 요청한다. 포탈이 생기고, 이브는 손쉽게 그곳에서 빠져나온다. 마라 소프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그 명령을 까마귀가 이브에게 떠넘겼다. 파라이바는 원치 않았다.
부탁해. 클레사는 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방문할 사람은 없는데. 파라이바가 문을 열자 그 곳에는 헤드기어를 벗은 테키언이 서있었다. 적갈색 머리는 드문드문 빠져있었다. 수술 흉터가 크게 보였다.
누구신지…….
수호자 파라이바 루, 맞으신가요?
테키언이 열린 문을 꽉 잡았다. 칼날을 손바닥으로 잡아챘다. 테키언은 자신을 보드히라고 소개했고, 여기에 온 이유는, 짐작할 수 있겠지만, 제발, 제발 클레사를 살려달라고, 였다.
싫습니다.
마음이 이상해졌다. 울렁거렸다. 하지만 이브는 딱딱하게 말했다. 혓바닥의 시멘트가 모두 깨지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다. 문을 닫으려하자 보드히는 문틈으로 자신을 끼워 억지로 집어넣었다. 다칠까봐 문을 살짝 열었다. 공간이 생겼다. 보드히는 무릎을 꿇어 그 공간에 자신을 모두 채워넣었다.
클레사는 저의 유일한 친구나 다름없어요.
유일한 친구면 유일한 친구지, 다름없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보드히는 머리를 조아렸다. 테키언 수업에서 만난 그들은…….
그러니까, 고작 몇 년 만난걸 갖고 절친하니 어쩌니 하고 있었다고요? 그냥 직장 동료라고 생각하고 빨리 잊어버려요, 그런 사람.
파라이바는 면도날을 삼키지 못했다. 그걸 삼킬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것이다. 파라이바가 뱉은 면도날을, 보드히는 두 손으로 귀히 잡았다. 끈적한 침이 면도날 위를 덮고 있었다. 칼날도 얼룩을 베어내는 재주는 없었다.
돌아가.
클레사가 보드히를 밀쳤다.
넌 돌아가면 어머니들이 있잖아.
보드히는 맨 꼴찌였다. 몇 번은 낙제할 뻔 하기도 했다. 클레사는 재능은 없었지만, 2등을 항상 거머쥐고 있었다. 아마 1등을 하려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 2등이지? 보드히는 비틀거리다 바로 섰다.
못 해.
그리고 너무 당당하게 말했다.
난 돈이 필요하니까.
테키언은 여왕의 조언자, 확실히 버는 돈은 많을 것이다. 그런 것 때문에 안 되는거라며 다른 후보생들이 깔깔 웃었다. 보드히는 굳게 서있었다.
아니. 돈을 위해서 테키언에 도전한다고, 의도가 불순한게 아니야.
보드히는 다시 말했다.
난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전까진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가게 될걸?
클레사가 비아냥거렸다.
네 성적이 널 떠밀지 못한다면 내가 널 밀어낼거야. 따돌릴 수도 있고, 또,
억지로 나쁘게 행동하지 않아도 돼.
클레사는 보드히가 자유시간마다 홀로 연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 저렇게 연습을 많이 하는데 해내는 것은 없단 말인가? 클레사는 그게 조금 궁금했다. 사실 보드히는 클레사에게 별 위협이 안된다. 아니, 위협이 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클레사는 2등이고, 언제든 1등을 거머쥘 수 있는 실력을 가졌으니까. 클레사에게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린도 그걸 알고, 페트라도 그걸 알았다. 클레사는 수정구를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어머니가 위독하셔.
클레사가 온 것을 보고 보드히가 말했다. 보드히는 연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바닥에 앉아서 창 밖의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싶은 것 아니었어?
별로. 다른 애들한테 동정 사고 싶으면 그대로 말하지 그랬어?
동정 받고 싶지 않았어.
보드히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해맑은 표정으로 클레사를 보았다.
넌 어차피 내 일에 관심이 없으니 그냥 얘기할게.
아니, 별로-,
어머니 한 분이 전사하셨어. 통곡의 날 때. 그것 때문에 다른 어머니가 음독하셨고. 아직도 병원에 계셔. 망상증까지 얻어서 리프 전체가 굴복했다고 믿고 있거든.
클레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수정구를 매만졌다. 보드히가 하늘을 보았다. 비단 밤이 아니더라도 리프의 하늘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자살기도이기 때문에 의료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와 같은 현실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어머니가 미워.
그 말의 어디가 클레사에게 와닿았는지 클레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보드히에게 다가와 옆에 앉았다.
나도 아버지랑 고모가 너무 미워.
클레사가 이를 갈았다.
너무 미워서 여기 온거야. 자유롭게 되기 위해.
보드히는 클레사의 표정을 보지 않아도 그의 분노와 절망, 그리고 굴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보드히는, 고개를 돌려 클레사를 보았다. 클레사의 들끓는 표정과 파도처럼 거칠게 울부짖는 눈동자를 보았다. 시베라이트 빛깔의 머리카락만은 차분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도망간단 뜻이야?
보드히가 순진하게 물어보았다. 클레사는 악의에 받혀 크게 웃었다.
클레사는!
보드히는 감히 소리쳤다.
클레사는 폐하께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쳤습니다, 폐하께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런데 어찌 포기라는 말을 입에 담으십니까?
여왕 폐하와의 독대라는 이 귀중하고 값진 시간을 이런 외람된 말로 낭비한다니 한심한 일이다. 그러나 보드히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여왕은 보드히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냥 언제 이 시간이 끝나는지 궁금하다는 듯 성물의 위치를 조금씩 바꾸고 있었을 뿐이다.
폐하.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그 분은 당신의 조카입니다.
보드히 옆으로 성물이 날아갔다. 그것은 어떠한 제스쳐일 뿐, 마라 소프는 클레사와 달리 차분하고 내려보는 시선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그 아이가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두었다. 그게 그 애가 원하는 것이니.
놀랍게 그 말이 끝나자, 독대의 시간도 끝났다. 테키언 보드히는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춰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떨어진 성물은 안 그런 척 돌려놓았다. 마라 소프는 그 한심한 몸놀림을 보고 콧웃음도 치지 않았다. 자유는 무엇일까. 보드히는 요동치는 감정을 담아 파라이바에게 물었다.
이것이 자유라고 생각합니까?
보드히의 이마가 땅에 닿았다. 파라이바는 보드히를 일으켜세웠다. 순순히 일어서진 않았지만, 결국 보드히는 일어섰다. 눈물로 얼룩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보드히는 불처럼 거칠게 울부짖는 눈동자로 파라이바를 마주보았다. 몰랐다. 파라이바도 자신의 과거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러나 뭐가 진정한 자유인지, 과거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자유로워 지는지 몰랐다. 까마귀를 떠날까? 그러면 자유가 될까? 클레사를 쫓을까? 그럼 자유가 될까?
몰라.
그래서 이브는 푸르디 푸른 눈동자로 보드히를 보았다. 그들이 아는 것은 단 하나 뿐이었다. 클레사가 죽는다면 여기에 있는 모두가 살인자가 된다는 것. 영원히 자유롭지 못할 것.
센서등이 망가졌다. 파라이바는 온 몸이 끈적거리는 것 같은 감각에 진절머리를 쳤다. 굴복자 어둠 때문에 그런 것일 터이다. 보드히와 파라이바는 마라 소프의 지원 없이 승천차원을 돌아다니며 곳곳에 물자를 비치하거나 클레사를 수색했다. 마라 소프가 그들이 자신의 승천차원을 마음껏 헤집고 돌아다니게 두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까마귀가 부탁했기 때문에. 파라이바는 단전에 힘을 줘 들쳐업은 보드히가 미끌어 떨어지지 않게 단단히 잡았다. 보드히는 홀로 승천차원의 문을 열었고, 그 때 마다 여왕의 풀 물약을 과복용 했다.
죽을거야.
파라이바가 보드히를 자신의 침대에 눕혔다. 당장 침대 밑에 털썩 주저앉아 잠을 자고 싶었지만 수호자로 품위를 지키고 싶었다. 찬장에 넣어놓고 가끔 마시던 위스키를 꺼내 한 잔 따랐다. 사바툰이, 까마귀가, 클레사가, 보드히가, 마라 소프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마라 소프가 좀 더 이 빌어먹을 “가족놀이” 에 진심이었다면……. 갑자기 센서등이 탁, 하고 켜졌다. 파라이바는 싱크대 밑에 앉아 술잔을 홀짝였다. 다시 픽, 하고 센서등이 꺼졌다. 탁, 픽, 탁, 픽,
보드히……!
파라이바가 도착하는 걸 보자 보드히는 휘청였다. 그렇게 뒤로 넘어가려고 하기에 파라이바는 보드히를 잡아야했다. 헤드기어를 벗기자 크게 뜬 눈이 보였다. 동공이 확장되어있었다. 멍하게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초점이 없었다. 작게 콜록이는 소리에 뒤통수를 받혀주었더니 쌍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코피만 멎으면 집으로 데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5분이 지나도 코피는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파라이바는 자신의 옷에 피가 묻는 것을 감수해야했다.
보드히, 일단 우리 집에 가자.
보드히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외부 자극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 자신의 우주선에 끙끙거리며 간신히 태웠다. 가끔 무언가 알 수 없는 말을 속삭였다. 모르는 언어는 아니었다. 어순이 뒤죽박죽되어 도저히 알아들을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되다 만 말들이었다. 언어는 어디서부터 부셔졌는가? 보드히의 이빨을 억지로 통과하려다 그렇게 박살 난 것일까? 파라이바는 일어나 운전대를 잡기 전, 다시 보드히를 보았다. 보드히의 몸이 간신히 버티며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가 꼭……. 파라이바는 눈을 들어 센서등을 보았다. 망가진 센서등은 무엇을 버티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파라이바가 손을 들어 센서등으로 뻗자 탁, 하고 등이 켜졌다. 놀라 손을 움츠렸다. 그 밑에 왠지, 보드히가 서있다고 느꼈다. 멍하게 빛줄기를 쳐다보았다. 그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이…….
보드히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파라이바를 쳐다보았다. 라일락 향이 나는 시베라이트 색 머리칼, 그리고 열대의 바다처럼 푸르디 푸른 눈동자. 그 눈동자를 따 파라이바 루가 되었다고 했던가.
클레사의 맨얼굴을 본 적 있나요?
파라이바는 고개를 저었다. 그가 클레사를 처음 본 것은 승천차원에서였다. 나 자신마저도 잿빛으로 보이는 그 공간에서, 클레사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파라이바 역시 그러했다. 클레사에 대한 이야기는 그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까마귀한테서였다.
내가.
까마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스로의 죄를 감당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파라이바는 까마귀가 안쓰러웠지만 자신의 전생이 그의 팔을 옭아메고 있었다. 시베라이트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어, 상황이 그를 미치게 했을 뿐이지. 하지만 그걸 맨정신으로 열람하는 나는? 어디까지가 나고 어디까지가 너인지 받아들일 수 없는, 나는?
내가 시베라이트를 모욕하기 위해 클레사를 만들었어.
그 아이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길 바라며, 그렇게 장난스럽게. 마라 소프가 자신을 꼭 찝어 클레사의 일탈을 막으라 명했던 것이 그 이유에서였겠지. 왕실의 품위를 위해서라면 아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을 쓰는게 나을 테니까.
이제 그 애를 영영 잃어버린 지금…….
그 애가 어떻게 자랐는지 알아요?
평소엔 순진하고 맑은 표정인 보드히가 그 순간만큼은 증오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내가 알아야 해?
자신의 죄가 아니지만 파라이바는, 클레사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몰랐다. 사실 지금 이 작전들을 수행하는 원동력이 무엇인지조차 불명확했다. 죄책감? (그러나 내 죄가 아닌데도) 연민? (전생에도 본 적 없는데) 분노? (하지만 클레사에게 분노할 수는 없는 법이다)
클레사는 당신에게 무엇이 되었나요? 클레사를 구하면 당신은 클레사에게 뭐라고 -
보드히, 선 넘지 마. 나는 너의 부탁을 받았을 뿐이야. 네 부탁이 내 마음을 울렸고, 나는 너 때문에 이 일을 하는거야.
보드히는 충격을 받은 듯 아무 말도 못 한 채 이브를 바라보았다. 까마귀를 따라가셨죠. 그렇다면 까마귀를 따라가 사바툰에게 불리한 조건을 제시했을 때, 왜 그러셨나요.
나는……. 그를 사랑하니까.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난수 방송의 난수를 해독해본 적 있는가? 파라이바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면 저는 당신들의 위대한 사랑에 뛰어든 것이네요.
보드히는 파라이바 루의 말을 막았다.
그렇습니다. 그게 어떻게 되었든, 그것이 사랑이라면 이 일도 그 때문에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파라이바는 울먹이는 보드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답을 알고 있었다.
당신이 저와 계약을 맺고, 그 계약에 수호자 까마귀가 들어왔을 때, 당신들은 저의 사랑에 뛰어든 것입니다.
파라이바는 이것이 꿈임을 알았다. 보드히는 테키언의 능력을 펼쳐 파라이바의 꿈을 탈취했다. 파라이바는 눈을 감았다. 그래, 우리의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반만 맞는 말이다. 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뜨지 않아도 센서등이 꺼졌음을 알았다. 파라이바는 깊은 아공간으로 낙하했다. 머리가 땅에 닿았을 때, 파라이바는 부엌 바닥에 술잔을 쥔 채로 누워있었다.
지방방송. 클레사는 구속된 채로 눈을 떴다. 팔다리를 묶어놓지는 않았다. 시부의 마법사가 바닥에 문양을 그려 어디로 가지 못하게 막아놓았을 뿐이었다. 클레사의 의식은 그 문양 안을 맴돌았다. 손 끝이 점점 검게 변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위대한 테키언들처럼 굴복자가 되어 동료들을 공격하고 자신이 가진 지식을 모두 빼앗길 것이었다. 아. 이젠 상관 없나.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익숙해지지 않는 그 비린내에 헛구역질을 하며 심하게 기침했다.
어머니는 돌아가셨어, 통곡의 날 때……. 남은 어머니는 음독을 하셨는데, 원래 가지고 계시던 망상증이 심화되어서 그랬지…….
클레사가 중얼거렸다. 다른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와중에 보드히가 자신의 가정사를 털어놓은 것 만은 선명하게 기억났다. 자살기도를 했다고 의료법의 보호를 받지 못해서, 병원비가 많이 나와. 나는. 어머니가 미워. 목이 말랐다. 군체 놈들은 어디선가 인간의 보급품을 가져와 클레사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배급해주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군체 시종 하나가 물과 보존식을 가져다 줄 것이다.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지만 괜찮았다. 클레사는 정신을 집중하려 노력했다. 실제로 효과는 있었다. 그의 명상은 폭력으로 깨졌다. 고통은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였다. 나는 보드히의 말에 뭐라고 답했던가.
나도 아버지와 고모가 싫어.
약간 달랐던 것 같다. 보드히는 쓰게 웃었고, 일어나 배운 것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유롭게 될거야. 보드히가 내 말을 따라했다. 나는 그 의미로 말했던 것이 아닌데, 그 말이 보드히에게 가자,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났다. 보드히는 자신을 믿었다. 그의 영혼이 이 육신을 떠 다른 세계로 진입하여 문을 여는 그 찬란한 순간을 나는 바라보았다. 그것은 경이였다. 압도적인 재능을 보는 자의 경이감.
난.
중얼거렸다.
난 클레사 소프야.
소프 가문의 일원이 되지 못한 소프. 울드렌 소프의 발표되지 않은 여식, 죽은 이를 모욕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이, 평생 갇혀지내야 하던 자. 마라 소프가, 고모가 사라졌다고 했을 때 나는 곧장 페트라에게 달려갔다. 나의 존재를 아는 단 세 사람 중 한 명.
찾을건가?
페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데려가.
페트라는 고개를 저었다.
안 데려가면 여기서 자살할거야, 그럼 고모가 참 좋아하겠지.
페트라는 한숨을 쉬었다. 여왕 폐하를 구출하는데 성공하면, 나는 숨겨진 클레사가 아니라 당당한 클레사 소프가 되는 것이다. 그 이후에는 자유롭게 될 것이다.
왜 자유롭게 “되” 는거야? 보통 자유롭게 “살” 거라고 하지 않아?
그 뒤엔 자살할거니까.
보드히의 표정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죽다가 실패하면…….
생각해보니, 보드히의 어머니가 자살기도에 실패했었다. 나는 약간 미안해졌다. 보드히의 손을 마주잡았다. 그러니까 나에게서 떠나, 나를 익숙해하지 말고 그냥 가버려. 난 그런데에 상처 안 받아. 난 아버지 얼굴도 본 적 없는걸. 클레사는 한계를 느꼈다. 몸이 너무 쇠약해졌고, 점점 변모해가는 오른팔이 명상을 방해했다. 클레사는 헐떡거리며 숨을 내쉬었고, 유기체 인간의 변화를 본 시종은 예정된 시간보다 더 클레사를 괴롭혔다. 보드히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다.
아니야, 들렸다고 생각해야한다.
파라이바는 쓰러지듯 문을 열고, 실제로 신발장에 한동안 쓰러져있었다. 보드히가 말했다. 클레사의 좌표를 계산할 수 없다고. 최선을 다 해 보겠다고. 근데 그 최선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파라이바도 묻지 않았다. 보드히의 몸을 깎아먹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걸 입 밖으로 내는 순간, 파라이바는 보드히의 무모한 행동을 막아야했다. 이미 그는 여왕의 풀 물약을 너무 마셔서 온 몸에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여왕의 풀은 맹독이니까. 배가 고팠다. 클레사만큼 어린 보드히가 자신의 몸을 망가뜨리고 있는데, 파라이바는 누워서 “배고프다” 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키득거리면서 웃었다. 요 몇 달 간, 파라이바는 임무와 수색을 번갈아가면서 자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어쩌면 몸을 망치고 있는건 보드히 하나 뿐이 아닐지도 모른다. 망가진 센서등이 이제야 켜졌다. 파라이바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배고프다. 일단 먹고 생각해보자.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 왜?
파라이바의 목소리가 떨렸다. 쾅, 소리 나게 냉장고 문을 닫았다. 다시 열었을 때는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파라이바가 소리질렀다. 냉장고 문을 닫았다, 열었다 반복했다. 왜, 왜, 왜, 왜, 파라이바의 눈가에 실핏줄이 섰다. 분노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왜, 왜, 왜 라는 질문은 점점 무너져 와악, 아악, 와악 같은 소리로 변하였다. 이젠 냉장고 열 힘이 없었다. 냉장고 문고리를 꽉 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입가에 게거품이 일었다.
씨발, 이 좆같은,
바닥을 뒹굴면서 떼를 써도 욕을 해도 마음 속에 있는 응어리는 풀리지 않았다. 차라리 아기처럼 큰 소리로 우는 것을 선택했다. 서러웠다. 그래, 그깟 냉장고에 알량한 음식이 없는게 너무 서러웠다. 파라이바가 먹지 않아도 되는 불사의 몸이라지만 서러운건 서러운 것이었다. 파파라챠는 파라이바를 잠시 쳐다보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체나 까딱하고 스륵 사라졌다. 비이성적인 몸부림을 치는 자신의 수호자에게 이성적인 설득이 통하지 않을거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띵동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파라이바는 밖에 사람이 들으라는 듯 더 크게 울었다. 띵동거리는 소리가 다급해졌다. 급기야는 문을 두드리기까지 했다. 파라이바는 쿨쩍거리며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내려다보자, 까마귀가 거기 있었다.
이브, 무슨 일이야.
까마귀는 손을 뻗어 이브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아니……. 닦아주려다 가까이에서 멈추고 주춤거리며 손을 다시 거두었다.
가.
파라이바가 까마귀를 가볍게 밀쳤다. 까마귀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고개를 들고, 파라이바의 손에 종이봉투를 쥐어주었다.
이브……. 이거라도 가져가. 너, 요즘 집에 들어오는 날이 없다고 들었다. 먹을 것이 있다면 그냥 버려도 돼.
파라이바는 까마귀가 건네준 봉투를 열어보았다. 치즈와 함께 구운 동글동글한 빵이었다. 갓 구운 것은 아닌지, 오다가 식은 것인지는 몰라도 냄새가 화려하지는 않았다. 담백한 음식 냄새에 마음이 풀어진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처량하게 바라보는 까마귀의 얼굴 때문이었는지 파라이바는 까마귀의 손을 확 잡아끌어 자신의 집으로 들였다. 싫었다.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까마귀는 다짜고짜 입을 맞추려는 파라이바를 손으로 막았다.
진정해, 친구.
예전의 까마귀처럼 장난스러운 모습이었다. 파라이바는 머쓱하게 뒤로 물러섰다. 까마귀는 대신, 파라이바를 가볍게 안아주었다. 어쩐지 녹은 마음이 다시 굳혀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예전처럼. 우리가 과거를 알기 전의, 그 모습처럼. 파라이바는 자신의 추태를 까마귀에게 고백해보았다. 그냥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서러워서 눈물 흘리며 듣는 사람도 없는데 떼를 썼다고. 그냥 밖에 나와서 사오면 되는 것을.
내가 적절할 때 왔군.
까마귀는 의기양양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치즈빵은 맛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얘기하며 빵을 먹다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문간에서 까마귀가 말했다.
용서하지 않아도 돼.
이브는 우뚝 멈춰섰다. 또 눈물이 흐른다. 이건 아니다. 눈물을 닦고 나서 파라이바는 까마귀의 뺨을 쳤다. 까마귀는 맞으면 맞는대로 서있었다. 공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허하지 않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네가.
그럼 난 뭐가 돼?
전생은 파라이바가 아니다. 그러나 전생으로 파라이바는 영구적으로 변화하고 말았다. 이브는 그 말을 번복했다. 고개를 깊이 숙여 까마귀에게 사과했다. 까마귀는 다시 이브를 안아주었다. 까마귀와 마주 안았다. 밤공기는 차가웠고, 그만큼 차가운 밤바람 안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포옹을 했다. 파라이바가 말했다.
미안해. 하지만 용서할지 말지는 유보할게.
그래. 기다리고 있겠다.
그럼, 한번만 더 미안해도 될까?
까마귀는 고개를 빼꼼히 들었다.
지금으로는 나 혼자서는 내 집을 관리하는게 너무 버거워.
도와달라는거지?
파라이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까마귀는 파라이바의 스페어 키를 가지고 돌아갔다. 마치……. 아니, 마치 예전처럼이 아니다. 이건 지금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나는 태어날 때 부터 남을 모욕하기 위해 태어났다. 장난으로 만들어진 아이. 아버지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장난감에 싫증이 난 어린이처럼. 고모는 나를 가두었다. 보기 흉한 장난감이 밖에 굴러다니는걸 싫어하듯, 그렇게 나를 가두고 나오지 못하게 했다. 나는 소프가 되지 못했다. 밖에 나가려면 클레사 다이트라고 스스로를 속여야했다. 보상받고 싶었다. 내가 소프의 일원으로 되던 아니면 영영 자유로운 새가 되던 아니면……. 아니면, 아, 끝, 죽으려고 한 적이 없지는 않았다. 어릴 때 부터 유모의 눈을 피해 자해를 했다.
클레사, 네가 느껴져.
굶어도 보고, 물도 마시지 않고, 독을 몸에 집어넣고, 승천차원에 뛰어들어 적들 사이를 거닐었다. 고문을 받다 죽었다면……. 그래, 뭐, 좋았겠지. 하지만 고문을 받다 들린 보드히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닿는다고……?
클레사, 거기서 나오기만 한다면 파라이바 루를 보내 널 구해줄게.
보드히,
나는 죽지 못하고 보드히에게 추적당하기까지 했다. 이건 수치스러운 일이다. 나는 죽으려고 했으니까. 보드히의 목소리가 끊겼다. 보드히! 클레사는 처절하게 소리쳤다. 보드히, 보드히, 안돼, 내가 거기로 갈게, 클레사는 비틀거리며 자세를 바로했다. 시종이 뭐라 소리치며 뒤로 물러섰다. 누가 누구를 구하는 것인가? 클레사는 직감했다. 보드히에게 자신이 없으면 그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시종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덜덜 떨리는 몸을 가라앉혔다. 두 손에 힘이 모이고, 보드히가 발작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파라이바가 입에 손수건을 물렸다. 잠시 뒤 발작이 멎고, 손수건이 우물우물 움직였다. 파라이바가 입에서 수건을 빼주자 쉬어빠진 목소리로 좌표를 말했다.
지금, 문을 열어줄 수 있겠어?
파라이바가 물었다. 보드히는 대답 대신 일어섰다. 파라이바는 다시 한번 진입할 용기를 모았다. 아까보다는 느리게, 차원문이 열렸다. 들어갔다. 굴복자들의 톡 쏘는 악취가 콧 속으로 들어왔다. 달렸다. 시간이 많지 않다. 보드히의 안내가 점점 희미해졌다. 단어와 단어 사이가 파도같이 거친 숨소리로 채워졌다. 정말, 많지 않다. 저 너머에서 휴머노이드 형체가 보였다.
클레사!
파라이바가 소리쳤다. 손을 뻗었다. 손이 마주잡혔다. 서로에 대한 충격으로 몸이 맞물린다. 안긴다. 안겼다. 클레사가 묻는다.
왜?
그건 파라이바도 마찬가지였다.
가자.
그건 클레사도 마찬가지였다. 파라이바는 굴복자화 된 클레사의 오른팔을 보고 눈을 돌렸다. 하나하나 슬퍼하기엔 급박하다. 보드히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헐떡이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보드히가 위험해, 시부의 군대가 그쪽을 보고 있다.
그럼 어떡하면 되지, 클레사?
파라이바…….
그 이름이 가진 씁쓸함을 음미했다.
보드히에게 말해서 맞서지 말고 차원문을 닫으라 해. 내가 공간을 찢어보겠다.
하지만 파라이바의 연락은 보드히에게 닿지 않았다.
안돼, 그 계획은 안된다, 클레사.
왜 안된다는,
보드히가 위험해. 연락이 전혀 닿질 않아!
파라이바는 클레사의 손을 잡고 포탈이 있는 곳으로 뛰기 시작했다. 클레사가 뒤쳐지며 손이 점점 빠져나가자, 파라이바는 클레사를 업고 뛰기 시작했다. 포탈이 점점 작아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틈새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몸을 던질 수 있었다. 클레사와 파라이바는 바닥에 뒹굴었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해냈다. 클레사를 찾았다. 몸을 돌렸다. 해적들이 보였다. 그들은……. 왜 우리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는거지? 파라이바는 헐떡이며 일어섰다. 총을 고쳐쥐었다. 뒤를 힐끗 보았다. 시부의 군대에 홀로 맞서느라 만신창이가 된 보드히를 클레사가 흔들며 깨워보려 하고 있었다. 저 둘을 지키면서 해적들을 뚫고 나갈 수 있을까? 마른 침을 삼켰다.
그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까마귀였다. 그는 울드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파라이바는 뼛 속에서 한기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누를 수 있었다.
까마귀에게 해당 사건을 이관하라는 누님의 명이시다.
해적들은 서로를 쳐다보았지만, 리프의 대공(어떻게 그가 살아돌아왔는지는 몰라도)의 전언이었다. 그들은 머뭇거리다 총구를 내리고 물러 사라졌다. 모두가 없어지자, 까마귀가 파라이바에게 달려와 서로 껴안았다.
내 얼굴을 이런데 써먹지 않으면 언제 써먹겠어?
까마귀가 키득거리려다 클레사의 표정을 보고 웃음을 거두었다. 파라이바는 까마귀의 입에 검지 손가락을 올렸다. 까마귀는 자신의 침묵을 이해했다.
근처에 우주선을 엄폐시켜놨다. 가.
클레사가 간신히 정신만 차린 보드히를 부축했다. 까마귀와 파라이바가 두 사람을 엄호하며 숨겨놓은 우주선으로 갔다. 곧 돌아오겠다고 파라이바는 까마귀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생각보다 오래 우주를 떠돌아야했다. 그래도 승천차원을 헤메던 때보단 나았다. 짬이 날 때 마다 까마귀가 물자를 지원해주었다.
아버지는, 그렇다 쳐도 당신은……. 왜?
보드히의 부상을 돌보던 클레사가 물었다. 파라이바는 클레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나는 파라이바 루, 이브라 부르렴.
부상은 낫지 않았다. 영원히 낫지 않을 것이었다. 그걸 깨달은 날, 클레사는 하루 종일 울었다. 보드히는 병든 몸으로 클레사를 위로했다. 클레사의 굴복자화가 악화되자, 보드히는 클레사를 위해 하루 종일 울었다. 클레사는 자신은 괜찮다며 보드히를 위로했다. 파라이바는 면도날을 피부에 밀어넣는 심정으로 좌표를 설정했다.
생면부지의 나를 도와줘서 고마워.
그들을 내려놓고 떠날 때, 클레사가 말했다.
파라이바는 꽃집에서 꽃을 두 송이 샀다. 꽃집 주인이 머뭇거리며 꽃을 건네다 조용히 속삭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잠시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감사해요.
파라이바는 울지 않았다. 대신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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