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티니 2 연성

광란

새벽제비가 끓여준 차를 마셨다. 아무 향도,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블레이드는 차가 뜨거운가 해서 식혀 마셔보았다. 차를 새 모금처럼 마시나 해서 훌쩍 들이켜보기도 했다. 아무 향도,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차를 훌쩍 들이키자 꺼끌한 실타래가 목구멍 안을 긁으며 들어왔다. 따끔거렸다. 블레이드는 사레가 들려 헛구역질을 하며 입 안에 들어온 타래를 뱉어냈다.

쉘……. 쉘터,

블레이드가 간신히 말했다. 쉘터는 여전히 말 없이 블레이드가 뱉어낸 타래를 비춰주었다. 새벽제비가 끓여준 차가 범상한 것은 아닐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그런데 이걸 생각한건 아니었다. 블레이드는 역겨움에 마셨던 물을 죄다 토해냈다. 엉망이 된 바닥과 엉망이 된 블레이드 그리고 엉망이 된 아침. 블레이드는 소리쳤다.

왭니까!

새벽제비는 미소지었지만, 블레이드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쉘터는 뒤엉킨 새벽제비의 머리카락 타래와 블레이드가 토해낸 머리카락 우린 물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머리카락에 손을 댄거죠?

이제야 진실을 인정하는구나.

새벽제비는 잘 잤냐고 묻는 것 처럼 온화하고 평온하게 말했다. 블레이드는 자기가 뱉어놓은 토사물밖에 볼 수 없었다. 답답했다. 새벽제비의 면상을 보고 싶었다. 그래야 그 다음에 화를 더 낼지 아니면 용서를 빌어야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시야가 흔들렸다. 손이 보이고, 불쾌한 신호가 머릿 속을 울렸다. 새벽제비가 쉘터를 잡아 채 그의 눈을 가린 것이었다. 비명을 질러야했을까? 블레이드는 어딘가로 시선을 고정한 채 바들거리며 떨었다.

선을 넘으시는군요.

선은 엣저녁에 넘었지, 얘야……. 솜니아, 나는 너를 사랑할까?

당연한 말 아닌가요? 사랑하지 않는데 몸을 섞을 수는 없는 일이죠.

불쌍한 블레이드, 새벽제비는 자신의 손 안에서 쉘터를 놓아주었다. 쉘터가 비틀거리며 새벽제비에서 벗어나는 것을 느꼈다.

어제도…….

그래, 어제도 섹스를 했지.

블레이드는 유독 몸을 맞대는 것을 좋아했다. 새벽제비는 그에 대해 유감은 없었다, 아니, 그냥 답답하다는 감정은 있었다. 그게 유일한 유감이라면 유감이었다. 그에 대해 블레이드는 구구절절 변명을 했다.

가끔 당신의 표정을 보지 못하는게 아쉽네요,

라고. 새벽제비는 그럴 때 마다 가볍게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몸을 딱 붙이고 있으면 표정 보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세하게 떨리는 근육, 뺨에 달라붙는 거친 머리카락, 텁텁하면서도 들큰한 땀내, 원한다면 입술을 목에 파묻을 수도 있고 그대로 키스할 수도 있었다.

너는 내 표정을 탐하는게 아니잖니.

새벽제비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정답 속에서 블레이드는 길을 잃은 것 같은 불쾌함을 느꼈다. 그건 블레이드가 길을 잃었기 때문이겠지, 그는 그걸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으로 하자.

새벽제비가 토사물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몸을 가누려 노력하는 블레이드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당신의 머리카락을 태우려고 했을 때 부터 뭔가 이상했어, 원한을 갖고 있었던건가요? 오늘 마신 차는…….

블레이드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새벽제비의 꺼끌한 입술이 그의 부드러운 입 위에 닿았다. 새벽제비는 어느 순간부터 그를 받아들였다. 그가 슈일 때 뿐만이 아니라, 하이옌일 때도. 블레이드가 요구하지 않아도 하이옌은 종종 그를 유혹했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블레이드는 그 유혹을 받아들였다. 물론, 하이옌이라 해도 새벽제비의 몸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 평소와 똑같이 행동하면 됐다.

왜죠?

너를 사랑하기로 했으니까.

새벽제비, 나를 조롱합니까?

하이옌.

블레이드는 하이옌을 밀어냈다. 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콧김이 손날에 닿아 온기로 흩어졌다.

하이옌. 생각해보니 머리카락 사건 이후로 당신은 이상해졌어요. 어디가 아픈거죠?

새벽제비는 짙은 녹색 눈동자를 눈꺼풀 안으로 숨겼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한다.

불에 타 죽은 것도 아니고, 옷소매 한쪽을 태워버린 것 뿐이었어요. 나는 사과를 했고. 그런데 당신은 계속 삐져있었죠.

새벽제비의 머리카락을 끊었다. 그는 이상했다. 디어는 그것을 이해하는 듯 했지만, 블레이드에게는 두려움이었다. 그를 통제할 수 없었다. 그는 바다제비로 변해 늘 어딘가로 날아갔다. 그리고 새벽 태양으로 천천히 떠오르며 블레이드를 굽어보았다. 솜니아. 낮은 목소리로 새벽제비가 말했다. 블레이드는 단검을 꺼내 그의 머리카락을 베었고, 서리 내린 머리칼은 거칠게 잘렸다. 풋내가 났다. 소녀처럼. 새벽제비는 자신의 머리를 빼앗기자 비명을 지르고 위액을 토했다. 손톱으로 긁은 뺨에는 붉은 피가 맺혔고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내 머리카락을 내놔.

이건 그냥 머리카락일 뿐입니다. 당신이 과민반응 하는겁니다.

새벽제비는 비명같은 숨소리를 내뱉으며 자신의 입과 코를 손으로 감싸고 히스테릭하게 거실을 오갔다. 그러다 옷걸이 밑에 쪼그려앉아 블레이드를 노려보며 원한 가득한 눈물을 쏟아냈다. 놀랍게도 머리카락은 멜이 재생할 수 없었다. 보란듯이 그 모습을 보여주고, 트로이메라이는 그 이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단단히 미움받고 있었다. 기꺼이 응해주던 잠자리도 칼같이 거절했다. 블레이드는 자신의 화에 지쳐 바닥에 웅크리고 누운 새벽제비에게 갔다.

당신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미안합니다.

돌려줘.

돌려준다해도 당신의 머리카락을 붙일 순 없어요.

블레이드는 판결을 내렸다.

당신은 광란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이 머리카락이고요.

부드러운 주머니에 곱게 들어있는 자신의 머리카락 타래를 보고 하이옌의 눈이 번뜩였다. 블레이드는 잠시 공포를 느꼈지만,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안심했다. 블레이드는 한 손에 주머니를 들고 하이옌의 손을 잡아 그를 이끌었다. 하이옌은 이끄는대로 움직였다. 블레이드가 주머니에서 머리카락을 꺼냈다. 블레이드가 가스불을 켰다. 블레이드가 머리카락을, 불 위에 얹었다. 새벽제비는 블레이드를 밀치고 불 위에서 타들어가는 머리카락을 집어들었다. 그의 손이 불길에 그슬렸고, 소매가 불길에 타올랐다.

하이옌!

블레이드가 비명을 질렀다. 새벽제비는 머리카락을 멀리 던졌다. 그는 불덩이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블레이드는 정신을 차렸다. 저 불씨는 우리의 집을 삼킬 것이다. 블레이드는 새벽제비에게 물을 끼얹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거에요!

새벽제비를 뒤흔들었다. 새벽제비는 신음과 비명과 오열을 섞어 노래처럼 부르고 있었다. 지랄맞고 끔찍했다. 지랄맞고 끔찍했다. 지랄맞고 끔찍한 사람, 블레이드는 새벽제비의 얼굴에 주먹질을 했다. 그의 주먹은 단단했다. 단박에 새벽제비의 코가 깨졌다. 화살에 맞은 여우처럼 새벽제비가 캥캥거렸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쌍코피가 흘러 바닥에 떨어졌다.

새벽제비……. 하이옌,

블레이드는 그제서야 자신이 뭔 짓거리를 했는지 알고 덜덜 떨었다. 새벽제비는 그의 두려움을 눈치채고 네 발로 기어 자신의 방으로 갔다. 뭘 본 것인지, 뭔 짓을 한건지 블레이드는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 날, 블레이드는 새벽제비가 삐져서 자신을 해치고 있는게 아닐런지 걱정이 되었다. 타다 만 머리카락은 거실과 부엌 중간에 내팽겨쳐져있었다. 블레이드는 불길한 것을 보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문이 빼꼼히 열리고 새벽제비가 수줍게 나왔다.

하이옌.

보지 마.

새벽제비는 자신의 코를 한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눈은 울어서 퉁퉁 부어있었다.

하이옌, 사과를 하려고 해요.

솜니아…….

당신이 광란하는 것을 막고 싶었어요. 하지만 결과는 나빴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확실히 사과할게요. 미안합니다.

새벽제비는 얼굴에서 손을 치웠다. 블레이드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두 팔로 안기 위해서였다. 블레이드는 새벽제비와 자신이 역경을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새벽제비는 동화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로운 정령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안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블레이드는 안심했다. 사과의 의미로, 블레이드는 새벽제비가 가져갈 수 있게 머리카락을 책장 안에 넣어두었다. 문은 잠그지 않았다, 정말로. 새벽제비는 머리카락이 유리장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블레이드가 가져갈라면 가져가라고, 이제 막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을 새벽제비는 들었다. 가져가지 않은 것은 새벽제비였다! 그는 오랫동안 그 책장 안에 머리카락을 방치해두었다!

내가 머리카락 차를 내줘서 싫었니?

왜 머리카락에 손을 댄거죠?

블레이드는 분명히 화를 내고 있었다. 새벽제비가 온화하게 웃었다. 하이옌도 슈도 아닌 새벽제비가. 그건 그냥 머리카락이고, 이건 그냥 짓궂은 장난이라고, 애인의 거친 모습에 삐져버린 한 유치한 사람의 장난이라고……. 새벽제비는 온 몸을 떨며 숨을 들이켰다. 쉘터는 그를 비추지 않았다.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복수? 저 어린 애인의 목에 단검을 박아넣는다? 쉘터는 블레이드를 살리지 못하니까? 안된다. 새벽제비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 그가 죽일 수 있는 것은 어긋난 자신의 딸 뿐이었으니. 어쩌면 도망은 갈 수 있겠지.

솜니아, 나는 너를 사랑할까?

새벽제비가 솜니아 블레이드의 고스트를 손에 쥐었다. 쉘터는 순순히 그의 손에 들어왔다. 블레이드는 새벽제비가 보내는 시야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새벽제비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는 것 조차 몰랐다.

당연한 말 아닌가요?

블레이드가 절박하게 말했다. 마치 자신이 새벽제비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단걸 안다는 것 처럼. 자신이 원하는건 그저 섹스가 가능한 아군일 뿐이라는걸 안다는 것 처럼! 새벽제비는 그를 먹어치우고 싶었다. 블레이드는 어제 동침한 것을 들어 그들이 아직 정신적 유대를 맺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블레이드는 새벽제비에게 불을 붙일 수 있었다. 블레이드는 실수에 대해 사과했지만, 블레이드는, 어리고 불쌍한 블레이드는 알고 있었다. 그건 고의라는 것을. 그의 정신은 남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아니, 그의 행동이 남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두 사람은 오랫동안 몸을 맞대지 않았고, 그 날은 새벽제비가 드디어 그에게 안겼다. 정말 오랫만이었다. 그래서 블레이드는 생각보다 지쳤고, 꽤 깊은 잠에 빠졌다.

왜 집착하냐고 말할거야?

새벽제비가 머리카락을 들고 물었다.

왜 내 머리카락을 전시해놓은거지? 마치 언제든 나를 불태울 수 있다는 것 처럼.

그런 의도가 있을 리 없잖습니까! 또 히스테릭하게 제 행동을 분석하고 있군요.

너는 나를 불 속으로 밀어넣었지.

실수였잖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넌 영원히 그걸 실수로만 생각할거고.

제가……. 고의였다고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옷소매에 불을 붙였다고 주장하는건가요?

주장이 아니야, 사실이지.

새벽제비는 걸레를 가져와 바닥을 훔쳤다. 무릎을 꿇고 바닥을 온 몸으로 기어다니는 새벽제비를 보고 블레이드는 화를 삭혀야만 했다. 그는 절대 나를 위해서 오체투지를 하지 않을 것이다.

저를 죽이려 하셨잖아요. 모를 줄 알았나요. 디어 스승님께서 제게 당신에 대해 가르쳐주지 않았죠, 왜였는지 알 것 같습니다.

난 너를 죽일 능력이 없다.

새벽제비가 걸레질을 멈췄다. 그의 손에는 걸레가 아닌 자신의 머리카락이 한 가득 담겨있었다.

도망칠 수는 있었겠지.

블레이드는 공포와 혐오감으로 소리쳤다.

도망치지 그랬어요! 당신의 그 동굴 속으로!

내가 어떻게 도망칠 수 있겠어? 나는 널 사랑하는데.

어머니가 있다면 그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블레이드는 자신의 비어있는 전생이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새벽제비는 이해할 수 없는 마법사다. 마녀다. 그는 가둬야한다. 새벽제비가 그의 머리통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새벽제비는 그의 입술에 자신의 꺼끌한 입술을 맞붙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블레이드는 겁에 질려 광란하고 있었을 뿐이다.

…… 네가 말하던 대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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