Εὔα
태초가 되어 세계를 구성할 수 있다면
은하람의 삶은 '온전한' 삶이었는가?
삶을 연명한다는 것이 삶을 살아간다는 것과 무조건 상통하지는 않는다. 주어진 삶의 끈을 끝내 스스로 놓지 못한 채 주저앉아도 삶은 살아지고, 옳은 길을 선택하지 못하더라도 나아갈 길은 주어진다. '자신만의' 무언가를 해내지 못하더라도, 심지어는 그런 것에 대한 일말의 통찰을 한 적이 없어도 사람은 육체가 제 기능만 한다면 숨을 쉬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은하람의 삶은 통 온전하다¹고 할 수도, 온전하다²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앞에 주어진 길이 있었기에 따라 걸어갔다. 갈림길 앞에서는 늘 쉬운 길을 택했다. 위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니 구태여 오르막을 택하는 일도 없었고 하물며 위를 바라보는 일조차 없었다.
그러나 백평화가 우리의 위에 존재하는 것을 하늘이라 명명한 순간, 은하람은 고개를 들어 올리고 마는 것이다.
은하람은 스스로가 기억하는 하늘을 상상한다. 옅은 푸른색을 띠는 청명한 빛깔 사이로 피어오른 흰 구름이 자리 잡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드넓게 펼쳐진 창공이 머리 위에 자리하고 두 눈에 가득 들어찬다. 세간에서는 이런 것을 두고 충만하다는 표현을 하던 것 같았는데. 하늘을 보며 마음을 다잡는 이들은 늘 이런 기분을 느끼며 살아가는 걸까. 실없는 생각의 끝에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어떤 말인지 알 것 같아요. 우리가 그들과 같은 최초의 인간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에 의해 어떤 개념이 계속 존재할 수도, 사라질 수도 있는 거겠죠. 다시금 생겨나는 개념도 생길 거고. 그러던 중 다른 이들을 마주하게 되더라도 상관없을 거예요. 본래 지구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이들이 함께하던 곳이니… 달리 형성된 이름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도 좋을 것 같거든요. 그에 굳이 옳고 그름을 따져가며 분별할 필요도 없을 테고요."
시선을 아래에 두고서 제 발밑에 펼쳐진 것을 발끝으로 한 번 매만진다. 아, 그래. 당신의 말대로라면 이 아래 존재하는 것은 분명 땅일 터다. 씨앗을 심으면 순을 틔워내고 종내에 자라날 식물의 요람이 되어줄… 모든 생명의 받침이 되어주는 것. 내가 두 다리로 버티고 서게 해주는 것. 은하람은 어쩐지 조금 걷고 싶어졌다. 제 앞에 주어진 드넓은 길을 한 번쯤은 제 의지대로 밟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가는 길을 함께 걸어줄 누군가가 있기를 바란다면 첫째로 그가 스스로와 함께해줄 것임을 믿어야 하고, 둘째로 그런 마음을 어떤 형태로든 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은하람은 우리가 땅이라 정의한 것을 응시하던 시선을 거두고 백평화를 보았다. 서로가 형성한 좁은 세계 속 유이한 인간을. 검붉은 머리카락의 색채가 눈에 들어차고, 그다음은 푸른색, 살굿빛, 계절감을 상실한 하복…. 영락없는 고교생의 꼴을 한 우리. 앞으로 어떤 정신적 성장을 경험할지라도 우리가 지닌 우리의 형태만큼은 변치 않을 것이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그저 자라버린 신체를 사고의 성장이 뒤따른다. 은하람은 스스로가 이제야 열여덟처럼 생각할 수 있게 된 것 같았고, 그게 그다지 싫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는 건 여전히 어려운 과제 같아요. 여태 필요성을 통감한 적이 없었거든요. 누군가가 알려준다고 해서 곧장 따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도 하고. 그래도…."
말을 고르듯 잠시 뜸을 들였다. 문득 너는 이어질 나의 말을 궁금해할지 알고 싶어졌다. 비단 당장 스스로가 이어 말할 문장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의 말에 대한 답을 돌려주었을 때, 우리는 다시금 상대에게서 답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을까? 서로에게서 실제적인 무언가를 얻지 못할지라도? 서로에게서 더는 인격적 성장에 대한 힌트를 얻지 못하더라도, 어쨌거나 '함께이기에 즐겁다'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그래도 이제는 그러고 싶어졌으니까요. 자신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요. 그게 어떤 일을 함에 있어 극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더라도, 분명 저답게 살아가는 것에는 필요한 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다 보면 은하람이라는 사람 자체에 대해 저 스스로가 정의할 수 있는 날도 오겠죠."
그러니까… 타생에 기인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내세에서 삶을 논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이 어디 있겠냐마는, 반대로 죽어서도 송장 같은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꼭 그것이 아니어도 인간은 인간답게 사는 것 다음으로 자신답게 사는 것을 갈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그런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생각을 하며 조심스레 한 걸음을 내디뎠다. 첫발이 떨어지는 순간 공기의 이동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우리가 정의할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바람이었다. 바람이 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칼이 나부끼듯 하는 착각 속에서, 어쩌면 방학 보충수업 도중 느꼈던 여름의 더위, 또 어쩌면 이글거리는 태양의 빛을 그대로 받아들이듯 하며….
은하람은 백평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끝이 아득하니 보이지 않는, 드넓게 펼쳐진 길을 누군가와 함께 걷길 원한다면 어떤 형태로든 그런 속내를 내비칠 필요가 있다. 상대가 거절의 의사를 표현할지라도 상관없다. 그 또한 신뢰 관계로 향하는 것에 도움을 줄 테니까. 은하람은 백평화와 걷고 싶어졌다. 정확히는 그런 의사 표현을 하고 싶어졌다. 첫째로는 거절당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어쩐지 너라면 거절하지 않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상으로… 은하람은 너와의 대화에서 실제적인 무언가를 얻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굳이 어떠한 의미를 잡아내어 배움으로 소화해 내지 못하더라도, 그저 일상적인 인사말만을 주고받더라도 충분히 즐거울 것 같았다. 나와의 어떤 연결점도 존재치 않는 이야기라도 듣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공통점이나 차이점을 찾아가는 것을 넘어 단순히 상대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그저 그 뿐. 그 이상은 없는 이야기. 그럼에도 어쩌면 어떠한 의미가 있을지도 모를 언어를 발음하기 위해… 은하람은 기꺼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 조금 걸을까요. 저, 이렇게 펼쳐진 공간에 끝이 존재할지 궁금해졌어요. 실리적인 호기심은 아니겠지만 가끔은 이런 단순한 궁금증에 대한 해답이 큰 도움이 될 때도 있으니까요. 설령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고요. 음, 그리고… 이왕 답을 찾을 거라면 평화와 함께 찾아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당신 또한 제가 속한 이 세계의 구성원이고, 저는 아마 앞으로도 이 공간에 대해 설명할 때 '백평화'라는 사람에 대한 설명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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