生日

23.12.25

天命 by 히자

“스승님께서는 언제 태어나셨습니까?”

 

명서령은 태자의 맹랑한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비단 그 아이가 지고한 창룡이 수호하는 황실의 태자되는 분이라 그런 것만은 아니고, 앳된 목소리에서 초조함과 성급한 호기심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태자를 바라봤다. 그 아이는 평소처럼 손을 바로 모으고 공손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옷자락 밑으로 손가락과 발 끝을 마구 꼼지락거리는 게 티가 났다. 뒷간에라도 보내야 할 꼴이었으나 태자의 얼굴은 뭐 마려운 표정은 아니었다. 뭐랄까, 잔뜩 상기되어 무언가 기대라도 하는 듯했다. 명서령은 태자 백진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부모를 그냥 처음부터 있던 사람으로 인식하던 어린애가 부모에게도 부모가 있음을 깨닫는 것처럼, 이 어린 태자도 그런 인식의 과정을 새삼스레 거쳤나 그런 추측 정도만 가능했다. 그래서 묻는 것에만 바로 대답했다.

 

“송구합니다. 소신은 조실부모하여 초도를 알지 못합니다.”

 

태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예상 못한 대답이라는 듯 낯을 굳히며 눈을 굴렸다. 따지자면 명목상 생일은 따로 있었다. 명서령은 생각했다. 태자께서 아직 유충幼沖하시나 금년의 생일로 만 10세가 되시니 슬슬 표정을 감추는 법을 가르쳐 드려야겠다고. 명서령은 무릎을 꿇어앉아 태자보다 낮은 눈높이에서 올려다봤다. 근 며칠동안 좋은 일만 있었다. 별 볼일 없던 말단 여관의 자식으로 승은은 승은이랍시고 황궁의 가장 구석진 별채에서 자라기를 10년, 드디어 황태자로 지명받아 동궁으로 터를 옮긴 것이다. 명서령으로선 자그마치 5년만의 제대로 된 성과였다. 말이 태자소부지 실상 좌천이나 다름없던 보직에서 성실하게 임하기란 보통의 관료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봐주는 뒷배도, 든든한 소속감도 없이 정치 권력에서 완전히 소외되어 까딱 궁에 피바람이라도 불면 가장 먼저 먼지처럼 목이 날아갈 위치였다. 고작 다섯 살난 어린애의 입지란 그랬다. 아무리 녹송안綠松眼과 검푸른 머리털을 가지고 있다 해도, 알 게 뭔가. 성상의 하해와 같은 정기가, 아니 은혜가 세상 만고에 쓸데없이 넘치니 그런 아이는 이미 궁 안팎으로 백여 명이 넘는다. 관례를 올리고 나면 암만 황자라 해도 궁 밖으로 내쫓기고 마니, 지학志學에 이르기 전에 입지를 다져놓는 게 명서령의 목표였다. 다행히 운과 흐름이 따라주어 계획보다 다섯 해나 일찍 태자로 임명받았으니… 그야말로 천운天運이었다.

 

한 가지 의외였던 것은, 당시 일말의 기대와 함께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황제의 사령辭令을 받은 직후 정작 당사자인 백진의 반응은 아주 찹찹했던 점이다. 온 힘을 쏟아부어 아이를 그 위치까지 끌어올린 명서령은 예비 태자에게 물었다. 기쁘지 아니하시냐. 백진은 대답했다. 기쁩니다. 헌데 어찌 반기지 아니하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냉궁을 떠나는 게 아쉬우십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싱거운 반응의 연유를 알 수 없었기에 명서령은 더 묻지 않았다. 처지가 좀 더 좋아진 것 외에 다를 바 없는 일상이 지속이 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태자의 자세가 더욱 의젓해졌다. 태자는 부쩍 자주 웃게 되었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의젓하게 감사를 표하고 방실방실 웃었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검술 수련에서 혼이 나도 더 크게 기합을 내뱉으며 목도를 두 배로 휘둘렀다. 혼자서 꽃을 보며 중얼중얼거리고, 화선지에 무언가를 적다가 인기척이 들리면 화들짝 놀라 적던 것을 감췄다. 명서령은 태자의 기행을 제법 여러 번 목도했으나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탈선도 아니고 오히려 좋은 일이었으니 뭐라 할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그리고 비로소 오늘이다. 언제라고 정확히 말했으면 내놓을 답을 준비했던 모양이다. 그러니 이렇게 당황한 거겠지. 명서령은 백진의 팔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태자마마의 생일이 바로 내일이지요.”

 

백진은 머쓱한 입술을 앙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명서령은 입꼬리를 미미하게 올렸다.

 

“동궁이 된 뒤 첫 절일이니 성대한 잔치가 열릴 겁니다. 가슴이 설레지 아니하십니까.”

 

대답은 없었다. 머뭇거리는 기색이 다분했다. 스승은 의아했다.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이긴 하나 좋을 땐 좋다고 말할 줄 알았다. 조가비처럼 앙 다물린 입이 열리길 한참 기다리고 있자니 백진이 겨우 말을 뱉었다.

 

“제자는 스승과 함께 했던 생일마다 설렜습니다.”

“음.”

“서, 선물도 매번 주셨잖습니까.”

“그랬지요.”

 

기특한 대답이긴 하나, 살짝 삐끗한 감이 있었다. 기시감이 몰려왔다. 지난 번도 그렇고 높아진 위치에 대해서 왜 기뻐하지 않는 건지 명서령은 알 수 없었다. 잠깐 의문에 빠져있으니 태자가 별안간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망설이는 낯이면서 제법 용감하게 직시하는 건 아이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이라면 버릇이었다. 명서령도 선명한 녹송빛에 성실히 응대했다. 그러자 아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군주가 되면 기쁘시겠습니까?”

 

웬일로 대범한 물음에 명서령의 눈이 약간 커졌다. 한 차례 바람이 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미약한 먼지바람이 일었는데도 백진은 눈을 깜빡이지도 않았다. 커다란 눈에서 어떤 의지마저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의지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높이 올라가고 싶은 야망도 없는 범재에게서 읽을 수 있는 눈빛은 아니었다.

 

“예. 소신이 모시는 마마께서 벽령의 천자가 되신다면 소신,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자 홍복으로 여길 것입니다.”

 

천자, 작게 되뇌던 백진이 볼을 붉게 물들였다. 자신의 팔에 머물러있는 스승의 손을 떼어 제 양손으로 꼭 쥐었다. 올망한 눈썹이 바짝 모아졌다.

 

“제자는, 제자는 꼭 보은할 것입니다. 아무 재주도 없는 저를 행복하게 해주셨으니 저는 반드시 스승께 보은할 것입니다!”

 

힘껏 외치는 아이의 기세에 약간 뒤로 밀린 명서령은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제자를 잡지 못했다. 귀가 이만큼 빨개져서는, 채신없이 후다닥 뛰어가는 등을 멍하게 쳐다볼 수만 있었다. 급하게 몸을 돌려 도망가느라 백진은 자신의 소매에서 무언가가 떨어져나갔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명서령은 얼떨떨한 낯을 갈무리하고 바닥에 형편없이 떨어진 화선지를 주웠다. 태자의 글씨체로 ‘집’(글씨 위에 덧칠이 되어 있다.), ‘패물’, ‘비단’, ‘공예품’, ‘꽃’, ‘시’가 차례대로 적혀있었다. 싱글벙글하거나 고심하던 낯으로 적던 게 고작 이것이었나? 다시금 바람이 훅 불었다. 겨울의 싸늘한 바람이 어쩐지 따갑지만은 않았다.

 

 


 

다음 날, 벽령의 차기 후계로 인정받아 황태자에 오른 백진의 탄일이 되어 계천절啓天節의 행사의례가 거행됐다. 아니, 거행되어야 했다. 조하를 올리러 올 만무백관 대신 내로라하는 재상들이 편전에 모여 입씨름에 열을 올렸다. 축출된 전 황태자 백공천을 따르던 왕당파가 그의 의문스러운 요절에 의문을 제기하던 와중, 지중추원사 관류욱을 위시한 병부의 무관 세력이 황자 백염을 앞세워 벌인 짓이 아니냐는 소문이 퍼졌다. 백염은 노하여 이부에 대거 산재한 사씨 일가의 수상함을 고했다. 진상을 캐내보니, 과연 이미 융천강 하류의 제후로 있던 백비후가 태자를 비롯해 황제인 백무천에 대한 암살 모의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바로 오늘 국가 반란죄로 백비후를 비롯한 사씨 일족의 처분에 대해 재상들이 판결을 내리고자 궁으로 모였다. 그러나 의외로 이 일은 쉽게 종결되었다. 정오가 되기 전 태경제 백무천이 더 들어볼 것도 없이 구족을 멸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인사와 관련된 이부 세력이 대거 축출되어 버리는 일에 사소한 이권을 가지고 각개의 가문들이 골머리를 안고 있던 중, 새로운 황태자 백진천의 생모가 사씨라는 사실이 조명되었다. 여인은 첩의 자식으로 일찍이 내쳐져 황궁의 가장 낮은 여관으로 일했기 때문에 사실상 사씨 일가와 관련이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나, 단순히 사씨의 여식이라는 이유로 공탁했을 일말의 가능성을 의심받아 봉변을 당하게 됐다.

 

그렇게 사미인은 한 마디 반항도 못한 채 죽었다.

 

뒤늦게 명서령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절일의 주인공 백진은 사라지고 없었다. 황궁 어디를 둘러봐도 그 작은 소년을 찾을 수 없었다. 때는 태경제 17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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