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같은 세상!
마녀는 때때로 술을 요구했다.
다행히, 오를레앙 성의 지하에는 마실 만한 포도주가 여러 병 있었다. 먹거나 마실 필요가 없는 영령의 몸으로 현계한 질 드 레가 어째서 음식과 주류 같은 사소한 요소에까지 신경 쓰는지는 모를 일이다. 이것이 그가 모시는 성녀의 요구를 위해서건, 성채라면 훌륭한 포도주 보관소가 있어야 마땅하다는 해묵은 귀족적 성향이 반영되어서건, 남자는 마녀가 바란 전부가 준비되어 있음에 만족할 뿐이었다.
마술사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벽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촛불 하나로 물리치지 못할 존재들이 어둠 속에 도사리고 있었으며, 질은 그것들이 주인의 행차에 무기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짙은 악의가 도사리는 공간은 성배의 소유자에게 길을 비켜 주는 듯했다. 비룡을 가두어 둔 우리와 사특한 우상이 즐비한 복도를 지나, 지하 저장고에 도착한 질 드 레는 그곳에 즐비한 어두운 빛깔의 병 중 하나를 손에 쥐었다.
지하실에서 올라온 질이 가장 먼저 눈에 담은 것은 가로로 넓은 탁상 한가운데에 앉은 잔이었다. 이는 먼 과거, 주의 대리자가 앉았을 마지막 만찬을 연상시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배반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테지! 발걸음을 멈춘 질 드 레는 제 구주를 바라보았다. 왜소한 어깨, 한 손안에 전부 들어갈 것 같은 머리, 그러나 두 번은 꺾이지 않을 자. 남자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그의 곁에 다가왔다. 속으로 몇 번이고 감탄을 흘렸지만, 지금의 주인은 제가 흘리는 탄성을 즐기지 않을 터였다.
질이 촛불 아래서 포도주를 검품하는 동안, 잔은 그가 들고 온 식기의 겉면을 잠시 만지작댔다. 은빛 표면에 한가득 새겨진 부조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지가 기이하게 비틀린 사람, 뱀이 휘감은 제단, 인간인지 물고기인지 모를 괴물들의 행진……. 적나라한 형상에서 어떤 이야기조차 찾을 수 없었고, 금속에서 오는 것이라기에는 과할 정도의 한기와 물비린내만이 은잔의 굴곡마다 서려 있었다.
내용물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질이 코르크 마개를 비틀어 열었다. 좁은 병목 위로 진한 포도 향이 풍겼다. 가벼이 병을 기울이자 붉은빛 액체가 흘러나왔다. 두어 모금 분량을 따른 질은 술병을 제자리에 내려놓았고, 은빛 표면에 어떤 변화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마녀는 남자가 내민 잔을 낚아채듯 받았고, 더 볼 것도 없다는 양 내용물을 입에 머금었다.
떫다. 갑자기 입안을 채운 홧홧한 기운에, 되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덤덤하게 유지하려 했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텁텁한 입을 씻어내려는 듯, 가시 돋친 말이 튀어나왔다.
“질, 당신의 안목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남자가 즉각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그렇다면 그나마 달콤한 술로……”
“됐어요. 어차피 거기서 거기니까, 남은 걸 따라 줘요.”
이거밖에 안 돼? 병에 더 들어 있잖아. 잔이 재촉하는 시선을 보냈다. 술 한 병을 통으로 가져와 놓고 고작 몇 모금의 분량을 채우는 종복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옆의 남자가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오로지 향만을 즐길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리가. 그가 질을 부른 이유는 오로지 취하기 위함이었고, 지금의 양으로써는 역부족이었다.
“자, 이 정도면 마음에 드시겠습니까?”
종은 주인 되는 자의 뜻대로 행한다. 평소라면 전혀 하지 않았을 행위였다. 입이 닿는 곳,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공백 위에 붉은빛이 어른거렸다. 마녀는 여전히 부족하다는 시선으로 술잔을 쳐다보았지만, 불만보다는 갈증이 먼저였다. 과량의 액체가 목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전신이 천천히 달아오른다. 뼛속까지 스미는 냉기를 몰아내기에는 이만한 게 없었다.
질은 자신의 성녀가 술에 다른 것이 있을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껏 분노할 수 있는 세상 이상으로, 그가 타인의 악의에 의한 죽음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가 있기를 바랐다. 고로, 용의 마녀는 포도주의 빛깔을 살피지도, 냄새를 맡아 보지도 않는다. 잔이 채워지면 곧바로 들이키고, 떫거나 신맛이 난다고 툴툴대고, 갈증이 다시 치미는 대로 술을 더 요구하는 것이다.
그 뒤로도 몇 잔을 더 마셨다. 한 병을 다 비운 마녀는 아직 부족하다는 눈치였고, 질은 최소한의 확인만 마친 새 포도주를 가져와 다시 잔을 채워 주었다. 사내에게는 나름의 확신이 있었다. 그를 위해 만든 성에 감히 그를 해할 것을 들여놓았을 리가. 그는 몇 번에 걸쳐 술을 목으로 넘기는 주군을 지켜보았다. 빈 잔을 내려놓고 인상을 쓰는 것을 보아하니, 이번에 가져온 물건은 더욱 독하던 모양이다.
여인의 창백한 피부 위에 부자연스러운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이런 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마녀는 자신이 요구하는 것보다도 더 빠르게 취했고, 빈번히 세상을 저주하다, 마실 게 다 떨어졌다는 사실에 성질을 내었다. 고로, 충실한 종복을 자처하던 질 드 레는 제 주인이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잔을 채워 줄 뿐이었다.
두 번째 병에 남은 술을 모두 따른 뒤 새 병을 위해 물러나려던 찰나, 잔이 돌연히 입을 열었다.
“질, 이쪽으로.”
남자는 지시를 들을 때처럼 몸을 숙였다. 이걸로는 안 돼. 작은 체구의 주인은 짐짓 투정을 부리는 듯한 태도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조금만 더 가까이 오세요.”
질 드 레는 어떤 의문도 표하지 않고 몸을 숙인다. 당장이라도 귀엣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잔이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짧은 호흡이 교차하는 순간, 남자는 정수리에서부터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감각을 느꼈다.
마녀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숙인 고개를 타고 흘러내린 포도주가 남자의 이마 위에 핏줄 같은 흔적을 만들었다. 그는 은잔 속 내용물을 모두 비울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뒤로 넘긴 머리카락 덩어리가 푹 젖어 몇 갈래로 분리되고, 턱과 코, 머리카락 끝에 검붉은 방울이 맺혔다. 석재 바닥 위로 떨어진 술이 진한 얼룩을 만들었다.
질은 아직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한 듯, 멀뚱히 눈을 굴려 잔을 쳐다보았다. 마녀의 잇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깨가 들썩이고 얼굴이 더욱 달아오른다. 마술사는 튀어나온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머리 바로 옆에서 웃음소리가 먹먹하게 울렸다. 질 나쁜 주사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행동이었지만, 그는 어떠한 지적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는 지금 즐거워하고 있지 않나!
한껏 취한 주인은 종복의 침묵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천천히 고개를 치켜든 그는 손을 뻗어 남자의 뒤통수를 한 손으로 틀어쥐더니, 푹 젖은 머리를 제 쪽으로 들이밀었다.
맞닿은 입술의 감각은 상상과 전혀 달랐다.
옳지 않은 것, 적합하지 않은 것을 끼워 맞추는 듯한 기분이었다. 마녀는 어렴풋하게 자신이 그 이물임을 알았다. 그렇기에, 그는 남자의 머리칼을 더욱 거칠게 틀어쥐고야 만다.
숨이 가빠 보이는 피조물을 위해 물리던 고개를 다시 아래로 짓누른다. 흉강에 품은 들숨이 온전한 취기로 변한다. 열이 오르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입맞춤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목을 틀어쥐는 행위에 가까워졌다. 머리가 지끈거려도 안심할 수 있었다. 되려, 어떠한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 순간이 이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이 이 땅에 속해 있지 않음을, 역사에 기록되지 못함을 자각할 새도 없이, 괴로운 무지에 영영 빠져 지낼 수만 있다면.
맞물린 입술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떨어지지 않았다. 날숨에서 선명한 붉은빛이 느껴졌다. 호흡을 교환할 때마다 저 역시 취하기 시작한 것처럼, 허공을 떠돌던 남자의 손은 로브 위에서 방황을 그만두었다. 주군은 때때로 무언가를 조르는 듯 으르렁댔다. 잠시의 틈이 생길세라 저를 거칠게 끌어당겼지만, 입술을 맞붙이는 일 외에는 무엇도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가슴도 목덜미도 아닌 눈꺼풀 아래가 불타는 것만 같았다. 질끈 감은 눈꼬리 아래로 눈물이 흘렀다. 줄곧 빠듯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던지라, 귀 뒤로 싸늘한 것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감각이 선연했다. 뒷덜미를 지난 눈물이 짧은 머리카락 틈으로 스미고 나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작은 손에 힘이 풀리고, 마술사는 가까스로 주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충혈된 눈, 몇 줄기의 눈물이 흐른 흔적, 진정되지 않은 호흡. 방금까지 억척같은 입맞춤을 나누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오로지 분에 겨운 사람의 얼굴. 가쁘게 들이마신 숨이 다 꺼져가던 불씨를 재차 피워 올렸다. 그가 원했던 모습. 그가 따르기로 마음먹던 모습. 한순간의 질식에도 개의치 않고, 역겨운 조국의 공기에 다시 타오르는 분노. 질 드 레는 종복 된 자의 마음가짐으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를 내칠 힘조차 없던 용의 마녀는 그로부터 등을 돌려 식탁 위에 올라간 은잔을 노려볼 뿐이었다.
다시 심기가 뒤틀리기 시작한다. 꼭 처음부터 그랬어야 한다는 듯, 잠시 잊었던 불쾌감이 척수를 타고 오른다. 이 세상은 다시 나를 밀어내려고 한다. 흐릿한 자각을 지워야 한다는 충동, 술에 대한 갈망이 전신을 휘어잡았다. 그는 바닥에 남은 두어 방울의 포도주로 혀를 적신다.
“질, 역시 이게 없으면 안 되겠어. 개 같은 세상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한 병 더 가져와. 마녀는 흐릿한 시야 너머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남자를 보았다. 편리한 사람. 내일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겠지. 어서 가지 않고 뭘 하는 거야? 잔은 질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으나, 껑충한 키의 마법사는 바보같이 허공에 두 손을 올린 채 안절부절못할 뿐이었다.
한 병 더 가져오라는 말이 제 머릿속에서 맴돌던 것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작은 주인은 몰려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옆으로 기운 마녀의 몸이 누군가의 품에 떨어졌다.
해가 뜨면 그는 다시 저주스러운 세상 속에 놓인다. 질 드 레의 최선은 잠든 마녀를 불편한 침소에 데려다 눕히는 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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