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그림자의 시간

“이름 모를 기사님, 혹시 동레미로 가는 길을 알고 계시나요?”

아침 일과를 마치고 방에 들어온 세이버 질 드 레는 이것이 아주 질 나쁜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아, 혹시 뫼즈 강을 알고 있으신지요? 동레미는 그 강을 따라 남쪽으로 가는 도중 나오는 작은 마을이에요.”

열 살 전후로 보이는 앳된 얼굴. 더벅머리에 가까운 금빛 단발. 차가운 바닥을 디디는 맨발, 농사일을 거드느라 거칠어진 작은 손, 낡은 천 옷 - 그가 익히 보아온 고국의 어린아이 같은 차림새. 처음 보는 풍경에 놀란 듯 보이지만, 침착하게, 그리고 정중하게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남자에게 말을 붙이는 당돌함.

질 드 레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잔느가 돌연 아이가 되었다든지 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령, 잔 다르크는 마스터의 원정에 힘을 빌려주고 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잔 다르크? 이것 역시 고려할 만한 추측이었지만, 눈앞의 소년은 서번트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소년은 대답을 요구하는 시선으로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포로로 잡혔다고 생각하고 있나? 최대한 호의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 질은 마스터가 한때 말해 준 칼데아 밖의 풍경을 둘러대듯 입에 올렸다.

“죄송하지만, 지금 바래다 드리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바깥에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네? 말도 안 돼요. 어제는 눈구름 하나 없이 맑았는걸요.”

들어 본 적 있다. 때때로 추수를 마친 땅 위에 눈이 소복이 쌓이지만, 매서운 겨울은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었다던 그의 고향. 성녀는 눈 녹은 물이 시내처럼 흐르는 봄의 풍경을 이야기했다. 질은 자신이 봄과는 거리가 먼 바깥의 풍경을 보여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자신이 기거하는 진지를 둘러싼 강철 벽에 창문 한 장 없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하고 말았다.

“글쎄…… 어떤 요술쟁이가 간밤에 장난이라도 쳤나 보지요.”

농담은 먹히지 않았다. 되려, 예의 비릿한 미소 -잔은 그것 역시 웃음이라 해 주었기에, 질은 지금까지도 교정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가 소년을 놀라게 했을 수도 있겠다.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말을 넌지시 던진 기사가 더는 입을 열지 않자, 자크 다르크의 어린 딸, 잔은 눈을 꾹 감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열셋의 나이었음에도 그는 자신 안의 두려움을 몰아내는 법을 알았다. 돌연 밀려드는 창병기 두드리는 소리에도, 마을 어귀에서 검게 피어오르는 연기에도, 눈을 뜨니 북쪽을 향해 달리는 마차 안이었을 때에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질은 두 손을 맞잡고 기도문을 외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질이 처음 그를 보았을 때부터 직감한 사실 - 그는 아직 주의 부름을 받지 않았다. 저이는 영령이 아니다. 칼데아에서 웃고 떠들고 때로는 못다 한 업에 열중하는 이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대신, 낯선 곳에 떨어져 난처해하는 한 소년의 표정만이 보일 뿐이다.

생전의 잔 다르크가 이곳에 나타났다. 주의 부름도, 지고한 사명도 짊어지지 않은 평범한 시골 처녀이던 시절의 모습으로. 질은 이에 대해 수많은 의문을 품었으나, 주의 이름을 부르며 불안을 달래는 이에게 어떤 말을 할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묵고 가시겠습니까? 날이 개면 바로 댁까지 모셔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정말요? 고맙습니다, 기사님. 혹시 성함을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질 드 레 라고 합니다. 부디 아가씨께서 부르기 편한 쪽으로 불러 주시길 바랍니다.”

“기사님께서 개의치 않으신다면 질이라 부를게요. 저는 잔 다르크. 기사님도 나를 잔이라 불러도 돼요.”

마을 어른들도 다 그렇게 부르시거든요. 눈앞의 잔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를 둘러싼 전혀 다른 생활 양식의 공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롯한 인간의 웃음이었다. 질은 잔이 자신을 더 의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그래요, 누군가가 저를 이름으로 부른다니. 조금은 그리운 감각이군요. 그러면, 잔……”

얼마 동안 이곳에 혼자 있었을까. 조금은 답답한 듯 뒷짐을 지고 방 안을 좌우로 돌아다니는 잔의 모습에, 질은 예정에 없던 말을 꺼내버리고 말았다.

“성안을 구경해 보시겠습니까? 무료함을 어느 정도 달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이른 시간부터 몇몇 서번트들이 복도를 어슬렁대고 있었다. 질은 잔을 데리고 방을 나왔을 때부터 든 걱정 중 하나가 현실이 되지 않아 안심했다. 서로의 정체를 간파하는 데에 죽고 사는 존재들이건만, 껑충하게 큰 기사의 옆에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가 한 명 더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몇몇 서번트나 칼데아의 스태프만이 유독 주변을 신경 쓰며 걷는 세이버 질 드 레의 모습에 의문 또는 걱정을 표할 뿐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레 경. 혹시 몸이 불편하신지?”

날카로운 눈을 한 신대륙의 영령이 인사와 짧은 물음을 건넸다. 긍정했다가는 당장이라도 치료를 시작할 것 같은 기백에, 질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미심쩍다는 듯한 간호사의 시선이 정확히 잔이 서 있는 곳에 머물다 떨어졌다. 그의 눈은 낯익은 얼굴과 그러지 않은 복장의 아이 대신 썩 멀쩡해 보이는 오른쪽 다리를 담았고, 이내 실례했다는 말과 함께 등을 돌려 사라졌다.

잔은 여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가 두른 붉은 제복은 마을 포목점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종류의 의복이었던지라, 그가 자신과 눈을 마주쳤음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이음매 하나 없는 강철 벽, 기이한 옷차림의 사람들. 이방인의 얼굴을 한 자들이 이국의 언어로 유창하게 대화를 나눈다. 동레미에서는 전혀 만날 수 없는 풍경에 감탄하고, 자신이 대단한 요새에서 눈을 떴다는 생각에 푹 빠져든다.

“질, 여기 계시는 분들은 모두 귀족 같습니다! 다들 이곳에서 묵고 계시는 걸까요?”

잔의 물음에, 질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이번에는 기사왕이 잠시 멈춰 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질은 그 시선에서 어떠한 익숙함을 느꼈다. 영혼의 형태가 닮은 존재를 처음 느꼈을 때 내비치게 되는 의문 섞인 눈빛. 잔 역시 푸른 예복을 입은 왕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제 쪽을 응시하는 여인을 향해 작은 손을 흔들었지만, 닿지 않던 모양이다. 성검의 소유자가 조용히 건네는 인사는 차분한 인상의 기사에게만 돌아왔다. 대답이라도 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질이 잔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이전의 흐릿한 미소뿐이었다.

그 뒤로도, 잔은 저를 스쳐 지나가는 이들의 차림새에 감탄하거나, 질에게 인사를 걸어오는 영령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짧은 순회 동안, 질은 제 곁의 소년이 반복되는 외면에 속상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가던 그는 지금이라도 잔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갈까 고민했다.

기사의 상념은 익히 들어 본 목소리에 의해 끊어지고 말았다.

“이봐, 옆에 달고 다니는 저건 뭡니까?”

기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용의 마녀가 복도 언저리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록색 눈에서 기분 나쁘다는 감정이 선명히 배어 나왔기에, 질은 최대한 담담한 말투로 되물었다.

“보이시는 겁니까?”

“보이고말고요. 그쪽의 나를 지독하게 닮은 시골 꼬마 아닙니까?”

그의 말에, 줄곧 바닥을 보고 있던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시무룩한 표정은 채 지울 수 없었지만, 누군가의 반응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기뻐하는 시선. 같은 사람인데도, 심지어 아주 어린 시절의 모습인데도, 저 푸른 눈에서는 선명한 현실감이 느껴졌다. 잔느 얼터는 그것에 제게 결코 깃들지 못할 빛임을 안다. 열 살 언저리의 어린애 모습이라도, 저것은 실존했던 제 모습이다. 이유 모를 짜증이 치밀어, 잔느 얼터는 세이버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지요. 사람이 모여 있으면 필시 소란이 일어날 테니.”

마녀는 두 사람을 누군가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원래 이쪽이던가? 질은 동행인을 데리고 걷는 잔느 얼터를 쳐다보는, 익히 본 적 없는 낯의 서번트들에 의문을 품었다. 문 앞에 도달한 마녀의 얼굴에 아뿔싸, 하는 표정이 스쳤고, 기사는 얼마 있지 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알게 모르게 나온 버릇에 짧게 후회한 잔느 얼터가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어두침침한 방 안에 인상적인 낯의 캐스터가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마스터가 마련한 각방이 유명무실해졌다는데, 정말이었나. 멀뚱히 허공을 쳐다보던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고, 기사는 썩 충직한 호위처럼 소년의 앞을 막아섰다.

캐스터 질 드 레는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왔다. 제 위로 드리우는 긴 그림자에, 기사의 뒤에 숨은 잔이 고개를 내밀었다. 남자는 튀어나온 눈을 굴리며 이 상황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시도하려다, 제가 만들어낸 성녀에게 보였던 것과 같은 인자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또 하나의 잔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그저 기쁜 모양이었다.

그를 올려다보던 잔의 앳된 얼굴에 어색한 웃음이 퍼졌다. 마귀라 부르며 두려워할 만한 얼굴보다도, 제 인사를 받아 주었다는 사실에 다소 안도한 듯싶었다. 로브 차림의 남자는 무릎까지 수그려 가며 소년과 눈높이를 마주하려 했다. 자기소개와 감탄으로 구성된 대화가 이어지는 듯,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문 옆의 벽에 기대선 세이버는 검 자루에 올린 손을 떼지 못했다. 침대에 앉아 대놓고 심기가 불편하다는 시선을 보내는 마녀는 그러려니 해도, 황송함에 몸을 떨며 멍청한 감탄사나 흘려대고 있는 캐스터 쪽의 자신이 언제 그 흉물스러운 인피 마도서를 꺼낼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눈치였다.

한참 동안 캐스터와 잔을 노려보던 잔느 얼터는, 여전히 신경질을 내는 표정으로 세이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 빈치라고 했던가. 그 여자를 찾아가 보는 건 어떤지요? 자칭 이곳 제일의 천재라던데, 이 사건에 대한 해결책을 줄 수 있을지도요. 그게 아니더라도, 어린애 장난감 정도는 만들어줄 테고.”

그는 짤막한 은빛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매만지며 빈정댔다.

“그쪽의 꼬맹이는 제아무리 조잡한 놀잇감이라도 좋아하겠지요. 저 바보 같은 얼굴을 하고 웃는 걸 생각해 봐.”

“다 빈치 공은 마스터의 레이시프트 조정 건으로 바쁘십니다. 기왕이면 이 사람들 선에서 해결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만.”

“뭐? 아무도 눈치 못 채게 없애 달라고? 웃겨, 당신이 멀쩡한 선택을 할 때도 다 있네.”

마녀가 보란 듯이 소리 내 웃었다. 기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잔느 얼터는 어디 한번 검을 뽑아 보라는 낯으로 소년과 기사를 번갈아 쳐다보았고, 세이버 질 드 레는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 그녀가 다시 여기로 돌아오기까지 기다리는 게 낫겠군요.”

“그 여자? 절대로, 절대로 싫어. 저걸 만난다면 분명 동생이 하나 더 생긴 것 같다며 난리겠지요. 게다가 난 기다리는 것 따위 질색이야.”

세 사람, 굳이 말하자면 두 사람이 아이의 처우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잔은 또래보다 넓은 보폭으로 방 안을 돌아다녔다.

소년은 고민에 빠진 나머지 자신이 곁에 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기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마녀가 걸터앉은 침대 위에 늘어진 망토에 관심을 보였다가, 싸늘한 시선과 묵직한 망토 모두를 받았다.

마지막으로, 잔은 여전히 말을 잇지 못하고 양손의 기다란 손가락만을 맞댄 마술사의 옆으로 다가갔다. 검은 망토를 어색하게 두른 금발의 소년. 남자는 검은 옷자락을 길게 늘어트린 그 모습에 감탄했다. 어린 잔으로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일종의 환희마저 섞인 시선. 불경을 범하고 싶지 않았는지, 캐스터는 기쁨을 여실히 내비치면서도 감히 팔을 뻗지 않았다.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으나, 영양가 없는 대화에서는 어떤 답도 도출할 수 없다. 잔느 얼터는 난데없이 나타난 소년보다도 방 안에 두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는 당신이 알아서 해.”

배웅보다는 쫓아내는 듯한 태도로 두 사람을 밖으로 몰아낸 마녀는 매정한 눈으로 기사를 돌아보더니, 술사가 기거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당황할 새도 없이 방 밖으로 떠밀린 질은 헛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반론하던 것도 잠시, 자신은 줄곧 마녀의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성정도 생긴 것도 변했다지만 결국은 같은 사람. 제가 그의 말에 감히 반기를 들 수가 없잖은가. 마녀는 제게 커다란 난제를 하나 던져 주고 모습을 감췄고, 질은 곁에 남은 이에게 들키지 않게끔 그것을 풀어야만 했다.

“갈까요. 곧 복도가 어두워질 겁니다.”

질은 가만히 시선을 낮추었고, 작게 하품을 하는 잔과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두 사람과 더 있고 싶다는 눈치였지만, 졸음이 끈덕지게 따라붙는 모양이었다. 기사는 그가 출발하기 전까지는 한 발자국도 내딛지 않겠다는 양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를 올려다보며 작게 미소지은 잔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모든 것을 아는 것만 같았다. 잔은 앞장서 걸었고, 질은 이번에도 자신의 모든 지휘권을 어린 소년에게 내주었다. 그가 어디로 가건, 종착점이 곧 제가 있을 장소가 될 터였다.

 

-

캐스터의 방을 떠나 큰 보폭으로 앞서나가던 잔이 다다른 곳은 다름 아닌 식당이었다.

저녁 식사는 이미 끝났는지, 뒷정리를 하는 몇 사람과 함께 진한 스튜 냄새만이 널따란 공간을 맴돌고 있었다. 질은 아주 뒤늦게 소년이 지금껏 아무것도 먹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늦은 간식을 즐기던 서번트 몇몇이 예상 밖의 손님에 의문 섞인 표정을 지었다. 질은 때아닌 야참이라고 둘러대며 데운 우유와 곡물 과자 몇 개를 가져왔다. 마음 같아서는 현대의 음식 중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이 있나 묻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많아 지레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방의 전등이 꺼지기 전에 방에 도착했다. 우유와 과자는 다행히 입에 맞는 듯했다. 배를 채운 잔은 이내 기지개를 쭉 켰고, 침대에 걸터앉은 채 졸기 시작했다. 진귀한 구경을 시켜 준 기사에게 밤 인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질이 앉은 탁상 쪽을 한 번 쳐다보았지만, 작은 고개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꾸벅, 아래로 떨어졌다.

영령은 잠들지 않아도 된다. 질 드 레 역시 하루의 끝 -복도와 방의 불이 꺼질 무렵- 에 침대에 눕곤 했으나 그 이유가 피로 때문인 적은 거의 없었다. 전력을 아끼기 위한 인위적인 소등 시간이 있었고, 어둠 속에서 눈을 감고 마력을 회복하는 행위를 적당히 잠이라 이름 붙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세계로 넘어온 잔은 평범한 사람이다. 목이 타고, 배가 고프며, 새로운 곳에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칠 수 있겠지.

질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소년을 눕혔다. 제가 누웠을 때는 다소 좁은 공간이었기에, 이불 안으로 파고든 잔의 모습이 더더욱 작게 느껴졌다. 소년은 처음 느끼는 감촉의 이불이 신기한 듯 몇 번 사부작대더니, 이내 움직이지 않았다. 얕은 숨과 함께 오르내리는 헝겊의 그림자만이 소년의 존재를 드러낼 뿐이었다.

질은 탁상 앞의 의자에 앉아 가만히 침대 쪽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줄인 발걸음마저 멈추자, 방 안에는 침묵만이 남았다.

탁상 위에 올라간 빈 접시와 유리잔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 가져온 것들은 입에 맞는 듯했고, 오늘처럼 종일 굶기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나. 식당에 상주하는 서번트들에게 부탁해 고향의 요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할까? 생전의 그가 해 준 고향 이야기 중에는, 살구를 넣은 키슈가 포함되어 있었다. 동향의 음악가 영령이 썩 훌륭한 요리 솜씨를 가졌다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가 부끄럼 없이 내뱉을 외설적인 이야기들을 생각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친교를 쌓아 둔 다른 영령들을 통해 이국의 이야기를 전해 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떠오르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기사의 동선은 단순했고, 그나마 친하다 할 수 있는 이들은 검술 수련장에서 마주한 몇몇 검사들뿐이었다. 이야기꾼들은 죄다 캐스터 쪽의 자신과 비슷한 파동을 가지고 있어 믿을 수 없다. 그리 생각하던 과거가 다소 후회스럽게 다가오기도 했다.

마녀가 말한 공방의 다 빈치라는 인물도 잠시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 여자는 마스터의 보조로 한창 바쁘다. 게다가, 영령이 아닌 자가 이 진지에 소환되었다는 사실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일을 크게 만드는 것은 질색이다. 잔을 볼 수 있는 인원들이 모여 오늘과 같은 사자대면이 벌어진다면 더더욱.

그럼, 내일은 무엇을 할까. 천천히 턱 주변을 매만지던 질 드 레는 제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 있음을 자각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하는 무료한 고민이 즐거웠다. 한때 프랑스군의 원수 작위까지 받았던 기사, 질 드 레는 작게 오르내리는 이불 뭉치를 눈에 담았다. 전란 없는 땅에서 만났다면 이런 식의 벗이 될 수도 있었을지.

이름 모를 기사와 시골 마을의 소년. 일국의 원수도 성자도 아닌 그저 널리고 널린 필부로 살다 숨을 거두는 자신의 모습. 질은 시뇽 성에서의 영광마저 포기할 수 있었다. 잔과 함께 떠날 수 있다면 자신 역시 국가로부터 등을 돌릴 것이다 - 1431년 루앙, 모두가 나라의 영광 따위에 등을 돌린 것처럼 보이던 그때처럼.

그러나, 영령의 길에 만약은 없다. 그곳에서 만났기에 인생에 빛을 받을 수 있었고, 그곳에서 이겼기에, 난전을 겪었기에, 불타고 분노했기에 영령의 좌에 이름을 올렸다. 자신은, 그리고 성녀는 지난 역사를 되짚어가는 흔적 중 하나. 한 사람은 억울한 죽음을 앞두고도 신앙심을 품은 성녀로, 또 한 사람은 전쟁 영웅이자 살인마로 기록되었다. 두 사람은 돈독한 전우였고, 성녀의 죽음 이후 영영 헤어지게 되었다.

때로는 하룻밤 꿈 같은 마법이 믿고 싶어지는 법이다.

바꿀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질은 이름 없는 만약을 상정했다. 그것이 한 영령의 최선이었다.

 

잠에서 깬 소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질은 그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불이 미끄러지는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방은 아직도 어두웠지만, 한 줄기 빛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광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기사는 의자에 앉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잔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질은 어둠 속에서도 그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거듭 신을 모독한 배교자마저도 충분히 알 수 있는, 신성의 현현. 남자는 허공을 올려다보는 성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천상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는 순간 뭇사람들은 울게 되리라. 잔의 모습은 그 명제를 성립하게끔 했고, 질은 문득 루앙에서의 소식을 들은 자신을 떠올렸다. 지금 잔의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에 비하면, 그때 제가 흘린 눈물은 한없이 같잖게 느껴졌다.

잔은 긴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가를 비볐다. 그는 어둠 속에서도 길을 찾았다. 맨발이 싸늘한 바닥에 닿을 때마다, 질의 심장 역시 거세게 뛰었다. 줄곧 탁상 앞에 앉아 있던 기사가 얼빠진 얼굴을 수습할 새도 없이, 성녀는 결연한 걸음으로 그 앞에 다가가 섰다.

“질, 나를 시뇽 성으로 데려가 주세요.”

흐릿해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질은 이 이상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게 이를 악물어야만 했다.

가장 듣고 싶지 않던 말. 처음 만난 날의 모습으로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언제 주의 부름을 받을지 모른다는 뜻이다. 동레미의 잔 다르크가 시뇽 성에 오지 않았더라면 질 드 레에게 내려진 기적은 시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역사가 흔들린다는 이 시기에조차, 성녀는 천사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참으로 잔인한 운명이었다.

“잔, 그것이……”

“성 미카엘과 성녀 카트린께서 주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눈보라가 멈추지 않았다면 그것을 뚫고서라도 가야 합니다. 전란의 불길이 경의 성 앞까지 내려왔다면 이를 각개격파해서라도 갈 것입니다!”

모든 인간성이 사라진 세계에도 신은 존재하는가? 제 뜻을 받들 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세계, 어떤 시간일지라도 그 마수를 뻗칠 것인가? 질 드 레의 말년에 벌어진 독신 행위들은 그가 이러한 의문을 품을 수 있게 만들었지만, 그것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나를 줄곧 막아선다면, 나는 당신이 나를 이 성에 매어 두기 위해 삿된 수를 쓴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질 드 레는 입술을 떼지 못했다. 침묵을 지키는 사내의 턱 밑에선 수십의 애원이 아우성쳤다 - 잔, 가지 말아요. 당신의 길에는 잠시간의 황홀과 끝없는 고통이 이어질 겁니다. 사람들은 당신에게 거짓 죄를 씌우고 능멸하며, 누구도 구해 주지 않는 가운데 불타는 최후만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뿐. 나조차도 당신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할 일은 정해졌다. 질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이 질 드 레, 주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자. 당신을 모셔가기 위한 종자들을 데려오겠습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린 잔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눈에서 반짝이는 완고함. 구국의 성녀가 받아든 운명. 먼 훗날 그의 깃발 아래 걷게 될 기사는 이상적인 종복의 모습으로 그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고, 당당하게 방을 나섰으며, 급히 문을 등지고 섰다.

자신은 방금 성녀에게 거짓을 고했다. 이에 대한 심판이 필연적으로 찾아올 것이다. 시대가 만든 두려움이 질 드 레를 파고들었다. 이유 없이 힘이 들어간 손으로 문고리를 틀어쥐었고, 불안과 죄악감으로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무엇도 스스로 할 수 없는 몸을 원망했다 - 차라리 이대로 천벌을 받아 불타버리면 좋을 텐데.

이번에도,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되돌려놓았다.

“돌아왔어요, 질. 이번 원정의 전투는 조금 길었네요.”

그늘이 드리운 사내의 낯이 돌연 당혹으로 물들었다. 불이야! 라는 외침이라도 들은 듯 이질적인 반응에, 잔느가 걱정스레 물었다.

“질, 설마 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가요?”

“아아, 잔느. 돌아오셨습니까. 그것이 말이지요……”

“오는 길에 또 다른 저를 만났어요. 당신이 재미있을 걸 숨겨두고 있다며, 얼른 가 보라고 하더군요.”

문 뒤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다는 듯, 잔느가 가벼운 미소를 띤 채 기웃거렸다. 두 사람이 만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아무것도 준비해오지 않은 자신을 본 잔은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 그 외의 잡념들에도 불구하고, 질은 천천히 문고리를 돌렸다.

기상 시간이 되었는지, 복도와 방에 불이 들어왔다. 미색 조명이 구석구석 스민 질의 개인실은 잔느가 아는 그대로였다. 탁상 위에는 이름 모를 책 몇 권이 단정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검을 손질하기 위한 도구 몇 가지가 자리했고, 말끔히 정리해 둔 갑옷에서는 희미한 광이 났다.

질 드 레는 아무도 없는 방 안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줄곧 그곳에 있어야 할 것 같던 소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급히 주변을 둘러보는 기사를 곁에 두고, 성녀는 공간 안을 맴도는 희미한 짚단 냄새를 느꼈다. 잊을 수 없는 유년의 흔적. 외로움이 사무칠 때 머릿속에 그렸고, 결국 희미하게 웃을 수 있던 고향의 기억. 재미있는 만남이 있었구나. 체구가 작은 누군가가 있었을 법한 침대로 시선을 돌린 성녀는, 환한 미소를 띤 채 입을 열었다.

“질, 잠이라도 푹 잤나요? 이불이 흐트러져 있어요. 평소에는 침대에 잘 들어가지도 않잖아요.”

“네. 긴 밤이 무료해 잠시 몸을 눕혔고…… 좋은 꿈을 꾸었습니다.”

나의 성녀가 나온 꿈을 어찌 악몽이라 칭하리오. 남자의 입꼬리가 희미한 호선을 그렸다. 서번트는 잘 필요도 없거니와, 만일 자더라도 꿈을 꾸지 않는다. 잔 다르크는 그의 얼굴에 드리운 찰나의 그림자를 묵인하기로 마음먹었다. 이 시간은 지금을 살아가는 영령들의 소유, 제가 아는 질 드 레는 줄곧 과거에 갇혀 살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좋은 아침이에요, 질. 원정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드릴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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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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