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적자

황제로드 연성교환

by 선
28
1
0

*어느정도 날조입니다. 로드의 성별은 우선 상정하지 않았으니 편한대로 보십시오.

그 밤은, 아무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조용하게 찾아왔다.

별일은 아니다. 겉으로 보이는 관계는 죄인과 판결자다. 책임을 져야 할 이와 책임을 얹은 이 이다. 선고의 대상이자 선고의 유예자이다. 생긴 것마저 흑과 백으로 완벽하게 갈라지는 둘은 어둠이 내려앉은 창살 안에서 촛불 하나에 의존하여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본디 죄인이란 철창 안에 갇혀야 하고, 판결자란 철창 밖에서 그를 바라보아야 할진대, 죄인과 판결자가 같은 곳 안에 있다. 이것은 판결자의 성정을 나타내는 것인지 대범함을 나타내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다만 눈, 저 눈, 사람을 믿음으로 보며 이 상황까지 와서도 적대감보다는 공평한 이로 보는 눈으로 그것이 성정임을 일부 짐작할 수 있다.

 

그래, 성정. 성정이지.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해 영원한 추락을 선택하려 했던 이의 영혼을, 연약하게 보이는 가망 없는 희망 하에 그것을 진실로 만들어 견인하지 않을 수 없다. 정작 그가 지금 저 이의 앞에서 은혜도 모른 채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카르티스 클라우디스는 고개를 들어 눈앞에 놓인 이를 바라보았다.

로드라고 불리는 자신의 도전자, 대적자, 구원자 그리고 심판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카르티스를 계속 바라보았다. 압박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는 배려다. 국정이 바쁠 텐데, 그가 벌인 일로 인해 해결해야 할 것이 많을 텐데도. 배려가 오늘따라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쓴맛이 나게 했다. 카르티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고, 자신이 모든 것을 최대한 막아내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한 타인에 의한 기망행위. 자신이 가진 것도, 자신이 아끼는 것도 전부 제 손으로 밑바닥에 처박고서 망가진 채 굴러가는 것을 아무것도 몰랐다. 심지어, 그것을 깨트리고 그 행적의 모든 반대를 가리키는 것이 로드 아니던가.

그러니 카르티스는 생각한 것을 말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정말로 말하지 않고서 버틸 수 없었다.

 

“…. 대적자…. 아니, 지금 이렇게 부를 것도 아니지.”

“호칭은 상관없어, 카르티스. 내가 너의 많은 자유를 제약한 게 아니니까.”

“하하…. 그대는 참 여전하군. 좋다. 그럼 말하지…. 딱히 그대에게 내가 붙일 호칭도 없잖은가.”

 

생략된 말에는 그가 어떤 이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 담고 있다. 이토록 절실하게 패한 후에는. 자비를 베풀어 남은 이후에는. 그에게 맹주라 부를 것은 연합의 일원이 아니니 될 것이 아니고, 주군 혹은 로드라 부를 것은 그는 기사의 신분이 아니니 될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이름을 부를 자격이 주어지지도 않았고, 또…. 깊은 생각은 그만두었다. 이 이상은 자해다. 쓴웃음을 지으며 카르티스는 그가 깊이도 생각하여 꺼낸 것을 올려놓았다.

 

“그대, 나를 죽여. 그리고 목을 잘라서 내걸어라. 그럼, 지금 많은 혼란도, 물 밑의 불안도, 혼돈의 정세도, 전부 해결되겠지. 그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 그 말은 옛적에 했을 텐데. 카르티스 클라우디스. 이미 당신의 신분과 처벌은 정해졌어. 내가 아주 많은 것을 내려놓고 결정한 일이다.”

 

로드의 음성에 노기가 담긴다. 말투도 배려가 아닌 견고함으로 변한다. 꿰뚫어 보는 시선은 그의 의사를 파악하기 위해 애쓴다. 그래, 이것을 참 좋아하지. 언제나 로드와 마주했을 때. 그가 기억하는 로드의 시선 중 이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은 오직 로드뿐이라 카르티스 클라우디스는 만약 이대로 죽어도 영영 영혼에 각인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니, 저번에도 완전히 잊지 못하였을까.

 

“알아, 하지만 돌려받을 수도 있겠지. 그대는 정당한 것을, 분노한 이들에게는 합당한 분노를, 그리고 나 또한…. 편하게 갈 수 있겠지.”

“카르티스 클라우디스, 내가 몇 번이나 당신한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편한 걸 고르자고 이곳까지 온 게 아니야. 편한 끝을 보겠다고, 속 편한 승리자의 위치에 서 있겠다고 여기까지 다다른게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미래다, 그 안에 너만 빠지겠다는 헛소리는 하지 마.”

“헛소리, 헛소리라…. 글쎄. 좀 더 규정하자면 내가 지금 살아있는 게 헛소리지.”

 

로드가 몸을 일으켜 카르티스의 앞에 다가온다. 불꽃이 일렁이는 잔상이 벽에 비친다. 기어코 격분을 참지 못한 로드가, 그럼에도 귀히 여길 줄 아는 이가 카르티스의 멱살을 잡으며 꾹꾹 누른 목소리로 말을 뱉는다.

 

“나는 누구의 삶도 헛소리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대?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살아야지! 앞으로 살아서 속죄든 뭐든 해야지! 네가 정말 생각을 한다면!”

“…. 지금 말하는 것은 그 반대일세, 그래. 내가 생각하고 인간의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정녕 지금 이래서는 안 되겠지. 살아서, 명줄을 독하게 부여잡고 속죄해야겠지. 그런데…. 죽고 싶으면 어떻게 하나.”

 

카르티스가 흘린 내밀한 속내에 로드의 손이 떨리며 힘이 풀린다. 다시 잡아보아도 전보다는 약하다. 카르티스는 이제 빛이 비치지 않는 검은 눈으로 로드를 보며 낮게 속삭인다.

 

“내가 이렇다는 걸, 그대가 모를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

“알지 않나, 내가 그대들의 처벌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대가 가장 먼저 달려온 것도, 알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나는….”

“…. 나는 지금 너무 많이 지쳤어…. 이딴 선택을 할 정도로. 그러니 부탁하지. 그대의 손으로 부탁해도 되겠나.”

 

자조 섞인 목소리가 감옥 안에 울린다. 카르티스 클라우디스의 자살 충동이 고해진다. 그는 정말로, 언제든, 한순간도…. 일정 회차를 넘어 모두를 도구로 삼게 된 순간 자신의 이유는 멸망의 연기임을, 그것뿐임을 잊지 않았다. 그는 살아갈 이유에 대해 미지하다. 앞에서 삶을 열렬하게 주장하는 이의 독려가 있어도, 그는 늘 죽고 싶어 했다.

인간이 가질 것을 가지지 않아 그렇다고 말하고 있지만, 모두가 안다. 지금 이러는 것은 카르티스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아직 인간이라서, 도구로 쓰이고 장난감으로 놀려지고 제위의 개념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인간이라서. 아직 잊지 않은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 죽음을 갈망한다. 아이러니하다. 무릇 인간이란 살아 숨 쉬는 생명체의 특성을 가져 삶을 본능적으로 갈만할 텐데, 그 갈망마저 누르는 충동이란 그가 겪은 수많은 마모의 충격과 고통과 PTSD의 총합이다.

숨소리만이 오간다. 여기서도 더 연약한 것은 카르티스의 것이다. 전반적으로 따져보면 가장 연약할 것이 로드임에도 불구하고. 대치 상태에 길게 놓인다. 카르티스는 아예 눈을 감아 그가 바라보아 주저하지 않도록, 부디 현명해 보이는 자살 동조를 이뤄주도록 자세를 취했다. 이것을 로드에게만 말하는 것도 이유가 있음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서.

카르티스는 기다렸다. 기다림은 어차피 그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며, 그가 겪은 가장 많은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어서 저 이가, 공정하고 완벽한 심판자가 자신의 목 졸라주기를. 혹은 베어주기를 기다렸다.

“….”

그러나 그의 뜻대로 일어나는 것은 없다. 로드는 심호흡하며 카르티스를 바라보더니 멱살을 풀고, 양손을 펴 그의 뺨을 소리가 나게 때려주었다.

“…?”

당연히 피부와 피부의 접촉이 이뤄지니 예상치 못하여 눈이 떠질 수밖에 없다. 아프진 않다. 오히려 아파하는 것은 그를 친 로드의 모습이다. 고개를 숙이며 고통의 경감을 시도하던 로드는 빠르게 고개를 들어 화가 잔뜩 난 눈으로 카르티스를 바라보았다.

 

“카르티스 클라우디스! 너를 배려한다는 식으로 죽음을 종용하게 하지 마! 그딴 건 딱 질색이니까!”

“…. 그대.”

“말하지 말고 들어! 너만 지금 죽음을 겪고 돌아온 줄 알아? 나도 겪었어! 이 미친 자식아! 나는 그러면 여기까지 오는 게 쉬운 줄 알았어? 더럽게 힘들었어! 나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내가 겪은 고통을 참고, 내가 가장 완벽하다고 보일 수 있을 때 끝낼 수 있었어! 근데 내가 왜 구질구질하고 힘든 일을 선택했는데? 너 때문이잖아!”

“...”

“욕심이느니 알량하다느니 멍청하다느니, 뭐 그딴 ‘현실적’인 거 다 집어치우라고. 나는 그놈의 현실을 바꾸고 싶어서 모든 걸 했으니까. 네가 지쳤단 걸 알아. 그래서 아직 아무것도 시키지 않은 거야. 네가 미안해하는 걸 알아. 그래서 아무한테도 아직 보이지 않는 거야!”

“….”

“이런 번거로운 절차도, 지금의 시간도, 너의 말을 들을 기회도 전부 네가 사람으로 살아갈 기회를 주기 위해서야. 네가 잃어버린, 네가 상실한 시간을 채울 기회를 주기 위해서야. 네가 사람이 되어야 너를 심판대에 올릴 수 있으니까 이러는 거라고. 지금 주는 건 너에 대한 유예가 아니야. 정당한 법의 절차지.”

“…. 하….”

“나한테 모두 맡긴다고 했나? 나한테 부탁한다고? 하, 마침 잘하는 소리네...카르티스 클라우디스, 잘 들어. 너의 모든 것을 전달받은 너의 대적자로서 명한다.”

 

뺨에서 손을 떼어내고 자세를 잡는다. 앉아 있는 그의 심장에, 늘 차고 다니는 검을 찔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에서 겨누고, 그가 자신의 기사들에게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견고한 낯으로 선언한다.

 

“절대 죽지 마. 어떤 일이 있어도 죽지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 네가 마침내 어엿한 사람이 될 수 있을 때까지. 네가 사람들에게 동등한 죄인으로 있을 수 있을 때까지. 네가 속죄의 값을 전부 치를 수 있을 때까지 살아. 알겠어? 다시는 그 딴 소리 꺼내지 말고 내가 처음 너를 이 신분으로 만들 때를 기억해.”

 

처음, 카르티스가 주저한 호칭마저 주워 삼키고 그를 종속시킨다. 이것이 어떤 관계의 상징임을 증명하듯이 예식의 자세를 취한다. 명령하는 어조에 강압적인 말투지만 그것은 전부, 카르티스의 미래를 상정한 말이다.

아, 카르티스 클라우디스는 이제 단단히 걸려버린 자신의 명제를 떠올린다.

 

“…. 나의 대적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고개를 숙인다. 칼날에 입을 맞출 정도로.

 

“기꺼이 따르는 것이 맞는바.”

 

시선을 살짝 위로 한다. 무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

 

“…. 그 명에, 기꺼이 따르도록 하지…. 대적자.”

 

심장 위에 손을 얹는다. 맹세의 이름을 가질 수 있도록.

그러자 밑에서부터 퍼지는 고동이 손에 선명하게 잡힌다. 이것은 심장 위에 겨눠진 칼의 사유도, 미래에 대한 기대나 갈망도 아니다. 이것은, 정말로 온전하게-

 

“그래, 평생 잊지 말고, 지금을 잊지 말고, 갚을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도록 해. 대적자.”

 

한결같은 저 눈을 띄는 이가 가져가 버린 몫.

카르티스는 앞으로 절대, 입 밖으로 내지 못할 감정을 손 아래로 꾹 누르며 로드를 바라보았다. 바라봄에 담기는 것은 자신의 도전자, 대적자, 구원자, 심판자 그리고 연정의 형상이다.

지독하게 얽혀버린 또 다른, 누구도 의도하지 않고 자의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영원의 계약이 시작된 순간이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그 외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