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로드] The Last Emperor I

모든것이 끝난 후 둘의 이야기.

내 눈을 감기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으세요. 그래도 나는 당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 The Last Emperor


처음 보인 건, 눈이 아릴 정도의 하늘이었다.

한낮의 꿈이라기에 이상할만치 생생했다. 구름을 베고 누운 듯 부드러운 풀내음이 코 끝을 간질거린다. 선명한 시원함이 손가락 끝에 감겨오자 두 눈이 절로 감겨진다. 어쨰 깨어나기 아까운 것들 투성이다.

몇밤을 집무실에 틀어 박혔을까. 아무래도 깜빡 잠이 든게 틀림없었다. 곧 깨어날 한낮의 달콤한 꿈이려나. 산 같은 서류 더미로 돌아가기 전 조금은 쉬어두는게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못다한 아쉬움이 눈커풀 안쪽에 남아버려 절로 두 눈이 깜빡거린다. 살짝 열려진 시야에 들어온 세계는 참 맑고 밝았다. 이 계절에서만 볼 수 있는, 이렇게나 높은 하늘로 반짝거리며.

느긋한 감상도 잠시다. 새파랗게 들이찬 시야에 흰 물감이 퍼지듯 조각 구름 하나가 찬찬히 침범한다. 꿈속이라도 시간은 어김없이 흐른다는 사실을 알리는 갈피였다. 더이상의 여유를 부릴 수 없는 로드는 나른해진 몸을 겨우 일으켜 앉았다.

하늘에서 거두어진 두 눈이 사뿐히 내려온다. 그리고 막 땅을 딛으려는 찰나. 눈동자는 잠시 멈추더니 점차 커다랗게 아롱거린다.

새카만 세계가 무지갯빛으로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격변하는 빛깔 속, 펼쳐진 또다른 세계는 -

금빛으로 너울거리는 끝없는 장미 군락. 백합 무리는 이읃고 은색의 별들로 만개한다. 새벽녘의 달 조각마저 아로새긴 이슬이 잎마다 매달려 반짝거린다. 내리쬐는 태양빛 살며시 맺히자 물방울은 영롱한 보석으로 변해 땅으로 돌아간다.

대지를 밝히는 모든 생명이 한곳에 피어나고 있었다. 머나먼 지평선까지 간지럽히는 색색의 꽃들은 곧 사라질 환상처럼 아름다웠다.

전부 잊고, 그저 바라보고만 싶을 만큼.

바스락.

이 아름다운 그림과 어울리지 않는 불협음이다. 꽃결에 흠뻑 취한 의식을 침범한 기척은, 저 멀리 꽃무리를 가로지르며 흐릿한 인영으로 변해 가까이 다가온다. 누구일까. 어쩌면 제 꿈의 불청객일 수도 있으려나.

그렇지만 왠지,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어느 땐가 제 귓가에 맴돌고 눈가에 아득히 머무르던 것이 분명한 존재처럼.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광활한 꽃밭이 물결처럼 나부꼈지만 로드의 시선만은 한치 흔들림 없이 잔잔하다. 

태양이 가장 높다란 정오의 시각, 광활한 축복속에 유일하게 생기 없는 것은 갈피 없이 흔들리는 은발 뿐. 찬란하게 물든 세상에 흑과 백으로 메말라 있는 한 남자가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걸어왔고 앞으로도 함께 걸어갈 유일한 존재.

몇번이나 외쳤던 그 이름을 처음인 듯 나지막하게 읊조린다.

" ...카르티스? "

그 이름이 불리자 쾌활하던 봄바람이 단숨에 낭랑한 웃음을 뚝 멈추었다.

싱그러운 장미넝쿨도 가만히 숨죽인 정원,

지금 이 순간이 아직 꿈이라 믿고 있는 자와, 꿈이 아니길 바라는 자가 마주하고 있다.


포르르, 맑은 새소리가 포근한 공기와 섞여 울린다.

내리쬐는 햇살은 절로 눈이 감길 만큼 따스했다. 두 사람 사이의 적막만이 좀처럼 녹지 않은 채, 오직 로드의 두 눈만이 깜빡이며 움직일 뿐이다. 언젠가 카르티스와 이렇게 꿈속에서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렇다면 이것도 꿈인걸까.

하지만 제 앞의 그는, 한 번도 본적 없는 눈을 하고 있는 저 남자가, 그저 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단추 없는 조촐한 흰 블라우스와 검은 하의는 언뜻 보기에도 낡은 것이었다. 아무런 무늬나 장식도 없는 옷차림은 화창한 주변과 무엇 하나 섞이지 못했다. 잘라 맞춘 듯 아무런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이질적인 그를 보자 로드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남자를 둘러싼 것이 무엇인지.

투명하리만치 짙은 비애悲哀 였다. 똑바로 마주하기만 해도 가슴 한켠이 쓰라려지는.

대체 무슨일이 일어난거지.

쿵, 갑자기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처럼, 시야가 마구 어지러지며 캄캄해졌다. 물에 빠지기 직전 몸부림을 치듯 땅을 박차고 일어섰다. 지금 해야할것은 하나뿐이다.

" 뮤, 뮤! "

대답이 없다. 아무리 절박한 심정으로, 몇번이나 부른들 무성한 꽃밭 속으로 흩어질 뿐이다.

어떻게 된 일이지. 더 이상 백일몽이라 치부하기에는 하나같이 선명하기 그지 없었다. 설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 건...

아니, 그건 아닐거다. 불행중 다행히도 자신을 아는 듯 보이는 눈앞의 이 남자가 증거였다. 로드는 알고 있던 이와 똑같지만, 어딘가 선뜻 다른 남자를 슬쩍 보았다. 또 다른 유니버스의 소유자. 이곳이 다른 세계라 해도 그라면 무언가 알고 있겠지. 

한발짝 성큼 다가간다. 두 사람의 거리는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남자는 훅 뒷걸음 쳤으나, 잠시 망설이는 듯 하다 순순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 카르티스... 맞지? "

가까이 다가가 올려다본 남자는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카르티스 클라우디스가 맞았다. 그러나 눈가의 옅은 주름이 약간은 낯설어서, 일순 확신이 흐려진 바람에 다급해져 목소리가 높아진다.

" 말 좀 해봐. 사실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잖아. 아까부터 왜 아무 말도 못하고 있...! "

어김없이 그의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자신과 마주친 아까도, 이리 소리치고 백안시 구는 지금도. 답답한 마음에 큰소리가 절로 나왔지만 그를 다그쳐 답을 얻어내는 건 깔끔히 포기하기로 했다.

보다 확실한 해결책을 떠올렸으니까.

" ...아니, 아니다. 이 시간선의 내가 어딨는지 알고 있지? "

살아있지 않은것마냥 미동 없던 카르티스가 눈에 띄게 동요한다. 로드는 조급한 나머지 굳어버린 표정을 알아채지 못하고 말을 이어간다.

" 같은 존재가 만나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뮤에 대해 물어봐야겠어. 아니면 당신이 대신..."

" 할 수 없을 거다. 그건. "

닫혀있던 문이 열린다. 하지만 조그만 틈 사이 흘러나온 음성은, 온화한 햇살이 초라해질 정도로 볼품없이 식어있었다. 전부 타버려 겨우 그러모은 재와 같은 목소리를 듣자 목이 매일 정도였다. 

이걸 들려주고 싶지 않았던 걸까. 그래서 지금까지 입을 열지 않았던 걸까. 허나 더 눈을 뗄 수 없는것은 꺼져버린 두 개의 창窓이다. 어두커니 잠겨있는 카르티스의 눈은 언뜻 비춰진 그녀의 발치만을 따라오고 있었다. 

로드는 그때야 깨달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카르티스는 자신을 바로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우연한 눈길조차 용인하지 않는 것처럼.

그와 다르게 로드는 카르티스를 환히 볼 수 있었다. 수많은 말을 가둔 입술은 곧 무너질 둑처럼 떨리고 있다. 샘 하나 없이 메말라 한끝만 내리치면 부서질듯한 눈동자와는 사뭇 달랐지만 유약해 보이기는 매한가지다.

이렇게나 약해진 그를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속단할 수는 없지만 저릿해지는 심장이 제게 속삭이고 있다. 아. 아무것도 남지 않았구나.

 찾아야할 것도, 지켜야할 것도. 

끝내는 사랑하는 것도 어느 하나 남지 않아 오직 혼만이 억지로 달라붙어 있는,

카르티스 클라우디스, 그는 남겨진 자였다.

자리를 옮겨 얘기하지. 카르티스는 짧은 한마디만 남긴채 뒤돌아 걸어간다. 앞서가는 넓은 등을 로드가 서둘러 따라잡는다. 어째서 나란히 걷지 않냐고 붙잡을 틈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보폭에 완벽히 맞추는 그를 보자 차오른 말은 도로 삼켜졌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녀의 한발이 곧 그의 한발이었다.

쫓아갈 필요가 없어지자 로드는 제 앞에 서성이는 은발을 느릿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은 퍼석한 나머지 속이 훤히 비칠 정도라, 문득 에워싼 싱그런 녹음으로 그가 사라질것만 같아서, 눈을 뗄수가 었었다.

이런 저런 생각에 골몰하며 걸으니 어느덧 하얀 외벽의 궁이 보였다. 두 개의 기둥 사이 둥근 문으로 들어서자 하늘 마냥 까마득한 천장이 로드를 맞이한다. 두 명 몫의 발소리만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타고 담담히 메아리친다.

간간히 창으로 들어오는 빛줄기에도 내부는 어스름했다. 바깥과 벽 하나만이 존재하지만 얼어붙은 공기는 들이쉬는 숨에 섞여 시리게 스며든다. 거대한 관속 같은 성내, 부유하는 먼지 조각만이 새하얀 춤을 추고 있었다. 소리 없이 내려앉아 계단을 눈처럼 희게 덮은 이곳은 겨울이었다.

이읃고 두 발걸음은 기다란 창문이 줄지어진 복도를 지나간다. 창틀을 따라 주조된 햇빛이 바닥에 차차 드리워져 어둑한 발 앞을 비추는 이정표가 되었다. 한발, 두발. 흔치 않은 온기에 로드는 시선을 아래로 두고 찬찬히 나아간다. 어느새 저만치 앞서있는 카르티스를 눈치채지 못한 채.

탁. 황금의 돌다리가 끊어진다. 로드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것은 검게 흐르는 비단천, 칠흑으로 감싸여 막다른 벽을 메우는 사각의 형체였다.

단 한발자국의 빛도 허락하지 않은 벽면은 어스름하게 잠겨있었다. 끝없는 어둠에 오직 로드만이 주저 없이 손을 내밀었다. 볕 녹아든 장갑이 넘실거리는 밤바다를, 차가운 천 자락을 쓰다듬으려 할 때였다.

저를 감싸는 한없이 지긋한 시선에 로드가 우뚝 몸을 굳힌다. 고개를 돌리자 시선의 주인이 바로 보였다. 멀리 떨어져 있어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말없이 매달리는 눈빛만은 못내 안타까웠다.

내밀었던 손이 도로 거두어진다. 사방이 장막으로 감싸인듯 온통 뜻 모를 슬픔 뿐이었으나 로드는 애써 무시하려 했다. 지금은 한시 바삐 나아가야 할 때였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서둘러 옮긴 걸음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마법일까. 아니면 오래전에 정해진 운명일까. 누군가 살며시 어깰 붙잡듯, 걸리는 것은 그 무엇도 없음에도 로드의 몸이 휘청 기울어진다. 떨어지며 뻗은 손은 깊게 봉해둔 어둠마저 멋대로 잡아버렸다. 수없이 묻고, 또 물으며 겹겹이 덮어두었던 시간이 한 사람의 손길에 너무도 쉬이 풀어졌다.

" ....! "

검은 융단은 눈물처럼 순식간에 흘러 내린다. 그리고 까만 밤 지나간 눈동자에, 환하게 차오르는 별과 같은 것. 하여 지금까지 마주한 중 가장 믿을 수 없던,

로드는 자신의 초상화를 올려다 보았다.

그림 속, 가슴이 미어지도록 희미하게 지은 웃음을.


궁을 빠져나와 낮게 자라난 수풀 사이로 놓인 길을 따라가자, 미세한 빛을 띈 둥근 돔의 유리 온실이 드러난다. 추억처럼 반짝였을 그곳은 돌봐줄 이가 없었기에 본연의 아름다움을 바랜 지 오래였다.

녹슨 쇳소리와 함께 낡은 문이 열린다. 은은한 꽃향기는 그리운 주인을 조용히 반겨주었다. 외관과 달리 내부는 흐트러짐 없이 정갈하다. 정성 어려 가꾸어진 꽃들이 원을 따라 피어나고 있었다.

아마 오래전부터 자리했을, 두 개의 의자와 하나의 테이블이 온실 중앙에 아담하게 놓여 있었다. 얼룩덜룩한 색유리로 인해 햇빛은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듯 산산이 흩뿌려진다. 마치 비밀스런 숲속에 서 있는 듯이.

카르티스가 먼저 다가가 의자를 뒤로 내었다. 고, 고마워. 머뭇거리는 로드를 앉힌 그는 테이블에 놓여진 다기로 차를 준비했다. 마력으로 물을 끓이고, 찻잎을 담아내는 유려한 옆모습이 내리 깐 검은 눈 안에 고이 담긴다.

찻주전자의 뚜껑이 닫히자, 로드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당신이 직접 하는 거야?

그래.

다른 사람들은?

이곳에 머무르는 자는 나뿐이다.

수심에 젖어 마디마다 잠겨있던 아까와 달리, 제 비운을 고해하는 말은 공허하게만 울려 퍼졌다.

어느덧 하얀 찻잔이 로드의 앞에 정중히 놓여졌다. 다정을 머금은 부드러운 차향이 피어올랐다. 어지러운 속이 조금은 진정되길 바라며 뜨거운 차를 한입 머금었으나,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버석한 목소리. 어떠한 온기도 남지 않은 황궁, 괴로울 정도로 검게 봉해져 있던 초상화.

모두 찣겨진 책장처럼 도무지 맞출 수 없는 파편 뿐.

달칵. 찻잔을 내려놓자 갈색의 찻물 속 아른거리는 형체가 보였다. 아까 보았던 초상화 속 자신이 저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한번도 본 적 없던 눈빛으로.

어둠이 걷힌 자리에는 거울에 비춘 듯한 두사람이 남았다. 그러나 공들인 붓질로 그려낸 온화함과 달리, 그것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갈피없이 요동친다. 아무리 보아봤자 대답 없는 그림 대신 로드의 두 눈은 카르티스에게 향하였다.

그는 시선에 응하지도, 다가오지도 않았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이럴 수 밖에 없는 자신을 부디 용서해달라고, 그리 외치는듯 한 토막의 촛불처럼 흔들리는 남자에게 제 숨결조차 거스르지 못할 폭풍일 터였다.

해서 로드는 기다렸다. 그 가느다란 불꽃이 온전히 타오를 수 있도록. 어둠을 물리고 스스로 진실을 밝혀줄 순간까지. 카르티스의 내리 덮은 시선에 꼭 쥐고 있는 검은 손끝이 일렁인다. 그리고 흐드러지게 피어난 붓꽃 향은 너무도 익히 머무르던,

수없는 회한으로 점철되어도 눈이 부신 한켠의 추억이 스친다. 꺼진 심지에 불꽃은 다시 피어오른다. 내내 감고 있었지만 언제나 선명했던, 긴 이야기의 첫머리로 더할 나위 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나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니까.

두개의 홍차 잔. 두 사람을 비춘 자그마한 수면으로 그 말은 사륵 녹아내렸다.

* 인용된 시는 Rainer Maria Rilke - Losch mir die Augen aus (내눈을 감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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