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로드] The Last Emperor II

The Last Emperor by 미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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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더 이상 황제가 아니니까.

두개의 홍차 잔, 두 사람을 비춘 자그마한 수면으로 그 말은 덧없이 녹아내렸다.


인류의 이야기에서 재앙이란 단어는 사라졌다. 새로이 쓰여질 첫 장, 모두가 희망으로 부풀어 오른 시작에서 유니버스는 나직하게 이별을 고하였다.

해야할 일은 끝났다고. 이제는 돌아갈 때라고. 로드는 매달리며 소리쳤다. 준비되지 않은 작별은 누구나 아이처럼 만드는 법이니까. 함께했던 무수한 시간을 실로 자아낸 듯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가지말라 애원하는 왕을 보며 소녀는 미소를 지었다. 하염없이 옅지만 뇌리에 영면하게 남겨질 미소를. 이 넓은 우주를 통틀어,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서.

괜찮아, 마스터. 

뮤는 항상 마스터와 함께 있을 거야.

소녀는 왕의 이마에 마지막 입맞춤을 남겼다. 혜성처럼 푸른 머리카락이 기다란 꼬리를 그리며 사라져간다. 로드는 떠나가는 자신의 우주를 바라보았다. 저 멀리 짙푸른 공간, 약속이 하나의 반짝임으로 남겨질 때까지. 그 미소처럼 오래도록 이어지는 빛을 보며 왕은 웃었다. 

그래. 너는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간 것 뿐이니까.

다시 세계의 일부분으로, 돌아가야 할 곳으로. 두 명의 회귀자 또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무엇도 아닌 존재가 되어 살아가게 되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시작이자 끝이 하나인 세계에서.

재앙이란 절대적인 시련, 유니버스의 권능이 사라진 세상. 오롯한 인간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위대한 황제는 추락하고 신을 잃은 제국은 무너졌다. 하나의 기둥으로 지탱한 영광은 하룻밤 사라지는 허무에 불과했다. 

카르티스는 제 운명을 다시 짜맞추기 시작한다. 가늠할 수 없는 염오로 엮은 올가미에 이 목을 내주고, 원한으로 연마한 창이 심장을 꿰뚫는다면. 한 세기를 종결짓는 의식으로 더할 나위 없었다.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선 옛 영광의 목숨을 거름 삼는 게 순리였으니. 하지만 그런 세계의 법칙 따위 없다고, 너는 내게 소리쳤다. 

살아가라고. 그 한마디로 인해 목에 걸린 줄은 단칼에 끊어지고, 제가 정렬한 운명은 시작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맹세를 되새길 뿐이다. 나는 너의 말을 따를 것이다. 잊고 있던 빛을 마주한 순간부터 흘러가는 시간은 제 것이 아니었으니까. 절망은 소원으로, 소원은 희망이 되었다. 다음은 더욱 찬란하게 태어나 앞을 비추겠지. 그래. 저기 떠오르는 해처럼. 

처참히 무너진 잿빛의 돌더미가 여명으로 물들어간다. 저 멀리 다가오는 내일이 너무도 눈부셨기에 두 명의 인간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지금껏 마주하지 못한 세상의 뒷면을. 

하여 곧 마주하게 될 진정한 재앙을. 

사력을 바쳐 승리한 그것은 본디 마수의 모습을 띄지 않았다. 흔하디 흔한 모습으로 땅에 발 딛고 있는, 가장 가까이에서 살아 숨 쉬는 자들이 바로.


시작은 도스의 내전이었다. 

희망의 다음으로 써 내려진 글자는 무엇이었나. 멈추지 않고 휘갈겨진 활자는 질서를 잃고 어지러진다. 한데 뒤엉켜 검은 뭉치로 꿈틀거린다. 갈피 없이 요동치다, 선득한 비명이 속을 찢으며 박차오른다. 끝내는 허무히 흩날려 무엇도 남지 않게 되었다.

제국은 부식되었을지 언정 세계의 기둥이었다. 그 견고한 유일함이 다른 기둥을 전부 쓰러트려 얻어낸 것이라 해도. 

만인을 짓누르던 눈가리개가 예고도 없이 한순간에 풀어진다. 그것은 오랫동안 해를 보지 못해 핏빛으로 물든 눈이 드러남을 의미했다. 쏟아지는 자유에 움츠러든 것도 잠시, 그림자는 가만히 숨을 죽인다. 비어버린 하늘을 물끄러미 본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것을 알아버린 주변을 주시한다. 

칼날처럼 돋아난 송곳니가 서로를 물어 뜯는건 삽시간이었다. 그것은 더 이상 인류의 구원이란 대의도, 하물며 생존을 위한 투쟁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주인이 사라진 권좌를 차지하기 위한 심판관이 없는 처형장에 불과하다. 

수도 없이 목도했던 광경이기에 카르티스는 미동 없이 지켜보았다. 이제는 머나먼 무의미한 단락, 피붙이의 숨통을 가차 없이 끊었던 눈동자가 문득 떠올라 가슴을 할퀴었다. 허나 일말의 쓰라림조차 남지 않았다.

이 혼돈을 부른 이는 자신이었고, 잠재울 답 또한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해답은 아님을 지금은 안다. 주저하는 카르티스를 일깨우듯, 누군가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 나온다. 

이 죗값은 너와 내가 함께 치러야 해.

함께 가줘. 혼자 여기서 끝내려 하지 말고.

그 또한 따르는 것만이, 카르티스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재판은 연기되었다. 바네사 왕녀를 포함한 많은 이가 반대했으나, 두차례의 내전 소식이 알려지자 그들은 침묵으로 동의의 뜻을 전했다. 혼란이란 완벽한 도화선을 타고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대륙 전체로 번져간다. 

끝내 알드 룬의 국경까지 전란이 번졌다는 전보가 들어온 날, 왕녀는 꾹 다문 잇새 사이로 한마디만을 남겼다. 로드께서 그렇게 정하셨다면.

패배자는 다시 황제의 이름을 덮어쓴다. 제 손으로 세운 것들을 온전히 무너뜨리기 위해. 산산이 부서져 버린 파편들의 주인으로.

몰락한 황제가 민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나 볼 수 있는 높은 단상에 올라섰지만 가장 낮은 이의 마음으로 임한 그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마침내 입을 열었다. 

황제는 자신의 생애를 찬찬히 고하였다. 숨기는 것 없이 진솔하게, 그녀가 말했듯이 닫힌 문을 두드릴 수 있도록. 기나긴 고해의 끝은 단언이었다. 제국은 한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생겨난, 존재해서는 안되는 부산물이었다고. 

그들과 같은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카르티스는 청한다. 인류는 종말의 망령에서 벗어났으며, 자유를 되찾았다고. 세계를 뒤덮었던 제국의 그늘은 남김없이 지워질 것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죗값은 이 목숨이 다하는 최후까지 갚으리라. 그러니 칼을 거두라. 우리는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간절한 호소가 끝나고 찾아온것은, 밑물이 쓸려간듯 어딘가 잘못된 침묵이었다. 

검은 폭풍이 몰려온다. 숭배와 증오, 이치를 벗어난 존재를 마주한 두려움으로 소용돌이치며. 불타올랐던 빛이 형체도 없이 휩쓸리는 광경을 본 모든 이의 머릿속은 점멸하였다. 

카르티스는 덧없이 쌓아온 제 시간들을 헤집었으나 답은 나오지 않았다. 등을 짓누르기에 눈앞의 벽을 부수는 것은 수도 없이 해보았지만, 그렇지만 이런, 한치라도 길을 잘못 든다면 깨져버릴 듯한.

게다가 너무 낡아버린 한사람 몫의 희망으론, 더 이상 한 발을 내딛기도 버거울 뿐이다. 

그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었다. 

아발론의 왕은 갈루스 황궁에 자주 머무르곤 했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처럼 당연해진 풍경이었다. 발길이 뜸한 뒤편의 정원은 한창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고 있었다. 무언가 풀리지 않는 것이 있을 때면, 두 사람은 그곳을 오래도록 거닐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샘물처럼 지저귀는 새소리가 오가는 대화 속 스며든다. 흰 아네모네가 수 놓인 정경의 그들은 멀리서 본다면야 마치 한폭의 그림처럼 안온했다. 일순, 반듯한 액자에 담긴 그림의 한 귀퉁이가 움틀거린다. 이변은 언제나 소리없이 찾아오는 법이었다. 

정원의 모두가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낮게 내리감은 눈은 조용한 변화를 담지 못하고 흐트러짐 없이 말을 이어간다. 조금 마른 입술이 마지막 문장을 끝맺었을 무렵, 곁을 지키던 카르티스가 돌연 몸을 굳혔다. 

의아해하는 로드를 두고 그는 한발짝 나아가 햇빛을 등지고 가로막았다. 살짝 놀란 눈이 카르티스를 올려보았다. 바람도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때를 기다린다.

황제는 왕에게 청혼하였다.

국가, 인류, 과오, 온갖 훌륭한 허울로 감싸도, 안쪽에 숨겨져 있는 것은 참으로 같잖은 욕망이었다. 진의는 명백하다. 더는 견딜 수 없는 인간의 몸부림이다. 그리 아우성치던 여럿 목소리를 지워버리는, 작디 잔은 입속말 하나만이 밤낮없이 메아리 치고 있었다. 곁에 있어 주었으면. 

끝내 그도 바라는 것이 생겼다. 그조차도 아주 조금은, 행복해지고 싶었다. 

풀잎 하나마저 생기가 흘러넘치는 계절의 축복이 무색하게, 꽃을 맴도는 나비의 날갯짓 소리만이 조심스럽게 귓가를 스치운다. 

적막은 조금 늦게야 그를 일깨운다. 엎지른 다음에야 저지른 짓을 깨닫다니. 아무리 닦아내어 치장했다 하더라도, 절대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 있음을. 카르티스가 지나친 무례를 사과 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 ... 그럴까."

혼잣말처럼 흘러나와도 고개를 들기에는 차고 넘치는 문장이었다. 행여나 놓칠까, 절박하게 매달리듯 황제는 왕을 바라보았다.

곧 선명하게 연결된 검은 눈이, 결코 무너진적 없던 두 눈이 슬픔에 잠겨보인다면 제 착각일까. 

카르티스는 여린 풀밭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들어 언제나 닿기를 망설였던 작은 손을 감싼다. 면사포를 들어 올리듯 검은 장갑을 조심스레 벗기자, 무결한 흰 손등이 드러난다. 견딜 수 없이 부시기에 카르티스는 눈을 감았다. 

제게 남아있는 온 마음을 그러모아 그위로 입 맞추었다. 높이 오른 태양이 왕의 머리 위로 떠올라 관을 씌운다. 어떤 보화보다 영롱한 가시관이었다. 당신의 죄를 함께 하겠다는 증표는. 

봄의 세례를 받은 단 둘만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오직 세계만이 그들의 증인이었다. 

국혼식은 열리지 않았다. 영혼을 수호하는 다섯 정령의 축복도 내려지지 않았다. 서로의 넷째 손가락에 걸린, 보석도 박혀있지 않은 반지만이 유일한 혼인의 증표였다.

아발론과 갈루스 제국의 소식은 널리 퍼져간다.  이제 로드는 우호국의 왕, 연맹의 수장인 동시에 그의 황후가 되어 카르티스의 곁을 지키게 되었다.  신중한 손길 아래 놀라울 정도로 흐드러진 것들이 일찍이, 바르게 잡혀갔다. 새로운 물결에 불길은 삽시간에 사그라들었다.

그가 받을 칼날에 그녀 또한 여지없이 베이며. 

위선자 !

예고없이 날아든 돌조각,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핏줄기, 부르짖던 증오의 말들. 잊을 수가 없었다. 피를 닦아내도 흉터는 고이 남아 버렸다. 그날의 지울 수 없는 상흔처럼, 입에 담기도 역한 추문이 왕의 발치를 진득하게 따라붙었다.  

근원지는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기사들 중 몇조차 달라진 시선으로 주군을 바라보았다. 순수한 충정으로 차올랐던 눈빛은 감추지 못한 의심으로 섞여 있었다. 속내를 들여다볼 수 없게 부옇게 되어. 검게 변해버려서.

탁하고도 짙은 늪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호흡마저 가빠질 압박에도 행여 제 숨결이 누구에게 상처라도 될까. 로드는 조심스레 숨을 가다듬었다. 그런 그녀를, 그녀의 흉터를 바라보는 카르티스의 손끝이 내내 떨리고 있었다. 

달도 고개를 들지 않은 어두운 밤이었다. 

온몸의 떨림마저 삼키는 깊은 밤이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로드는 억지로나마 눈을 감고 희미한 바람결에 귀 기울였다. 서늘한 공기 속에 의식이 흩어지려는 찰나였다. 

위선자! 

날카로운 절규가 암전된 머릿속을 관통한다. 뒤에서 밀쳐진 듯 두 눈이 흠칫 떠졌다. 

떨어지는 자신을 겨우 붙잡은 것은 미약한 노크 소리였다. 비틀거리며 문으로 다가가는 걸음이 어두웠다. 떨리는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고 문고리를 돌리자, 두터운 장막이 걷어지며 노크의 주인이 드러난다. 

로드는 한껏 초라해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한때 세계를 군림했던 자라 도저히 믿을 수 없이, 자신과 똑같이 말아쥔 손안으로 무단히 떨림을 삼키는.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하나의 악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끈질기고, 구차하게 그대를 붙잡아 살아 남았다. 이리 매달릴수록 나란히 가라앉아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곁에 있고 싶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내보인다면 밤이 모자랄 정도의 기도였다. 하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그를 위해 로드는 가만 지켜 보았다. 나도, 한치 다를 바 없이 같아. 라고 속삭이듯이.

구름이 걷어진다. 하얀 달이 지켜보는 가운데 맹세의 입맞춤은 이루어졌다. 어슴푸레한 베일이 눈을 가려 손길은 깊게만 파고들었다. 홀로 남겨진 밤은 너무도 차가워 눈물과 같은 온기를 찾았다. 

그리하여 당신이 지워지지 않도록, 서로의 가장 아득한 곳까지 새겨질 수 있게 밤새도록. 


" ...그럼 이 협약서를 기반으로, 이후 다시 종결짓겠습니다. "  

타국의 지도자와 회담을 마치고 나설때였다. 그들은 단 하루도 멈추지 않고 주어진 길을 따라 나아갔다. 바라는 것에 닿기 위해선 한시도 늦출 수 없었다. 

그런 카르티스가 막 앞으로 내미려던 걸음을 뚝 멈추었다. 제 밑에서 아른거리는, 얼핏 본 검은 머리칼 아래 얼굴색이 아까 체결한 협약서보다 하얗게 질려 있기에. 아직 보는 눈이 많음에도 그가 조급하게 말을 건넸다.

" 안색이 좋지 않군. "

불쑥 꺼내진 목소리에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로드는 슥 웃어 보였다.

" 별거 아니야. 어제 잠을 별로 못... "

말은 끝나지 못했다. 잡을 새 없이 까만 머리카락이 시야에서 사라져간다. 바닥에 부딪히기 직전 , 억센팔이 간신히 로드를 붙잡아 안아 올렸다. 애타게 소리치며 감싼 얼굴은 소스라칠 만큼 하얗고 차가웠다. 카르티스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머리가 어질해지는 소란스런 풍경 속, 사방의 기사단이 모여들어도 한참을 그렇게 놓지 못한채로.


" ...아이? "

정령사의 극진한 보살핌 아래에도 이상하게 왕은 좀처럼 깨어나질 못했다. 확연히 다른 기류를 감지하고 서둘러 불러온 주치의가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꺼내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변하였다.

미약하게 띄고 있는 또 다른 심장 소리가, 로드에게서 들려온다고. 그제야 샬롯은 뒤늦게야 목이 메어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털어놓는다. 왜 평소보다 많은 정령이 로드를 맴도나 했는데. 

그 말이 귓가에 닿은 순간, 카르티스는 세상 밖으로 아득히 떨구어졌다. 

것 또한 찰나였다. 이름이 아닌 호칭을 부르는 목소리에 불현듯 되돌아온다. 조인이 필요한 서류를 들고 온 대신이 문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필시 불안한 내용으로만 가득하겠지. 본래는 저만이 이고 갔어야 했던. 미간은 엉망으로 일그러진다. 

카르티스의 두 눈이 제 반려를 향한다. 눈을 감고있어도 괴로운 기색이 완연한 얼굴이다. 유독 야윈 듯한 뺨에 손을 뻗다가, 무엇이 이토록 그녀를 죄었는지 깨닫자 이내 그만두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단호히 걸어간다. 문앞에 선 그는 간결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뜻을 내비쳤다.

추후에 처리하도록 하지.

지금만큼은, 황명과 함께 문이 닫혔다.

그날 이후 깃펜과 검은 로드의 손에서 거두어졌다. 그에 그치지 않고 모든 정무가 투명한 벽에 감싸이듯 닿을 방도가 없어졌다. 누구의 뜻인지는 유추할 필요도 없이 뻔했다. 애초에 조금이나마 걸을라치면 달려와 안아 드는 그가 아니던가.

마치 소중한 것을 처음 가져본 듯한 카르티스의 모든 행동이, 로드에겐 터무니 없는 경솔함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분풀이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통하지 않자 자신은 정말로 괜찮다며 타일러 보기도 했으나 그 어떤 방법도, 그의 의지에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잠시만, 아주 잠시만. 

아주 잠깐의 유예라면, 그녀를 위해서라면 냉혹한 세계도 못 본 척 눈감아주지 않을까. 

결국 로드는 자신의 의지는 아니지만, 태어난 이래 가장 평온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고, 무엇에도 쫓기지 않고, 하루를 노래처럼 안온하게 보내는 그런 시간을.

따스한 볕을 받으며 안락의자에 기댄 로드는 창밖을 빤히 내다보고 있었다. 선혈이 난무하지는 않았어도 제법 치열하게 살아온 지난 날 때문인지, 느슨한 햇살의 향기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무언가 발견하자 기다렸다는 듯 다소 무거워진 몸을 일으켰다. 곧 문을 열고 들어온 카르티스에게 로드는 질문을 무더기로 던졌다. 돌아오는 것은 늘, 진실인지 확인할 수 없는 긍정의 대답들.

" 카르티스. 저번에 그 협정은? 보상 문제는 어떻게 - "

" 내가 처리하였다. 잘 해결되었어. 그러니..."

그대의 것이 아닌 속죄를, 더는 하지 않아도 돼.

언제나 말하고 싶었던. 그러나 말할 수 없던. 그러한 마음을 엮어 자아낸, 반짝이고 보드라운 시간이 두사람을 감싼다. 

넓다란 소파 위, 로드는 카르티스에게 비스듬히 안겨 있었다. 흰 손에 들린 것은 옛이야기들을 엮은 작은 책. 해가 저물며 투명한 커튼이 장밋빛으로 물들어 너울거린다. 소리 내 읽는 글자들은 바람을 타고 방안을 부유하며 잎사귀처럼 나부낀다.

...그렇게 그들은, 영원하고도 하루를 더 살았습니다. 

낭만적인 이야기네. 흡족한 결말에 로드는 미소 지으며 책을 덮었다. 아무런 답이 들려오지 않자 슬쩍 위를 보니 늘 보던 얼굴이 들어온다. 이런 평온이 버겁다는 듯, 결국은 제가 사라져야 옳다는 결론이 여실히 드러나는. 

그는 모를 것이다. 그런 당신을 바라볼 때 마다 심장이 멎을 것 같다는 걸.

분명 깊고도 큰 죄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사랑에 눈멀어 제가 똑바로 보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무엇에도 짓눌리지 않고... 온전한 삶을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은 조밀하게 잘근거리다 꾹 다물린다. 대신 로드는 그의 손을 잡았다. 꼭 잡고는 산달이 다가와 부푼 배 위로 이끌었다. 

약하지만 분명한 고동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어엿한 한 사람분의 온기도. 

낮게 깔렸던 눈이 동그랗게 떠지다 풀리듯이 내리감았다. 매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이 입을 열지 않아도 전부 들으며, 말이 없어도 수많은 것을 알게 해주는 그대에게.

카르티스의 남은 손이 로드의 얼굴을 모아 감싼다. 그에 응하듯 로드는 단단한 손을 붙잡고 살풋 고개 들었다. 말이 오가지 않아도 그녀는 그를 위해 움직였고, 그 또한 그러했다.

깊숙히 목을 숙인다. 서로의 간절한 소원 아래 입술이 만난다. 텅빈 곳도, 비워진 줄 몰라던 곳마저 넘치게 채워 주는 황금의 시간이었다. 반짝이는 초풍은 곯아버린 시간의 그을음까지 멀리 날려 보낸다.

행복이란,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만들어진 단어일지도 모른다고. 카르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은 흘러 장미가 아름답게 피는 봄. 아이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아발론의 왕녀이자 갈루스 제국의 마지막 황녀가.

안고있어도 보고싶다는 말이 이런 것일 줄이야.로드는 작은 아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날 때부터 어머니를 알아보는 듯, 제게 안기자 거짓말처럼 울음을 그치는 아이는 너무 사랑스러워서. 따사로운 볕에 꽃망울이 터지듯 웃음이 나왔다. 

머지않아 또다시 로드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작은 아기가 재앙보다 두렵다는 듯 카르티스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아이는 벌써 작은 손 고물대며 안겨 오는데 정작 아버지란 사람이 저러다니.

카르티스. 다가오지 못하는 그를 따스히 바라보며 말했다. 봐봐. 우리 아이야. 두 쌍의 꼭 닮은 검은 눈동자가 물끄러미 카르티스를 향한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눈동자가 하나 더, 늘어나 있었다. 

멈춰있던 다리가 또렷한 빛을 향해 나아갔다. 가까이서 눈에 담은 얼굴은 제 손 하나마저 벅찰정도로 작았다. 겨우 들어올린 손가락 하나로 솜털도 채 나다만 동그란 뺨을 슬었다. 닿았던 것 중 이보다 따스한 온기는 없었다.

제게 생겨난 또 다른 유일함을, 감히 희망이라 불러보고 싶었다. 

슬픔이라곤 조금도 섞이지 않은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이제사야 깨달았다. 자신의 지난 모든 비탄이, 고통과 괴로움이, 이 순간을 위해 쌓여진 것이라 하면, 정말로 하잘것없는 대가였다고. 

이 죄는 씻어내야만 했다. 기필코 새롭게 태어나고 말리라. 그리하여 어느 오래된 이야기처럼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영원히.

카르티스 클라우디스. 회귀자이기에 다른 이들보다 높이 오른 자. 그렇다 해도 닿을 수 있는 진리는 광대한 별무리 중 하나에도 미치지 못하였으니. 

별은 차갑게 빛난다. 영원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빛을 간직한 채. 그렇게 누구에게나 잔혹했다. 입술이 만나지도 못하는 영원이란 단어는.

그럼에도 누구도 뿌리칠 수 없는 것이었다. 피붙이를 전부 빼앗긴 어느 왕녀도, 생과 사를 함께 뛰어넘은 동료를 잃은 군인도, 눈앞에서 숨을 거두는 일족을 지켜봐야만 했던 자도.

그들도 어느땐가, 사랑하는 이들과 영원히 함께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해, 두 해. 그리하여 모든 갈루스 제국 휘하의 국가는 독립을 맞이하였다. 

본래의 갈루스는 국토를 배분하여 인접국으로 흡수될 것이다. 갈루스라는 국호는 더 이상 어떤 명예에도 오르지 못하고 서책에만 남을 터였다. 황제의 이름도 여기까지다. 이날을 끝으로 허상의 왕관을 내려놓고, 그뒤는 심판의 안배만이 남았다.

흰 꽃잎이 환호성에 섞여 휘날린다. 마지막 회담을 끝내고 나선 그들은 기뻐하는 군중을 뒤로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황제와 황후, 그리고 몇년의 시간동안 나날이 자라난 황녀와 함께. 

군중은 변함없는 행보를 보여준 그들을 잊지 않았다. 앞날을 축복하는 수많은 손이 흔들린다. 커다란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아이는 작은 손을 따라 흔들었다. 이 다음 무엇이 기다리더라도, 카르티스는 더이상 두렵지않았다.

북적이는 인파 속, 유난히 눈에 띄는 환대가 들어온다. 한 행인이 열렬히 몸짓하며 무언가 받아달라 간청하고 있었다. 아이의 손가락이 카르티스의 긴 망토 자락을 꼭 쥐었다. 

잠시 마차가 세워지고 두발이 힘차게 뛰어 내렸다. 따라 내리려는 카르티스를 로드가 저지하며 뒤따랐다. 

아이는 활기차게 꽃을 내민 행인에게 다가갔다. 황녀의 성정은 어머니를 닮아 사람에 대한 적의가 없었다. 가까이서 본 그것은 활짝 핀 흰 장미였다. 행인의 무릎이 숙여지고 조그만 손에 장미가 들려졌다. 처음 본 이의 선물에도 아이는 태양처럼 기뻐했다. 

환하게 빛나는 아이를 보며 미소짓던 로드의 눈빛이 순식간에 변한다. 

황제를...척결...

곁눈질로 보았음에도 저 입 모양은 분명, 로드는 반사적으로 뛰쳐나가 온몸으로 아이를 감싸 안았다. 카르티스도 곧바로 눈치채고 달려갔으나,

너무 늦어버렸다.

굉음. 심장이 뚫리는 감각. 압도적인 섬광. 훅 밀려와 호흡마저 멎게 할 뜨거운 공기.

머릿속을 난도질 하는 이명만이 선명하다. 곳곳에 치솟는 불길속에 침묵과 신음이 얽혀 타오른다. 눈을 찌르던 흙먼지는 뜨거운 바람에 걷혀진다.

이읃고 흘러내린 피로 붉어진, 카르티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평생을 바친 복수 앞에선 어떤 가호도 무력했다. 꽃을 내민 이는 인과에 맞도록 흔적조차 남지 않았기에 심문은 무의미했다. 그러나 진의는 명백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나라에 행해진 무고한 학살을. 새하얀 꽃잎이 내리지 않는 어느 땅 아래, 눈감지 못한 시신들이 태워진 대지는 봄이 와도 싹이 나지 않았다. 

망자를 위로하는 종은 울리지 않았다. 검은 관은 그곳에 모인 누구보다 한참이나 작았다. 마지막 배웅으로 어루만질 곳조차 모자랄 만큼. 

일제히 검은 옷을 입은 기사들이 안아올리듯 관을 들어 올렸다. 발소리 없는 대열이 멈춰버린 공기를 나아간다. 카르티스가 선두에서 그들을 이끌었다. 그러나 허공을 짓밟는 걸음걸이에 아무런 영혼도 머무르지 않았다. 이미 숨을 거둔 사람처럼.

모인 이들의 눈물은 강이 되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는 작은 관을 평안히 떠내려 보낼 만큼 흘러내렸지만 흐느낌은 한방울도 새지않았다. 마치 소리만을 정교하게 도려낸듯이. 

혹여나 바람결에 실려 누군가의 귓가에 흘러갈까, 하여 아직 그날에 멈춰있는 누군가의 시간이 흘러갈까 봐. 하나의 마음이 똑같이 웅크려 소리를 죽였다. 조그만 손을 잡고 가는 길은 고요하였다.

그날 이후 로드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를 감싸 나머지 폭팔의 여파까지 떠안은 탓이었다. 치료사들이 마력을 부어넣어도 꺼져가는 숨을 가까스로 붙잡는 게 고작이었다. 

카르티스는 매일같이 로드의 병상을 찾아갔다. 떠지지 않는 눈. 움직이지 않는 그의 심장. 그 둘은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 눈이 영영 뜨지 않는다면 필시 그의 삶 또한.


세상이 다시 깨어난 듯한 그런 날이었다. 모든 것이 고요하고 밝았다. 

그저 오랜 잠에서 일어나듯 두 눈이 떠졌다. 지켜보던 카르티스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그의 가장 기쁘고 영광스러운 날은 언제나 봄과 함께하지 않았는가. 부디 이번에도 제발.

카르티스가 힘없는 손을 붙잡아 깊게 파고들었다. 그대가 처음 건넬 말은 이미 정해져 있겠지.

그렇기에 허상이 진실이 될 정도로, 셀 수 없이 되뇌인 말을 메여버린 목에 가까스로 머금었다.

카르티스....

- 는? 

" 다행히 무사하다. 그러니.... "

찰랑, 비탄 위로 사랑이 넘쳐 흐른다. 그 찰나 만큼을 아주 잠시 망설였다. 찣겨진 심장을 가느다란 미소로 억지로 이어 붙인다. 

꿰맨 자국 사이로 울컥 솟아오르기 전에, 아주 잠겨버려 한 글자도 버겁기 전에, 어서 말해야만.

" ...그대만 일어나면 돼."

그렇기에 후회하지 않는다.

설령 이 시간마저 흩어진다 하더라도, 눈앞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미소를 위해서면 나는 얼마든지.

... 그래.

꽃봉오리가 긴 겨우내 얼어붙은 눈 위로 돋아난다. 초봄이 드리워진 카르티스의 눈가가 눈부심을 견디지 못하고 희게 옅어진다. 이렇게나 날이 따스하니 곧 일어설 것이다. 과업도 거짓도 모든 것은 그 후였다. 

그러나 꽃이 핀다는 것은 지는 것만이 남았단 뜻이었다. 칠흑 같은 응달 속 마지막 다정함이 저물어간다. 아무리 그만두어라 울부짖어도 당신은 한 글자씩 꾹 눌러쓰듯, 끝까지 말을 이어갔다. 

우리가 이루지 못한 것들. 지키지 못한 것들. 

당신이... 끝까지 해내리라 믿어. 

우리라니. 전부 그대가 일구어낸 것들 아닌가. 어째서 그런 말을 해.

붙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곧 떠나갈 이는 잔잔했으나 남겨진 자는 비걱거리며 무너져간다.

부탁해. 카르티스.

부디 내 몫까지.


부탁할게......

흐르는 눈물 한줄기를 끝으로, 눈은 영원히 감긴다.

식어버린 손을 계속해서 붙잡아 봤자 한숨처럼 빠져나갈 뿐이다. 그 눈이 다시 떠질 일은 없기에 카르티스의 심장은 검푸르게 물들었다. 끝내는 본래 없었던 듯 스치는 바람결에도 산산히 부서져 멀리 흩날려 간다.

자신보다 소중한 것을 모두 잃어버린 한 사람을 시작으로, 이제야 울음소리가 아득히 넘쳐흘렀다.

처음이자 마지막 재판이 열렸다. 

갈루스 제국의 폐제. 카르티스 클라우디스가 선고 받은 형벌은 종신형이었다. 전 맹주의 뜻대로 사형이 없는 재판에서는 최고형 이었으나 그에게 이보다 무의미한 형벌은 없었다. 그렇기에 속박을 뿌리치고 바닥에 몸이 짓이겨져도 오직 죽음만을 간청하였다. 아무리 소용없다 할지라도.

아직 허물지 않은 갈루스 성 한켠, 죄수는 그곳에서 남은 평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왕의 국서였던 자에 대한 예우라는 명분이었다. 조금 더 내밀히 들여다보자면, 사랑하는 이를 잃은 망자는 그뿐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듯이. 

왕의 죽음에 그가 무결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 궁전에서 그들과 어린 공주가 함께 머무르곤 했다는 사실 또한 기사들은 알고 있었다. 죄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유배지가 아닌가. 너무도 사랑했기에, 연옥보다 괴로운 감옥으로 변해버린 그곳은.

카르티스는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았다. 오직 바라고 바랐을 뿐이다. 해가 뜨지 않기를, 아무도 깨어나지 않는 밤이 계속되기를. 다시는 이 눈이 떠지질 않기를. 

무능한 해가 뜨고 무가치한 달이 지는 그런 날이 계속되었다. 자격이 없는 것은 알고있었다. 그러니 숨이 절로 멎는 기적만을 바랄 수 밖에.

그러나 아무런 비극도 희극도 없이 시간은 흘러간다. 성 밖의 가지에 새순이 돋아나고 푸른 잎이 날리고, 앙상하게 메마르다 다시금 봉오리를 맺고. 숨이 달려있기에 내쉬는 형벌만을 번복해서. 

쌓여진 시간을 보여주는 먼지로 바래버린 창문은 일말의 빛도 들이지 않았다. 

겨우 남은 한조각, 아직 투명한 유리로 반사된 햇빛이 눈가를 찌른다.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반짝임에 저도 모르게 카르티스는 지워버렸던 바깥을 내다보았다. 움푹 패여진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린다. 

그의 어린 딸이 정원을 뛰놀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몹시 사랑스러웠다. 종소리 같은 웃음이 심장이 빈 자리를 낭랑하게 울린다. 무언가 뜨겁게 울컥 치닫는다. 

여린 빛이 잠깐이나마 눈 감으면 사라질까 봐, 시야가 자욱하게 잠겨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날아가듯 가볍고 작은 몸을, 

두 팔 널리 뻗어 기다리고 있는 이는...

끝내 넘쳐흐르고 말았다. 시리도록 하얀 꿈이 손짓하는 대로 두발은 움직였다. 삭막한 궁을 나서 마주한 바깥은 옛 기억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지만, 늘 함께 거닐었던 길목만은 변함없었다.

정처없이 나아가다 조용히 걸음을 멈춘 곳은, 이제는 이름 모를 풀로 무성하게 덮인 쓸쓸한 정원. 

빼곡한 녹음 속 무언가 희게 흔들린다. 무릎을 꿇어 풀숲 사이로 거친 손을 내밀었다. 무성한 잡초 사이 어린 꽃망울이 고개를 툭 내밀었다. 

때마침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솜털같은 꽃잎이 그의 손등을 살며시 쓸었다. 희고 동그란 뺨을 부비듯이. 이다지도 따스한 온기로.

카르티스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소리 없이 무너져 내렸다. 

다음날 초엽의 풀잎은 사라지고 하얀 꽃 한송이만이 오롯이 피어있었다. 두 손은 매일 상처로 뒤덮여 졌으나 고통은 처음으로 누그러 들었다. 그후태양이 뜨고 지는 순간까지, 그곳을 보살피는 것만이 카르티스의 새로운 삶이 되었다.

그것밖에는 할 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


잔잔한 햇살 속 찻잔은 나직하게 식어있었다. 

카르티스는 하얗게 덧칠해버린 기억 속, 간신히 남은 부분을 간추려 풀어내었다. 아주 단순하고 명료하게.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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