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로드] The Last Emperor III
https://youtu.be/s-QVbW5FqAA?si=IpRhwmyyIe6_9n2w
잔잔한 햇살 속 찻잔은 나직하게 식어있었다.
하얗게 덧칠된 기억, 그 사이로 얼핏 드러난 반짝이던 순간들. 그에게 남은 마지막 세계. 메마른 하얀 손이 움켜쥐자 비로소 갇혀있던 이야기는 해방되었다.
허나 풀려난 글귀들은 날아오르지 못하고 차가운 땅바닥으로 추락한다. 시작과 끝이 망가진 이야기의 정해진 최후였다. 마침표마저 흐릿해진 문장의 주인공만이, 단 한 번의 기적처럼 옛 모습 그대로 눈앞에 존재할 뿐.
온전히 믿는 것도 아닌, 그러나 믿지 못하는 것도 아닌 검은 눈동자. 흔들리면서도 자신의 눈을 피하지 않는 올곧은 너는 영원할 것이다. 이 세상이 수없이 태어나고 멸망해도 늘 떠오르는 태양보다 영원히.
다시는 마주할 수 없다 생각했던 맑은 눈동자가 그의 심장에 여린 불씨를 피워낸다.
너는 여전히 나의 꿈이다.
자신도, 이 황궁도 초봄의 햇살이 번져가고 황금의 장미가 피어났다. 그렇게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따스하여서, 얼핏 드리워진 온기를 저도 모르게 잡아보려 한 것이 잘못된 시작이었을까. 제 손끝이 닿은 빛은 찰나 거대한 균열로 변하여 무너져 내렸다.
꿈은 결국 꿈일 뿐이었던 것이다. 끝내 눈앞의 너로부터 깨어나야만 했다. 헤진 소매 아래, 떨구어진 손아귀에 가까스로 힘이 들어간다.
나는 그대의 얼룩이다.
아주 작은 한방울 만으로 모든 것을 문드러지게 할 운명. 그대가 사랑한 것, 그대를 사랑한 전부를. 알면서도 놓지 못한 그 어리석음을 자신은 비참하게도 사랑이라 정의하였다.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떠나보내고야 알았다. 결국 자신은 아무것도 내주지 않았으니까.
시작과 끝이 하나가 된 마지막 순간은 지금도 제 안에서 돌아가고 있다. 그들을 에워싸던 떨리던 대기. 투명한 손가락, 내려앉던 입술, 그리고 눈동자 속에 감추어진 못내 전하지 못한 것까지.
카르티스는 빠짐없이 목도하였다. 그건 무엇이었을까. 원망, 그도 아니면 증오일까. 아니면.
자신과 만났던 모든 순간의 후회일까.
만약 그렇다면, 마지막 숨결을 끌어안고 지금까지 이 생을 이어간 의의는 바로 이곳에 존재하였다.
자신을 버리라고. 그리해야만 한다고 말하기 위해서.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비로소 떨림은 멎었다. 내내 다물렸던 입술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다.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말 한마디를 전하기 위해서 였다.
아니야.
입을 열기도 전인데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허나 어째선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막지도 못한 채, 카르티스를 지켜보던 로드의 머릿속이 고동치며 울린다. 간절히 애원하는 듯, 떨고있는 이 목소리는 분명.
아니.
아니야. 카르티스.
챙그랑 ! 바닥으로 떨어진 찻잔이 카르티스의 첫마디를 가로막으며 산산조각난다. 검은 제복에 둘러싸인 몸이 바닥으로 기울어진다. 살이 에는듯한 파열음도 가라앉는 의식을 붙잡지는 못했다.
- 아.
머리가 깨질 거 같아...!
흐릿해지는 시야로 카르티스가 들어온다. 자리를 박차고 달려온 그는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왜일까. 귓가에 들리는 소리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느새 주위가 고요해진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검은 눈이 감긴다.
이상하다.
분명, 오랫동안 누워있어 몸이 무거울 텐데.
가볍고도 편안한 감각. 마치 하늘에 떠있는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어떻게 된 거지.
안식도 잠시, 끔찍한 통증과 함께 기억은 파편처럼 새겨진다. 등 뒤로 밀려오던 녹을듯한 열기. 머릿속을 울리던 이명.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어둠. 떠오르는 것은 이게 전부였다.
무엇을 하고있던 건지, 무얼 해야할지도 잊어버린채 자신은 우두커니 암흑속에 서있었다. 그렇게 제 이름마저 희미해질 무렵,
카르티스.
오직 그 이름만이 선명하게 그리웠다.
오랫동안 닫혀있던 두 눈이 떠진다. 밝은 빛이 쏟아지며 처음으로 들어온 건, 다름아닌 정말로 보고 싶었던.
- 는?
허나 제가 붙잡을새 없이 첫마디는 흘러나온다. 찰나 그의 눈가에 비탄이 맺힌다. 곧 떨구어진 눈물처럼 스쳐 지나갔어도, 눈동자에 깃든 영원한 상실감은 어찌할 수 없이 커다랗고 커다랬으니까. 게다가 이어지는 말은 얼마나 되뇌었는지 자칫 진실처럼 들릴 정도지만.
애석하지만 전부 알고 있었다. 저 눈빛을, 그리고 거짓말을 모르는 당신을.
그도 그럴게... 얼굴에 다 드러나는걸.
모든것이 무너지는 슬픔이 순식간에 덮쳐왔다. 눈가로 나오지 못한 눈물은 부서진 심장으로 울컥거리며 흘러나온다. 투명한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언젠가 아이의 옷자락처럼 너울거려서, 시야가 아릿해지기에 자꾸만 눈을 감았다.
그 작은 몸으로 얼마나 아팠을까. 지켜주지 못한 아이는 제가 따라가 한없이 부족하지만 용서를 빌 터였다. 너무 늦어버렸지만 다시금 함께 할 수 있어. 하지만...
카르티스.
당신에게 해야 할 말이 있는데.
.
.
.
.
" ... ! 눈...! ....떠....! "
떨어지는 눈물방울은 가슴을 짓누르는 기억보다 무거웠다. 그가 오랫동안 홀로 삼키던 어둠이 고스란히 배어 나온 것처럼. 슬픔보다 차가운 눈물이 뺨 위로 번져가자 고요했던 눈커풀이 차츰 빛을 되찾는다.
힘없이 늘어진 몸은 카르티스의 품에 고이 안겨있었다. 그는 줄곧 자신을 보고 있었다. 손대면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로드는 자신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온 힘을 다해 눈물에 젖은 입술을 움직였다.
" ...해.... "
사실은 아무것도 부탁하고 싶지 않았다. 태어나는 순간조차 짓눌렸던 당신에게 어떠한 짐도 지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 말을 남기는 것조차 너무나 무서워서. 어쩌면 나를 영영 용서하지 않을까 봐.
해야했으나 결국 하지 못했던,
정말로 남기고 싶었던 마지막 말은.
" 미안해 .... "
사라질듯이 유약한 말 한마디로 인해 세계는 멈추었다. 흘러넘치는 눈동자도, 위태로운 숨결도, 전능한 시간조차 모두. 두 사람의 눈물이 한데 섞이며 이제야 하나가 되었다.
갇혀있던 과거가, 지금의 순간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당신을 혼자 두고 가서.
줄곧 혼자였던 당신을 또 홀로 만들어 버려서.
미안해. 카르티스.
...스터.
마스터.
로드는 천천히 눈을 뜬다.
황량할 만치 높은 천장은 짙은 어둠에 잠겨있었다. 목소리의 근원지를 찾기위해 반쯤 감긴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다 멈칫 굳어버린다. 제 옆에 누워있는 남자, 카르티스는 깊이 잠들었는지 조금의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로드는 그런 그에게 시선을 둔채 입을 떼었다.
" 뮤? "
주인의 부름에 푸른 머리를 가진 소녀의 형상이 허공에 펼쳐진다. 샛별처럼 흐릿하지만 소녀의 표정만은 미안함이란 감정으로 선명하다. 여린 목소리가 떨구어진 고개 밑으로 새어 나온다.
" 미안해. 바로 마스터의 위치를 추적 할 수 없었어. 미확인 존재로 인해 접근이 제한되어서..."
" 아니야.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
로드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제게 일어났던 알 수 없는 사건의 원인을 이제는 알게 되었기에. 이곳으로 자신을 불러온 이도, 돌아가지 못하도록 붙잡은 존재 또한 아마....
" 다행이다. 그러면 지금, 마스터의 좌표 위치를 수정할게. 접속 권한을 허락해줘. "
" 지금? "
되묻는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주저 없이 떠나기에는, 아직 풀지 못한 매듭이 너무 많았다. 주인의 망설임을 소녀는 알아챘기에 더욱 힘주어 말한다.
" 더 이상 지체되면 시공간의 조정이 어려워. 해당 차원의 일출이 시작되기 전, 이동해야 해. "
그 말을 끝으로 소녀의 목소리가 폭풍우에 휘말리듯 멀어져 간다. 흩어져 가는 음성에서, 드문 들리는 단어들이 합쳐지자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 시공간 방- 통신... 제...한. - 거야. "
" 처음 마스터가 눈을 뜬 곳. 그곳으로 이동하면 뮤가 통로를 열게. 조정이 가능한 유일-....... "
팟, 연결이 완전히 끊겼는지 형상은 어둠으로 사라졌다. 더는 무엇도 들려오지 않았다.
창이 밝아온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푸른빛이 돌기 시작한 하늘을 응시하다, 여명을 등진채 잠이 든 남자를 지그시 담는다. 눈을 감고 있어도 처음 보았던 초췌한 모습 그대로였다. 로드는 그에게 손을 뻗었다.
곧 닿을 것만 같던 손길은 도로 거두어진다. 어떤 짓을 하든, 무슨 말을 하든 어차피 괴로움만 안겨주겠지.
다신 만날 수 없을 테니. 바닥에 떨어진 겉옷을 주워 조심스레 걸치고는, 발소리도 없이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텅 비어버린 황궁에 긴박한 걸음 소리만이 울려 퍼진다. 거대한 문을 살짝 빠져나오자 보인 풍경은, 아직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땅이었다. 짙은 안개까지 섞여 사방은 온통 잿빛으로 술렁거린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어.
카르티스가 안내했던 길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앞서가던 그의 발걸음을 되감듯 거꾸로 따라 걸었다.
탁한 회색의 자락이 발아래를 휘감는다. 온몸에 달라붙는 한기를 뿌리치며 계속 걸어가도, 앞으로 나아가긴 커녕 한곳을 빙빙 도는 것만 같다. 다가오는 시간속에 갇힌 로드의 심장이 요동친다. 쿵, 생각은 멀어지고 박동소리만이 커져간다.
이러다 해가 뜨기 전까지 가지 못하면.
두려움에 질끈 눈을 감은 그 순간, 누군가 자신의 손을 강하게 붙들었다. 그녀를 그렇게 붙잡을 수 있는 이는 단 한사람 이었다.
" 돌아가는 건가. "
로드는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가 떨고있음을 알아차리자 저도 모르게 뒤돌아 보고 말았다. 한번도 본적 없는 표정의 그가 가슴에 들어온다. 한때 세계의 황제였던 존재라곤 믿을 수 없는, 약하디 약한 인간의 얼굴.
지금 잡은 이 손을, 카르티스는 놓고 싶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가능성까지 엮을 수 있는 지금의 그녀가 가진 힘이라면.
아니, 그럴 필요조차 없다. 이 손을 놓지만 않으면 된다. 이대로 해가 높이 떠오를 때까지 품속에 끌어안아, 그리하여 함께 아침을 맞이한다면.
허나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보잘 것 없다 여긴 제 욕망이 일으킨 거대한 재앙들을.
시간으로 친다면 하루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기나긴 세월동안 찾지 못했던 것을 겨우 손에 넣었다. 그렇기에 지금 무얼 해야 할지도 알고 있었다.
카르티스는 로드의 손을 놓지 않았다. 대신 그대로 잡은 채 어딘가로 그녀를 이끌었다. 제 손을 잡고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검은 안개를 두갈래로 가르며 나아간다.
저 멀리 지평선으로 일광이 비쳐오자 어둠은 힘을 잃고 사라진다. 잠들었던 꽃들이 새로운 오늘을 맞이하려 태양을 향해 고개 든다. 두사람이 만났던 정원, 처음이자 끝을 맞이할 그곳에 도착하였다.
카르티스의 걸음이 멈춘다. 한 발자국, 그는 결코 내디딜 수 없는 세상의 경계선이었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때처럼. 그러나 놓아주는 손에 망설임은 없었다.
알고있기에 로드 또한 망설임 없이 한발을 내디뎠다. 빛을 머금은 바람이 불어온다. 활짝 피어난 꽃에서 떨어진 꽃잎들이 밝아오는 하늘에 무수히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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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멀리 태양이 눈부신 빛으로 세상을 감싸며 떠오르고 있다. 이제는 영원히 헤어질 두 사람을 축복하는, 각자 나아갈 길을 밝히는 이정표였다.
어떤 말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지만. 로드는 숙여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이 말만은. 잠긴 목에서 간신히 그러모은 또렷한 목소리가 작별을 고한다. 바람은 점점 강하게 불어온다.
" ....안녕. 카르티스."
그렇기에 답은 바라지 않았다. 분명히 그는...
" 안녕히. "
마주 건넨 인사가 뜻밖이었는지, 검은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진다. 카르티스의 굳어있던 입매가 조심스레 움직인다.
" 나의 .... "
이 울림을, 다시 입에 담을 일이 있을까.
마지막으로 본 그는 언뜻 웃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허나 무수히 날리는 꽃잎에 그 희미함조차 사라지게 되었다.
바람이 멎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더는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히 사라진 자리, 그 위를 내리앉은 꽃잎들이 반짝이며 남아있었다.
카르티스는 고개를 들었다. 태양이 제 위로 어둠을 몰아내며 떠오른다. 세계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간다. 눈꺼풀이 닫혀도 사방은 여명으로 차오른다.
기나긴 밤을 날아 마침내 그에게도,
아침이 찾아왔다.
이튿날 황제는 사라졌다.
가꾸던 정원의 꽃 한송이도, 새하얀 찻잔도 그대로 남기고. 아침 해가 떠오르자 간밤의 이슬이 말라버린 것처럼.
허나 그가 사라진 연유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니.
누구도 그를 찾아 나서지 않았다.
The Last Emperor.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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