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오브 히어로즈

천재 박사와 안드로이드!

천재 공학 박사 프라우와 안드로이드 로드의 이야기.

1.

프라우 레망은 끝내주는 천재 엘리트 공돌이였다. 아, 그래. 정정. 공학 박사. 됐지? 어찌되었든 이 천재 박사는 공학 계열, 그 중에서도 안드로이드를 비롯한 로봇 생산 계열 쪽에서는 누구나 알아주는 인재였다.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어느 날 이 굉장한 인재에게 한 가지 생각이 퍼뜩 떠오른 것이다.

'고성능 안드로이드를 대량생산하면 어떻게 될까?'

프라우 레망은 이를 실현시킬 머리도 있었고, 기술력도 있었고, 여기엔 좀 쓸모없는 내용이지만 잘난 얼굴도 갖고 있었다. 그런 프라우 레망에게 부족한 것이 단 하나 있었으니.

바로 스폰서.

후원자가 없어서 연구를 하고 개발을 할 비용이 없단 게 문제였다. 아무리 머리가 잘나면 뭐해. 얼굴이 잘나면 뭐 하느냐고. 당장 돈이 없어서 연구의 ㅇ자도 하질 못하는데! 그때였다. 가난한 천재가 머리를 싸매고 이리 뒹굴, 저리 뒹굴하던 차에 구원의 손길이 내밀어진 것은.

"저희 회사는 고성능 안드로이드의 대량 생산에 아주 흥미가 많답니다. 어떤가요? 갈루스 코퍼레이션에 온다면⋯. 후후, 당신이 바라는 안드로이드를 마음껏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구요?"

긴 갈색 머리의 여성은 잘 생각해 보라며 명함 한 장을 남기고 떠났다. 여자의 이름은 체자렛 알티온. 그가 속한 회사는 본인이 밝혔듯 갈루스 코퍼레이션이었다. 갈루스 코퍼레이션이라면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다 아는 거대 기업이다. 게다가 마도 공학의 천재로 이름난 솔피 레벤하이트 또한 갈루스 소속이라는 건 연구에나 관심 있던 이쪽 판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었다. 프라우는 입맛을 쩝 다셨다. 갈루스, 갈루스라⋯. 그래, 뭐. 기회는 있을 때 잡는 거지!

그렇게 프라우 레망은 갈루스 코퍼레이션 소속 공학자가 되었다. 무려 고성능 안드로이드의 대량 생산 프로젝트까지 총괄하는 전도유망한 일꾼이 되어서.

2.

고성능 안드로이드라는 건 눈 한 번 깜빡인다고 뿅 나타나는 그런 종류의 물품이 아니었다. 당연히 여러 시행착오가 필요했으며 대량생산을 위해 먼저 시범적으로 샘플을 제작해야만 한다. 즉, 프로토 타입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프로토 타입에는 갈루스 코퍼레이션의 후원을 받은 김에 이것저것 다양한 기능을 잔뜩 넣었고, 이에 대해 프라우는 솔직히 말하자면 꽤 기대를 걸고 있었다. 돈을 잔뜩 잡아먹고 태어난 프로토 타입의 실제 기능은 어떨까? 원래 넣기로 예정된 인공지능보다 좀 더 고차원적인 성능의 인공지능을 프로토 타입에 탑재했는데, 이게 어떻게 작동될까? 잔뜩 설레고 기대되는 마음이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을 뜯기 전 아이가 갖는 설렘 같았다.

괜히 침을 꼴깍 삼키며 프라우는 안드로이드의 칩을 만지작거렸다. 프로토 타입은 인간형-그 중에서도 여성형-이었다. 안드로이드 주제에 머리카락도 있고 사람과 같은 피부도 있어 겉으로만 봐선 인간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굳이 외형적으로 차이점을 찾자면 프로토 타입의 뒷목에 난 홈 구멍이 전부일까. 그 구멍은 인공지능 칩을 넣는 구멍이었는데, 프라우는 아까부터 그 칩을 넣질 못하고 손으로 조물대고만 있었다. 조금만 더 창조주로서의 생명 창조 직전의 설렘을 느끼고 싶단 게 그 이유였다. 그러길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프라우는 눈을 딱 감고 인공지능 칩을 프로토 타입의 안으로 밀어넣었다. 

윙, 위잉- 칩 안에 있던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가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성공인가?! 제가 실패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막상 자신이 창조한 결과물을 보고 있자니 더럭 겁이 났다. 프라우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고는 프로토 타입을 지켜봤다. 50%, 70%⋯ 마침내 100%.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완전히 프로토 타입의 몸체에 설치되었고, 프로토 타입이 감고 있던 눈을 느리게 떴다.

아.

검은 눈이었다. 그야 알고 있었다. 프라우 본인이 설정한 색상이었으니 모를 리가 없었다. 검은 눈, 검은 머리, 기본으로 입혀 놓은 의복마저 검은색. 별 의미 없이 고른 색상이었으나 제 창조물이 눈을 뜨는 순간 그 모든 게 의미를 지녔다. 검은 눈동자가 한 번, 두 번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돌려 저를 똑바로 응시했다. 프라우는 제 몸이 무심코 움찔거리려는 걸 애써 의식적으로 내리눌렀다.

"당신은⋯"

목소리 괜찮네. 실없는 생각이나 하는 것도 잠시, 프로토 타입이 지금 자신을 불렀다는 걸 깨달은 프라우가 다소 호들갑스럽게 입을 열었다.

"음? 나? 어어, 나는 프라우 레망. 널 만든 천재 엘리트 공학 박사야."

어때. 몸의 움직임은 좀 괜찮아? 어디 어색한 곳은 없고? 프로토 타입이 고개를 저었다. 이야, 고개를 저어서 의사 표시도 할 줄 알아? 하긴 고성능 인공지능을 탑재했으니 사람들 간의 기본적 의사소통 방식을 알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닌가. 이것저것 시끄럽게 떠들던 프라우의 목소리를 뚫고 프로토 타입이 입을 열었다.

"⋯나는, 누구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프로토 타입이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었고, 고로 이 창조물은 존재한다. 프라우 레망은 순간적으로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물론 프로토 타입의 물음은 단순히 주변 환경이나 자기 자신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려는 기계적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뭔가, 이건 좀 더⋯

"너⋯ 는 그러니까, 음."

내가 지금 뭘 만든 거지? 프라우는 눈동자를 굴렸다. 안드로이드. 그가 만든 건 분명 안드로이드였다. 그 중에서도 앞으로 대량 생산을 할 안드로이드 제품의 프로토 타입. 결코 사람이나 생명이 아닌 하나의 로봇.

"안드로이드지. 안드로이드."

그건 자기암시와도 같았다. 그래. 안드로이드야. 안드로이드, 안드로이드⋯. 몇 번 입에서 단어를 굴리던 프라우는 고개를 번쩍 들고 프로토 타입에게 말했다.

"안드로이드이긴 한데, 안드로이드 다섯 글자는 너무 길다. 줄여서 로드라고 하자."

"로드?"

"그래, 로드. 네 이름이야."

제 이름을 얻은 창조물이 이름을 되뇌었다. 로드, 로드. 그 모습을 보고 프라우가 픽 웃었다. 그래, 아까의 그 느낌⋯. 자신이 감히 인간이 만들어선 안될 무언가를 만들어낸 게 아닌가 싶었던 감각. 그건 전부 기분 탓일 터다. 프라우는 무언가를 털어내려는 것처럼 머리를 휙휙 저었다. 

그걸 본 로드는 어색하게 따라 웃었으며, 프라우를 따라 머리를 저었다.-아, 애 앞에선 찬 물도 못 마신다더니! 라며 기겁하는 프라우는 덤이었다.- 그렇게 인간 하나와 로봇 하나는 웃음으로 그 순간을 넘겼다. 석연치 않은 예감을 뒤로 하고서.

3.

"프라우."

역시 목소리 좋네.

"⋯프라우."

목소리에 대한 감탄을 하기도 잠시, 덮고 있던 이불이 어딘가로 끌려갔다. 추워!

"⋯아, 안 돼! 저리 가. 나는 좀 더 자야 한다고."

"그거야말로 안 돼. 이미 적정 수면 시간을 넘겼어."

이불을 전부 빼앗긴 프라우 레망은 황망한 시선으로 위를 올려다 보았다. 검은 눈, 검은 머리, 검은 옷. 자신이 만든 고성능 안드로이드의 프로토 타입, '로드'가 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손엔 저에게서 뺏은 이불을 둘둘 감은 채로.

"일어나. 프라우."

이불 강탈자는 방 밖으로 나가 햇볕 좋은 베란다에 이불을 널었다. 햇볕으로 살균 소독이란 건가? 저런 건 또 어디서 배워 온 거람. 프라우는 크게 하품을 하며,

"너 진짜 가만 안 둬⋯."

따위의 부질없는 선포를 했다. 와, 정말 부질없다. 가만 두지 않으면 뭘 어쩔 건데? 고성능 안드로이드의 대량 생산을 위한 그 대망의 첫 걸음, 프로토 타입을 가만 두지 않으면 어쩔 거냐고. 응? 자신이 묻고 자신이 상처받다니 만담도 이런 만담이 없었다. 이불이 벗겨져 찬 공기를 고스란히 맞자 그제서야 잠이 좀 달아난 천재 공학 박사는 꾸물꾸물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방 밖에서 로드가 물었다. 프라우, 무슨 맛 주스를 마실 거야? 

"그거야 당연하지. 포도맛 주스로 부탁해!"

오늘도 평소와 다름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4.

로드. 안드로이드에서 두 글자를 빼내서 지은 이름. 프라우는 책상 위에 널부러져 연필을 굴렸다 잡길 반복하는 중이었다. 데구르르, 탁. 데구르르, 탁. 제가 만든 프로토 타입이 인간과 흡사할 거라곤 예상했다. 하지만⋯.

"프라우. 그렇게 바르지 못한 자세로 앉아 있으면 척추 수술비가 많이 나갈 거야."

이건 흡사해도 너무 흡사하지. 프라우는 바른 자세로 고쳐 앉으며 로드를 힐끔거렸다. 저 안에 진짜로 인간이 들어있는 거 아냐? 하지만 프로토 타입의 제작 전 과정엔 프라우 레망이 참여하지 않은 곳이 없었고, 저 안드로이드의 철판 아래 인간이 숨어 있을 리가 없단 것도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그렇다면 역시 고성능 인공지능 칩 쪽에 인간의 뇌라도 압축해서 넣은 거 아닐까? 이것 역시나 말도 안되는 가정이란 걸 알면서도 프라우는 의심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물론 이렇게나 대단하고 뛰어난 성능의 안드로이드가 무려 제 작품이라는 데에 자부심을 느끼긴 했다. 이 정도의 프로토 타입을 제작했단 게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 공학자들 사이에서 프라우 레망은 단박에 선망의 대상이 될 터였다. 하지만⋯.

"프라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지?"

"어?"

이렇게 가끔씩 훅 치고 들어오는 녀석을, 굳이 다른 놈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도록 하고 싶지가 않았다. 저 얼굴로, 저 목소리로 대량 생산이 된다고. 나만 알고 있는 녀석이 아니게 된다고. 저 모습이 나 아닌 다른 수많은 사람들 옆에, 집 구석구석에 있게 된다 이거지.

"너, 내가 깜빡이 키고 들어오랬지?"

"항상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네, 프라우."

죄송해요. 이해하지 못했어요. 지나간 21세기에나 출시되었던 구닥다리 인공지능 비서의 대사를 떠오르게 하는 말이었다. 아오, 내가 진짜. 프라우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구시렁거렸다. 제가 로드를 사람들 앞에 발표하지 않는 건 굉장히 이성적이지 못한, 심지어는 비합리적인 행동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무려 프로토 타입에서 저 정도의 월등한 성능이다. 창조주인 저조차도 가끔씩 이 안드로이드가 사람이 아닌지를 의심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저걸 보면-로드는 최근 체스에 흥미를 가져 체스 기보를 읽던 참이었다.- 당장 눈이 돌아가서 프로토 타입을 내일부터 시판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상부에 올라가는 보고서를 조작해가면서까지 저 녀석의 성능을 낮춰 보고하고, 원래 목표했던 성능치를 달성하기 위해선 아직 지속적인 연구 및 개발이 더 필요하다며 굳이 제 옆에 두고 있는 이유는⋯.

체스 기보를 읽던 로드가 프라우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마주치곤 살풋 눈웃음을 지었다. 제조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표정이 아주 자연스럽다. 어이가 없어서, 원.

'⋯넌 대체 무슨 생각이냐. 프라우 레망.'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명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5.

"프라우. 세잎 클로버의 꽃말을 알아?"

예이 예이, 알고 말고요. 대체 언제적 대사냐, 그거. 답을 뻔히 알면서도 프라우는 공연히 툴툴대며 말했다. 그런 풀떼기 꽃말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런 건 내 전공 분야가 아냐. 로드가 슬며시 웃었다. 아, 또 저 미소. 프라우는 어쩐지 로드가 제 속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단 착각에 휩싸였다. 행복이래. 세잎 클로버의 꽃말. 그렇게 말하는 로드의 미소가 정말로 행복해 보여서, 프라우는 치밀어오르는 물음을 내뱉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너, 행복이 뭔지는 알고?

녀석이 계속 웃었으면 한다. 동시에 제 물음으로 인해 난처해질 얼굴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도 아닌 주제에 난처해질 수도 있다니! 정말이지 끝내주는 성능의 안드로이드가 아닌가. 프라우는 제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어져 로드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따지고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안드로이드, 즉 로봇이란 건 기본적으로 입력된 정보값을 토대로 움직이는 무기물이다. 그리고 지금 저는 그 무기물 덩어리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그 녀석이 난처한 표정을 출력하는 게 보고 싶으면 그냥 명령을 내리면 될 텐데 그걸 또 굳이 명령은 내리지 않으면서, 막상 난처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생기면 애써 그 상황을 무마하려 하는 게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비참해. 비참하다고. 저와 영영 동등하지 않을 감정선이 원망스러웠다. 아, 이 세계에 왜 신이 없는지 알겠다. 신이 인간에게 가진 마음과 인간이 신에게 가진 마음이 서로 동등할 수가 없기에 신이 이 세계를 떠난 게 틀림없었다. 애초에 시작점부터 인간과 로봇으로 서로 달랐다. 인간과 로봇, 더 자세하게 표현하자면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는 인간과 0과 1로만 구성된 프로그램. 아무리 고성능 인공지능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느끼는 감정을 똑같이 느낄 순 없었다. 그게 못내 억울하고 비참해 속이 배배 꼬였다.

더 억울한 건 프라우 레망이 로드에게 품은 감정은 딱히 유성애적 감정이라든가, 쉽게 말해 저 로봇 녀석이랑 자고 싶다든가 그런 노골적이고 거창한 감정마저 아니었다는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친애 내지는 정이라 불릴 무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품는 보답받지 못할 감정은 그 자체로 사람을 지옥에 처박았다. 저기에서 멍청하게 세잎 클로버를 들고 웃는 깡통만 제외하고선. 아, 쟨 사람이 아니지. 참.

그 와중에 깡통 녀석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 건 또 기꺼웠다.

"나도 정말 구제불능이다⋯."

의아해하는 로드에게 굳이 제 혼잣말을 설명해주진 않았다. 그런 게 있어, 그냥.

6.

체자렛 알티온은 제게 올라온 프로젝트의 보고서가 조작되었다는 걸 눈치챘다. 프로젝트의 총괄자는 프라우 레망. 분명 고성능 안드로이드의 대량 생산을 위해 우선 프로토 타입을 만들었다고 했던가. 그런데 어째서 프로토 타입의 성능을 더 낮게 표기되도록 조작했을까. 아직 연구 기간이 더 필요하다고? 글쎄, 그 정도에 불과한 인재였다면 애초에 갈루스 코퍼레이션으로 데려오지 않았을 텐데. 체자렛은 검지로 책상을 한 번 스윽 훑은 후 톡, 톡 두드렸다. 책상 표면의 진동은 이내 그 위에 놓여 있던 고급 찻잔 안의 홍차로까지 번져나갔다. 잘게 떨리는 찻잔 속에 체자렛의 고운 미소가 담긴다.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틀림없군요." 

7.

입 안에 넣은 포도맛 사탕은 달콤했다. 혀로 달짝지근한 사탕을 굴리다 보면 복잡했던 심경마저 사르르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이게 다 당이 부족해서 그랬던 거라고. 제가 만든 고성능 깡통의 성능이 조작된 보고서를 상부에 올렸으니 당분간은 시간을 좀 번 셈이었다. 무슨 시간이냐면, 제가 로드를 독점할 수 있는 시ㄱ⋯

"진짜 미쳤나."

프라우는 손으로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착잡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 탓에 손길이 거칠었다. 프라우. 로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프라우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삐빅, 안드로이드의 손 부분에 내장되어 있던 체온 감지 센서가 프라우 레망의 현 체온이 정상 체온임을 알렸다.

"체온은 정상이야. 사람이 열로 미칠 정도의 체온은 아니니 걱정 마."

"진짜 미쳤나⋯."

멍청한 표정의 프라우를 의아하게 보던 로드가 웃었다.

"잠시 1층의 비품 창고에서 포도맛 사탕을 가져올게. 최근 포도맛 사탕을 엄청 먹고 있는 거 알아? 방금 입에 넣은 게 마지막 사탕이었어."

아, 진짜?! 프라우는 새삼 맥이 탁 풀려 자리에 늘어졌다. 언제 그렇게 다 먹었담. 연구동 최상층에 자리한 프라우의 연구실로부터 1층의 비품 창고까지는 다소 거리가 있었고, 천재 공학 박사께서는 그 거리를 왕복하는 귀찮음을 감수하고 싶진 않았다. 안드로이드 좋은 게 다 뭐냐.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프라우는 밖으로 나가는 로드를 향해 손을 휘적거렸다.

"그럼 얼른 다녀와."

다녀올게. 로드가 답하며 방을 나섰다.

8. 

그리고 로드는 한참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9.

입 안에 있던 사탕을 녹여먹고도 30분이 더 흘렀는데도 로드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1층 비품 창고까지 심부름을 하다가 길을 잃었나? 고성능 안드로이드가 그 정도 심부름에 길을 잃을 리 없을 텐데도, 어쨌거나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 건 사실이라 프라우는 슬슬 걱정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끼익. 의자가 뒤로 밀려나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거슬렸다. 연구자답게 흰색 가운을 걸치고 방 밖으로 나서니 때마침 엘리베이터는 또 1층에 머무른 채다. 일이 안 풀리려니 이렇게도 안 풀릴 수가 있나. 연구동 최상층에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연타한 프라우는-물론 그렇다고 엘리베이터가 더 빠르게 올라온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1층 버튼을 누르고 문을 닫았다. 중간에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일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평소 연구동 1층 복도에는 사람이라곤 엘리베이터에서 저 멀리 떨어진 안내 데스크에 상주하는 직원 한 명이 전부였다. 분명 그럴 터였는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1층 복도 끝의 비품 창고까지 향하는 길목에 오늘따라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긴 갈색 머리. 또각또각 소리가 나는 구두. 묘한 미소까지. 프라우 레망에게 명함을 건넸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체자렛 알티온, 저 사람이 왜 여기에⋯. 프라우는 퍼뜩 드는 직감에 당장 비품 창고로 달려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설마, 아니겠지. 체자렛 알티온과 로드가 무슨 접점이 있어서 만났겠어. 그렇지? 하지만 본능은 여전히 비상벨을 울렸다.

프라우는 애써 평범하고 느긋한 걸음걸이로 체자렛 알티온에게 다가갔다. 비품 창고에 가기 위해선 체자렛의 앞을 지나쳐야만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게다가 저를 이 대기업에 꽂아준 사람 아닌가. 인사를 하지도 않고 지나가는 건 꽤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어머, 프라우 레망. 그 동안 잘 지냈나요?"

이미 제가 그 쪽으로 걸어오는 걸 다 보고 있었으면서 이제야 뭔 처음 봤다는 것 마냥 목소리가 환하다. 찡그려지려는 미간을 애써 웃음으로 피며 프라우는 자리를 벗어나려 애를 썼다.

"예. 이것저것 연구도 좀 하면서요. 갈루스로 오라는 제안을 주신 덕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감사 인사가 늦었군요.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현대인의 고개는 원래 값싼 법이었고, 이 자리에 선 게 프라우 레망이 아니라 그 누구였더라도 자신을 낙하산으로-물론 프라우 레망의 실력이야 출중했지만!- 꽂아준 사람 앞에서 인사를 하지 않을 순 없을 터였다.

"후후, 감사 인사는 오히려 제가 해야겠던데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프라우를 묘한 눈빛으로 훑던 체자렛의 입술이 움직였다. 당신이 개발한 프로토 타입. 굉장한 성능이더군요. 저 정도 고성능 안드로이드라면 오히려 다운 그레이드를 해서 대량생산을 해야 될 정도예요. 아직 대다수의 사람들은 지나치게 고성능인 인공지능 로봇은 감당할 수 없을 거랍니다? 우리 갈루스 코퍼레이션은 사회의 기술 수준이 발달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닌, 사회의 시민 의식이 발달하는 것에도 초점을 맞춰 기술과 시민 의식, 그 사이의 균형을 이루는 개발을 목표로 하고 있으니까요. 저렇게나 뛰어난 안드로이드를 받아들이기엔 대중들의 시민 의식이 아직은 뒤떨어지니, 아쉬운 일이지요. 후후, 후후후⋯.

그런데, 왜 보고서에는 안드로이드의 성능을 낮춰 보고하셨죠?

10.

그 자리를 어떻게 벗어났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체자렛과 프라우가 있던 장소에서 1층 비품 창고까지는 그리 긴 거리가 아니었음에도 비품 창고의 문을 열었을 땐 프라우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더워서일까. 아니면 식은땀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그런 걸 구분하는 건 무의미한 짓이었으니. 캄캄한 비품 창고 안에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자신의 안드로이드, 로드였다.

"프라우."

로드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낮고 담담했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내 보고서를 조작했어?"

그건, 말이 목구멍에 턱하니 걸려 그 이상 나오지 못하고 쌓였다.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는 말은 나오지조차 않았다. 뭐라고 말할까. 기껏 개발한 고성능 안드로이드의 프로토 타입에게 정이 들어서 그 유일한 안드로이드를 복제한 양산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꼴을 보기 싫었다고 말할까? 내가 개발한 로봇을 남과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할까? 상부에 로드의 성능이 하향 조작된 보고서를 올리면, 그 서류가 결제를 받고 여러가지 업무적 처리를 거치는 동안 로드를 저 홀로 독점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어서 그랬다고 말할까?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죄다 멍청한 말들 뿐이다. ⋯프라우. 로드가 답을 재촉했다. 공학 박사는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떨궜고, 안드로이드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애초에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 개발된 안드로이드였잖아. 내 성능이 뛰어나면 모두에게 좋은 거고. 그걸 굳이 성능까지 낮춰 조작할 필요가 있었는지, 그걸 묻고 싶은 거야. 나는."

프라우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았다. 열 수가 없었다. 그때, 로드의 손가락이 프라우의 입술을 누르고 입을 벌려 무언가를 입에 넣었다. 워낙 뜬금없는 일이라 프라우는 멍하니 로드의 손짓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뒤늦게 입에 들어간 무언가에서 맛이 느껴진다는 것을 알았다. 포도맛이었다. 자신의 입에 포도맛 사탕을 넣은 로드의 손가락이 제 윗니와 아랫니 사이를 스치고, 다시금 빠져나가는 그 일련의 행동이 지극히도 자연스러워서 프라우는 제가 이런 방식으로 사탕을 사람의 입에 넣으라는 행동 양식을 로드에게 프로그래밍 한 적이 있었는지 의심했다.

"대답을 못하길래, 당이 부족한가 싶어서."

그제서야 로드의 입꼬리에 걸린 작은 미소가 보였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아니, 애초에 안드로이드를 두고 '눈이 웃고 있지 않다' 운운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란 걸 깨닫는다. 어차피 사람도 아니잖아? 프라우는 이를 세워 와그작! 소리와 함께 사탕을 씹어먹었다. 날카롭게 부서진 사탕조각들이 혀를 난도질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새 혀의 베인 상처에서 새어나온 피가 입 안에 번져 시큼털털한 쇠 맛을 낸다.

아, 정말 엉망진창이다. 피에 젖은 사탕의 맛도, 대답할 수 있는 말들이라곤 전부 멍청한 이야기들밖에 없는 것도. 물론 그 모든 것들 중에서도 가장 엉망인 건 프라우 레망, 자기 자신이다. 기껏해야 고철 덩어리에 불과할 안드로이드에게 정을 주는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애초에 정이란 건 선택적으로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프라우는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괜스레 속으로 한탄했다. 정이 다 뭐라고! 하지만 이 순간에서조차 로드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목구멍까지 치민 단어를 조심스레 골라냈다.

프라우는 조소했다. 사람이 로봇의 심리 상태를 걱정하다니. 그래봤자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진 고철 덩어리를 걱정하다니! 그럼에도 사람은, 사람이기에 하는 멍청한 행동들이 있는 법이었고, 프라우 레망은 사람이었다. 

따라서 프라우 레망은 멍청한 행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11.

 "네가 좋았거든."

12.

인정하자. 프라우 레망은 제가 창조한 안드로이드를 좋아했다. 그의 감정을 단순히 유성애적인 사랑이라고 칭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터놓고 말해서 이 천재 공학자는 자신의 안드로이드와 소위 그렇고 그런 행위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조차 않았으니까. 허나 세상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있었고, 그 중 프라우 레망이 로드에게 가진 감정을 굳이 단어로서 뭉뚱그려 정의하자면 '좋다'라는 감정이었다.

좋았다. 저를 깨우는 목소리가 좋았다. 제게 포도맛 사탕을 건네주는 게 좋았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게 좋았다. 때론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자연스레 그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법이었고, 프라우는 바보 같은 생각이란 걸 알면서도 자신만의 고철덩어리가 행복하길 바랐다. 로봇이 과연 행복이란 걸 제대로 아는지조차 의심스럽지만 아무튼 그랬다. 적어도 프라우 레망은 그랬다.

때문에 자신이 정을 준 상대의 복제품이 잔뜩 양산되고 아무데로나 팔려나갈 미래가 지독하게 보기 싫었다. 걘 그런 취급을 받을 녀석이 아니라고. 물론 처음부터 대량 생산 및 복제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안드로이드였지만, 그래도 그 녀석은 그런 대우를 받을 녀석이 아니었다. 

"야."

시비조의 목소리가 말문을 열었다.

"네가 잔뜩 복제되어서 세상 천지에 팔려나가는 거. 그게 행복일까? 말해 봐. 로드. 그럼 행복해? 네가 복제된다면 나는 수천 수만의 로드들을 걱정하게 될 텐데. 복제품들이 '로드'와 똑같을 리 없단 걸 알면서도, 그 모든 복제품들의 원본이 너란 걸 안 이상 멍청하게도 나는 모든 안드로이드들을 '로드'로 보게 될 텐데. 적어도 이런 미래에 프라우 레망의 행복은 없어."

로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프라우의 뇌리에 불현듯 어떤 생각이 스쳐간다. 어쩌면 나는 네가 아니라 내가 행복하길 바라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나쁜가? 이제 와서 알 게 뭐야. 그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잔뜩 씹혀 너덜거리는 아랫입술이야 어찌되었든, 프라우는 입꼬리만 올려 비죽 웃었다. 지금껏 입을 다물고 속으로 쌓아올리던 것들을 쏟아내니 기분만큼은 한결 후련했다.

"멍청한 행동이었단 건 내가 더 잘 알고 있어. 답지 않게 굴어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로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너다운 행동이었는걸, 프라우."

뭐? 짓고 있던 웃음에 금이 갔다. 프라우의 목소리가 다소 날카로워졌다.

"그게 무슨 말이야?"

"멍청한 행동이 아니었단 뜻이지. 네가 바라는 것을 가장 우선시한 아주 영리한 행동이라면 모를까."

허! 프라우가 코웃음을 쳤지만 로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가 만든 고성능 인공지능 안드로이드를 얕보지 마, 프라우. 꿈쩍하긴 커녕 되려 자신의 복장을 터트리는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입을 벙긋거리다가 깊은 한숨을 토해낸 프라우 레망은 제 머리를 헤집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적어도 프라우 네가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보고서를 조작했단 걸 알 수 있었어."

한 발짝, 로드가 프라우에게 다가섰다.

"나는 그걸로 충분히 네 행동 원리를 납득해."

한 발짝, 프라우가 뒷걸음질을 쳤다.

"프라우. 행복했어?"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냐고⋯."

프라우는 뒤로 주춤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보고서를 조작한 네 행동으로 인해 나는 너와 함께하는 시간을 더 길게 가질 수 있었잖아. 그 시간이 네가 바라던 시간이었는지를 묻고 있어. 행복했어, 프라우?"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거야.

"프라우. 나는 네가 행복했다면 좋겠어."

왜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건데. 마치 떠날 것처럼.

"그만 말해."

귀를 막았다.

"기억하지? 세잎 클로버의 꽃말."

그럼에도 목소리는 손틈 사이로 흘러들었고, 끝내 귀에 닿고야 만다.

"몰라. 그런 거 기억도 안 나."

그러니까 제발 그만 말해. 사람 불안하게 하지 말고.

"나는 행복했어."

"⋯⋯."

프라우 레망은 멍하니 시선을 들어 제가 만들어낸 안드로이드를 바라보았다. 행복했어, 프라우. 로드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그걸 보는 프라우의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네가, 네가 행복이 뭔지나 알고 행복했다 말하는 건데? 사람도 아니면서. 허나 가시 돋친 말은 입술 밖을 나서지 못하고 입 안만을 맴돌았다. 그야⋯ 저렇게 환하게 웃는데 그런 말을 할 순 없잖아. 

"행복했다고⋯?"

"응."

분명 지금 제 얼굴은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괴상한 얼굴일 것이다. 행복했다고. 지금까지의 모든 시간들이 행복했다고. 제 중얼거림에 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 행복했어. 프라우. 그러니 자책하지 마."

프라우 레망이라는 사람이 한 안드로이드의 행복을 바랐다는 걸 내가 알아. 네 안드로이드가 알고 있어. 

귓가에 들리는 말이 어색했다. 뭐야, 지금. 꿈이라도 꾸나? 프라우는 아랫입술을 다시 한 번 깨물었다. 아픈 걸 보니 꿈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만, 프라우. 로드가 손을 뻗어 프라우의 입술을 윗니로부터 떼어냈다.

"자책하지 말래도."

"뭔⋯."

뭔데, 너. 뭔데 그렇게 말하는 거야. 잔뜩 흔들리는 한 사람의 눈동자와 잔잔하기만 한 안드로이드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서로를 응시했다. 얼마나 그렇게 마주 보고 있었을까. 로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론부터 말할게. 나는 체자렛 알티온의 의견대로 나 자신,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안드로이드 프로토 타입의 대량 생산 및 복제에 찬성해. 난 원래 그럴 목적으로 만들어진 개체잖아. 많은 사람들의 삶이 편리하고 쾌적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고성능 안드로이드."

아. 발밑이 한순간 사라진다면 이럴까. 디딜 곳을 잃고 허공에 붕 뜬다면 이러할까. 아까 복도에서 본 체자렛 알티온의 모습이 떠올랐다. 역시 로드와 이야기를 나눈 거였구나.

"하지만 그건 네가 바라지 않는 미래겠지. 정확히는 내 외양과 기억을 복사한 안드로이드들이 시중에 팔려나가는 걸 바라지 않는 거겠지만."

아니야. 아까 내가 말한 걸 대체 뭐라고 들은 거야? 너와 겉모습이 다르더라도, 네가 지금까지 가진 기억이 없는 로봇이어도 그 원본이 '너'라면 나는 그 모든 안드로이드들이 시중에 팔려나가길 원치 않아. 하지만 그걸 막을 수 있는 권력이 제게 있던가? 당장 지금 이 순간도 갈루스 코퍼레이션 소속으로서 월급을 받는 제게? 권력도 없다면 무력은 있었나? 아니. 무력은 무슨. 프라우 레망은 일국의 왕도 아니었고, 무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능력자도 아니었다. 그저 거대 기업에 운 좋게 취직한 소시민. 그게 프라우 레망의 전부였다. 어딘가의 다른 세계에 사는 프라우 레망이라면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을까. ⋯분해. 분하다고. 프라우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제 진심을 전부 말한다고 상황이 바뀔 것 같지 않았다.

로드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시중에는 지금 내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프로토 타입의 기억은 계승하지 않은 개체들이 풀릴 거야. 참. 프로토 타입의 인공지능에서 한 두어 단계 정도 다운 그레이드를 한 채로 말야. 아직 사회가 고성능 인공지능을 문제 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나 봐."

그렇겠지. 당장 개발자인 저만 해도 로드의 고성능 인공지능에 휘둘려 이 모양 이 꼴이지 않은가. 고성능 인공지능이 아무리 똑똑해봤자 결국 사람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감정선을 따라올 순 없었다. 제 속도 모르고

'내 외양과 다른 안드로이드들이 출시된다니 다행이지?'

라며 웃는 로드를 보니 적어도 아직까진 안드로이드의 인공지능이 인간의 감정을 정확히 짚어낼 순 없는 게 확실했다.

이건 꽤나 큰 문제였다. 서로 동등한 감정의 교류가 일어나도 사람 간에는 결국 관계의 악화나 다툼 등의 문제가 생기곤 한다. 감정 교류가 쌍방향인 사람들끼리도 그러할진대, 결코 동등한 감정의 교류가 일어날 리 없는 상대방을 탈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리가. 저 정도 수준의 안드로이드가 시판되면 안드로이드를 상대로 사람 혼자 기대했다가 사람 혼자 실망하고 슬퍼하는 일이 수없이 많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와중에 안드로이드들만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고 멀뚱거리며 서 있겠군.

로드.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진심을 네게 말한다 한들, 네가 다른 선택을 내릴까? 아니겠지. 결국 너는 로봇이니까. 안드로이드니까. 네 제조 목적에 합당한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을 거야.

⋯제조 목적. 프라우는 새삼 숨이 턱 막혔다. 그 목적이란 걸 처음 누가 설정했는지를 떠올리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전부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고성능 안드로이드를 대량생산하면 어떻게 될까?'

이 한 문장의 생각이 저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다 제 업보 같았다. 이제 와서 자신이 막을 수 있는 것 따위 아무것도 없었다. 자책하지 말라니. 이런데 내가 어떻게 자책을 안 해. 자꾸 목이 메었다. 프라우는 할 수 있는 가장 덤덤한 표정을 애써 짓고는 물었다.

"그럼⋯ 너는. 그런 복제품들이 팔려나가고, 그런 게 좋아? 그게 네 행복이야?"

로드의 미소는 변하지 않았다. 안드로이드에게 쓰긴 이상한 비유지만, 마치 로봇 같은 미소였다.

"응. 제조 목적에 부합하는 삶. 그게 내 행복이야."

프라우 레망은 한참을 침묵하다가 고개를 푹 떨궜다. 네가 그렇다면 되었다. 그걸로 된 것이다.

13.

체자렛 알티온이 운전대를 잡은 승용차 안.

"후후, 프라우 레망과의 이야기는 잘 끝났나요?"

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혹적인 미소를 짓는 체자렛 알티온은 유독 기분이 좋아 보였다. 어째서 기분이 좋냐고 물어보니 희한한 대답이 돌아왔다. 좋은 걸 구경했거든요, 라니. 저와 프라우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걸까.

프라우 레망으로부터 다소 강제적인 인수인계를 거쳐, 지금 현재 로드는 체자렛 알티온의 관할에 놓여 있었다. 보고서를 조작한 사람을 더는 신뢰하기 어렵다는 게 이유였다.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연구동과 프라우를 보며 로드가 물었다.

"안드로이드의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고 나면, 나는 어떻게 되지?"

존댓말이 아니었으나 체자렛은 그저 왼쪽 눈썹을 슬쩍 치켜올릴 뿐이었다. 나중에 시중에 팔릴 안드로이드들에게는 존댓말을 기본 말투로 설정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겠군, 같은 생각을 하며 체자렛이 대꾸했다.

"어떻게 될 거라고 예상하죠?"

물음엔 물음으로. 로드는 잠시 침묵했다. 한 사람과 한 안드로이드가 탑승한 승용차 안에선 부릉거리는 소리만이 낮게 깔렸다. 힐끗 본 차창 밖으로는 더는 연구동도, 프라우도 보이지 않는다. 이 차는 어디로 가는 걸까. 물론 짐작되는 곳은 있었다.

"이 차가 향하는 곳에 계속 머무르다가 폐기되거나, 뭐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

이 차가 향하는 곳은 갈루스 코퍼레이션의 본사일 게 분명했다. 로드의 검지가 네비게이션에 설정된 목적지를 톡 두드렸다. '갈루스 코퍼레이션'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력에 의해 나 정도의 안드로이드는 금세 구형이 되지 않겠어?"

"어머. 그래도 몇 년 정도는 버틸 수 있지 않겠어요? 천재 공학 박사가 만든 안드로이드인데."

천재 공학 박사, 프라우 레망. 저를 만들어낸 창조주. 로드는 마지막으로 보았던 프라우의 모습을 떠올리면서도, 체자렛의 방금 발언에서 결코 '로드'가 폐기되지 않으리란 말은 없었단 걸 눈치챘다. 다가올 미래에 자신의 끝은 결국 폐기된 안드로이드가 되리라. ⋯그래도.

그래도 그걸로 괜찮았다. 로드가 검은 눈을 깜빡였다. 로드, 안드로이드. 고성능 인공지능 안드로이드의 프로토 타입. 그는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인간은 기분 좋은 일이 있거나 기쁜 일이 있다면 웃기 마련이다. 그런 지식이 자신의 인공지능에 내장되어 있었기에 로드는 웃었다. 마치 자신이 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그게 네 행복이야?'

프라우 레망이 일개 소시민임을 안다. 갈루스 코퍼레이션의 눈을 피해 자신을 빼돌릴 수 없음을 안다. 이제 와서 공학 박사 하나가 기업의 지원을 등에 업고 막 개발한 신제품의 안드로이드, 그것도 프로토 타입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을 거란 사실도 안다. 전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고성능 인공지능 안드로이드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응. 제조 목적에 부합하는 삶. 그게 내 행복이야, 라고.

Three Laws of Robotics
로봇 공학의 삼원칙 

제1원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제2원칙: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

로봇 공학의 3원칙. 통칭 로봇 3원칙이란 것이 있다. 꽤 오래된 과거에 창안되었으며, 로봇의 제작 단계에서 인공지능에 박아 넣는 명령들이다. 로드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로드는 생각한다. 이미 보고서까지 조작한 전적이 있는 공학자가 안드로이드 프로토 타입을 빼돌리기까지 한다면 어떻게 될까. 분명 위험에 처하겠지. 기업 측에서 대대적으로 프라우 레망을 수배할지도 모르고, 그를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것도 가능하리라. 갈루스 코퍼레이션은 그럴 만한 힘이 있는 기업이니까. 그렇다면 이대로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높은 프라우 레망을 모른 척할 것인가? 아니. 제1원칙에 의거하여 그를 외면하지 않을 의무가 제겐 있었다. 애초에 외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갈루스 코퍼레이션의 상부에 연락을 취했다. 연구동 사무실에 붙어 있는 비상연락망을 찾아 전화하니 간단했다. 여보세요? 아무래도 고성능 인공지능 안드로이드의 프로토 타입에 관한 보고서가 조작된 것 같습니다만⋯.

뭐, 연락을 하기도 전에 보고서가 조작된 걸 눈치챈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 사람은 지금 제 옆에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체자렛 알티온이었다. 다시 프라우 레망에 대해 계속 생각하자면, 보고서가 조작된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건 사실 로드였다. 여태껏 수집된 데이터에 기반해서는 프라우가 아무런 이유 없이 그런 일을 할 것 같지 않으니 말을 꺼내지 않았을 뿐이다. 허나 점차 프라우는 로드가 복제되는 걸 막고 싶어하는 티를 냈고, 이에 로드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최악의 상황이란 조작된 보고서가 상부에 들킨 뒤 곧바로 안드로이드인 저를 데리고 프라우가 도주하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갈루스 코퍼레이션에게 잡힐 게 뻔한 그런 미래에 프라우를 내버려 두고 싶진 않았다. 때문에 체자렛 알티온과 만나 제가 순순히 갈루스 본사로 인계되기로 예정을 잡아두었다. 프라우가 아무리 로드 자신을 빼돌리려 한들 빈틈 없이 조여오는 상황 속에선 포기하게 될 테니까. 프라우 본인이 대기업의 눈을 피해 안드로이드 하나 숨길 수 없는 그저 일개 소시민임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을 테니까.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체자렛의 차에 탑승한 로드의 존재가 이를 증명했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어딘가 잘못된 것만 같았다. 분명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었고 프라우는 무사했다. 게다가 앞으로의 자신은 본래의 제조 목적에 부합하도록 사용될 것이다. 오류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문제일까. 마지막으로 보았던 프라우의 일그러진 미소가 떠올랐다. 좀 더 환하게 웃어주었으면 했는데. 제조 목적에 부합하는 삶이 행복하다고 제가 말했는데도 엉망인 표정을 짓는 프라우라니. 그래서야 제가 부러 그런 말을 한 이유가 없지 않은가.

가능하다면 좀 더 프라우와 있고 싶었다. 그와 함께한 별 것 아닌 일상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자신과 프라우에게는 행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안드로이드를 창조하고, 자신은 창조된 목적을 수행한다. 이는 무를 수 없는 계약이었으며 책임이었다. 이를 어긴다면 갈루스 코퍼레이션의 철퇴가 둘 모두를 향해 휘둘러졌을 터였다.

로드는 사실 자신의 복제품이 널리 팔려나가는 것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으나 프라우가 그걸 싫어했으니 이왕이면 막고 싶었다. 프라우가 싫어하는 일을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까. 로드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제 외형과 똑같진 않은, 인공지능이 다운 그레이드 된 안드로이드가 팔려나가도록 힘을 쓴 게 다였다. 그것조차 체자렛 알티온에게 부탁해서야 이뤄낼 수 있었던 성과였지만. 일개 안드로이드가 사람에게 부탁을 하는 게 체자렛의 흥미를 자극한 모양이었는지 체자렛은 흔쾌히 로드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다만⋯ 자꾸 무언가가 어긋난 것 같아서. 그게 자꾸 로드의 시선을 이미 보이지도 않는 연구동 방향으로 잡아끌었다. 프라우는 지금쯤이면 뭘 하고 있으려나, 따위의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상대에 대해 떠올리면서도 그는 끝내 제가 놓친 게 무엇인지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되지 못한 안드로이드가 가진 한계였고, 동시에 천형(天刑)이었다.

오류를 명확히 특정하지 못한 기계는 웃는다. 프라우 레망이 좋아했던 미소로.

14.

프라우 레망은 문득 떠올리곤 한다. 제게 웃어주었던 어떤 안드로이드를. 그때 다른 선택을 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친 척 눈 딱 감고 그 녀석의 손을 붙잡고 달아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물론 이제 와선 덧없는 망상일 뿐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포도맛 사탕을 입 안에 굴릴 때마다 그 애를 떠올리게 될 줄 알았더라면 좀 더 미친 채 살아볼 것을 그랬다. 지금은 더는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고 뒤바꿀 수도 없지만 그 시절이라면, 어쩌면 우리들 앞에 놓인 길을 한 번쯤 바꿀 수 있지 않았을까.

천재 공학 박사는 의식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찍어낸 듯한 '행복한 미소'가 그려졌다. 안드로이드가 마지막에 보여주었던 모습과 꼭 닮은 웃음이었다.

14.

알고 싶어. 너는 지금도 행복하니? 나는⋯

<END>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G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