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는 꿈에 잠겨 익사한다
당신의 꿈이 나의 삶입니다.
요한로드 온리전 <아발론도로공사> 출품작.
하드 8-16의 스포일러, 유혈, 죽음에 관한 묘사가 있습니다.
어딘가에 잠겨 죽는 걸 익사라 하지요.
그렇다면 꿈에 잠겨 죽는 것 또한 익사인 것을.
요한 테일드는 하염없이 검푸른 강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어쩌면 강물이 아니라 바다일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물은 깊었고,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면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였으니. 물이 맑으면 무언가 보일 법도 한데 발밑은 그저 온통 어둠이었다.
요한은 그나마 빛이 들어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코와 입에서 흘러나온 공기방울들은 해파리처럼 너울거렸는데, 느리지만 조금씩 위로 올라가는 게 몹시도 부러웠다. 저렇게 위로 향하다 보면 빛과 만나는 게 아닐까. 부럽고 애타는 마음에 손을 뻗어보지만 이미 공기방울들은 수면을 향해 떠난 뒤였다. 요한은 다급하게 외쳤다. 로드!
사내는 제 입에서 나온 외침에 스스로가 놀랐다. 대체 왜 그의 신을 방금 부르짖었는가? 빛이 있는 곳에 분명 제 신이 있을 것이란 무의식적인 확신 때문인가? 다음 순간, 목구멍으로 검은 물이 밀어닥쳤다. 요한 테일드는 폐를 가득 채우는 폭력적인 물줄기에 얻어맞아 밑으로, 밑으로 더욱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아침이라곤 해도 갓 동이 튼 시각이라 아직 하늘은 검푸르기만 하다. 그는 잠시 제가 아직도 강물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지를 가늠했다. 피부에 닿아오는 새벽 공기를 뒤늦게 깨닫고 나서야 사내는 제가 잠에서 깨어났음을 알았다.
새벽 동안 서늘해진 침구의 감촉이 팔다리의 온기를 빼앗고 있었으나 요한은 그걸 가만 내버려 두었다. 게슴츠레 뜬 시야 끝에 떠오르는 붉은 해가 보인다. 빛이 어둠을 쫓아내는 건지 어둠을 뒤쫓는 건지 모를 시간. 그는 반쯤 잠에 잠겨 몽롱한 정신으로 생각했다. 아, 나는 오늘도 살아가고 있구나.
요한 테일드는 깨어나지 않을 꿈을 살아간다. 물론 꿈이란 잠에 들었을 때에나 꾸는 것이다. 허나 그는 잠에 들지 않은 한낮에서조차 몽중을 걷는 이였다. 제게 건네진 로드의 손을 붙잡은 순간부터 끊이지 않는 꿈을 꾸었고, 끝나지 않는 꿈은 그 자체로 삶이 된다.
오늘따라 날이 좋았다. 햇살을 받은 금발이 희게 빛났고, 요한은 손을 눈썹께로 올려 작은 그림자를 만들곤 하늘을 눈에 담았다. 고개를 들어 본 하늘은 푸르고 맑다. 그는 불현듯 제 악몽을 떠올렸다. 아발론의 군주가 갈루스의 황제와 함께 한날 한시에 절명한 것을 악몽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대체 무얼 악몽이라 불러야 할까.
아니, 사실 그 순간을 악몽이라 부르는 건 제 신의 죽음이 한낱 꿈에 불과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몰랐다. ⋯로드의 죽음이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사내는 무겁게 한숨을 내쉰 후 애써 상념을 떨쳐냈다. 그런 생각에 잠기기엔 장소가 좋지 않았다.
거대한 재앙이 칼끝 너머 지평선에서부터 기어올라오고 있었다. 군주를 잃은 기사단이, 세상을 잃을 필멸자들이 감히 불멸에게 검을 겨눴다. 여기에 자리한 모두가 이 전투의 끝은 죽음임을 직감했다.
그러나 세상엔 끝을 알면서도 시작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다. 기사는 속으로 문득 물음이 치솟았다. 로드, 로드께선 울티마 포트리스에서의 결말을 알면서도 그 모든 여정을 시작하신 건가요?
시작은 언제나처럼의 선봉장 프람이었다. 그는 듀랜달을 붙잡고 작게 무언가를 소곤거리더니 이내 크게 외쳤다. 진격하라, 아발론이여! 요한은 프람의 입이 무어라 달싹였는지 눈치챘다. 언제까지나 로드의 검이 될게. 프람다운 맹세였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순간, 저는 무어라 말하면 좋을까. 빈민가 출신의 기사는 말없이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한때 신을 잡았던 손이었다. 그는 손 위에 놓인 공기를 움켜쥐었다. 그렇게 하면 신과 맞닿을 수 있을 것처럼. 요한은 주먹 쥔 손을 가만히 응시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쓰게 웃었다.
더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신의 신실한 신도는 양손을 맞잡고 기도하듯 고개를 살짝 숙여 입술을 움직였다. 요한 테일드가 출전하기 전에 할 말이라곤 언제나처럼의 그 말 뿐이었다.
"⋯아발론의 영광을 위하여."
참혹했다. 참혹하다는 말 외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힘겹게 눈을 깜빡였다. 한쪽 눈에 흘러들어간 피 때문에 시야가 반 토막이 나 어지러웠다. 아무래도 그 눈은 제 기능을 다한 모양이었다.
눈을 하나씩이나 잃었으니 전투의 승기가 인류 쪽으로 기울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닌 것이, 애초에 재앙은 불멸이었고 세계는 필멸이었으니 이미 끝이 정해진 전투였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까지 전황이 끔찍할 필요가 있었을까. 평기사들과 일반 병사들의 시체가 주변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정예 기사단원들의 생사는 전부 불명이다. 아직 버틸 만한 자들은 재앙에게 검 하나라도 더 찔러넣기 위해 갔을 테고, 그게 아니면⋯.
쿨럭거리며 기침하자 붉은 피가 토해져 나왔다. 로드의 검, 요한 테일드는 비틀대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쌍검을 들어올렸다. 제 끝이 다가온다는 것을 느꼈기에 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었다. 적어도 여기서 이런 모습으로 죽고 싶진 않았다. 죽는다면 제 신의 검으로서다.
기사는 있는 힘껏 땅을 박차 재앙을 향해 달려들었다. 양손에 쥔 검, 그 검날에 한낮의 태양이 반사되어 쨍하게 빛났다. 자그마한 빛이 제 쪽으로 달려오는 것을 감지한 재앙이 요한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몸집이 천천히 몸을 움직여 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요한은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건⋯ 상대가 되고 말고의 수준이 아니었으므로. 그제서야 요한 테일드는 제 처지를 그 어느 때보다 뼈저리게 깨달았다. 자신은 태풍에 뛰어드는 나비였고, 불길에 덤벼드는 낙엽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이 세계는 그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나마 그 멸망을 늦출 가치가 있는 곳이었다. 기사의 입꼬리에 기묘한 미소가 걸렸다. 나비가 지금껏 날아다닌 세상은 아름다웠고 낙엽이 봄과 여름, 가을 동안 마주했던 햇살은 찬란했다. 뒷골목에서 제 손을 붙잡고 끌어올린 손은 작지만 따뜻했으며 제 신이 보여준 꿈은 행복했다. 영원히 그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그렇다면 깨지 않으면 된다. 요한은 불현듯 깨달음을 얻었다.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면 꿈에서 깨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말장난이나 다름없었으나 그것이야말로 요한 테일드가 찾던 진리였다.
잘 때도, 자지 않을 때도 꿈에서 깨지 않는다면 그것은 차라리 삶이라 불러야 마땅했으며 아발론의 군주가 뒷골목의 꼬마에게 선사한 꿈은 지금껏 깨어지지 않은 채 삶이 되었다. 허면, 삶을 삶이라 증명하는 건 무엇을 통해서인가? 기사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요한이 움켜쥔 쌍검을 횡으로 휘두르자 빛무리가 검끝에서부터 터져나와 재앙의 발목을 향해 직격했고, 잠깐이지만 재앙은 괴성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끔찍한 울음소리가 뇌를 진탕시켜 요한은 이를 악물었다. 그렇잖아도 아까부터 시야가 점차 흔들리는 데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는 멎을 기미조차 없었다. 점차 타들어가는 제 생명의 끝을 느끼며 광명의 기사는 마음속으로 최후의 고해를 시작했다.
로드, 오로지 산 자만이 죽을 수도 있는 법입니다. 그러니 죽음으로서 이것이 삶이었음을 증명하고자 합니다. 제가 꾸고 있던 이 꿈은 저의 삶이었음을요.
삶을 삶이라 증명하는 건 죽음을 통해서다. 그게 바로 기사가 내린 답이었다.
대개들 꿈이란 눈을 뜨면 사라진다고 하나, 거꾸로 생각한다면 영영 눈을 뜨지 않으면 그것은 영원하단 의미가 되겠지요. 눈을 뜨지 않겠습니다. 로드께서 보여주신 광명에 눈이 먼 기사로 살아가겠습니다. 제 삶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다가올 최후까지 로드의 꿈에서 살겠습니다. 당신의 꿈이 나의 삶입니다.
최후가 머지않았음을 안다. 제가 지금껏 삶을 살아왔단 걸 죽음으로 증명할 시간이 올 것이다. 그래도 그 직전까지는, 최후의 최후까지는 저의 신이 보여준 꿈 속에 잠긴 채 살아가도 되지 않을까.
요한 테일드는 온몸의 상처에서 뿜어지는 선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뛰어올랐다. 제 눈도 하나 잃었으니 적어도 놈의 눈 하나는 없애야 수지가 맞지 않겠는가.
높이, 더 높이. 재앙과 두 눈을 마주칠 정도로 높게. 한쪽 눈을 잃은 기사가 허공으로 훌쩍 뛰어올라 빛으로 찬란히 빛나는 검을 치켜들었다가, 추락하며 재앙의 한쪽 눈에 깊숙히 내리꽂았다.
뒤이어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찢어지는 울음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허나 손잡이가 피 칠갑이 되어 미끄러웠던 탓일까, 아니면 재앙의 몸부림이 지나치게 격렬했던 탓일까. 요한은 재앙의 눈알에 꽂아 넣은 쌍검을 놓치고야 말았다.
⋯아, 로드.
한낮의 햇살은 여전히 따사로웠다. 저를 멸망시키려 도래한 재앙에게도, 이미 검붉게 물든 수많은 주검들에게도, 높은 곳에서 추락하는 요한 테일드에게도 모두 공평하게 상냥하고 다정했다. 그 따스함이 저의 신을 떠올리게 해 요한은 어쩐지 조금 눈물이 났다.
당신께서 내민 손에 어룽지던 꿈을 감히 제가 따라 꾸었습니다. 꿈이 찬란하여 눈이 멀었습니다. 눈이 멀었기에 영원히 눈을 뜨지 않고 꿈을 계속 꿀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꿈에 잠겨 삶을 살았습니다. 기뻤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제 삶 속에서 이 꿈은 영원할 것입니다.
⋯다만 용서하십시오, 로드. 저 요한이, 꿈에 잠긴 채로 죽는 것을요.
어딘가에 잠겨 죽는 것을 익사라 한다. 그렇다면 꿈에 잠겨 죽는 것 또한 익사일 것이다. 그러니 저의 사인(死因)은 분명 전사(戰死)도 추락사도 아닌 익사이리라.
요한 테일드는 자신의 사인이 퍽 마음에 들었다. 빠르게 가까워져가는 땅의 모습을 뒤로 하고 그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 너머 태양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기에 그것을 움켜쥐었다. 손 안의 온기가 이토록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을 봐선 주먹 쥔 손 안에는 분명 찬란한 빛이 묻어 있을 터였다. 기사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발론의 영광을 위하여."
재앙이 분노하며 몸을 뒤틀었다.
거대한 앞발을 들어 휘둘렀고, 추락하는 기사의 몸뚱이를 후려쳤으며, 잔해는 없었다.
어딘가에 잠겨 죽는 것을 익사라 한다.
그렇다면 꿈에 잠겨 죽는 것 또한 익사일 것이다.
그러니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요한 테일드의 사인은 익사였다.
댓글 2
유연한 개미핥기
아름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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