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부동항

성탄 전야에는 아이를 데리고 바다에 간다. 올해의 산타들이 임무 수행에 열중할 때, 선대 중에서도 가장 어린 잔느 얼터 산타 릴리에게 나름의 고참 대우를 해 준다는 명목이었다. 누군가는 이 외출을 마스터가 아이의 투정을 못 이기고 가는 견학으로, 또 누군가는 희미한 영기를 지닌 존재를 위해 마스터가 준비한 세상 구경이라고 여겼다. 갖가지 견해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마스터는 어린 산타를 필두로 한 특별 전투 시뮬레이션을 준비했다는 사실이었다.

손마디를 곱게 만드는 찬 공기. 높게 일었다 부서지는 파도. 끝까지 빠져나간 바닷물이 다시 밀려들 때, 순식간에 방향을 틀어 옷자락 사이를 파고드는 해풍. 뛰어들어 놀 수도 없는 풍경이지만, 아이는 겨울 바다의 변주를 좋아했다. 가장 좋아하는 날. 가장 가고 싶던 곳. 첫 번째로 바랐고, 처음 만난 바다의 형태가 그 모습이어서일까.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푸르고 상냥한 정경과는 사뭇 다른 해역이었지만, 아이는 그날의 바다를 눈에 담기 위해 12월 24일을 기대했다 - 산타라면 당연히 크리스마스 전날을 가장 열심히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올해도 마찬가지다. 바다를 구경하러 가는 게 아닌 전투 연습을 위한 출정이라는 말을 듣기는 했는지, 어린 산타는 들뜬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크리스마스는 본디 하루 내내 내리는 함박눈으로 반짝여야 하는 시기. 잭과 너서리와 함께 처음으로 본 풍경만큼은 아니더라도, 잔느 얼터 산타 릴리는 이번에 찾은 바다 역시 멋진 곳이리라 믿었다.

그러나, 출정에 앞서 내뱉은 당당한 선언이 무색하게, 다섯 기의 서번트와 그들의 주인은 싸늘한 안개 속에서 길을 헤매고 있었다.

 

매서운 바람이 피부 곳곳으로 파고들었다. 눅눅한 안개가 시야를 온통 가렸다. 공기에 섞인 짠내와 어렴풋이 들려오는 철썩이는 소리만이 시뮬레이션에 이상이 없음을 대변했다. 그러나, 상황을 파악할 새도 없이, 파도 소리마저도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기이한 소음에 묻히기 시작했다. 날붙이로 무언가를 내려치는 소리가 서서히 커지고 있었다. 뼈를 쪼개고 그 안으로 한기를 스미게 하려는 듯한 동시다발적인 금속음. 입항을 알리는 종소리라기에는 과하게 섬찟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누구의 기대와도 다르던 풍경에 맥이 빠진 것도 잠시, 전열의 서번트들이 이상을 감지했다.

대열을 둘러싼 안개가 기이하게 몰아친다. 하늘을 가린 두꺼운 구름이 눈발을 불러왔다. 허공에서 쏟아지던 결정들은 어떠한 물리력 앞에 멈춘다. 해무 속에서 춤추는 사령의 무리. 안개 속 위화감은 저들 때문이었나 보다. 찬 기운이 저들을 불러내었는지, 저들이 눈바람을 불러왔는지는 모를 일이다. 저번에 만난 적은 평범한 마수가 아니었냐는 아이의 외침이 최전선에서 들려왔다. 마스터 역시 적의 이변에 당황했으나, 반사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한 서번트에게 지시를 내리는 것이 먼저였다.

익숙한 기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기가 등골을 타고 치민다. 얼터 릴리의 후방 엄호를 맡은 세이버 질 드 레는 급히 뒤를 살폈다. 사령들이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제 배후를 할퀴고 지나간 공격 때문에 뒤쪽의 사람들과 떨어진 모양이다. 아이는 판단할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치는 공격을 받아친다. 지금의 목표는 어린 성녀를 데리고 마스터와 합류하는 것. 사내는 창의 빈틈을 파고드는 적들을 일사불란하게 베어 넘겼다. 육신을 가르는 감각 대신, 스산한 냉기가 쇠를 타고 흐른다. 누군가의 격려가 갑옷 틈으로 스미던 한기조차 잊게 했다.

질, 나의 벗이여. 이곳에서 무얼 보았지? 자네는 잘 알고 있을 거야. 다시 묻겠네. 무얼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지?

속삭임을 떨치고자 팔을 크게 휘두른다. 은빛 검날에 스친 사령들은 다시 붙기를 수 번 반복하다 허무하게 사라졌다. 시야를 온통 가리는 눈보라 속, 아이의 성가마저도 멀어지는 기분이다. 질 드 레는 이곳이 어떤 장소인지 깨닫고야 만다.

 

-

얼터 릴리가 마지막으로 힘을 주어 창을 찔러넣었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마지막 남은 적이 사라진다. 쏟아지는 눈은 여전했지만, 기이한 추위는 서서히 힘을 잃었다. 사령이 사라지자 안개가 조금 걷혀 발밑 정도는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이는 자신이 모래사장 대신 소금기 낀 판자 위에 서 있다는 사실에 잠시 의문을 품었다. 반면, 숨을 한 번 크게 내쉬며 입김을 피워올린 기사는 자연스레 옷자락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뒤이어 부두 한구석에 가 걸터앉는다 - 그곳에 나무 상자가 쌓여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아는 사람처럼.

세이버 질 드 레는 팔을 뻗어 제 옆의 상자에 쌓인 눈을 치웠다.

“수고하셨습니다. 훌륭한 창술이더군요. 당신 같은 분을 앉히기에는 변변찮은 자리지만, 부디 이쪽으로.”

눈앞의 아이에게 앉으라는 듯 손짓한다. 잔느 얼터 릴리는 궤짝 위를 잠시 쳐다보더니, 자연스레 기사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어정쩡하게 두 손을 들어 올린 남자의 표정이 난처함으로 물들었으나, 이를 알 리 없는 어린 성녀는 등을 쭉 펴고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상반신의 오른쪽 면을 덮은 갑옷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러나, 판금 아래에 선명한 체온이 남아있었다. 그것이 채 식지 않은 싸움의 열기임은 아이 역시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쪽이 따뜻해서 좋다고 단순하게 판단했을 뿐이다.

“질 씨는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는 거죠?”

“숨기려던 건 아니었습니다만, 그런 셈이지요.”

“역시나! 사고 한 번 제대로 치셨네요. 마스터의 기척조차 없으니, 이대로는 찾으러 갈 수도 없잖아요.”

“송구합니다. 마스터를 호위하는 영령들에게도 별일이 없어야 할 텐데…….”

“질 씨는 더 죄송하다 하셔도 돼요. 산타를 실망하게 하다니, 중죄라고요!”

남자가 낮게 목을 울렸다. 정곡을 찔린 데에 이어 착잡함마저 느껴지기 시작해, 붉게 곱은 맨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러니까! 뭘 하러 이런 날씨에 나갔는지 얘기라도 해 봐요. 재미있는, 아니, 일리 있는 이유라면 봐 줄지도 모르죠.”

눈을 내리감은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기억하는 성탄 전날의 바다는 이 풍경뿐입니다. 분명 중요한 물건을 받기 위해 나간 날이었지요.”

말을 꺼낸 대로, 생전의 질 드 레는 분명 그곳에 서 있었다. 한데, 무슨 이유로?

그의 기억은 말년 - 즉, 잔 다르크의 사후로 갈수록 흐릿해진다. 마치 무언가가 그 시절을 떠올리지 말라고 억눌러 놓은 듯이. 그러나 지금의 자신은 이를 해명할 의무가 있다. 마스터는, 그리고 함께 소환된 영령들이 발을 들인 곳은 다름 아닌 제 기억의 재현이다. 이에 대한 일종의 가책을 느낀 기사는 조금 더 면밀하게 기억을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프랑스군 원수, 질 드 레 영주가 군인의 삶을 그만둔 뒤 일어난 일이다. 잔 다르크의 화형 이후, 그의 수집벽은 극에 달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성에 거대한 벽화를 그리게 시켰고, 진귀한 조각을, 이국의 예술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구국의 영웅이라는 칭호는 여전히 사내의 뒤를 유령처럼 따라다녔고, 막대한 부를 가진 젊은 영주의 취미에 이견을 제시할 자는 없었다.

1434년의 성탄 전야. 영주는 바다로의 외출을 감행했다. 레 남작의 영지의 일부는 해안선을 따라 자리했으나, 자신은 중요한 거래가 있을 때를 제하면 수평선을 본 적이 손에 꼽았다. 그 날의 외출은 영지 시찰을 빌미로 한 감독이었다. 중요한 물품을 실은 배가 무사히 정박하는 것을, 그리고 그 배가 제가 원한 물건을 가져왔음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해의 겨울이 유독 추웠는지, 그저 오랜만에 바닷가에 가서인지. 몰아치는 해풍이 매서웠다. 항구는 몇 주 째 얼어붙어 있다는 보고 그대로였기에, 사람을 시켜 고용해 놓았던 일꾼들은 얼음 위에 올라 열심히 곡괭이질을 하고 있었다. 하늘이 어두워지며 바람이 멎는다. 기다렸다는 듯 짙은 안개가 몰려오고, 싸락눈이 온 하늘에 퍼지기 시작했다.

“물과 하늘, 물과 땅의 구분이 사라지는 모습이 인상 깊게 남았나 봅니다. 평소에는 그토록 단단히 나뉘어 있던 공간들이…… 꼭 마법 같지 않습니까?”

어린 성녀가 곁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음을 아는 말투. 하지만, 질 드 레는 자신이 기억하는 흐릿한 풍경 속에 홀로 서 있었다. 수 명의 입김이 피어오르는 선착장 앞바다에 가 있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한다. 온통 희뿌연 시야. 빗줄기 같은 눈발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의 위로 쏟아졌다. 서늘한 바람이 옷가지를 적신다. 인부들의 불만 섞인 곡괭이 소리마저도 멀어져 간다. 시찰을 나온 레 남작은 외투를 여미는 것조차 잊은 채 비현실적인 풍경을 바라보았다. 물결이 땅에 부딪히며 생기는 흰 거품이 실은 허공에서 흩날리는 눈발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온 세상이 탁한 백색으로 뒤섞이고, 범부들의 목소리조차 사라지는 어떠한 마법의 땅에 선 기분이었다.

염치없게도, 자신은 그 마법이 성녀를 불러오기를 바랐다. 안개 속에서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내게도 성야의 기적이 내려졌다고 믿으려 했다. 구주가 단 한 번이라도 다시 변덕을 부린다면, 그의 신실한 종자 질 드 레 영주는 지금까지의 냉담과 불신, 고뇌를 뒤로하고 다시금 그의 품에 몸을 던질 것이라고. 그러니, 두 번은 오지 않을 기적을 감히 다시 내려 달라고.

“물론 제가 바란 마법은 없었습니다. 안개를 뚫고 나타난 것은 기다리던 상선 한 척이었지요.”

남자가 허탈하다는 듯 웃었다. 추위 속에서 어떤 물건을 받았는지, 그 물건이 무얼 위해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자명한데, 자신이 기적 대신 선택한 일은 여전히 닿을 수 없는 영역에 놓여 있었다.

그의 말을 곱씹어 보던 얼터 릴리가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 선장님이 질 씨에게는 산타 같은 사람이었군요!”

“…… 어른은 때때로 성인을 매수하기도 한답니다. 그때의 제겐 어떤 물건이건 손에 넣을 재력이 있었기에-”

“그게 뭐예요. 재미없어. 산타가 무엇을 선물했는지는 열어보기 전까지 비밀이어야 한다고요. 그게 산타에 대한 예의에요!”

아이가 고개를 추켜올리자 작게 종 울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이어나가던 묘사는 자신이 상상한 풍경과 닮은 구석이 없었고, 그는 돈으로 산타를 살 수 있다는 소리나 하고 있지 않나. 아이는 실망한 투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질 드 레는 그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아직 예의를 지킨 셈일까요? 지금의 저로서는 그 배가 무엇을 실어왔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마법사 - 눈이 튀어나온 쪽의 제게 묻는 게 나을 겁니다.”

이는 아이의 궁금증을 풀어줄 수 없다는 사과나, 불안하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와는 거리가 멀었다. 남자는 자신이 무엇을 손에 넣고자 했는지, 그것으로 무엇을 하였는지 기억해낼 수 없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아마도 그것을 사용했을 쪽의 자신이 가지고 있을 터. 그걸 바란 게 아니라고요. 아이는 짐짓 토라진 척을 하며 팔짱을 낀다.

“아무튼, 평생 이런 바다만 봤다는 얘기죠? 다음 크리스마스에는 레 경을 빼고 가야겠어요.”

“이런, 반성이 덜했습니까? 당신을 실망하게 만들어 죄송하다는 생각은 여전합니다만……”

“그건 참 안됐네요! 하지만 어쩔 수 없어요. 힘을 빌려주는 건 고맙지만, 매년 이런 풍경을 보게 되면 마스터와 다른 서번트 분들에게 실례라고요.”

“그럼 대신 동행하고 싶은 자가 있으신지요? 마술사 쪽의 저를 동행으로 생각하고 계신다면 재고를 권하겠습니다. 그가 기억할 바다는 이것보다도 더 어두운 해역. 당신이 이물들의 무대를 볼 생각을 품으신 게 아니라면야-”

“다, 다시 생각해 볼게요!”

흠칫 놀란 아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로 를 염두에 두고 있던 건가? 양 볼이 달아오른 채 쏘아붙였지만, 어지간히 말문이 막힌 듯하다. 세이버 질 드 레는 잔느 얼터 릴리가 한때 캐스터 쪽의 그를 찾아가 바다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마술사가 묘사한 심해를 기는 것들에 한바탕 울먹였다는 것도 알 수 없을 테지만 – 그는 아이가 왜 날 선 반응을 보이는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이 모습으로는 젊은 영주 시절의 나쁜 성격이 나와버리고 만다.

제대로 토라진 낯의 얼터 릴리는 뒷짐을 지고 갑판 위를 걷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만큼 크게 벌린 보폭에서 말을 걸지 말라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세이버 질 드 레는 입을 다물고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

항구에 배가 들어오는 일은 없었다. 마스터와 다른 서번트의 기척도 마찬가지다. 어떠한 결계 속에 갇힌 것처럼, 두 서번트를 둘러싼 공간은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반복되기만 했다. 인부들의 곡괭이질 소리도, 얼음 위에 금이 가는 형태도, 심지어는 두꺼운 얼음판 위에 몰려와 부서지는 파도마저도.

마력 공급이 끊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마스터와 자신들이 한 공간에 있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바깥의 마술사가 결계를 풀고 돌입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질 드 레는 제 무구 중에 마술서가 있음을 안다. 자신은 아직 그것에 손댈 각오를 다지지 못했다는 사실도, 그것을 펴는 날을 무엇보다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고로, 제게는 방법이 없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질 드 레는 얼터 릴리가 무얼 하는지 살폈다. 한참 동안 갑판 위를 빙빙 돌아다니던 아이는 어느새 제 옆의 궤짝에 앉아 뚱한 표정으로 바다를 보고 있었다. 마스터와 합류하기 전에 성녀의 기분을 풀어주어야 한다. 이에 대한 모종의 사명감마저 느낀 기사는 사뭇 부드러운 어투로 말을 꺼냈다.

“제가 기억하는 바다가 이것만은 아닙니다. 더 들어 보시겠습니까?”

토라진 체를 하면서도, 침묵 속에서 제 옆에 앉은 기사를 두어 번 흘끔거린다. 어디 한 번 이야기해 봐요. 아이가 작게 혼잣말했고, 질은 목을 두어 번 가다듬었다.

“조부와 친분 있는 이들이 해변의 별장에서 만남을 가지곤 했습니다. 저는… 아마 당신 정도 나이었던 것 같은데, 당신과는 달리 막중한 업무를 맡지는 못했습니다. 어디에나 있는 소년이었으니까요.”

그는 머리 위를 내리쬐는 여름날의 볕에 대해 말했다.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은 불쾌하지 않을 정도로 시원했고, 자신은 대낮부터 해가 질 때까지 널따란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고. 소년 시절의 기억은 입에 올릴수록 선명해져, 기사는 어느채 물결 위에서 부서지는 햇살과 모래 아래에 간간히 보이던 조개껍데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웃옷에 모래알이 끼어들고 바짓단이 바닷물에 젖었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제게도, 별장의 어른들에게도 말입니다. 그들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면 저를 다시 해변으로 보내고, 아니라면 대화를 마무리한 뒤 만찬을 위해 움직였지요.”

돌연, 줄곧 심기를 거슬렀던 곡괭이질 소리가 멎었다. 선착장 주위를 덮은 얼음이 조금 녹으며 위에 서 있던 일꾼이 물안개처럼 흩어졌다. 이에 놀란 질 드 레가 눈을 크게 뜬 것도 잠시, 얼터 릴리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여름 바다의 모래는 따뜻한가요? 저번에 발을 넣었을 때는 엄청 차가웠단 말이에요.”

“겉은 데일 정도로 뜨거우나, 모래에 발을 파묻으면 금새 서늘해지지요. 물론, 바닷물만큼 시원하지는 않지만요.”

“그러면, 바닷물은 정말로 파란색인 거죠? 하늘에도 지지 않을 정도로 선명한 파란색이요!”

“물론입니다. 하늘과 바다 모두 같은 푸른색이지만, 수평선을 사이에 두고 각자의 영역을 주장하고 있지요.”

“그래요, 수평선! 수평선에는 얼음이 떠 있지 않았잖아요. 그건 왜 그런 거예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물이 너무 깊어서가 아닐지?”

아버지가 자식과 나누는 듯한 질의응답은 일렁이는 해역에 시선을 붙인 채 진행되었다. 서로를 쳐다볼 여유가 없다고 보는 편이 맞았겠다. 아이가 묻는 대로, 남자가 답하는 대로, 그리고 그가 기억하는 대로 - 한겨울의 풍경이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한 명의 일꾼이 허공으로 흩어진다. 여남은 얼음은 거세게 밀려든 파도에 부딪혀 산산이 조각났다. 망망대해로 퍼진 파편들이 제각각 녹아 사라질 때 즈음, 질 드 레는 제가 내놓는 모든 답이 단 하나의 기억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왕실과 비견할 만한 재보나 눈에 담지도 못할 만큼 광활한 영지 대신 그 백사장이 나의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하고요. 바닷가 마을의 필부 질. 레 경이라는 호칭은 누군가의 조소 속에서나 들을 만한……. 당치도 않은 상상이지요?”

아이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서서히 개어 가는 풍경과 제 옆에 앉은 기사를 번갈아 쳐다본다.

필요보다 앞서는 가치가 있음을 안 것도 두어 해 전의 일이다. 인과에 맞지 않고, 때로는 상상조차 못 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는 사실은 매일 느끼고 있다. 고로, 얼터 릴리는 기사의 자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군가가 상상하지 않았음에도 어느새 이 세상에 생겨난 존재가 눈앞에 있잖은가. 그는 그림자 밑에 깔린 몇 줄의 서술이 만들어낸 영령. 자신은 본디 존재하지 않아야 마땅한 영령. 하룻밤의 꿈 같은 현계보다, 역사에 단 몇 줄이라도 남은 이야기의 힘이 더 강하지 않은가?

“그럼 그렇게 하면 되지 않나요? 다시 소환된 김에 이루고 싶은 일에 전념하는 서번트도 많은 모양이던데요. 게다가, 어른이 된 나는 어쩐지 바라는 게 없어 보인다고요. 질 씨가 부탁한다면 기꺼이 들어 줄 텐데.”

진지한 낯으로 아이의 말을 듣던 사내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빛을 보았고,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감히 그녀와의 평화로운 여생을 꿈꿀 수는 없지요. 그녀가 르 크로투아를 지날 때, 잠시라도 바다를 눈에 담았다는 사실만으로 기쁠 따름입니다.”

질 드 레는 어떤 목소리를 기억한다 - 조국이 다시 한번 자유로워진다면, 나는 바다에 가고 싶어요.

잔 다르크의 소원을 처음 들었을 때, 질 드 레는 자신이 소년 시절 맨발로 디뎠던 백사장을 떠올렸었다. 물론, 성녀의 전우는 자신이 기억하는 것보다 더 자주 바다에 발을 들였을 것이다. 젊은 레 경은 환담을 위해, 수렵을 위해, 또 무언가를 손에 넣기 위해 파도가 치는 곳으로 말을 몰았었다. 백사장을 뛰놀던 것도 하룻밤의 기억이요, 자신이 어른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겨질 무렵부터는 해안 별장마저도 알력과 모략의 장소가 되었다. 고로, 그의 청년 시절에 당당히 내세울 풍경은 없다. 내륙의 작은 마을에서 온 성녀의 앞에 자랑스레 내보일 만한 바다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지금 질 씨가 말한 그게, 어른 쪽의 제가 보고 싶던 풍경…….”

어린 산타의 궁금증이 끊이지 않던 이유는 분명하다. 기사가 일러 주는 풍경은 자신이 처음으로 눈에 담았던 바다와는 전혀 달랐다. 그의 말에서는 희미한 금색으로 물드는 파도도, 만조를 앞두고 서서히 거세지는 바람도 찾아볼 수 없다. 비교하면 비교할수록 그 날의 풍경이 더욱 선명히 다가왔다. 제가 기억하는 바다는 결국 그 날의 모습일 것이다. 함께 잡았던 두 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터져 나온 탄성과 결국 감탄이 되지 못한 단어들을 쏟아낸 일까지 포함해서.

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나름대로 소리 없이 표정을 감추려고 한 모양이었으나, 머리 장식에 달린 종이 흔들리는 바람에 큰 효과를 거두진 못했다.

이러한 방어기제는 분명 제가 아는 그 마녀를 닮았다. 자신은 그를 용서할 수 없다. 이미 선택의 기로에 섰음에도, 진작 그 모독적인 책을 손에 쥐었음에도. 그때의 제게 만능의 원망기가 있었다면 같은 짓을 저질렀으리라 미루어 짐작하면서도 여전히 선의 편인 양 검을 휘둘렀다.

“제게는 미쳐 날뛰게 하는 저주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제정신을 되찾는다니. 얄궂은 일이지요.”

진작 악명으로 점철된 이야기를 우리에 가두고 사슬을 매어야 가장 영광스러운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우습다고 생각했었다. 제가 뒤집어쓴 광기는 제법 기이한 구석이 있어, 인생 제일의 영광과 말년의 고뇌 외의 군더더기들은 전부 짙은 안개 속에 파묻는다. 그리고, 자신이야말로 해무 너머 놓인 모든 행위의 목적을 알고 있었다. 어떤 동기로 그녀를 다시 만들었는지, 무엇이 질 드 레라는 이름을 살인마로 각인시켰는지.

“사람들이 기억하는 나의 천성은 악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요, 어쩌면 성녀에 대한 제 마음이 곧 광기였을지도…… 이런.”

아이가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궁금하지도 않은 연애사를 늘어놓는 친척을 보는 듯한 표정에, 세이버는 고개를 돌려 멋쩍게 헛기침했다. 기사가 다시 제 쪽을 쳐다보자, 얼터 릴리는 짐짓 이해한다는 척, 뒷짐을 지고 말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충분히 이해했어요. 저는 산타가 아니면 안 되는 존재. 질 씨는 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인 거죠.”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두려우신가요? 눈이 튀어나온 쪽의 자신으로 변하는 게.”

“솔직해지자면, 그렇습니다. 저는 죄인으로 낙인찍힌 자. 얼마든지 지옥에 빠질 수 있는 존재니까요.”

“그럴 만도 하지요. 나도 말이에요, 미래에 성격 나쁜 쪽의 내가 될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어요. 안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요!”

아이가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외쳤다. 난데없이 불어온 찬 바람에 그의 머리칼이 흔들렸다. 얼음이 녹고 눈이 그쳤다고 한들, 지금의 두 사람이 바라보는 풍경은 결국 겨울 바다다. 파도는 싸늘하고 바람은 매섭다. 추위로 인해 상기된 볼과 코끝은 거짓말이 아니다. 얼어붙은 백사장과 희뿌연 바닷물, 엷은 안개가 낀 하늘의 경계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세이버 질 드 레는 들어오지 않는 상선을 기다리며 기적만을 바라고 있을 테다. 마찬가지로, 잔느 얼터 산타 릴리의 바다 위에는 항상 찬 바람이 불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얼어붙은 모래밭 위에 제 족적을 남길 수 있지 않나. 그에게는 사람들의 구설수 밖의 세상으로 얼마든지 걸어 나갈 가능성이 있었다.

어린 성녀를 멍하니 쳐다보던 남자는 천천히 일어났다. 마스터의 기척을 느꼈냐는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서 만나러 가자는 아이의 말에 머뭇거리나 싶더니, 난데없이 한 무릎을 꿇는다. 질 드 레는 다소 놀란 낯의 얼터 릴리를 앞에 두고 말했다.

“오늘의 일이 없었다면 평생 그 날의 풍경을 잊고 살았을지도 모르죠. 그러니…… 감사합니다, 작은 성인이여.”

“이건 무슨 뜻인지 알아요! 물론, 산타라면 당연한 일이라고요!”

그러니까 고개를 들어요. 아이가 환히 웃었다. 가슴을 쭉 펴고 흡족한 코웃음까지 친다. 동시에, 저 멀리에서 귀에 익은 마술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하나 더. 마스터와 쭉 함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언젠가 어른 쪽의 내가 보고 싶던 풍경도 볼 수 있겠죠?”

“분명 가능할 겁니다. 이곳보다 나으리라 미루어 짐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분명 다음 성탄을 기대하게 될 테니까요.”

“당연해요.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 아니, 준비는 매년 하고 있어요! 산타는 일 년 내내 바쁘니까요!”

“하하, 그럼 다음 원정에도 저를 데려가 주실 겁니까? 당신을 위해 이 검을 바친다면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일 테죠.”

“으음…… 오늘 같은 일을 안 벌이겠다고 약속하면요.”

기사는 확답을 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가 어린 성녀가 앞장서기만을 기다리는 동안, 잔느 얼터 산타 릴리는 마지막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흐릿한 금빛 홍채 너머로 파도가 일렁였다. 밀려온 낮은 물결은 소리 없이 부서진다. 그것은 아이에게 속삭인다. 아니, 단지 아이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네게 발자국을 찍을 땅을 얌전히 내어 줄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누군가의 모래밭을 백지로 만들어버릴 테다. 얼지 않는 바다가 익히 그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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