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 도시락

_ 웨이버 벨벳, 4차 성배전쟁 이후 날조

21세의 웨이버 벨벳은 남극에 간다.

남극해 일부를 거닐다 아르헨티나 남단의 출항지로 돌아오는 여정이었지만, 그의 신분으로 남극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비행기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고, 오후 열 시를 넘긴 늦은 시간에 배에 올랐다.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이 선착장에 모여 있었다. 일본에서 왔다는 단체 관광객들의 대화 속에서 익숙한 단어들을 잡아낸다. 굳은 얼굴의 승무원 두엇이 부두 구석에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누군가가 수화기에 대고 속사포처럼 지시하고 있었다. 억양이 심해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재촉이 확실했다.

이윽고 들려온 승선 신호. 뱃고동이 멎고 가교가 생긴다. 배에 오르자, 금속과 페인트 냄새가 밤공기에 섞여 날카로이 맴돌았다. 새로이 만든 배와 호화로운 대접은 별개다. 갑판 아래는 줄곧 출렁였고, 손에 드는 짐가방은 스스로 들고 가야 했으며, 선실은 네 명이 같이 쓴다. 불편한 환복을 거친 웨이버는 마침내 좁다란 침대에 몸을 눕혔다.

피로에 금방 눈을 감고, 정신을 잃다시피 잠든 것이 고작 몇 시간. 악명 높은 해협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리듯, 선실이 흔들린다. 웨이버 벨벳은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침구가 전부 새 물건이라는 점이 유일한 위안이었겠지만 – 몇 번이고 자다 깨기를 반복하자 합성 섬유와 금속제 침대 프레임에서 풍기는 공산품 냄새마저도 역했다.

 

다음 날 아침. 난처한 낯의 승무원이 식당에 집합한 객들에게 플라스틱 곽을 돌렸다. 거듭 고개를 숙여 가며 무어라 말이 많다. 주방 설비에 큰 문제가 있었고, 전날 밤새워 해결 방안을 찾아보았으나 제때 아침을 차릴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급히 달려와 싣던 물건이 이것이었나? 얼떨결에 받아든 도시락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가장 큰 칸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쌀밥의 그것이렸다.

앞과 옆의 사람들이 일제히 뚜껑을 연다. 웨이버 벨벳은 식사에 동참하는 대신, 곁눈질하며 내용물을 살폈다.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승객에 대한 여행사의 임기응변에 흡족해할 새도 없이 – 죽을 맛이었다. 방부제 냄새,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수증기, 나무젓가락 뜯는 소리 따위의 하찮은 변수들에 머리가 다 울렸다. 마술사 중에는 유독 감각이 예민하거나, 감각의 극에 달해 마(魔)의 이름이 붙은 자들이 있다. 웨이버 벨벳은 그들의 반열에 속하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가벼운 외부 자극에도 괴로움을 호소하는 이들의 기분을 알 것만 같았다.

불편한 표정으로 주변을 노려보던 웨이버는 결국 식당 밖으로 걸어 나왔다.

후회는 한순간에 몰려왔다. 조미료와 비닐 냄새 가득한 식당에서 나와 바람을 쐬며 식사할 생각만 했지, 그 바람이 극점으로부터 불어오는 삭풍이라는 사실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탓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유한 표정으로 나올 걸 그랬다. 저걸 봐, 영국 신사분이 화가 많이 나셨구만. 일행에게 중얼거리듯 빈정대는 목소리를 확실히 들었었다. 이제 와서 바깥 온도를 까먹었다고 너스레를 떨 수도 없다. 한 치의 자존심, 채 지우지 못한 치기라고 볼 수 있는 무언가에 돌아가는 길이 막혔다.

웨이버 벨벳은 어쩔 수 없이 선실로 들어가는 해치 근처에 자리 잡았다. 무릎 위에 도시락을 올리고, 흔들리는 발밑과 힘없는 플라스틱 사이의 균형을 맞춘다. 예전에는 적어도 나무통 흉내라도 냈건만, 지금의 그가 받은 도시락은 비닐 안에 든 밥에 가까워진 물건이었다. 결로 하나 서리지 않은 투명한 뚜껑이 불길하게 다가오는 건 또 처음이다. 순식간에 체온보다 낮은 온도로 식어버린 아침 식사. 평소의 그였다면 본체만체했을 테지만, 쌀쌀한 선실에서 밤을 보낸 여파는 지독한 굶주림으로 이어졌다.

언제 뚜껑을 열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물결이 잦아든다. 웨이버는 기다렸다는 듯 뚜껑을 연다. 지금 먹어치우지 않으면 갑판 위에 온통 엎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밥에서 올라오는 수증기는 온데간데없고, 축축한 기운이 감도는 쌀알에서부터 불길함을 느꼈다. 반찬으로 들어간 나폴리탄 파스타에서는 얼어가는 케첩 냄새가 났다. 여기가 이탈리아였으면 사형감이라고 생각하며, 웨이버는 옆 칸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양 잡힌 달걀말이가 먹음직스러운 노란빛을 뽐냈다. 누구나 기쁜 마음으로 입에 넣을 노란빛 틈에서 회록색으로 변한 부분이 눈에 들어오는 이유는 분명 차게 식은 달걀에서 나는 냄새 때문일 테다.

미간을 찌푸리고 무엇부터 집어야 그나마 나을지 고민한 끝에, 웨이버는 밥과 달걀말이를 입에 넣고 급하게 씹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곱절로 단단하게 굳어가는 밥의 식감이 최악이다. 단단한 밥알이 입천장을 긁고 덩어리진 소금이 미뢰를 한 번 걷어찬다. 내용물을 목구멍으로 진작 넘겼음에도, 희미한 황 냄새가 비강에서 맴돌았다. 이건 폭력이다. 당장 저 바다 아래서 생선을 하나 건져 먹어도 이보다는 비린 맛이 덜하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아직 덩어리진 음식들을 급히 목 아래로 넘긴다. 싸늘한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쳐 지나가고 나서야 악몽 같던 계란을 뇌리에서 지울 수 있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여전히 춥다. 그리고, 배가 고프다. 끔찍한 경험을 머릿속에서 환기할 때마다 애매한 허기가 고개를 들다니.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는 물건이 무릎 위의 도시락뿐이라는 사실이 그를 절망케 했다.

이번에는 파스타를 입에 넣는다. 이 또한 처참하다. 밀가루와 기름, 방부제 섞인 케첩 맛이 따로 논다. 웨이버는 두어 번 두리번대며 주변을 살폈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많은 건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는 양의 내용물 앞에서 눈을 질끈 감는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다 식은 음식들을 차례차례 입안에 밀어 넣는다.

일본의 도시락은 왜 항상 이 모양이지? 웨이버 벨벳은 이 물건이 일본에서 온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속으로 뇌까렸다. 후유키와는 멀어도 한참 먼 땅에 와서 내뱉는 가장 강렬한 감정은 어쩐지 익숙하다. 적어도 그때는 발밑이 흔들리지 않았고, 이렇게 추운 날씨도 아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마음껏 성질을 내도 들어 줄 사람 -분명 한 귀로 흘렸겠지만- 이 있다는 점에서, 지금보다 기분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혀를 끌끌 차며 고개를 저으리라. 이봐, 꼬마야. 네 마력을 위한 식사인데 왜 짐에게 떠넘기는 것이냐? 머릿속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상력은 진작 죽은 줄 알았는데. 마술사는 실존하지 않는 상황을 예상할 수도 있어야 하나, 이 목소리는 훈련의 산물보다는 어느 순간 생겨버린 버릇에 가까웠다. 시계탑으로 돌아간 뒤, 웨이버 벨벳은 난처한 낯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버릇을 고쳤다. 지금의 그는 자주 혼잣말하지도, 쪽방 구석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지도 않는다. 다만, 몇 가지 상황에서 튀어나오는 나직한 입속말과 예고 없이 찾아오는 회상만큼은 진득하게 남았다.

짧게 한숨을 쉰다. 갑판을 살피던 승무원이 빈 플라스틱 곽을 양손에 들고 노려보는 승객을 향해 다가왔다. 식사는 잘하셨냐고 묻지만, 그 역시 변변찮은 물건이었음을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여행길에 괜히 열을 내고 싶지는 않아, 웨이버 벨벳은 신경질적으로 도시락통을 건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항해사 복장의 남자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자리를 떠난다.

이대로 식당에 들어갔다가는 분명 체할 테다. 웨이버는 한탄하듯 갑판 난간으로 다가갔다. 벗겨진 곳 하나 없는 방수 페인트가 아침 햇볕에 반짝였다. 손바닥을 타고 한기가 스민다. 드러난 피부가 그대로 금속에 붙어 떨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 다행히 손을 뗄 수 있었다. 청년은 이유 없는 편두통을 떨치고자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허기가 걷히자 배가 어디를 건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마술은 사람의 영역. 마법은 신의 영역. 이 행성이 얼어붙었다 녹으며 생긴 흔적임을 알고 있음에도, 이 풍경은 신대에 횡행했다던 마법의 잔재 같다. 남청색으로 물든 풍경이 시야를 빼곡히 메운다. 높은 파도 사이로 드문드문 흰 형상이 보였다. 해류 속에서 방황하는 유빙이 잠시 모습을 드러내더니 - 이내 여러 조각으로 부서지거나 빠르게 흘러가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짙푸른 바다와 눈이 아플 정도로 흰 얼음덩이. 배가 가는 역방향으로 부는 바람이 양 볼을 간질였다. 살을 에는 추위가 웨이버 벨벳을 현실로 끄집어내지 않았다면, 그는 분명 어떤 탐험가의 도해 속에서 길을 잃었으리라.

정복왕의 신하는 정복의 발길이 영영 닿지 못할 땅의 영해에 서 있다. 적어도 현대의 논리는 지구의 최남단에 대해 그렇게 정의하고 있었다. 온 대륙이 빼곡한 권력으로 찬 가운데, 아직도 누구의 소유가 아닌 땅. 그러면서도, 정복이 금지된 땅을 둘러싼 바다는 모두의 소유라면서.

그였다면 코웃음 쳤을지도 모른다. 당장 보구를 전개해 군사를 부르겠다는 그에게 안 된다고 쏘아붙이는 제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신하에게 한소리를 들은 왕은 툴툴대며 갑판 너머를 내다보겠지. 자신을 섬긴 병사들이 이 풍경을 눈에 담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고 한마디 던질 테다. 그럼에도, 또 다른 오케아노스를 담은 두 눈은 열망으로 반짝이리라. 라이더, 이스칸달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발밑이 크게 한 번 흔들린다. 뱃머리를 스친 거대한 너울이 십수 미터 거리에서 떠돌던 빙산에 몰아닥쳤다. 대양의 일부가 눈발처럼 흩어진다. 부서지는 쪽이 부서졌음을 모르고, 제가 난 곳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이 유독 기이했다. 수면과 맞닿은 부분의 흰색이 한 겹 벗겨진다. 거친 재회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끝났다. 갑판에 남은 이는 가까스로 두 손을 짚어 자빠지기를 면한 사내 한 명이었다. 균형을 잃고 갑판 위에 주저앉는 순간까지도, 웨이버 벨벳은 벽력 같은 파도 소리에 눈 한번 깜빡일 수 없었다.

그는 높은 파도가 갑판 위에 몰려와 부서진들 개의치 않았겠지. 쇄도하는 물결에 탄성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름이 붙은 땅만큼이나 거대한 대륙이 이 행성에 남아 있다는 사실. 남과 북의 양극에 얼어붙은 바다가 있으며, 지금의 사람들은 새로이 찾은 땅마저 모자라 서로 죽고 죽인다는 사실을, 안개 낀 세상의 끝을 내다보던 그때는 몰랐을 테니. 현세에 소환된 그의 표정. 거대한 군세가 닿지 못했을 풍경에 눈을 빛내던 모습을 기억한다. 처음으로 세계전도를 본 그의 감탄을 이해한다. 그가 왜 밤새 컨트롤러를 붙들고 있었는지도 - 아니, 밤새 게임기를 붙잡고 있던 건 분명 그 시리즈가 폐인 제조기로 악명 높았으니 그랬겠지.

한껏 부푼 감상에 굳이 토를 달고야 말았다. 싸늘하게 식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웨이버 벨벳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린다. 부정할 수 없다. 그는 절망으로 끝났다던 일본에서의 며칠 동안 많이 웃었다. 대부분이 어이없다는 듯한, 또는 체념에 가까운 실소였음에도 그랬다. 제가 만난 유라시아의 패자는 분명 실없는 구석이 있었다. 그와 함께한 성배전쟁은 영광스러운 찰나보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며 비명을 지르는 기억의 비중이 컸다. 예상에 없는 장소라 해 보아야 일본의 강에 놓인 철교 꼭대기 정도일 줄 알았는데, 진짜로 세상의 끝에 가까워질 줄이야. 웨이버 벨벳은 생전의 이스칸달이 상상조차 못 해 보았을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결국 그 사람을 그려내고야 만다.

한참을 웃다 보니 바다가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온 배를 뒤흔든 파도도, 이를 견디며 우뚝 서 있던 빙산도 모두 시야에서 지나간다. 숨을 고르고 주섬주섬 일어나는 와중에도 심장이 뛰었다. 난간에 부서지는 햇살이 어느 날의 벼락불 같다. 일련의 기억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 깨고 나서도 심장을 뛰게 하는 강렬한 꿈처럼, 끊긴 신경 몇 개가 자아내는 평생 남을 그림자처럼.

그 날의 상흔이 영광의 상처라는 사실은 자명했다. 가역의 자리로 돌아간 그는 자신이 웨이버 벨벳에게 남긴 비가역의 흔적을 잊으리라. 한때 유라시아를 손에 쥐었다는 자와 전장에 섰다는 증명이 될 수 없어도, 그와 함께한 벽력 같은 나날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더라도. 당신은 나의 왕이었고, 나는 당신이 무얼 남겼는지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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