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을 관측하며

고스트 게임 디지몬 할로윈 기념 연성

통모짜 by 모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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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이 몰려오는 날에 초콜릿이 웬 말이야.

차가운 목소리에 초콜릿이 허공을 날았다. 최강이라는 호칭을 얻고 톡톡히 귀여움을 받던 그 달콤한 간식이 이렇게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다니. 하준은 느릿한 손길로 초콜릿을 주워들었다.

“웬일이야, 굴루스감마몬?”

커다란 눈동자의 흰 자위까지 살라 먹은 존재가 제 옆에 앉아 있는데도 하준의 얼굴에는 별 다른 감흥이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적응력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이란 말이야. 굴루스감마몬은 은하준의 그런 행태를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가끔은 저도 모르게 놀라워하기도 했다. 자기 자신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어쩐 일이라니, 내가 뭐 말하고 나와야 하나?”

마음이 동하면 나오는 것뿐이지. 선선한 가을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딱히 추위에 약한 편은 아니어서, 목도리가 치렁치렁하게 목을 감싸고 있는 것이 신경에 거슬렸다. 이거 풀어도 돼? 자연스럽게 하준에게 동의를 구하려던 굴루스감마몬의 고개가 멈칫거렸다. 아니, 내가 왜 허락을 받으려고 한 거지? 작은 코가 찡긋거리며 인상이 구겨졌다. 자기 행동을 그리도 인정하기 싫었는지, 하준이 자기를 쳐다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요 근래는 빈도가 낮은 편이었잖아.”

하준이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답답하면 목도리 풀어도 돼. 절대 너를 자극할 생각은 없다는 듯 무심하고 심드렁한 목소리. 저게 거짓이 아니라는 것은 굴루스감마몬이 제일 잘 알았다. 은하준이라는 인간은 그를 배려하기 위해 일부러 성의 없는 가장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귀찮게 군다면 몰라도.

됐어. 하준이 그렇게 나오자 목도리를 푸는 것이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나중에 심상세계에서 감마몬을 보았을 때 후폭풍이 귀찮기도 했다. 목도리가 싫다고 하면 왜 싫냐고 꼬치꼬치 캐물을 것이 뻔했으니까. 말 많은 녀석. 굴루스감마몬 자신도 목에 무언가를 두른 형태라는 걸 까먹은 듯한 적반하장이었다.

“근데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추운 데에서 초콜릿 같은 거나 나눠 먹기?”

너도 참 실없네. 하준이가 손에 든 초코볼을 입에 가득 털어 넣었다. 실없다기보다는……. 우물우물 초코볼을 양껏 씹으면서 그가 몸을 앞으로 굽혔다. 오늘 감마몬이랑 약속한 날이거든. 그제야 굴루스감마몬은 그 앞에 놓인 물체를 인식했다. 커다란 천체망원경. 하준이 입꼬리를 슬그머니 올렸다.

“감마몬이 별을 보고 싶다고 하더라고.”

“……별?”

“기숙사 옥상은 청솔 선배가 이용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셨고, 천체망원경은 관련 부서 애들이 빌려줬고. 선생님이 사용법까지 알려주셨어.”

하준이 그새 익숙해진 자세로 망원경을 조작했다. 한 번 봐볼래? 됐어. 굴루스감마몬은 별 같은 것에 관심 없었다. 새가 하늘을 당연히 여기듯이, 물고기가 한 번도 제 아가미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듯이. 낯선 것은 필연적으로 미지의 호기심을 동반하지만, 익숙한 것은 불합리하게도 이해에서 비롯된 무감을 동반한다. 이 도식이 모든 지적 생명체에게 들어맞는 것은 아니겠지만, 굴루스감마몬은 적어도 이 도식에 딱 들어맞는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 이곳에 있는 굴루스감마몬이.

“관심 없어.”

냉랭한 목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날았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의 소리를 닮은 듯 어딘가 애절하면서도 자그마하여 안쓰러운 티가 나는 목소리였다. 하준은 굴루스감마몬에게 그 이상 망원경 관측을 권하지 않았다. 싫음 말고. 그의 담백한 응수가 하루 이틀도 아니었는데, 굴루스감마몬은 새삼스럽게 그 등을 빤히 쳐다보게 되었다.

무언가를 관측하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그걸 이해하기 위하여 행해지는 행위다. 굴루스감마몬은 이름 모를 별, 인간이 분류화하고 이름 붙인 별을 관측하고 싶지 않았다. 이해라는 욕망과는 결부되지 않은 순수한 나태였다.

어쩌면 그 감정은…….

“아쉽네.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았는데.”

나태라기보다는,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에 가까운 것일지도 몰랐다.

아쉽다고 말한 것치고는, 전혀 아쉬워보이지 않는 얼굴로 하준이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 보온병에 따뜻한 코코아 있는데 먹으려면 먹어. 굴루스감마몬이 코코아를 즐길 리도 없는데, 마치 감마몬을 대하는 양 천연덕스럽게까지 보이는 태도였다. 굴루스감마몬은 괜히 보온병을 손에 들고 무작정 흔들었다. 잔뜩 거품 낀 코코아를 보고 울상이나 지으라지. 그 울상을 정면에서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어차피 인간의 몸으로는 닿을 수도 없는 것에 왜 그리 매달리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네.”

하준은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라는 질문이나 “그렇진 않아”라는 반박도 돌아오지 않았다. 굴루스감마몬의 본래 성정 같았다면, 자기의 말을 듣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그의 옷자락이라도 잡아당겼으리라. 그러나 그는 본의 아니게 은하준이라는 인간을 예전보다 더 잘 알게 되었고, 저 무심한 듯 내던져지는 호의가 마냥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앎은 곧 의지였고, 의지는 방만함으로 이어졌다. ……굴루스감마몬은 지금 조금 방만해져 있었다.

“인간이 저 별에 닿으려고 노력하는 시간에 저 별은 사라져 버릴 텐데.”

망원경의 각도를 조절하던 하준의 손이 멈췄다. 굴루스감마몬은 제 형을 자처하는-정확히 말하면 이 몸을 공유하는 다른 이의 형이었으나, 어찌 되었든 혈통을 기반으로 하는 호칭이니 그의 형도 되지 않겠는가?- 인간의 움직임을 기민하게 살폈다. 하준의 손이 아무렇지 않게 다시 움직일 때까지 기회를 엿본 그가 짧은 다리를 까딱였다.

“그렇지 않아, 은하준?”

그러나 형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부르기엔 혀 아래가 까끌까끌하게 바싹 마르는 느낌이라. 굴루스감마몬은 익숙한 가면을 꺼내 썼다. 망원경에서 얼굴을 뗀 하준이 굽혔던 허리를 폈다. 추운 겨울 같은 건 모르는 색깔의 눈동자였다. 아니, 어쩌면 추운 겨울을 그대로 견디는 나무의 색깔일지도 몰랐다. 굴루스감마몬이 인상을 찡그렸다. 난데없이 제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것에 질려버린 것이다.

“취미가 고약하네.”

“아……, 미안.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하준이 입꼬리를 올리고는 캠핑 의자에 몸을 내렸다. 미안하다고 곧이곧대로 사과한 것도 그다웠다. 하준은 곰곰이 생각하는 듯 눈도 깜빡이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굴루스감마몬이 던진 질문은 답을 구하지 않은 시비에 가까운 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질문이 아주 위대한 진리를 구하는 선각자의 말인 것처럼, 그는 골똘히 생각했다.

“별이 죽어도, 우리는 그 죽음을 바로 목도하지 못한대.”

그렇게 한참이 흘러서 하는 말이 고작 이런 거라니. 굴루스감마몬이 일부러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질문에 동의하듯, 혹은 반박하든 정보값 있는 대답을 기대했더니. 굴루스감마몬이 뚱한 얼굴로 턱을 괴었다. 하얀 용의 얼굴로 심기가 불편하다는 티를 팍팍 내보았자 귀엽기만 할 뿐이었지만.

“그래서?”

더 해보라는 듯 굴루스감마몬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은하준이 언제나 그의 예상을 뛰어넘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진부한 생각에 사로잡힌 인간이었고, 정과 이상에 취해 가끔 헛된 시도를 하곤 했다. 그러나 굴루스감마몬은 그 모든 은하준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대답을 들어보기로 했다. 이유를 묻는다면, 글쎄…….

보온병이 아직 따뜻하기 때문일까.

“그게 다야. 굴루스감마몬, 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이 저 별에 닿으려고 노력하는 시간에 저 별이 사라져 버릴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국 우리의 눈에 그 별의 과거가 들어온다면, 일부라도 닿을 수 있었던 거잖아.”

“이상론자의 헛된 망상이라면?”

“망상?”

하준이 굴루스감마몬의 말을 반복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걸. 확신에 찬 얼굴이었다. 굴루스감마몬은 하준이 이런 표정을 짓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설프게 함께하고 있는 형국이라고 해도, 하준이 저런 얼굴로 그를 어떤 꼴로 몰아넣었던가. 본능적인 불쾌감과 거부감에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기에 가치가 있는 거니까, 망상이 아니라 결론인 거지. 결론이라고? 하준이 굴루스감마몬에게 손을 내밀었다. 굴루스감마몬은 손을 뻗지 않았다. 예상했지만, 살짝 입맛이 쓰다는 얼굴로 그가 웃었다.

“사라진 것의 흔적을 볼 수 있기에 별을 관측하는 거야.”

“…….”

“기록되지 않은 끝도 분명히 존재했을 테니까.”

캠핑용 전등을 손에 든 그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인간은 떠나버린 것을 그리워하는 존재거든. 그러니까 귀신이 찾아오는 거고 말이야. 우스꽝스럽게 전등을 얼굴 밑에 갖다대자 그림자가 기괴하게 얼굴에 스며들었으나, 굴루스감마몬의 얼굴은 평온하기만 했다.

아차, 감마몬이랑은 다르지. 눈동자 색과 가끔 툭 쏘아붙이는 말의 온도가 다를 뿐, 많이 차분해진 굴루스감마몬을 대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감마몬을 대하던 태도가 튀어나왔다. 하준이 민망해하며 전등을 내려놓았다.

“……끝을 보기 위함이라고.”

바보 같은 짓이다. 끝은 말 그대로 끝이다. 끝에서 창조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으며, 끝에서 비롯될 수 있는 것은 종말뿐이었다. 종말이 두려웠기에 모든 것을 파괴하는 끝을 보려고 했던 것이 그 자신이었기에, 더더욱 굴루스감마몬은 하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호박 바구니 안에 가득 찬 초콜릿과 사탕이, 묵직한 보온병이, 목을 갑갑하게 두르고 있는 목도리가, 그 모든 미지의 세계가 그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듯했다. 끝에서만 볼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지 않아도 된다고. 끝은 그저 끝이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소중했던 것을 기억하는 방법이겠지.”

그 대상을 사랑했던 이의 발버둥일 뿐이라고.

굴루스감마몬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사라진 별을 기억하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생존 경쟁에서 이기지 못했기에 멸망은 곧 패배였고, 패배는 치욕스럽고 고쳐야 할 문제였으니까.

굴루스감마몬은 물러터진 은하준과 감마몬의 방식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귀신이 돌아오는 날에 어째서 이런 달달한 것으로 입맛을 버리는지도 납득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굴루스감마몬이 캠핑 의자에 등을 묻었다.

떠나간 것이 돌아온다는 것, 그것 하나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악한 유령이 몰려와 그를 잡아먹으려 아가리를 벌린다고 해도 그는 더 이상 그것에 쫓기듯 손을 뻗을 이가 아니었으니까. 그는 확실히 바뀌었다. 약해 빠졌다고 괄시했던 이 인간의 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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