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보우 식스 드림
유료

삼위일체론(1)

레인보우 식스 GSG-9 드림 장편

1. 녀석이 여기가 제 집인 양 들락날락한지 3주가 되었다. 처음엔 멀리서 자연스럽게(적어도 본인은 그렇게 행동하려고 한 것 같다. 의상이 달라서 아무런 소용이 없었지만, 다들 대충 모르는 척해주는 분위기라 나도 적당히 그런 체했다.) 돌아다니던 놈은 다음번엔 대놓고 기웃거렸고, 그 다음번엔 눈이 마주치자 당연하단 듯 다가와 말을 걸었다(무슨 포켓몬 트레이너인가? 난 고글 때문에 나랑 눈이 마주친 줄도 몰랐다고).

2.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냐면, 그냥 적당히 받아줬다. 왜냐고? 당연하잖아.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놈은 유우명 영화의 주연급이고, 나는 카메라 화면에 단 한 번도 잡힐 일이 없는 고작 말단 스태프 따위다. 그리고 굳이 그런 계급 문제가 아니라도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게 내 인간관계 신조니까.

□. 3이 완전한 숫자라는 건 헛소리다. 삼종신기, 삼권분립, 삼위일체, …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얼마나 떠들어대든 적어도 나에겐 해당하지 않았다. 다짐은 삼 일이면 땡, 흥미는 삼 주면 식었다. 나에게 3은 그런 징크스였다.

4. 그러니까, 내가 이글루에 얼굴을 비춘 지 이제 딱 3주째인 사람이 다음에 또 찾아올지 안 올지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한 섭리다. 정확히는 '내' 이글루만 찾아오는 중이시지. 몇 가지 부연 설명을 하자면, 나는 내가 아끼는 녀석을 직접 손보는 경우가 잦았다. 물론 내가 정비사는 아니지. 이글루도 내 것이 아니고. 하지만 모든 날개 있는 아이들은 쉬는 자리가 정해져 있었고, 그리고 나는 뭐랄까… 정비사가 의사라면 나는 보호자? 연인 이상 가족 미만인 관계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 친구(별명도 붙여줬는데 말하지는 않겠다. 너드 같으니까)와 같이 쉬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동료들은 내가 일하지 않는 시간에 어디 처박혀있는지 다 알았다.

걔한테 전할 거 있는데 어딨는지 알아? 이글루요.

얘 밥 먹고 어디로 사라졌대? 이글루에.

ㅇㄷ? ㅇㄱㄹ. 그 새끼는 뭐 항공기랑 사귄대?

5. 잡소리가 길어졌군. 아무튼, 무슨 얘길 하고 싶었냐면, 나만큼이나 항공기에 관심이 많아 보이는 놈이 무슨 생각인진 몰라도 출석 도장 찍듯 찾아오고 있다는 것이다(여기가 프렌차이즈 카페였으면 커피 한 잔 무료였을 텐데). 나를 정비사로 착각한 줄 알고 질문 몇 번 받아준 게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다른 놈들이 알려주길, 내가 없으면 몇 분 지나지 않아 그냥 쓱 돌아가 버린다더라. 놈들은 '간택' 받은 거라며 나를 놀려댔다. 나는 차분히 반박했다. 첫째, 그는 고양이가 아니고. 둘째, 나는 강아지 파야.

6. 그의 대화 스타일은, 그래, 탁구로 말하자면 마구 서브 에이스를 넣는 타입이다. 핑과 퐁이 아니라 핑만 존재했다. 핑, 핑, 핑- 반대로 나는 볼보이었다. 경기장 가에 서서 글러브를 끼고 공을 캐치하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했다. 탁구 경기에서 왜 글러브를 끼냐고? 굳이 내 입에서 직설적인 단어를 뱉게 만드는군. 사교 실력이 형편 없단 거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성향 때문에 그와의 대화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그가 공을 던지면 나는 잡고. 그가 찾아오면, 나는 막지 않고. 그게 내 신조니까….

7. 아, 그래. 진행 상황을 보고하자면 그는 마의 3주를 넘겼다. 얼굴을 마주친 횟수로는 두 자릿수가 넘었고. 그동안 그와 내가 사적인 정보를 공유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여기가 무슨 학술대회도 아니고, 어떻게 서로의 전공이나 전문 지식만 공유하겠는가. 호칭도 'hey'에서 콜사인으로 바뀌었다. '예거'. 왜 촉새가 아니지? 그런 마음에서 제법 근사한 이름이네, 칭찬해 주니 신이 나 자신의 까치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당연하게도 대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모의전에서의 활약으로 넘어갔다(이건 제법 흥미로운 주제였다. 아무튼 나는 참가하지 않으니까).

그때 밴딧이 어떻게 했냐면- 아, 밴딧은 내 파트너인데- 그런데 블리츠가- 오, 블리츠는 누구냐면- 그리고 아이큐는-

그렇게 나는 그의 팀 전원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들이 이 사실을 달가워할 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나도. 하지만 내 행동은 정해져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기. 떠날지 선택하는 것은 그의 권리다. 그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는 게 나의 일이고.

8. 우리는 가족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왜 '우리'냐면, 내가 아무리 '볼 보이'라도 상대만 끊임없이 얘기하게 두는 초심 잃은 동태눈 아이돌은 아니다. 이런 직업을 가지고 자신의 사적인 정보를 알려 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동료라도 말이야. 그러니까 나는 상대가 알려준 것에 상응하는 정보를 말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듣지 않으면 교환할 필요가 없지만… 어쨌든 그는 마의 3주를 넘겼잖아? 그는 자신의 삼촌에 대해 말했다. 삼촌이 BPOL의 정비공으로 일하고, 그래서 자신이 어릴 적부터 비행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라고. 그래서 나도 내 아버지 얘기를 했다. 해병대 출신에 대해서도. 나에게는 정당한 교환이었지만 그에게는 뭐랄까… 일종의 신뢰의 표시라고 생각된 것 같다. 혹은 약간의 동질감을 느꼈거나. 아무튼 그게 긍정적인(정말?) 작용을 했는지 그는 신이 나서 자신의 삼촌이 얼마나 까탈스러운 사람인지부터 시작해 옆집 할머니의 반려 강아지 얘기까지 꺼냈다. 어느 정도냐면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의 동네 맛집을 내가 훤히 꿰고 있을 정도다. 기왕 과장한 거 좀 더 해보자면 거의 동네 친구가 됐달까. 그의 삼촌과도 자연스럽게 인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삼쵼, 그때 말한 내 친구.

안뇽하세요 저 예거랑 방에서 놀아도 되나요?

…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9. 이 모든 대화가 이글루에서 이루어진 건 아니다. 그와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한 순간부터(더 정확히는 서로의 콜사인을 알았을 때부터) 그는 공용공간에서 마주칠 때마다 아는 체를 해왔다. 복도, 식당, 휴게실, 자판기 앞… 내가 본인을 알아봤다는 걸 얼마나 잘 눈치채는지 시선이 마주쳤다 하면 모르는 척하기가 힘들었다(꼬리가 달려있었다면 프로펠러 마냥 돌아갔을 거다. 어떻게 그런 걸 무시해). 사실 주연 배우와 일개 스태프가 대화하는 게 무슨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내가 그의 진짜 '팀'과 마주하게 됐다는 거지. 이렇게 빨리 면면을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 꼭 방청 객석에서 무대로 끌려 나온 기분이다. 자, 방청객분들 중에서 지원자를 한 분 뽑아 무대로 모시겠습니다! 전 지원한 적이 없는데도요?! 와우!

10. 사건은 음료자판기 앞에서 일어났다. 점심을 먹고 가볍게 입가심이나 할 생각이었다. 지폐 투입구에 돈을 넣으려던 찰나에 부르는 소리가 들려 바라보니 복도 끝에서 예거가 잰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손까지 붕붕 흔들면서. 제발 사람들 관심이 이쪽으로 오지 않게 해줄래…). 나는 예정했던 것보다 더 큰 금액의 지폐를 투입하고, 콜라 한 캔과 오렌지 주스 한 캔을 뽑았다. 콜라는 나의 취향이고, 오렌지 주스는 예거의 몫이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음료라던가 그런 건 아니고. 말을 저렇게 많이 하다 보면 목이 마르지 않을까 싶어(대화 중에 탄산은 좋지 않은 선택 같았다.) 챙겨줬더니 잘 마시길래 그냥 그렇게 고정되었다.

11. '오렌지 주스 좋아하냐고 한 번쯤은 물을 걸 그랬나?' 이때의 나는 멍청하게도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정말 중요한 물음은 그의 뒤에 따라올 존재들에 대해서였는데도. 생각을 해보라. 틴-에이저들이(비꼴 생각은 아니다. 군이나 학교나 사회생활은 비슷하니까.) 식당에 갈 때 혼자 가는 걸 보았나? 찌질이처럼 밥을 혼자 먹는다고? 친한 친구들끼리 몰려다니는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은가. 예거 같은 인싸라면 더더욱! 콜라 캔 뚜껑이나 따면서 멍청하게 서 있을 게 아니라 그가 답지 않게 대화 주제를 먼저 꺼내지 않고 무언갈 기다리고 있을 때 낌새를 눈치채고 떠났어야 했다. 앞으로는 절대 다음의 문장을 잊지 않으리라. '인생은 타이밍.'

12. "오, 그쪽이 말로만 듣던 '그' 파일럿?"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선수를 뺏겼군. 순식간에 첫인사로 뱉을 문장이 사라졌기에 눈인사로 대신하며 세 사람을 살폈다. 아마 'that'을 강조하여 말한(왜? 웃으라고 한 말인가?) 남자가 블리츠, 유일한 여성이 아이큐, 나머지가 밴딧일 것이다. 콜사인과 생김새를 빠르게 매치시킨 후 자판기에 지폐를 더 넣었다.

"아, 그러지 않아도 괜찮- 고마워."

그리고 아이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렌지 주스의 버튼을 다다닥, 세 번 눌렀다. 너흰 모두 오렌지 주스 행이야. …누군가에게 알러지가 없길 바랄 뿐이다.

13. 대화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났다. 그들에게도 나에게도 복도는 지나가는 길일 뿐이니까. 사람이 총 다섯이니 팔 할이 서로를 소개하는 시간이었다(나는 여기서 최대한 그들의 정보를 미리 알고 있다는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블리츠 너는 반성하도록). 긴장도 탄산도 다 새어 나가 밍밍해졌다. 그들이 우르르 떠난 뒤에, 나는 그저 단물이 되어버린 캔을 홀짝이며 어기적어기적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네 사람이나 아는 척을 해야 하는군. For God's s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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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대단한 조랑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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