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보우 식스 드림
유료

BABY BOY COMPLEX

레인보우 식스 드림

· 연하듦캐X연상듦주


내가 보기에 넌 아직 어린아이일뿐이야.

뮤트

내적 호감도 150%, 사회성 -50%. 뮤트는 그렇게 도합 100%의 완벽한 사랑을 하고 있었다.

당연히 반어적인 표현이다. 아니, 짝사랑인 것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맞는 말일지도 몰랐다. 그는 당신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걸지 못하고 주변만 서성거리고 있는 게 실정이었으니까. 그래도 한가지 나아진 점이 있다면 맴도는 거리가 약 5m에서 2.5m로 줄어들었다는 점일까.

훈련 시작 전에 한번 흘끔. 훈련이 끝나고 한 번 더 흘끔. 연구실로 향하는 복도를 지나며 또 흘끔.

당신의 고개가 제 쪽으로 살짝 기울어지기라도 하면 그는 누가 혼내기라도 하듯 시선을 홱 돌렸다. 당신이 제 시선을 알아차렸을까? 머리를 가득 채운 의문으로 뮤트의 심장은 쉴 새 없이 쿵쾅거렸다. 그 유치한 행태에 함께 있던 스모크가 비웃음을 흘렸다. 첫사랑에 빠진 틴에이저구만. 뮤트는 조롱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밀치듯 지나치며 자리를 벗어났다. 떠나가는 그의 걸음마다 분노와 수치심, 후회와 같은 감정들이 엉망으로 뒤섞여 묻어났다.

당신은 새카맣게 남은 그 발자국들을 눈으로 뒤쫓을 뿐이었다.

오늘은 정말 최악이었다.

먹구름으로 가득해 보는 이를 불안하게 만들던 하늘은 기어코 예정에 없던 물줄기를 쏟아부었다. 어두침침한 분위기, 빗줄기가 유리창에 부딪히며 내는 소음과 습기를 가득 머금은 공기는 모두를 불쾌하게 만들기 충분했으나 전문대원들이란 어떤 조건에서도 움직여야 하는 존재였다. 대원들은 기계 부품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위치로 이동했다.

열 명의 대원들은 다섯 명씩 두 팀으로 나뉘었다. 뮤트는 당신과 같은 편에서 나란히 서 있었다. 헬멧을 수없이 때리는 물줄기가 곡면을 타고 내리며 시야를 방해했지만, 누구도 불만을 내뱉지는 않았다. 이윽고 신호가 오가고, 대원들이 일제히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무거운 군화가 잔디를 밟으며 진흙이 철퍽이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장대비와 함께 시작한 모의전은 수비팀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말 그대로 압도적인 차이에 시합을 마치고 돌아온 대원들 모두가 말을 잃었다. 빗물을 잔뜩 머금어 무거워진 복장. 물기로 미끄러운 장비를 놓치지 않게 힘을 주느라 얼얼해진 손바닥. 사방에서 울리는 빗소리 사이로 상대의 발소리를 듣기 위해 한껏 예민해진 신경. 침묵이 가득 채운 눅눅한 공간에서 카베이라가 피 섞인 침을 뱉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의 얼굴 한쪽은 반대쪽과 달리 페이스페인팅이 벗겨진 채로 부어있었다. 경기 초반 슬레지와 몸싸움을 하다 생긴 부상임이 분명했다.

그것을 시발점으로 작은 대화들이 오갔다. 닥이 카베이라의 상태를 확인하고, 장비를 점검하던 룩은 곧장 미라에게 무언가를 보고하는 듯했다. 당신은 애쉬에게 다가가 모의전 결과에 대한 피드백을 받았다. 그 사이에서 뮤트만이 오롯이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장비를 채 벗지도 않은 그가 자리에서 가만히 눈만 굴려 고글 너머로 당신을 살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친 곳은 없나 느릿하게 전신을 훑는 그 시선이, 안 그래도 신경이 곤두서있던 당신에게 느껴지지 않을 리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것을 눈치챈 애쉬가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며 돌아섰다. 이런 상황을 겪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당신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에 사적인 감정을 섞지 말자며 몇 번이고 다짐했건만, 쌓이고 쌓인 불만이 이 순간을 기점으로 결국 터지고 말았다.

“따라 나와.”

꼭 학교에서 하급생을 괴롭히는 상급생 같은 대사를 뱉은 당신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나가자 뮤트가 허둥지둥 장비를 정리하곤 당신의 뒤를 따랐다.

*

기지 안은 평소보다 어둡고 또 조용했다.

앞서 언급했듯, 뮤트가 당신을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당신을 포함해 대부분의 대원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그 미묘한 상태가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티를 안낼거면 확실하게 숨기던가. 애매하게 소문은 돌지, 제대로 찰 수도 없게 고백은 안 하지. 요 몇 달간 쉬지 않고 긁어낸 당신의 인내심은 기어코 바닥에 다다랐다. 당신은 속으로 뇌까렸다. 그가 끝을 내지 않으면 자신이 끝내면 될 일이다.

그런 생각은 당신을 사람이 없는 계단으로 이끌었다. 뮤트가 당신의 맞은편에 서고, 비상구의 문이 닫혔다. 쇠로 된 경첩이 삐걱이며 불쾌한 소음을 만들었다.

“뭐 하자는 거야?”

“네?”

당신과 단둘이 같은 공간에 놓여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있던 뮤트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당신은 조금 더 직접적으로 문장을 바꾸었다.

“너 내가 좋니?”

“….”

이번에 그는 당황하여 대답조차 하지 못하였다. 크게 뜬 눈이 초조함으로 물들고, 눈동자는 이리저리 방황하기 시작했다. 입술을 잘근 깨무는 꼴이 제법 웃겼기에, 뮤트는 방독면을 벗은 자신을 탓했다. 적어도 표정을 가릴 수 있었다면,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그만의 생각이었다. 그런다고 해서 이 상황이 더 나아질 리는 없었으니.

뮤트가 대답하지 않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사이 당신이 말을 이었다.

“아니야? 그럼 나랑 그냥 한번 자고 싶은 거야? 응?”

단어의 선택에 놀란 뮤트가 바보같이 버벅거렸다. 그 꼴을 지켜보던 당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작은 숨이었음에도 그것이 뮤트의 가슴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됐다, 내가 너 같은 애를 데리고 뭘 하겠니….”

그 말을 끝으로 당신이 먼저 자리를 떴다. 뮤트는 끝까지 제대로 된 말 한번 해보지 못했다. 조명이라곤 비상등뿐인 어두운 계단에서, 뮤트는 제 주먹을 세게 말아쥐었다.

정말 최악이다. 오늘 하루도, 이딴 상황도, 그리고 자신도. 숙인 고개로 인해 아래로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어두운 눈동자가 조명을 반사해 내며 빛났다. 기다란 속눈썹이 호흡과 함께 떨렸다.

*

… 그렇게 그가 어떠한 결심을 하는 사이, 당신은 자신이 어떤 스위치를 누른 건지도 모른 채 느껴지는 오한을 날씨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어휴, 나도 나이가 들었나….

“몸은 좀 어떠세요?”

모의전을 마치고 곧장 의무실에 들렀던 당신이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마주친 것은 티 없이 맑은 새파란 눈동자, 룩이었다.

당신을 따라다니기 바쁜 그의 행동에 갓 걸음을 떼기 시작한 강아지를 떠올린 당신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문턱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당신의 등으로 닥의 시선이 느껴졌다. 당신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의무실을 나와 문을 닫았다.

“그냥 작은 찰과상이야. 금방 나을 거야.”

“다행이에요.”

룩은 당연하다는 듯 당신의 옆에서 따라 걸었다. 제법 큰 덩치를 가진 그가 당신의 보폭에 맞춰 종종거리며 걷는 모습은 꽤… 귀여웠다. 두 사람이 복도를 걷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할지도 몰랐다. 그만큼 그의 태도는 당신에게 맞춰져 있었다.

“나 보려고 여태 기다린 거야?”

“네, 보고 싶었어요.”

한 가지 포인트가 있다면 아직 조금 어리숙하단 점일까.

멘트를 던진 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는 시도는 좋았으나, 조금씩 꿈틀거리는 얼굴근육, 긴장한 티가 역력한 눈빛과 특히 잔뜩 붉어진 귀 끝에서 그의 감정이 전부 드러났다. 네가 말해놓고 네가 먼저 눈을 피하면 어떡해. 당신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 결국 얼굴까지 새빨개졌다.

“왜, 왜요? 제가 뭔가 웃긴 말을 했나요?”

“아니, 그냥. 네가 너무 귀여워서.”

비죽, 하고 살짝 튀어나오는 입술. 솔직한 감정 표현이야말로 젊음의 특징이자 매력이었다. 이렇게나 귀여운데 자꾸만 성숙한 모습을 연기하려는 그의 노력이 가상하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사람을 보는 기분이 들게 했다.

“귀여운 사람 좋아하세요?”

“글쎄.”

“그럼 어떤 사람을 좋아하세요?”

회복력도 좋지, 금세 의도가 빤한 질문을 던져왔다. 당신은 부러 대답에 뜸을 들였다. 그가 혀로 마른 입술을 축이고, 침을 꼴깍 삼켰다. 당신에게 집중하는 새파란 눈동자가 타오르듯 빛났다.

“굳이 따지자면 질 같은 사람?”

“예?”

“멋있잖아. 난 그렇게 기댈 수 있는 어른스러운 사람이 좋더라.”

예상치 못한 아는 이름의 등장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유까지 덧붙이자 떨림이 더 커졌다. 룩의 입장에선 절망적인 대답이었다. 질은 존경받아 마땅한 멋진 사람이고 그도 본받고 싶은 이였으나, 그렇기에 그와 자신을 비교해 보자면… 그가 잠시 침묵했다. 포기한 걸까?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 그가 당신의 손을 슬쩍 건드렸다.

그의 손가락이 당신의 영역을 살짝씩 침범하고, 반응을 살피듯 조금 머뭇거렸다가, 거부하는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다시 움직였다. 대범하게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더니 부드럽게 손을 잡아 왔다. 크고 두툼한 손에서 그의 노력을 담은 굳은살이 느껴졌다. 당신이 걸음을 멈추자 그도 멈춰 섰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마주쳤다.

“혹시 기댈 수 있고 어른스러운 몸으로는 어떻게 안 될까요?”

목까지 시뻘게진 주제에 계속해서 어필하는 모습이라니. 정말로, 정말로 유치한데도… 당신은 살짝 넘어갈 뻔했다.

카베이라

훈련은 항상 고되었다.

아니, 솔직히 세상 그 누구도 직장에서 편하게 꿀이나 빨아먹고 있진 않을 것이다(몇몇 자본가들 빼고. 당신은 피냐타 경제 이론파이다). 잔뜩 구른 뒤 기진맥진한 상태로 벤치에 기대앉은 당신은 느닷없이 물통 뚜껑과 씨름 중이었다. 아니, 이런 썩을. 상식적으로 내가 잠갔으면 내가 열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당신이 몇 시간 전의 스스로를 욕하며 낑낑대던 그때, 당신의 위로 그림자가 졌다. 카베이라였다. 그는 당신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물통을 뺏어갔다. 당신은 그가 손쉽게 물통의 뚜껑을 열어, 다시 당신 손에 쥐여줄 때까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고나 있었다.

“어, 음… 고마워.”

기왕 해줄 거 먼저 말이라도 하면 어디 덧나나, 같은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말보다는 행동이 먼저인 거친 방식이야말로 카베이라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요즘 들어 그 행동에 사심이 부쩍 섞여 들어갔다.

저번에는 훈련 중 발목을 삔 탓에 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 당신에게 다가와 직접 냉찜질을 해주었다. 당신의 수많은 만류를 씹고, 무릎을 꿇고 앉아 발을 잡고 찜질팩을 대어주고 있는 카베이라의 모습이란….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한 번씩 시선을 던져댔기에 당신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지옥 같은 10분은 군인이 되고 나서 처음이었다.

하루는 운동을 직접 봐주기도 했다. 무게를 치는 당신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더니, 나중에는 팔, 다리에 직접적인 터치가 오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걸까? 하고 플로레스에게 얘기를 털어놓았을 때 그는 혀를 차며 무어라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니, 나 스페인어 못 알아듣는다고.

아무튼, 그런 그를 애써 모른척하는 중이었기에, 당신은 떨떠름한 감사 인사를 내뱉었다. 카베이라는 그것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무뚝뚝한 얼굴로 다음 훈련 일정과 그 전에 당신이 처리해야 할 업무에 관해 설명했다.

“- 그리고 이번 주말에 저녁 먹게 시간 비워놔.”

네, 네, 하고 성의 없이 답하던 당신은 마지막 문장에서 입을 합 다물었다.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자 그는 눈썹을 조금 꿈틀거릴 뿐이었다. 명령인 걸까, 권유인 걸까, 아님 부탁인 걸까. 답을 내리지 못한 당신이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하자, 곧장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카베이라의 얼굴에 불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당신은 잽싸게 입을 열었다.

“같이 밥 먹을 사람 필요한 거면 다른 사람도 많지 않아?”

카베이라가 당신을 내려다보았다. 시선에 얼굴이 뚫릴 것만 같았다.

꿀꺽, 하고 당신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을 때 그가 손을 뻗어 벤치의 등받이를 잡았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당신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코끝이 닿을 것만 같았다.

“내가, 혹시 알아듣기 힘들게 말했나?”

당신은 고개를 도리 저었다. 그 모습에 카베이라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럼 약속한 걸로 알고 있을게. 그는 그렇게 말하곤 먼저 자리를 떴다. 굉장히 쿨한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당신은 한숨을 쉬었다. 주말까지 급한 일은 다 처리해야겠네. … 그리고 데이트 복장도 생각해 봐야겠다.

도깨비

최근 도깨비는 틈만 나면 핸드폰을 잡고 시시덕거리는 일에 빠졌다. 당신과 인스타 아이디를 공유해 얼마 전부터 디엠을 나누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당신의 계정은 스토리도, 프로필 사진도 없는 거의 스팸 계정에 가까운 상태였으나, 도깨비는 그게 또 당신다워서 귀엽다고 생각해 버렸다.

팔로워 5, 팔로잉 5.

당신의 가족을 제외하면 대원들 중 당신과 맞팔로우 상태인 건 도깨비뿐이었다. 거기에 당신과 유일하게 디엠을 나누는 사람이라는 특별함이 추가되었다.

당신의 인스타를 아는 유일한 대원이 누구? 바로 나!

당신과 디엠을 나누는 유일한 대원도 누구? 바로 나!

할 수만 있다면 트로피라도 만들어 전시해 놓고 싶은 마음이었다. 번쩍번쩍하게. 금으로 만들어진 조형물 아래 글귀에 당신과 자신의 이름이 적혀있을 것을 상상한 도깨비의 마음이 십 대 소녀처럼 들떴다(옆에서 에코가 미친 사람처럼 혼자 웃지 말라고 하는 건 무시했다).

너구리를 잡기도 전에 소란부터 피우는군. 계속해서 시비를 거는 에코에 도깨비가 답했다. 걘 너구리보다는 강아지를 닮은 것 같아.

… 에코는 대답 대신 질린 표정을 하곤 노트북을 챙겨 자리를 떠날 뿐이었다.

아무튼 당신과의 지난 대화 내용을 계속해서 곱씹고, 새로운 답장을 기다리는 일은 무척이나 행복했다.

그리고 오늘, 그는 고심 끝에 당신에게 디엠으로 링크 하나를 보냈다. 요즘 인기 있는 카페의 홍보 글이었다. ‘여기 디저트 어때? 네가 좋아할 것 같은데.’ 잠시 뒤 답장이 돌아왔다. ‘맛있겠네.’

그 간결한 답에도 침대 위를 폴짝거리며 기뻐한 도깨비가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메세지를 보냈다.

[ 혹시 주말에 시간 괜찮으면 여기 가볼래? ]

[ 우리 둘이서만! :D ]

마지막 문장은 보내지 말 걸 그랬나? 후회했지만 이미 전송된 디엠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아니야, 읽기 전에 빨리 삭제하면…

도깨비가 고민하는 사이 다시 답장이 왔다.

[ 좋아. ]

한참이고 긍정의 답을 확인한 도깨비가 얼굴을 베개에 처박고 비명을 지름. 이거 데이트 맞지? 맞지?! 당신이 말을 물리기 전에 구체적인 날짜를 잡는 도깨비의 엄지가 마치 천재 피아니스트라도 된 양 자판 위를 유영했다.

텍스트로 마무리 인사를 하고 나서도 그는 핸드폰을 내려놓지 않았다. ‘좋아.’ 액정에 들어있지 않았다면 분명 닳아버렸을 그 짧은 문장 하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도깨비는 슬슬 눈이 아파질 때쯤에서야 휴대폰을 껐다. 검은 화면에 비친, 광대가 하늘을 뚫을 듯이 솟구친 제 얼굴이 한마디로 빙구 같았다.

잠깐, 이렇게 시시덕거릴 때가 아니라 지금부터 데이트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도깨비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옷장 문을 벌컥 열어젖힌 도깨비가 거친 손길로 옷더미 사이를 헤쳤다. 이건 구리고, 이건 오래됐고, 이건 너무 꾸민 것 같잖아. 그렇다고 이건 너무 안 꾸민 것 같고. 이건… 에이씨, 흰옷에 이 빨간 얼룩은 뭐야? 저번에 떡볶이 먹다가 흘렸나? 애꿎은 얼룩을 엄지로 문지르던 도깨비가 다시 휴대폰을 켜 검색창을 열었다. 토독, 톡. 자판을 누르는 손길이 다급했다. ‘흰옷에 빨간 국물…’


안녕하세요 잇님들!

오늘은 흰옷에 묻은 빨간 국물 지우는 법에 대해 알아볼게요!

흰옷만 입으면 떡볶이처럼 꼭 붉은 음식을 먹게 되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알려드리는 얼룩 지우는 방법은 바로바로~~

흰옷을 입고 떡볶이 먹지 않기! 입니다~

그럼 다음 포스팅에서 만나요!!


“이런 씨발, 지금 장난해?!”

도깨비가 다른 포스팅을 찾아 오른손 엄지로 스크롤을 내렸다. 그의 심경을 대변하듯, 반대쪽 손으로 쥐어뜯은 머리카락들이 들쭉날쭉 엉망으로 엉키었다.

“과탄산소다와 식초… 이거다!”

이런 물품이 개인실에 있을 리는 없었기에, 도깨비는 의자에 대충 던져놓은 외투를 서둘러 챙겨입고 삼선슬리퍼에 발을 끼웠다. 복도를 지나는 발소리가 요란했다.

와마이

최근 와마이는 레인보우와의 합동 훈련이 즐거웠다. 당신을 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당신의 입장에서 그는 그저 나이트헤이븐 요원 1 정도에 그치는지, 당신은 그에게 일 얘기 말고는 도저히 틈을 내어주지 않았다.

모의전을 위한 대기실에서 장비를 점검하며 한숨을 내쉬는 와마이를, 에이스가 팔꿈치로 툭 건드렸다.

“너 얼마 전에 칼리에게 받은 보트 하나 있잖아. 같이 타고 바다 데이트라도 가자고 해.”

그렇게 말한 에이스가 데이트 신청을 위한 온갖 플러팅 멘트를 내뱉기 시작했다. 나불나불 떠들어대는 내용 전부가 영 구리다고 생각한 와마이는 그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에이스는 대체 언제쯤 입을 다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모의전이 끝나고, 다들 지친 몸을 이끌고 하나둘 제 할 일을 하러 흩어지기 시작했다. 해리의 손에 들린 태블릿 화면을 보며 분석을 듣던 당신도 그와의 용건이 끝나자마자 미련 없이 훈련장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그렇게 생각한 와마이가 당신의 옆으로 빠르게 붙었다. 뒤에서 칼리, 아루니, 에이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와마이는 처음엔 별거 아닌 주제로 얘기를 시작했다. 나이트헤이븐과의 합동 훈련은 어떤지, 나이트헤이븐의 기술이 접목된 장비들은 어떤지… 말하다 보니 어쩐지 나이트헤이븐 자랑 같은 대화가 되어 당신의 눈썹이 조금 씰룩였다.

마치 보고라도 하듯 담백한 당신의 대답에 와마이가 바싹 마른 제 입술을 오물거렸다. 두 사람 모두 이게 본론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다. 걸음을 늦춘 당신이 샤워실에 들어가기 전, 여기서 용건을 끝내라는 듯 복도에서 걸음을 멈춰 섰다. 지금 무슨 얘기라도 꺼내야 한다, 바쁘게 머리를 굴리던 와마이의 입에서 툭, 한 문장이 튀어나왔다.

“그래서… 혹시 보트 타는 거 좋아하세요?”

그리고 내뱉자마자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렇게 고민해 놓고 한다는 말이 겨우 에이스의 조언대로라니. 이미 쏟은 물을 주워 담고 싶은 허망한 심정의 와마이에게 당신이 되려 물었다.

“이번 주말에 시간 돼?”

“네?”

“보트 말이야. 데이트 하자는 거 아니었어?”

잠시 벙쪄있던 와마이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오, 음, 네, 물론이죠, 시간 비워둘게요.

기대하고 있을게. 당신이 미소를 지으며 떠나가자, 그제야 와마이도 웃을 수 있었다.

뒤를 돌아 당신과 반대 방향으로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한 와마이는 머릿속으로 바쁘게 일정을 정리했다. 생각이 빨라질수록 그의 발걸음도 점점 조급해져갔다. 아, 그렇지. 에이스에게 다시 조언을 구하기 위해 뭘 주면 좋을지도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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