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론(□)
레인보우 식스 GSG-9 드림 장편
22. "진짜라니까? 못 믿겠어?"
엘리아스는 당장이라도 증명하려는 듯이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지난번에 마리를 심판으로 둔 채 그와 버피 내기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를 떠올리기만 해도 근육통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나는 숨을 들이켜는 것도 힘들어서 헉헉대고 있는데 얘는 무슨 아침 산책이라도 다녀온 사람처럼 서있더라니까.
그럼에도 내가 못마땅하단 태도를 취하는 것은 그저 약간의 심술이었다. 내 근육통의 뒤끝 맛 좀 봐라. 엘리아스는 이게 심술인 줄도 모르고 정말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여기 이거 좀 보라고, 내가-"
엘리아스는 냅다 입고 있던 티셔츠의 배 부분을 잡고 올리다가 멈칫했다. 그래, 네가 생각해도 그건 좀 오버지? 그는 붉어진 얼굴로 다시 옷을 내리곤 정리했다. 그리곤 잠시 고민하더니 이번엔 제 소매를 걷어 올렸다.
"어- 어때? 이렇게 먹어도 멀쩡하지?"
근사하게 형태가 잡힌 두툼한 이두근이었다. 이건 뭐 멀쩡하다기보단… 특출나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만약 군인을 하지 않았다면 모델을 했을 녀석이다. 인기 많겠는걸.
"만져봐도 되는데!"
이건 무슨 말이지?
엘리아스의 유머 감각이 엉뚱한 건 알았지만… 여전히 붉은 얼굴로 저렇게 말하니 안 해줬다간 터질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뭐, 닳는 것도 아니고. 나는 손을 뻗어 엘리아스의 팔뚝을 더듬었다. 오… 탄탄하군. 설마 버피를 잘해서 이런 팔을 가질 수 있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다 비결이 있지. 궁금하면 체력단련실에 나랑 같이 갈래?"
싫어. 난 이렇게나 빨리 죽고 싶진 않다.
23. 이후로도 엘리아스는 종종 운동이나 건강에 관한 얘기를 했다. 펌핑된 근육 자랑과 동시에. 이게 무슨 짓인가 싶냐마는, 본인이 저렇게 신나 하는데, 뭐.
한번은 마리까지 셋이 있는 자리에서도 팔뚝을 드러내어서, 이번엔 내가 심판을 맡고 마리와 엘리아스 두 명이 내기를 했다(난 보기만 해도 근육통이 오더라고). 결과는 당연히 엘리아스의 승. 드러누운 채로 목소리를 쥐어짜 내 난 기술병이거든! 하고 외치는 마리를 뒤로하고 둘이 시원한 음료라도 사러 나왔다(물론 마리의 돈으로).
24. 엘리아스는 상대를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덕분에 걷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느껴졌다.
덜컹, 덜컹, 덜컹. 자판기 바닥에 캔 떨어지는 소리가 세 번 났다. 엘리아스가 몸을 숙여 그것들을 꺼내고선 나에게 하나를 먼저 건넸다.
"자, 여기 네 콜라."
고마워. 나는 짧게 감사 인사를 하고 엘리아스가 손에 쥔 나머지 음료를 보았다. 하나는 마찬가지로 콜라였고, 나머지 하나는 오렌지 주스였다. 콜라 마시려고?
"응? 응."
치익. 탄산이 빠지는 소리가 그의 캔에서 났다. 너도 그걸 좋아하는 줄은 몰랐네.
"그래? 난 우리가 제법 공통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 말조차 내 생각과 정반대였다. 대체 어디가? 내가 물었다. 엘리아스는 캔을 입에 대며 말했다.
25. "음- 일단은 우리 둘 다 무거운 걸 들지."
정확히는 엔진이 드는 거지 내가 드는 게 아닌데.
"그래서 심폐지구력이 좋고."
그건… 그렇지.
"그리고 감자칩을 좋아해!"
나 사실 어니언 맛 파야.
"뭐? 거짓말!"
응, 거짓말이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한 방 먹었다며 엘리아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곤 다시 웃으며 덧붙였다.
"이것 봐. 농담에 소질이 있는 것도 똑같네."
…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농담이 아주 잘 먹힌다고 생각하는 것 같으니, 이건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나는 애초에 왜 일일이 반박하고 있던 거지? 그런 내 생각이 이어지기도 전에 엘리아스가 계속 말했다.
"난 우리가 아주 잘 맞다고 생각해."
그가 내 눈을 정확히 바라보며 말했다. 근육을 만져보겠냐는 농담을 한 것도 아닌데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이거 분위기가… 이상한데.
그때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마리가 재촉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우리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내가 전에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한 거 기억 나? 그건 정말 좋은 타이밍이었다.
정말로.
26. 이후 엘리아스보다 마리가 혼자 오는 경우가 더 줄어들었다. 마리가 찾아올 때면 엘리아스가 꼭 끼려고 한다나. 그렇게 되자 마리는 엘리아스 때문에 집중하기 어렵다고 불평했다. 집중할 일이 뭐가 있는데? 하고 물으니 나는 팀이 아니니까 우리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이 귀중하단다. 참나, 말은.
아무튼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니 다행이었다. 간만에 마리와 단둘이 보내는 시간이었다. 단둘이라니까 뭔가 이상한데. 아무튼 우리가 무슨 얘기 중이었나면…
"CC-295."
역시 F-16이지. 낭만이 없구만.
"그게 낭만이랑 무슨 상관이야?!"
예거가 광분하며 반박했다. 갖가지 전문 용어가 나왔지만 내 머릿속을 차지한 생각은 하나뿐이었다. 누가 동그라미 아니랄까 봐 동그란 항공기만 좋아하는구만. 퍼스널 컬러도 그와 비슷했다.
우리는 계속해서 덕톡을 이어나갔다. 보잉 X-32가 어쩌니, 스텔스 기능이 어쩌니. 스텔스 하면 F-35 라이트닝 Ⅱ가 어쩌고 저쩌고.
너무 전투기만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게 낭만이고 로망이라니까….
27. 주제는 개인적인 내용으로 넘어갔다. 항공기 모형을 집에 수집하고 있다는 마리의 말이 시작이었다. 난 그런 걸 모으는 취미는 없어서 부러웠다. 나중에 개인 작업실 옆에 전시실을 만드는 게 꿈이란다. 그건 돈 내고라도 구경하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니 나는 영원히 무료란다. 얼마나 친구를 집에 초대하는 걸 좋아하는 거람.
28. 그는 내 꿈에 대해서도 물었다. 나는… 글쎄. 나이가 들어서도 살아있다면 넓은 땅을 사서 전용기 활주로로 사용하고 싶었다. 전용기로는 그렇게 크지 않아도 되니 경비행기 하나, 헬기 하나… 아니, 돈만 된다면 여러 개도 좋을지도.
29. "와, 그럼 나 태워줄 거야?"
얘는 왜 자연스럽게 내 미래에 함께하는 거지? 나는 그 나이대까지 둘 다 살아있을 확률에 대해 계산했다. 사실대로 딱 잘라 말할 수도 있었지만, 마리와 마주한 상태로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가능하다고? 당신은 사이코패스입니다). 그래서 130달러만 내면 태워준다고 했다. 마리가 반발했다.
나는 무료라고 했는데 너는 왜 돈 받는데?! 알겠어, 그럼 30% 지인 DC해 줄게.
30. 웬일로 휴게실에 도미닉뿐이었다. 마리와 엘리아스에게 뺏길 것을 생각하여 제일 큰 쿠키 박스를 챙겨 왔는데 애매하게 됐다. 박스를 들고 뻘쭘하게 서있는 나를 본 도미닉이 자연스럽게 자리를 내어주면서 물었다.
"커피?"
긍정하며 꺼내준 의자에 앉았다. 마침 쿠키도 있는데.
"그거 좋네."
포트가 끓는 소리가 났다. 도미닉은 간단하게 티백을 우려냈다.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머그가 손에 쥐어졌다.
31. "시끄러운 놈들은 한참 뒤에나 올 거다. 훈련장으로 간 지 얼마 안 됐거든."
그러면 아마 마주치진 못 할 것 같았다. 쿠키나 두고 가야지 뭐. 세 사람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컵을 입에 댔다.
네가 커피를 좋아하는 줄은 몰랐어. 그렇게 말하자 도미닉이 나를 한번 보고는 작게 웃었다.
"피로를 덜기 위해 마시는 것뿐이야. 똑같이 새카만 음료라면 맥주가 낫지."
아, 좋지, 맥주. 그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알트?
"너 그 말 마리우스 앞에서는 절대 하지 마. 우쭐거릴 거 생각하면 벌써 머리가 아프니까."
아하. 그럼 네 취향은 뭔데?
"Berliner Kindl Pilsener."
독일인들이란….
32. 컵은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따뜻하던 머그의 표면도 차갑게 식어있었다. 짧은 휴식의 끝을 알리는 신호였다. 쿠키 박스를 두고 빈손으로 일어났다. 나머지는 다 같이 나눠 먹어. 그렇게 말하자 밴딧이 장난스럽게 눈썹을 들썩였다.
"글쎄. 그렇게 쉽게 가져갈 순 없을걸."
□□. 넷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팀이었다. 비유하자면 엘리아스는 무엇이든 포용하는 해변, 모니카는 강렬한 파도, 도미닉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심해 같았다. 마리는… 음, 음… 갈매기…?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해 주는 이들의 관계가 부러웠다. 가끔은 학창 시절 베프와 지내던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너무 놀라지 말도록. 전에 몇 번 언급한 적 있듯이, 나도 베프라는 게 존재했던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간만에 그가 나오는 꿈을 꿨다.
우리는 함께 단상 위에 서있었다. 1등은 최고고, 2등은 아쉽고, 그럼 3등은 뭐지?
축하받지 못하는 들러리, 애매한 성적, 동색의 루저. 그러나 그만은 나를 바보 취급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환호 속에서 내가 말했다.
네 왼쪽을 차지해서 기뻐.
그의 대답이 나에게로 닿았다.
나도 네가 내 왼쪽에 있어서 기뻐.
환한 미소. 그건 추억 보정을 빼더라도 내 유년 시절 몇 안 되는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건 교통사고로 그의 왼팔이 부러졌다는 소식이었다.
34. 숨을 들이켜며 잠에서 깼다.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이후 연달아 악몽을 꾸는 탓에 아침부터 기분이 찝찝했다. 이건 길몽인가, 흉몽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지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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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하는 바다코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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