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마츠]너와 나와 우산

2016.01.03 작성 | 공백 미포함 3,571자

"아, 비 온다."

곤란하네, 작게 중얼거렸다. 일기 예보를 보지 않은 데다 가볍게 빠칭코를 할 셈이었기에 나에게 우산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뒤에선 수십개의 빠칭코 기계가 유혹하듯이 색색의 빛을 뽑내며 경쾌한 소리를 울리고 있다. 비가 그칠 때까지 몇 판 더 하면 참 좋겠지만 아쉽게도 수중엔 돈이 거의 없었다. 저 기계들에게 돈을 다 따여버렸으니까. 같은 이유로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이젠 히끗히끗해진 숫자버튼들을 순서대로 꾹꾹 눌렀다. 곧이어 「집」이라는 문자가 휴대폰 액정에 떠올랐다. 니트지만 싸돌아다니기 좋아하는 동생들이 집에 돌아와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따위를 하며 통화 연결음을 멍하니 들었다. 신호는 채 세 번도 가지 못하고 멈췄다.

"여보세요?"

똑부러진 이 목소리. 쵸로마츠다. 운이 나쁘네.

"여어, 쵸로마츠. 형아 비오는데 혼자 벌벌 떨고 있어."

"하아? 또 우산 안 들고 나갔어?"

"엉. 좀 데리러 와주라."

말을 마치고 슬쩍 휴대폰을 귀에서 뗐다. 여기서 바로 '응. 알겠어. 금방 갈게.'라고 하면 마츠노 쵸로마츠가 아니지.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비 올거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대체 뭘로 들은 거냐며 잔소리 폭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적당히 대답하며 흘려듣가가 어디냐는 질문에 빠칭코라고 대답하니 잔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지금 내리는 비보다 더 많이 떨어지는 것 같은 잔소리, 잔소리, 잔소리. 빗소리에 섞이어 더 시끄럽게만 들렸다.

"네 잔소리 듣다가 비 다 그치겠다, 쵸로마츠."

"하여간에. 금방 갈테니까 거기서 딱 기다려!"

칼같이 끊어지는 전화에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집에서 여기까지 그리 멀지 않은 것도 있지만 쵸로마츠 성격에 아마 10분도 안되어 올 것이다. 정말 이름 그대로네. 우산 두 개를 들고 자신의 이름처럼 달려올 동생을 떠올리며 휴대폰 폴더를 닫았다. 탁. 짤막한 그 소리는 곧 빗소리에 묻혀버렸다.


"오소마츠형!"

"오, 정말 금방 왔네."

왼손엔 초록 우산을 펼쳐서 들고, 오른손엔 곱게 말려있는 빨간 우산을 쥔 채 쵸로마츠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한 발짝 한 발짝에 분노를 담아서. 큰일났네.

"금방 왔네, 가 아니잖아! 내가 평소에 일기예보 좀 보고 살라고 그랬지!"

"네이, 네이~ 알겠습니다아."

"하아... 더 말해봤자 내 입만 아프지. 자, 우산."

"땡큐. 역시 내 동생밖에 없다니까~"

"징그럽게 왜 이래."

질색하는 쵸로마츠 표정에 웃은 후 우산을 들었다. 잿빛 하늘에 붉은 우산이 힘차게 펼쳐졌다. 빗방울이 우산 위를 매끄럽게 타고 내려와 지면의 웅덩이에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그럼 갈까, 쵸로마츠."

"빨리 돌아가자, 오소마츠형."

초록 우산이 바로 내 옆에서 걷기 시작했다. 무수한 비가 소란스럽게 나와 쵸로마츠의 우산을 두드린다. 잿빛 세계에 나란히 놓인 빨강과 초록. 보색 관계에 있는 두 색. 이제와서 새삼스럽지만 우린 이름도 정반대였다. 느리다는 뜻을 가진 나와 빠르다는 뜻을 가진 쵸로마츠. 그렇지만 우리들은 늘 함께였다. 여섯 쌍둥이여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형제들 중에서 특히 쵸로마츠는 늘 내 장난에 따라와주었다. 때로는 나보다 더 심한 짓을 하기도 했다. 그랬었다.

"날짜에 맞지 않게 비가 많이도 오네."

"그러게~"

"앗, 차가! 우산 돌리지마, 오소마츠형!!"

"아하핫, 알겠어."

"애도 아니고..."

쵸로마츠는 작게 입을 내밀고 투덜거렸다. 그래, 이젠 애가 아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20살 처먹은 성인이 되었지.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고 했던가. 나와 함께 장난을 일삼던 쵸로마츠는 이렇게 변해버렸다. 잔소리를 퍼붓고, 결벽증이 생겼고, 단정하게 다니고, 또 이렇게 역으로 날 챙겨주는 일이 많아졌다. 그리고 싸우는 일도 잦아졌다. 다른 동생들도 변한 것은 매한가지지만 가장 친했던 동생이었기에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아, 이래서 비오는 날은 싫다. 답지 않게 감성적이 되어버려.

"이러고 있으니까 그때 생각난다."

"그때?"

"그 왜 있잖아. 중학생 때인가, 고등학생 때인가? 아무튼 나랑 너만 늦게 끝난 날 있었잖아. 다른 녀석들은 기다리다가 결국 다 먼저 집으로 가버리고, 그때도 이렇게 비가 왔었고."

"아아. 기억나. 아마 중3 때 였을 걸?"

쵸로마츠 말이 맞을 거다. 여섯쌍둥이라 다 다른 반에 배정하기 마련인데 중3 때, 딱 한 번 쵸로마츠와 같은 반이 되었으니까. 늦게 끝나 텅텅 비어버린 건물 아래에서 둘이서 멍하니 비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던 게 또렷이 생각난다.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표정을 지은 채. 유리창에 비친 우리 모습이 썩 웃겼었다.

내가 집에 연락하려고 하자 쵸로마츠는 기다리라며 자신의 사물함을 뒤지기 시작했었다. 체육복 뒤, 제일 구석진 곳에서 발견한 초록색의 삼단 우산. 그걸 중학생 남자 둘이서 쓰고 갔었더랬다. 안그래도 작은 우산을 건장한 남학생 둘이서 쓰고 간 탓에 둘 다 한 쪽 어깨가 젖어버렸었다. 남은 형제들은 그 꼴을 보고 비웃었었지, 아마?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여섯명은 잘만 붙어다녔던 걸로 기억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때부터 조금씩 서로 달라지기 시작한 거다. 

"이야~ 왠지 그립구만. 그때는 쵸로마츠의 준비성덕분에 살았습니다, 그려."

"그 준비성이 오소마츠형에게 좀 생겼으면 좋겠거든?!"

"또또 잔소리~"

잔소리를 피해 쵸로마츠보다 몇 발자국 더 앞서 걸었다. 웅덩이에서 찰방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이 튀어올라 바짓단을 적셨다. 쵸로마츠는 굳이 날 따라잡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는 이렇게까지 잔소리가 심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지."

그래도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그때도 서서히 변하고 있었던 거겠지.

"그땐 그때고. 지금도 여전히 이러고 있으니까 그렇지."

쵸로마츠는 살짝 화를 내며 걷는 속도를 높였다. 금새 나를 따라잡더니 이내 나보다 앞장 서서 걷기 시작했다. 초록색 우산이 내 눈 앞에서 살짝살짝 흔들린다.

대체 언제 이렇게 되버린 걸까.

쵸로마츠는 여전히 내 동생이고, 아직도 마냥 나보다 어리게 느껴지지만 언젠가는 저렇게 혼자 걸어가버리는 걸까. 쵸로마츠뿐만이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그리고 나까지. 동생의 성장은 형으로써 흐뭇하게 느껴야만 하지만 어딘가 쓰리다.

"그런 말 하지마. 이 형아 섭섭하다구?"

속도를 높여 쵸로마츠 바로 옆에 섰다. 잿빛하늘 아래에서 빨강과 초록이 흔들렸다.


"횽아 왔다."

"다녀왔어."

"오, 이제 왔는가. my brothers."

"다른 녀석들은?"

"모두 2층에 올라가 있다. 훗, 역시 나의 형제들. 정적과 고독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배려해준 것──"

"아파아파아파아파."

"에."

어정쩡한 표정을 짓는 카라마츠를 보고 씩 웃은 뒤 우산을 털었다. 우산에 들러붙어있던 빗방울들이 사정없이 떨어져내려 신발장을 적셨다. 밖에서 털라는 쵸로마츠의 일갈에 이미 다 턴 우산을 우산꽂이에 꽂고 도망치듯 거실로 들어가버렸다.

"하여간에 저 잔소리. 잔소리로 시작해서 잔소리로 끝나는 구만."

코타츠에 앉아 나른하게 엎드렸다. 카라마츠가 계속 있었던 것인지 코타츠 안은 따끈따끈했다.

"너무 나쁘게 생각말라고, 형님. 저건 쵸로마츠만의 LOVE 표현이니까 말이야. 말은 저렇게해도 형님을 가장 걱정했던 건 쵸로마츠니까 말이야."

"헤에─ 그래?"

건성으로 대답했을 뿐인데 카라마츠는 계속 말할 셈인지 어느새 팔짱까지 끼고 폼을 잡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이 녀석도 참 많이 변했지.

"동생들 다 들어오고 형님만 돌아오지 않으니까 걱정되는지 계속 전화기 앞에서 왔다갔다 거리고 있었다고. 물론 내가 형답게 진정시켜주었지. 훗."

"그래, 그래. 대견하다, 카라마츠."

칭찬의 의미를 받아 가볍게 카라마츠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본인 입으로 형이라고 말했지만 내 칭찬에 뿌듯해서 더 가슴을 피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동생이다. 어쩐지. 그래서 빨리 받았던 거구나. 문 밖으로 고개를 쭉 내밀고 쵸로마츠를 찾았다. 쵸로마츠는 아직도 현관에 서서 투덜거리며 내가 아까 털어버린 물을 닦고 있었다. 결벽증인 쵸로마츠 눈에는 상당히 거슬렸겠지.

"응?"

잠시 눈을 두어번 깜박였다. 생각치 못한 것이 보여서 그만.

"왜 그러는 건가, 형님."

"아─ 아무 것도 아냐."

다시 코타츠 안으로 들어와 엎드렸다. 내가 신경쓰이는지 카라마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현관의 물기를 열심히 닦고 있는 쵸로마츠의 바짓단은 젖어있었다. 약간도 아니라 아주 푹. 쵸로마츠는 결벽증이니까, 어떤 경우에도 옷을 더럽히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렇게 비가 온 날에는 바짓단이 젖지 않도록 신경써서 걷곤 했다. 그런 쵸로마츠가 저렇게 된 이유는 분명 하나뿐.

'나때문에 뛰어와서.'

우와. 이거 뭐야. 기분 이상해. 코타츠에 아예 이마를 대고 얼굴을 가렸다. 스스로도 내가 지금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소마츠...? 왜 그래?"

"그냥~ 그냥... 코타츠가 너무 따뜻해서."

카라마츠는 나를 보더니 웃으며 '그런가'라고 말했다. 그제야 겨우 나 자신의 표정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웃고 있었던 것이다.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려서 행복한 듯이. 뒤에서 쵸로마츠가 2층 갔다 오겠다는 말이 들렸다. 이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적당히 손만 흔들어주었다. 동생들 보러가는 걸까, 옷을 갈아입으러 가는 걸까. 어느 쪽이든 좋다. 다시 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쵸로마츠 덕에 현관은 어느새 말끔해져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여섯 개의 우산이 있다. 제각기 다른 색깔에, 다른 방향으로 꽂혀있지만 그래도 모두 한 곳에 사이좋게 모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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