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마츠상 2차 창작 백업

[오소쵸로]Expressivo

2018. 5. 15. 작성 | 공백 미포함 19,828자 | 밴드마츠au

※육둥이 모두 남남+동갑. 형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따스한 햇살이 방 안을 가득히 채운다. 큰 손이 바이올린 케이스를 쓸어내리면 먼지가 날아올라 공기 중에 부유했다. 내가 차향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테이블에 앉아 다리를 흔들고 있으면 삼촌은 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이내 햇살을 등에 업은 삼촌이 바이올린 활을 잡고 눈을 감은 채 숨을 짧게 들이마쉰다. 나도 그런 삼촌을 따라해본다. 눈을 감는 것만 빼고. 곧이어 삼촌만큼이나 부드럽고 따뜻한 선율이 흘러나온다. 미소를 머금은 채 연주를 하는 삼촌의 모습은 꼭 바이올린과 함께 춤을 추는 것 같았다. 귀를 기울이느라 삼촌이 기껏 타주신 차는 점점 차가워져가지만 나는 반대로 점점 뜨거워져만 간다. 흥분해서 의자에서 뛰어내려 삼촌 곁으로 쪼르르 달려간다. 삼촌과 함께 햇빛이라는 조명 아래에서 바이올린 연주 시늉을 내며 뱅글뱅글 도니 아름다운 음악에 웃음소리가 섞이어간다. 한 곡이 끝나면 또 다음 곡으로, 그 곡도 끝나면 또 새로운 곡으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른채 두 사람의 연주회는 계속 이어져갔다.

따스한 햇살, 은은하게 퍼지는 차 향기, 부드러운 바이올린 선율과 웃고 있는 삼촌과 나의 모습.

내 유년 시절을 더듬으면 항상 이 풍경이 떠오른다.


"...왜 나 혼자야?!"

아무도 없는 음악실에 혼자 서서 외쳐보아도 누구 한 사람 오는 이는 없었다. 홧김에 들고 있던 빗자루를 내팽겨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오늘 음악실 청소 당번은 분명히 나 말고도 3명은 더 있었다. 학기 초에 번호순대로 매주 4명씩 맡기로 결정되었고, 오늘 칠판에만 해도 4명의 이름이 써져있었으니 틀림없다.

"그런데 이것들 다 어디간 거냐고!"

머리를 헤짚어봐도 어디론가로 튄 녀석들이 돌아올리는 만무했다. 전화해서 따져물으려 해도 이름만 알고 친분은 없는 녀석들이니 번호조차 몰랐다. 그렇다고 나까지 도망가기에는 양심이 콕콕 찔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론은 나 혼자 이 음악실을 청소한다는 것밖에 나오지 않았다. 넓디 넓은 음악실을 둘러보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똥코털 불타라, 개자식들."

무슨 일 있어도 선생님한테 꼰지른다. 그래서 다음에 나 빼고 걔네들끼리만 청소하게 해줄테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내팽겨친 빗자루를 다시 주워들었다. 창문을 열자 조금 후덥지근한 바람이 들어왔다. 눈부신 햇살에 한 번 눈을 찌푸렸다가 뜨면 푸르른 하늘 아래 운동장을 돌고 있는 운동부의 모습이 보였다. 쟤네도 고생한다는 생각이 반, 이 날씨에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은 생각이 반. 한숨을 푹 내쉬고 체념하며 빗자루질을 시작했다. 피어올라 공기 중을 유영하는 먼지들은 그 언젠가의 풍경을 떠오르게 했다.


"다...했....다..."

중얼거리며 반질반질해진 피아노 위에 엎어졌다. 검은 표면에 초췌해진 내 얼굴이 비춰보인다. 처음에만 해도 나 혼자니까 간단히 쓸고 갈 생각이었는데 한 번 청소하기 시작하니 자꾸 더러운 곳이 보이고, 보이고, 또 보여서... 정신을 차려보니 그랜드 피아노까지 박박 닦은 후였다. 뒤늦게 몰려오는 피로감에 휘청거리며 교실 구석에 갖다놓은 가방을 들어올렸다. 가방이 원래 이렇게 무거웠던가? 대충 어깨에 꿰어넣고 주변을 한 번 둘러보니 그래도 깨끗해진 교실을 보니 기분은 좋다. 봐주는 사람도 없건만 혼자 뿌듯해하며 코 밑을 문질렀다. 내일 음악실 처음으로 쓰는 녀석들은 좋겠다. 이렇게 깨끗한 교실을 맨처음으로 독점하니 말이야. 예쁜 여학생이 방금 닦은 피아노를 칠 거라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히죽히죽 웃게 된다. 도리질을 치며 정신을 차리고 막 발을 떼려던 찰나였다.

"악기 보관실...?"

피아노 뒤쪽, 교실 구석의 구석에 조그마한 문이 있었다. 청소하느라 미처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시 봐도 문에는 악기 보관실이라고 써있었다. 청소하느라 시간도 많이 지체되었고 몸도 지쳐있는데도 홀린듯이 문 앞으로 걸어갔다. 문고리에 손을 올리니 의외로 부드럽게 손잡이가 돌아간다. 마치 사탕을 훔쳐먹으려는 어린 아이가 된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오늘처럼 혼자 청소할 날이 얼마나 될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악기 보관실에 들어갈 수 있는 찬스가 또 올 수 있을까.

"잠깐... 잠깐 보는 것뿐이니까."

여기도 더러우면 어차피 청소해야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며 기어코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매캐한 먼지 냄새가 나를 덮친다. 꽤나 오랫동안 방치되어왔는지 사람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곳엔 다양한 크기의 악기케이스가 줄지어 서있었다. 그 위에는 누구인지도 모를 많은 사람들이 악기를 들고 다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 걸려있었다. 그러고보니 예전엔 오케스트라 동아리가 유명했었다고 음악 선생님이 그러셨었다. 전국대회에서 수상한 경력도 있고 학교에서도 지원을 했었지만 그랬던 만큼 진입 장벽이 높아져 작년에 마지막 부원들이 졸업함과 동시에 완전히 사라져버렸다고. 먼지 쌓인 악기도, 아직 빛바래지 않은 사진도 어쩐지 아련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바이올린 케이스를 보자마자 그 느낌은 강렬해져 심장을 옥죄어왔다.

나는 마른 침을 삼키고 조심스레 케이스를 열었다. 먼지에 기침을 하기를 몇 번. 먼지 쌓인 케이스와 반대로 윤기가 흐르는 바이올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심스레 손가락 끝으로 만지니 허탈한 웃음이 터져나왔다. 몇 년이나 만져왔었던 악기인데 몇 달 안 만졌다고 낯설게 느껴졌다. 나도 작년까지만 해도 사라진 오케스트라부처럼 바이올린을 연주했었다.

우리집이 음악가 집안이라든가 그런 것은 아니다. 다만 외삼촌이 바이올린을 킬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실력자는 아니었지만 삼촌의 바이올린은 마음을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삼촌이 바이올린을 연주하시는 걸 자주 옆에서 구경하자 삼촌이 웃으며 가르쳐주던 게 시작이었다. 항상 듣기만 하던 멜로디가 내 손가락에서 피어오르는 것이 좋았다. 삼촌이 잘한다며 칭찬해주는 것이 기뻤다. 좀 더 많은 이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대회에 나갔다. 처음치고는 성적이 괜찮았다. 초반에는 수상을 한 적도 더러 있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밀물에 휩쓸리듯이 순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재능차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웃으면서 연주할 수 없게 되었다. 악보를 씹어먹기라도 할듯이 통째로 외우고, 피가 날 지경으로 손가락을 놀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언제나 불만족스러운 결과뿐이었다. 더 열심히 하면 된다고, 연습이 부족했던 거라고 매달리면 매달릴 수록 심해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순위권에는 천재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 뒤를 수재들이 따랐다. 그리고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범재였다. 계속 힘들게 맨 손으로 모래사장에 구멍을 파고 있었던 거다. 아무리 파고 또 파도 모래가 다시 굴러 들어오는 걸 모르고. 바보같이.

그걸 인정하고 나니 그제서야 부모님의 눈이 보였다. 웃고는 있지만 작게 흔들리고 있는 눈이. 직설적으로 말은 안 하지만 지원하기도 힘들고 성과도 안 나오니 그만두길 바라셨던 거겠지. 뛰어난 바이올리스트는 될 수 없어도 착실한 아들이 될 수는 있어. 그런 이유로 나는 바이올린을 관두었다.

그게 불과 몇 달 전이다. 그리고 몇 달만에 다시 바이올린과 재회했다. 아니, 내 것이 아니니 재회라고 하면 조금 어폐가 있지만. 조심스레 바이올린을 들고 처음 보는 거마냥 이리저리 살폈다. 최소한의 관리는 계속 하고 있는 것인지 상태는 괜찮아 보였다. 다시 오케스트라부가 생길 지도 모른다는 미련때문인걸까.

"바보같아."

내가. 나는 어느새 금방이라도 바이올린 킬 것처럼 활을 쥐고 있었다. 잠깐만이라면... 잠깐정도는... 숨을 크게 들이마쉬고 살짝 활로 현을 그었다. 얇디 얇은 바이올린 소리가 귀를 가르자 손끝에서부터 소름이 끼쳐올라왔다. 아아. 이래서 싫었다. 이래서 바이올린은 보지도 않았던 건데. 그리웠던 소리에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눈물 대신 흘러나오는 욕심에 몸을 맡긴 채 조금씩, 천천히, 조심스럽게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박자에 몸이 흔들릴 때마다 멜로디에 힘이 실린다. 삼촌이 좋아했던 곡. 둘이서 함께 연주했던 첫번째 곡.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비록 가사가 한국어라서 가사는 기억하고 있진 않지만 삼촌이  조잘조잘 설명해주시던 건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순수하고 올곧은 사랑의 노래.

악보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아 지시는 여러번 어겼지만 그럼에도  신이 나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 이 느낌이었어. 분명 처음에만 해도 이런 기분으로 연주를 했었는데. 즐거우면서도 서글픈 감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미소를 머금었다.

햇빛도 닿지 않는 구석, 매캐한 먼지 냄새, 연주하고 있는 사람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웃고 있는 나 혼자뿐. 내가 기억하고 있는 풍경과 달라도 너무 달랐지만 나는 그 장소에 서있었다. 삼촌과 함께 했던 그 시간대에.

활과 현이 떨어진다. 아쉬움에 살짝 떨려오는 손을 모른 척 하며 느리게 눈을 떴다. 엉망진창이었지만 만족스러운 연주였다. 박수소리가 들려오는 착각이 일었다. 마지막 콩쿠르에서 들었던 기계적이고 의례적인 박수소리와는 다른...

"와! 멋진 연주인데?"

...잠깐만. 진짜 박수소리야? 깜짝 놀라 바이올린을 품에 안아 숨기고 뒤를 돌아보니 처음 보는 남자애가 악기 보관실 문에 기대어 서있었다. 교복은 어디다가 갖다 팔아먹은 건지 붉은 후드를 입은 그 녀석은 내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서려했지만 이미 벽쪽에 서있던 내가 갈 곳이라곤 없었다. 한 발자국을 앞두고 멈춘 녀석은 날 보고 씩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난 마츠노 오소마츠! 너는?"

내밀어진 손과 오소마츠의 얼굴을 번갈아보다가 말없이 바이올린을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복장도 그렇고 말투도 껄렁껄렁한 게 엮이면 안 되는 부류임이 틀림없었다. 청소당번이 다 도망치고, 기껏 혼자 청소했더니 이런 놈을 만나다니 오늘 일진이 참 사납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미안한데 빨리 집으로 가봐야한다며 슬금슬금 움직이자 분명 내 앞에 있던 손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오소마츠가 얼굴을 코 앞까지 들이밀었다. 가까워. 오소마츠는 이 거리가 아무렇지도 않은지 눈꼬리를 휘어보이며 웃었다.

"멋진 연주를 들었으니 나도 뭔갈 해야지."

"아니, 그닥 멋지지도 않고 딱히 널 위해 연주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난 집에... 자, 잠깐만!"

말도 끝나지 않았는데 오소마츠가 내 손목을 끌기 시작했다. 빼려고 했지만 무슨 놈의 힘이 그렇게 센지 아무 소용이 없다. 하는 수 없이 아슬아슬하게 가방을 겨우 챙겨 그 뒤를 따르는데 점점 걸으면 걸을 수록 불안감만 퐁퐁 솟아오른다. 혹시 삥 뜯으려는 건가? 아니면 집단 구타? 난 몰래 바이올린 연주한 죄밖에 없는데?! 혼란함에 머리가 핑핑 돌 때쯤 돌연 오소마츠가 멈추어섰다. 미처 멈추지 못 한 내가 녀석의 등에 코를 찧고 살살 문지르고 있는데 오소마츠는 다짜고짜 교실 문을 발로 열었다. 예의도 같이 차버렸나, 이새끼가. 어안이 벙벙해져 눈만 깜박이는 날 오소마츠는 그 안으로 이끌었다.

"여! 형님 왔다!"

"왜 이제 와!"

"기다리고 있었다, 오소마츠."

"어서와~!"

"쓰레기 리더..."

"열렬한 환호 감사!"

"반은 질타였잖아?!"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자 안에 있던 네 명의 시선이 곧장 나에게로 향했다. 8개의 눈이 모두 나에게 꽂히는 게 부담스러워 슬쩍 오소마츠 뒤에 숨자 녀석은 호탕하게 웃었다. 당황스러운 와중에도 주변을 살펴보니 교실이라고 하기엔 작고 생활감이 물씬 풍겨나오는 걸 보니 동아리 부실인 모양이었다. 책꽂이에는 악보가 4분의 1정도 꽂혀있고 나머지는 잡지나 만화책, 각종 잡동사니로 꽉 채워져있었다. 바닥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뒹굴고 다니고, 벽에는 뭔지 모를 각종 페스티벌 포스터가 붙어있었다. 네 명의 등 뒤로 드럼이나 키보드, 기타, 베이스가 세팅되어 있는 걸 보면 아무래도 이녀석들은 밴드부인 것 같다. 밴드부면 양아치 아니야? 편견 가득한 생각에 부들부들 떨면서도 정작 그 양아치같은 오소마츠의 옷자락을 붙들고 있는 내 신세가 참 웃겼다. 젠장, 손목만 안 잡혀있었어도... 부실에 와도 이자식은 놓아줄 생각이 없어보인다.

"그런데 리더, 뒤에 있는 그 샤이보이는 누구지?"

"어라? 마츠노 쵸로마츠군이잖아?"

"엥? 서로 아는 사이?"

"어떻게 내 이름을..."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 애는 내 질문에 관심 없다는듯 스마트폰을 만지며 넌지시 말했다.

"모를 리가 없잖아. 바이올린 전공자가 우리 학교에 들어왔다고 소문이─"

"─누가 바이올린한다는 거야."

어찌할 틈도 없이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어나갔다. 스마트폰에서 시선을 뗀 그녀석은 내 얼굴을 보더니 흠칫 놀란다. 덕분에 거울을 보지 않아도 내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겠다. 순간적으로 욱하긴 했지만 초면인 애들이랑 이러고 있는 것도 뭐해 은근슬쩍 시선을 피하려는데 오소마츠가 또 얼굴을 들이민다. 피하지도 못한 채 마주한 오소마츠의 얼굴엔 화사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연주를 잘했구나."

"에."

오소마츠는 내 손목을 이끌고 부실 안쪽에 있는 쇼파에 나를 앉혔다. 겨우 자유로워진 손목은 붉게 변해있었다. 고개를 드니 스탠드 마이크를 잡은 오소마츠가 아주 당당하게 내 앞에 서있었다. 이미 세팅되어있는 다른 악기들이 그 녀석의 뒤를 지켜주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익숙한듯 의자나 쇼파에 앉아있던 다른 애들도 하나 둘 일어나 각자의 포지션에 섰다. 스마트폰을 보던 녀석은 살포시 하얀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렸고, 기타를 맨 녀석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베이스를 맨 녀석에게 얻어맞았다. 이상하리만치 텐션이 높은 녀석이 기운차게 드럼 스틱을 딱딱 붙이치자 동시에 음악이 터져나왔다.

밴드의 바로 앞 VIP석이라 해도 좋은 자리에 앉아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파도처럼 덮쳐오는 굉음에 귀를 틀어막았다. 거리가 가까워서인지 발바닥에서부터 진동이 쿵쿵 올라온다. 이런 류의 음악은 잘 듣지 않아서 낯설고 정신 없기만 했다. 나는 눈을 꼭 감아버렸다.

"쵸로마츠."

귀를 막았음에도 날 부르는 목소리가 똑똑히 들린다. 눈을 뜨니 약간 흥분한 오소마츠는 마이크를 움켜잡고 속삭이듯이 말했다.

"잘 들어줘. 네 연주에 대한 답례곡이야."

오소마츠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감각을 잡아끄는 매혹적인 보이스를 중심으로 뒤섞여있던 드럼, 기타, 베이스, 키보드 소리가 합해지기 시작한다. 오소마츠의 노래가 내 귀를 사로잡자 혼란스러웠던 감각은 저멀리 날아가고 짜릿한 감각만이 남았다. 무대도 아닌 부실 한 편에 조명도, 멋진 의상도 없는 오합지졸 밴드인데 어째서 이렇게... 귀에서 손을 떼고 심장을 감싸잡았다. 빠른 비트에 맞춰 심장도 빠르게 뛰고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오소마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매혹적으로 웃었다. 그 목소리처럼.

마지막 기타 소리가 사그라지자 아까의 박력도 같이 사라진 것인지 애들이 희희낙락 떠들기 시작했다. 오소마츠는 노래가 끝나자마자 땀에 맺힌 이마를 닦아내며 쪼르르 내 옆에 앉아 연신 어땠냐고 묻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눈동자는 어린 애들이랑 똑같았다. 다른 애들도 내 평은 궁금한지 내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마치 사료 들고 왔을 때의 고양이들같다. 주변을 슬쩍 둘러보다가 짐짓 팔짱을 끼고 말했다.

"별로야."

가볍게 콧방귀를 뀌자 애들 표정이 제각각으로 변했다.

"드럼은 자기 기분대로 박자가 왔다갔다하고, 기타는 폼 잡는 거에 비해 기교가 부족해. 아까 솔로 부분 틀린 거 맞지?"

"아이..."

"훗, 기타 소리가 아직 이 몸의 화려함을 따라오지 못한 모양이군."

"꼴 좋다, 쿠소마츠."

"어이, 거기 베이스 웃지마. 그런 기타에 은글슬쩍 묻혀가려는 거 다 보였으니까."

"..."

"그러길래 내가 다들 연습 좀 제대로 하라고 그랬지? 하여간 여기서 나 말고 제대로 된 사람이 없다니까."

"확실히 키보드는 무난했지만 그냥 적당히 치고 있다는 느낌이던데. 감정도 별로 없고 드라이해."

"우와... 신랄해..."

순식간에 다운된 분위기에도 오소마츠는 아무렇지도 않은지 내게 어깨동무를 해오며 달라붙었다. 아까부터 지나치게 가깝다고! 네 녀석은 거리감각을 대체 어디다 팔아먹은 거냐!

"저기, 저기 보컬은? 보컬은 어땠어? 보오커얼~!!!"

"시끄러워! 귀에 대고 외치지마!"

얼굴을 쭉 밀어버리자 오소마츠가 양 볼을 부풀리며 투덜거렸다. 여자애라면 모를까 동갑의 남자애가 그래봤자 귀엽기는 커녕 징그럽다.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이번에는 옷자락이 잡혔다. 이번에는 또 뭔데. 손을 날카롭게 쳐내며 노려보니 오소마츠는 속도 없는 건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너 우리 밴드 들어와라."

이건 또 무슨 방구같은 소리야.

"하아? 어디의 해적단 선장도 아니고 갑자기 그게 무슨."

"오, 그거 좋은데? 너! 내 동료가 되라!"

"성대모사하면서 말하지마! 그리고 싫어, 이 멍청아!"

"거기 둘 지금 콩트라도 하는 거야?"

"와아이~ 콩트다! 콩트! 나도 한 개그한당께요~ 짜잔, 웃긴 얼굴!"

"사람 얼굴이 어떻게 그렇게까지 구겨지는 건데?!"

"팝콘 먹을까."

"훗, 그럼 나는 콜라를 가져오도록 하지."

"카라마츠, 난 다이어트 콜라로 부탁해~"

"어이, 거기! 은근슬쩍 방청모드로 들어가지 말라고! 아무튼 난 이 밴드 들어올 생각도 없고! 집에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또 잡히기 전에 얼른 가방을 챙겨 부실에서 빠져나왔다. 일부러 문을 세게 쾅 닫고 나오니 더 따라올 생각은 없는지 조용하다. 나는 가방을 다시 똑바로 매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시간을 꽤나 뺏긴건지 창 밖의 해는 어느덧 늬엿늬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오늘 대체 무슨 날이람. 다시는 저녀석들과 엮이지 말자고 다짐하면서도 귀 한 쪽에서 아까 들은 노래 소리가 사라지지 않고 웅웅 울리고 있었다.


"오, 뭐야 이 도시락. 엄청 맛있어 보이잖아!"

"쵸로마츠다운 식상한 도시락이네."

"리얼충 도시락은 아닌 것 같네."

"카라아게가 있다니 나이스한 초이스다!"

"저요! 저요! 계란말이 먹고 싶슴다!"

"이게 대체 무슨 시츄에이션?!"

내 주위를 에워싼 녀석들로부터 도시락을 지키려 몸을 바짝 낮췄다. 이 와중에 머리 위에 있는 나뭇잎들이 바람에 서로 맞부딪히며 시원한 소리를 낸다. 녀석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내 주위 자리를 꿰차며 각자 도시락이나 매점 빵같은 것을 꺼내기 시작했다. 어제 드럼을 쳤던 녀석은 뻔뻔스럽게 내 계란말이 하나를 기어코 집어갔다. 앗하는 사이 샛노랗던 계란말이는 큰 입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씹기는 씹은 건지 바로 꿀꺽 삼킨 녀석은 계란말이가 있던 곳에 비엔나 소세지 하나를 얹어주었다. 최소한의 양심은 있나보다. 네 갈래로 갈라진 문어 모양이 제법 귀엽다.

"아니, 아니 이게 아니라! 너희 왜 여기 있어?!"

"부실에 모여서 점심 먹으려는데 쵸로마츠가 보여서리~"

"친구 없어?"

"있거든! 조금 기쁜듯이 묻지 마, 베이스!"

"정적과 고독... 혼자 밥 먹는 그 심정 나도 이해한다, 쵸로마츠!"

"네 멋대로 이해하지 말아줄래?! 전혀 다르니까!"

기타는 그렇게 수줍어하지 않아도 된다며 주먹밥을 크게 한 입 물었다. 그렇게 폼이란 폼은 다 잡더니 양 볼 빵빵하게 채워 오물거리는 모습은 꼭 햄스터같다.

동아리 부실이 모여있는 건물은 본관과 떨어져있어서인지 사람이 적어서 혼자 있기엔 딱이었는데 망해도 제대로 망했다. 한 두명도 아니고 여섯 명이나 모여앉으니 어제 밴드만큼이나 시끄럽다. 비엔나를 집었다가 한숨을 쉬며 아직 한참 남아있는 도시락통을 닫았다.

"엥? 밥 안 먹어?"

"다른 데 가서 먹게. 너희는 너희끼리 자알 먹어라."

"지금 그냥 가면 쌤한테 바이올린 몰래 킨 거 이른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홱 돌아간다. 오소마츠는 한 손으로 제 입을 가린채 키득키득 웃었다. 웃는 꼴이 악마나 다름없다. 증거도 없는데 어쩔 거냐며 반박해보지만 내가 봐도 안쓰러울 정도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아직 학기 초인데 선생님에게 찍히는 것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오소마츠는 나와 눈을 맞추었다.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멤버가 되기 싫다면 말이야. 그냥 부실에 놀러오기만 해도 돼."

"...그냥 가기만 하라고?"

"응. 그냥 와서 우리 연주 좀 들어주고 해줘."

"어제처럼 평가라도 해주길 바라는 거야?"

"아니! 그냥 듣고만 있어도 괜찮은데?"

"뭐야, 그게..."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 수록 더 꿍꿍이를 모르겠다. 떨떠름해있으니 오소마츠는 또 아까처럼 얄밉게 미소지었다.

"대신 안 오면 선생님께 이른다?"

"뭣...!"

"악기 보관실은 학생들 출입금지라지~?"

"음악 선생님 화나면 무서운데..."

"맞아, 무서워! 화나면 도깨비 같아!"

"갈게! 간다고! 이제 만족하냐?!"

씩씩거리니 오소마츠는 씩 웃고는 주변 애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기 시작했다. 이녀석들 다 한 통 속이었어...! 한 숨을 푹 쉬다가 전부 부질없게 느껴져서 아까 먹으려던 비엔나 소세지를 입 속에 넣었다. 내 기분은 꿀꿀하기만 한데 비엔나는 맛있기만 하다.


"악보 완성했어! 이거 어때?"

부실에 카라마츠와 둘이 있을 때, 종이 뭉텅이를 들고 토도마츠가 상기된 표정으로 달려왔다. 테이블에 놓인 악보에는 직접 손으로 그린 음표들로 빼곡했다. 악보를 보니 머릿 속으로 멜로디가 그려진다. 그렇게 귀여운 척하면서 이녀석이 쓰는 곡은 꽤나 터프한 느낌이다. 쭉 훑어본 뒤, 괜찮단 의미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니 토도마츠가 기고만장해하며 웃는다. 솔직히 악보도 쓸 줄 알고 센스도 있는 토도마츠가 없었으면 이 밴드는 유지되지도 못 했을 거다. 더 기고만장해질 테니 말은 안 할 거지만

"흠... 나는 하이라이트에 기타 솔로를 하고 싶다! 이렇게 더 화려하게!"

어느 틈엔가 기타를 꺼내든 카라마츠는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내키는 대로 연주해대기 시작했다. 즉흥치고는 괜찮지만 번잡하고 쓸데없이 힘이 너무 들어가있다. 눈으로 어떠냐고 말하며 특유의 표정으로 날 보고 있어도 해줄 말은 정해져있었다.

"그렇게 연주하면 다른 악기들이랑 안 어울리잖아. 굳이 기타 솔로를 넣어야겠어? 그리고 그것보단 이렇게 하는 게 더 나을걸?"

카라마츠 기타를 뺏어들고 아까 들은 연주를 기반으로 가볍게 줄을 튕겼다. 카라마츠와는 알고 보니 같은 반이라 시간대가 맞아 기타를 조금 배웠다. 아직 어설프긴 해도 두 녀석이라면 내가 어떤 걸 말하려 하는지 알 거다. 아니나 다를까 토도마츠는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작게 박수를 쳤다.

"오, 역시 쵸로마츠. 이젠 카라마츠보다 기타 잘 치는 거 아니야? 기타 포지션 자리 위험하겠는걸~"

"싫다~! 나에게서 기타를 뺏어가지 마라, 쵸로마츠으~!!"

"안 뺏어! 애초에 너희 밴드 들어갈 생각 없다고 몇 번을 말해!"

"너 이쯤되면 그냥 멤버 아님?"

"우왓! 갑자기 뒤에서 안지마, 오소마츠!"

버럭 화를 내며 고개를 돌리니 아니나 다를까 오소마츠가 내 어깨 위에 얼굴을 올려놓고 있었다. 내가 뭘했다고 날 흘겨보며 입을 댓 발 내놓고 있다. 비키란 의미로 머리를 통통 두드려도 비키기는 커녕 얼굴을 내 어깨에 파묻으며 더 달라붙었다. 달큰한 샴푸향이 나는 머리카락이 내 코를 간질인다. 하루이틀도 아닌 일에 익숙해졌는지 카라마츠도, 토도마츠도 뭐라 하지 않고 태연하게 인사를 건내고 있다. 한숨을 쉬며 느릿하게 오소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으니 그제야 기분이 풀린 것인지 고개를 들고 생글 웃는다. 가끔씩 이녀석이 정말 고등학생인지 초등학생인지 헷갈린다. 기분이 좋아진 오소마츠는 내 옆에 바짝 붙어앉고는 기세 좋게 감자칩 봉지를 뜯었다. 곧이어 이치마츠와 쥬시마츠도 합류하여 조금 소란스러운 정도였던 부실은 금세 시끄러워졌다.

오소마츠의 협박 아닌 협박을 받고 3개월정도가 지났다. 협박도 있고, 오소마츠가 매일 데리러 온 탓에 학교 출석률과 밴드부 출석률은 똑같아졌다. 처음에는 오소마츠 말대로 듣기만 하고 쌩하니 가버렸지만 점차 다른 멤버들과도 말이 트기 시작하니 부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갔다. 자연스럽게 평가도 하게 되었고, 현재에 이르러선 작곡이나 작사에까지 개입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끔씩 멤버도 아닌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기도 하지만 막상 녀석들과 같이 있다보면 정신이 하나도 없고 지쳐서 아무래도 좋아진다. 집에 돌아와 침대 위에 쓰러져 잠시 눈을 감고 있으면 이녀석들의 음악이 들려온다. 그리고 오소마츠의 노래도. 능글스럽고 발칙하기까지한 그 보컬을 듣고 있으면 어쩐지 심장이 옥죄어오는 기분이 든다. 다른 밴드 노래를 듣고 비교해봐도 기술적인 면으로는 아직 부족한데 왜 이렇게 귀를 잡아끄는 건지 모르겠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활을 쥔 시늉을 하고 있다. 곤란하다.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명명백백해서 피할 수도 없다. 나는 이 녀석들의 음악에 중독되어버렸다. 

"쵸로쨩, 아~"

"뭔─읍!"

입 안에서 감자칩이 바사삭 부서진다. 짭짤한 맛에 얌전히 오물거리고 있으니 입가에 과자가루를 묻힌 오소마츠가 눈 앞에서 헤사하게 웃는다. 정말이지 얘가 그 보컬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맛있어?"

"응. 뭐어... 맛은 있지."

"그럼 우리 멤버 해라!"

"그게 무슨 논리야, 대체!"

"또 시작이네."

"나도! 나도! 감자칩!"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해도 신경 좀 써주면 어디 덧나냐, 너희들?! 태평하게 오소마츠가 먹던 과자봉지를 들고 자기들끼리 나눠먹는 모습을 보니 기가 찼다. 생각해보면 이녀석들도 오소마츠만큼은 아니여도 멤버로 들어오길 바라는 눈치니 신경을 써줘도 말릴 리가 없었다. 결론, 여기에 내 편은 없다. 다시 들러붙기 시작한 오소마츠를 밀어내며 이를 으득 갈았다.

"우리 같이 밴드하자아아아아!"

"시끄러! 가서 연습이나 해, 망할 리더!"

감정을 살짝 섞어 엉덩이를 차버리니 오소마츠가 제 엉덩이를 감싸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모습이 웃겨서 웃음을 터트리니 뭐라 꿍얼거리면서도 악보를 들었다. 리더가 악보를 드니 다른 멤버들도 하나 둘 그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쥬시마츠가 떠난 자리에는 과자 부스러기가 잔뜩 남아있다. 짧게 한숨을 쉬며 자리를 치우면서 녀석들을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아까까지의 분위기는 어디간건지 제법 진지하다.

"밴드라..."

과자봉지를 접다말고 내 손을 바라보았다. 뼈가 도드라보이는 손가락은 아직 움직일 수 있다고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왜 또 나 혼자야?!"

아무도 없는 음악실에 나 혼자 서서 짜증을 내며 빗자루를 내팽겨쳤다. 몇 달 전과 완벽히 일치하는 상황에 머리에 손을 짚고 일부러 소리내서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듣는 사람은 없다. 하여간 튄 녀석들도 튄 녀석이지만 선생도 문제다. 튀었다고 말하면 뭐해 다음엔 그러지 말라고 한 마디 하고 끝인데. 그러면 그 녀석들이 네 알겠습니다하고 오겠냐 뉘에 알궷슙니돠~하고 튀겠지. 이번에는 선생님뿐만이 아니라 그 당사자들이랑도 대화를 해야겠다.

"일단 청소는 해야지..."

하는 수 없이 빗자루를 다시 들었다. 오늘 청소는 정말로 간단하게 하자.


청소 간단히 한다던 나는 어디로 간 걸까. 다짐도 무색하게 음악실은 또 번쩍번쩍 광이 난다. 그렇지만 한 곳을 치우면 다른 곳 더러운 게 보이고, 보이면 무시할 수 없고, 무시할 수 없으면 닦아야하고...

"적당히 좀 하자, 나야..."

하긴 적당히라는 걸 알았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지. 나는 또 악기보관실 손잡이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 몇 달 전과 완벽하게 데자뷔를 이루는 상황에 쓴 웃음이 지어졌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학교에 학생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까지 시간을 끈 건지도 모르겠다.

문을 열자 매캐한 먼지 냄새가 나를 반긴다. 몇 달 전엔 불쾌했는데 지금은 조금 반가운 기분이다. 저번보다는 빠르게 바이올린을 찾아내어 케이스를 열었다. 바이올린은 어쩐지 전보다 손 때가 탄 것 같았다. 이보다 더 손때가 탈 정도로 바이올린을 잡았던 적이 있다. 적당히 했다면, 삼촌처럼 취미 수준으로만 했다면 이렇게 괴로울 일도 없었을 텐데. 힘들게 연습을 하고, 떨어지고 또 떨어져서 비참해지는 일도 없었을텐데. 바이올린에 이마를 대자 서늘한 감촉이 나를 감싼다. 미련같은 거 그 날 그 연주에 전부 털어버린 줄 알았다. 처음 바이올린 했을 때 그 감각을 떠올리며 이걸로 된 거라고 자기합리화했다. 그랬는데─

"몰래 하지 말고 이걸로 해."

─다 너때문이야, 오소마츠. 얼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자 오소마츠는 씩 웃으며 코 밑을 비볐다. 손에는 손때가 조금 탄 듯한 바이올린 케이스가 들려있었다.

그 날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너희들의 음악을 들을 일도 없었을 텐데. 그 날 네가 나를 데려가지 않았다면 너희 부실에 들락날락하는 일도 없었을텐데. 네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면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을 꾹 눌러 참으며 가만히 서있으니 오소마츠가 성큼성큼 내게도 걸어왔다. 자꾸 그 날의 기억이 어른거려서 괴롭다. 눈을 감았다가 뜨자 바이올린 케이스는 내 손에 들려있었다. 오소마츠를 보니 얼른 열어보라며 성화다. 조심스럽게 열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바이올린 하나가 들어있었다. 쓴 지 조금 된 것 같은데 깨끗이 닦아낸 건지 지문 하나 보이지 않는 초록색 바이올린이. 이게 뭐냐는 눈으로 다시 오소마츠를 보자 오소마츠는 그저 흡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나 이제 바이올린 안 한다고 했잖아."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싶었는데 살짝 쉬어버린 목소리가 원망스럽다. 오소마츠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빛에 흔들림이 없다.

"너 사실은 하고 싶잖아."

적당히. 늘 적당히 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네가 싫다.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와 똑같이 지금까지 내 말 귓구멍이 아니라 똥구멍으로 들었냐며 쏘아붙이고 싶은데 목이 탁 막혀버렸다. 고개를 숙이고 케이스를 다시 닫자 오소마츠가 내 머리에 손을 올리고는 쓰다듬기 시작했다. 부드러움과는 거리가 먼 거친 손놀림. 머리가 헝클어지는 게 싫은데 손을 쳐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전공을 안 하는 거지 연주를 아예 안 하는 건 아니잖아?"

아아, 정말 싫다. 도망치려는 내 손목을 몇번이고 잡아끄는 네가 싫어. 늘 적당히 하면서 어째서 나한테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말없이 밀치듯이 오소마츠 품에 바이올린을 안겼다. 반동으로 뒤로 주춤 물러난 오소마츠는 나와 바이올린을 번갈아 보더니 한숨 섞인 웃음소리를 내었다.

"지금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돼. 부실에 갖다 놓을 테니까 쓰고 싶을 때 써."

눈을 질끈 감았다. 생각해보라는 말 한 마디 넘기고 떠나가는 오소마츠의 발소리가 귀에 콕콕 박힌다. 힘이 풀려 벽에 기대어 섰다. 미처 닫지 못한 음악실의 갈색 바이올린 위에 먼지가 쌓이고 있다. 먼지가 바이올린 현에 닿을 때마다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린다. 너는 왜 그런 말들을 하는 거야. 그리고 나는 왜 네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야. 벽을 손톱으로 긁으니 기분 나쁜 소리가 났다.

"...나가자."

오늘은 부실에 가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자. 바이올린 케이스를 닫고 가방을 들고 음악실 밖으로 나갔다. 영영 열리지 않을 것처럼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닫힌다. 벌써 해가 지고 있는 건지 복도는 주홍빛으로 가득 차있었다. 노을 진 하늘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다. 부실의 반대쪽으로 향한 발이 무겁다.

오늘따라 운동장이 유독 넓게 느껴진다. 시선을 내리깔고 잔잔한 바람에 데굴데굴 굴러가는 흙바람을 바라보며 느리게 걸었다. 모든 소리가 다 거슬린다. 바람 소리도, 멀리서 들려오는 운동부의 기합 소리도, 그리고...

"도옹~!"

"으악! 깜짝 놀랐잖아, 쥬시마츠!"

"어라? 쵸로마츠 아님까!"

쥬시마츠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맑게 웃으며 화단에서 나왔다. 온 몸이 흙먼지에 풀 투성이다. 조금이라도 묻을까 질색하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이 시간까지 부실 안 가고 뭐했어?"

"야구!"

어디서 꺼낸 건지 은빛 야구배트를 손에 든 쥬시마츠가 한 번 크게 휘둘렀다. 아까 물러서지 않았으면 이거 100% 맞았다. 놀라서 뭐라하지도 못한 채 벌렁거리는 심장을 꾹 누르는 나와 달리 쥬시마츠는 즐거웠다며 크게 웃었다. 그러고보니 이치마츠가 말해준 적이 있다. 야구부 마의 카드 쥬시마츠. 힘이나 체력은 누구도 따라갈 자가 없지만 그만큼 마이페이스라 종잡을 수가 없어 게임이 어디로 흘러갈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예측할 수가 없다고. 그래서 야구를 좋아하는데도 야구부에 못 들어가고 밴드에 있는 거라고 그랬다. 이치미츠의 어두운 분위기랑 섞이어 대체 뭐하는 건가 싶었는데 이 꼴을 보니 알 것도 같다. 이녀석은 3루에 서있어도 배트 휘두를 녀석이야. 아무것도 모른다는듯이 큰 눈을 꿈벅이는 녀석을 보며 픽 웃고는 머리에 들러붙은 나뭇잎 몇 개를 떼주었다. 아까 배트 휘두르는 모습은 도깨비나 다름 없었는데 헤실 웃는 모습은 꼭 어린 동생을 보는 것 같다.

"부실 돌아가면 바로 씻어. 알았지?"

"알겠슴다! 그런데 쵸로마츠는 같이 안 가?"

"아, 응... 오늘은 그냥 집에 가려고."

"글쿠나~"

"응. 그러니까 다른 애들한테도 그렇게 말─"

"─그렇게 도망 안 가도 될텐데."

"어?"

쥬시마츠는 더 말 할 생각 없는지 입을 꾹 다물며 손을 입가에 가져다댔다. 한 손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큰 입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평소와 같은듯 다른 그 미소가 내게 무엇을 말하려는지 대체 알 수 없었다. 뭐라 말을 걸기 전에 쥬시마츠는 크게 손을 흔들고 달려나갔다. 잡을 틈도 없이 흙먼지 바람을 남기고간 쥬시마츠가 있던 자리에는 선명히 붉은 노을빛이 내려앉았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말이야..."

"헤에~ 그렇구나~"

"...저기 토도마츠 듣고 있어?"

"응응. 듣고 있어~"

"안 듣는 것 같은데?!"

"듣고 있다니까 그러네, 참."

토도마츠 목소리가 아까보다 커졌다. 보나마나 핸드폰 멀리두고 딴짓하다가 내가 뭐라고 하니까 그제서야 폰 잡은 거겠지. 드라이 몬스터 자식. 토도마츠는 일부러 들으라는 식으로 한숨을 쉬고선 말했다.

"그래서? 쵸로마츠 넌 어쩌고 싶은건데?"

"어쩌긴 뭘 어째?"

"오소마츠가 준 바이올린 말이야. 그것도 그 오소마츠가 몇 달 알바해서 산 바이올린."

토도마츠의 말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오소마츠가 힘들다고 징징거리며 달라붙은 일이 많긴 했지만 다 엄살인 줄 알았으니까. 어리광부리던 오소마츠와 바이올린을 건내던 오소마츠가 겹쳐서 머릿 속에 떠오른다. 

"뭐 알바...? 맨날 빈둥빈둥 놀기 좋아하고 돈 많은 백수가 꿈이라고 노래를 부르는 그 오소마츠가?"

"그래, 맨날 빈둥빈둥 놀기 좋아하고 돈 많은 백수가 꿈이라고 노래를 부르고 내 미팅 방해한 그 망할 리더가."

아니, 맨 뒤는 말 안 했는데. 이 가는 소리도 뒤이어 들린다.

"아무튼 어쩔 거야, 그 바이올린? 오소마츠가 아주 정중하게 부실 한 편에 놓던데."

"어쩌긴... 난 바이올린 안 해. 관두었고. 집에 있는 바이올린도 손 안 댄 지 오래인데."

"바이올린 관뒀으면서 버리지는 않았구나?"

"아, 아직 안 팔려서! 안 팔려서 갖고 있는 거거든?!"

"네네~ 어련하시겠어요~"

다 알고 있다는 저 말투가 상당히 짜증난다. 바이올린이 안 팔리는 이유를 계속 덧붙여보지만 말이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오소마츠가 눈 앞에서 어른거린다. 비싸고, 진입 장벽도 낮지만은 않고, 좋은 바이올린을 찾기도 힘들고... 물론 보기만 해서 그게 좋은 바이올린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다른 누구도 아닌 오소마츠가 그렇게 싫어하는 알바를 하며 다른 것도 아닌 바이올린을 샀다는 것만으로도 말의 무게가 달랐다. 힘없이 침대 위에 누워 베개를 끌어안았다. 원래부터 받을 생각이 없긴 했지만 마음 한 쪽이 불편하다.

"왜..."

건너편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린다.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가엽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토도마츠는 속삭였다. 은밀한 거래를 하듯이.

"그럼 말이야─"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수고해라."

"저기 있잖아. 요즘 쵸로마츠 돌아가는 거 빠르지 않아?"

가볍게 손 흔들고 나가려다가 말 한 마디에 붙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쇼파 위에 책상다리로 앉은 오소마츠가 대놓고 삐졌다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얼굴 도장만 찍고 돌아가는 날이 늘어나면서 언젠가 이러지 않을까 싶었지만 막상 그 날이 오니 당황스럽다. 금방이라도 나갈 수 있게 문에 손을 올려놓고 뻔뻔스럽게 답했다.

"난 바쁘거든. 너희들하고 다르게."

"너도 같은 학생이잖아?! 야, 너희들도 한 마디 좀 해봐!"

"엉?"

밴드부 맞는지 한가롭게 포커를 치고 있던 녀석들이 카드를 내려놓았다. 이치마츠가 트리플로 1위인가. 괜히 나때문에 게임을 멈추게 되서 조금 미안해졌다. 서로 시선을 주고 받던 애들은 포커 치던 때처럼 태연하게 눈을 깜박였다.

"뭐어, 멤버도 아니고."

"와주는 것만으로도 세크로스! 아니 쌩큐!"

"이번 선곡 작업 무사히 끝냈으니까 난 더 볼 일 없음~"

"이 드라이 몬스터가."

"훗, 쵸로마츠에게도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겠지. 나도 이해한다, 쵸로마츠! 불 꺼진 방 안에서 혼자 고독을 곱씹으며─"

"─딸이나 치겠지! 딸 칠 시간에 우리랑 악!"

"똥코털 불타라, 이 개같은 자식아!"

사전이 정확히 오소마츠의 안면에 꽂혔다. 10점 만점. 애들이 박수를 치며 깔깔 웃기 바쁘다. 오소마츠가 정신을 차리고 몸으로 날 붙잡기 전에 서둘러 문을 열었다. 몇번이고 열고 닫고 한 문은 드르륵거리며 매끄럽게 열렸다. 나가기 직전 한 마디를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라이브 하우스에서 연주하는 날까지 연습이나 똑바로 해, 이 망할자식들아!"

"이게!"

달려나오려는 오소마츠 앞에서 보란듯이 문을 닫았다. 열 때만큼이나 문은 쉽게 닫혔다. 소리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컸지만. 오소마츠의 달음박질 소리를 흘려들으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단순히 바이올린 키던 범생이 녀석이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야, 오소마츠. 달리기는 제법 자신이 있거든.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리다 뒤를 돌아보자 푸르른 하늘과 그 아래 장대하게 서있는 학교밖에 보이지 않는다. 따돌렸네. 미소를 입가에 걸치며 가볍게 걸어나갔다. 마주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오소마츠네 밴드가 새로 생긴 라이브 하우스에서의 무대에 오르기까지 벌써 하루를 앞두고 있다. 3주 전쯤이었나 토도마츠가 잔뜩 흥분한 채로 달려와 한 라이브 하우스에서 오프닝 공연 제의를 받았다고 이야기했다. 토도마츠가 우리도 모르게 헬스를 다니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소식과 함께. 이야기인즉슨 헬스에서 친해지신 분이 있는데 알고 보니 새로 생길 라이브 하우스 직원이라서 제안을 받았고 냉큼 받아들였다고 한다. 멤버들이랑 대화해보고 결정해야되는 거 아니냐고 해봐도 정작 그 멤버들이 신나서 춤을 추고 있으니 내 말을 금방 묻혔다. 하여간 생각없는 녀석들이다.

그 뒤로 시간은 정신없이 흘렀다. 간간히 작사, 작곡을 도와주던 나는 웬일로 의욕이 넘치는 토도마츠에게 붙잡혀 선곡이나 무대 구성 등을 도왔다. 토도마츠는 여자애들이 많이 올 거라며 무대 의상에도 한창 열을 올렸고, 다른 멤버들도 드물게 연습에 집중했다. 문제는 그게 작심삼일이었다는 거지만. 아무튼 나는 주로 토도마츠와 붙어있었고, 슬금슬금 일찍 돌아가는 날이 늘어나다보니 오소마츠는 오소마츠대로 불만이 쌓인 모양이었다. 자기가 산 바이올린도 본 채 만 채 했으니 그녀석 성격에 어련했을까.

"좀 봐달라고, 오소마츠."

당사자에게 닿을 리 없는 말을 하며 토도마츠와 함께 만든 악보를 꺼내들었다.


"다들 노래 순서는 알지?"

"어."

"저기, 쵸로마츠는?"

"무려 첫 무대라고! 첫 무대! 절대 실수하지마! 내가 아는 여자애들도 다 불렀으니까 실수하면 절대로 용서 안 할 거야!"

"기다려라, 카라마츠 걸즈!"

"쵸로마츠는 언제 와?"

"아니, 카라마츠 걸즈 없으니까.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그 똥폼 그만둬. 앗! 쥬시마츠 기껏 준비한 의상이 흐트러졌잖아. 이리 와봐."

"어라라~? 이게 왜 이렇게 되었지?"

"쵸로마츠 오늘 오는 거 맞지?!"

"쵸로마츠, 쵸로마츠, 쵸로마츠 시끄러워, 리더!!"

참다 못한 토도마츠가 소리를 빽 지르자 오소마츠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스태프분들도 다닌다는 것도 잊은 건지 아이처럼 생떼를 쓰기 시작했다.

"쵸로마츠, 쵸로마츠, 쵸로마츠으~!"

"쵸로마츠니까 관객석에 있으려는 거 아냐?"

"쵸로~!!!"

"창피하니까 당장 일어나!"

"늦어서 죄송합니다!"

요란스럽게 문이 열리고 다소 어두웠던 실내에 빛이 쏟아진다. 익숙한 목소리를 바로 알아챈 오소마츠가 잽싸게 몸을 일으켜 문쪽을 바라보았다. 역광에 눈이 부셔 모습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실루엣만으로도 오소마츠가 알던 쵸로마츠와는 거리가 멀었다. 보고 싶어서 환청을 들었나 싶어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터져나갔다.

"늦었잖아, 쵸로마츠! 왜 이제 와!"

"미안. 가발 착용하는 거 처음이라 오래 걸렸어."

쵸로마츠? 그제서야 오소마츠를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문에 서있는 그 인물에게로 쏠렸다. 문이 닫혀 빛이 사라지고, 숨을 고르던 그 사람이 조금씩 다가오자 오소마츠는 입을 벌렸다. 교복 입을 때도 단추 하나, 넥타이 하나 엇나가는 걸 용납 못 하고 단정 그자체였던 쵸로마츠가 자신과 별반 다를 게 없는 펑크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거기다 초록색 머리라고? 가발인 것을 알아도 오소마츠는 쉬이 제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애들은 알고 있었던 건지 태연하게 쵸로마츠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아이고, 이 청년은 누구신감?"

"마츠노 쵸로마츠라 안 혀요~"

"이거 참 못 알아볼 뻔 했슈~"

"너희는 이 상황에서 콩트가 나오냐."

"쵸로마츠 오늘은 퍼펙트한 코디군! 잘 어울린다!"

"고마워. 이거 토도마츠가 골라준 거긴 하지만. 근데 넌 옷이 왜 그러냐."

"말도 마. 무슨 일이 있어도 저걸 입겠다고 그러잖아. 그래서 냅뒀지."

"카라마츠답다."

웃으며 말하면서도 지금 제 차림이 어색한 건지 뒷목을 쓸던 쵸로마츠는 오소마츠와 눈이 딱 마주쳤다. 오소마츠의 멍청한 표정에 픽 웃고는 아직까지도 바닥에 앉아있는 그 앞에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추었다. 오소마츠가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선수치듯이 쵸로마츠는 오소마츠 눈 앞에 검은 케이스를 들이밀었다. 너무 가까운 탓에 검은 색 외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게 무엇인지 오소마츠는 잘 알고 있었다. 부실 한 편에서 먼지만 켜켜이 쌓여갔던 그 바이올린 케이스는 쵸로마츠가 닦고 온 것인지 광이 나고 있었다.

"이거 빌린다."

다소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오소마츠는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그냥 네 거라고, 바~보."


스포트라이트가 켜졌다. 머리 위로 바로 쏟아져내려오는 불빛이 제법 눈부시다. 무대와 관중들과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지만 이 빛때문에 잘 안 보여서 다행인 것 같다. 지금까지 올라가봤던 무대들과 달리 소란스럽고 좁고 정신없지만 어째서일까.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 이유는. 혼자가 아니여서일까. 오소마츠쪽으로 시선을 옮기자 오소마츠는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 찬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애냐고 한 마디 던지려다가 그냥 삼켜버렸다. 분명 나도 저녀석과 똑같은 표정일테니까.

"잘 부탁해."

"나야말로!"

나는 차분하게 바이올린에 턱을 괴었다. 처음 잡아보는 녹색 바이올린은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었다는양 내 손에 착 감겼다. 숨을 천천히 길게 내쉬고 쥬시마츠에게 눈짓했다. 쥬시마츠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힘차게 드럼 스틱을 부딪혔다.

"원, 투, 원 투 쓰리!"

몇 십번이나 반복해서 들었던 음악소리가 바로 내가 서있는 곳에서 터져나온다. 무대 위의 진동과 나를 감싸는 온갖 소리들에 소름이 쫙 끼친다. 우리 6명의 첫 합주, 첫 무대, 첫 앙상블. 맞춰본 적도 없는데  괜찮을까 같은 걱정은 사치고 할 시간도 없다. 음악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으니까. 그래도 큰 걱정이 없는 것은 내가 한 가지 확신하고 있는 게 있기 때문일 거다. 이녀석들의 음악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건 바로 나라는 사실. 나는 활을 크게 내리그으며 그녀석들 틈으로 파고 들었다.

분명 처음인데 처음답지 않게 바이올린 소리는 매끄럽게 밴드 소리 위에 겹치어 이내 하나가 되었다. 집에 일찍 가서 바이올린에만 매달린 보람이 있었다. 어떤 멜로디가 밴드에 잘 녹아들까, 어떻게 연주하면 좋을까 그 노력의 결실이 음악으로 피어오르고 있다. 지금 저 관중석엔 점수를 매길 사람이 없다. 지금 이 연주는 악보만 따라 할 필요가 없다. 지금 나는 순위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아, 어쩌지. 너무 즐거워.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웃지 못했던 내가 이 낯선 무대 위에서 웃고 있다.

관중들의 환호성때문일까 나도, 다른 녀석들도 더 열정적이고 수월하게 연주하고 있다. 이 공간의 열기에 모든 게 녹아내려 뒤섞이는 기분이다. 물론 그 중심에는 오소마츠, 네가 있다. 너와 닮은 확성기를 손에 들고 마음껏 목청껏 노래하는 너는 누가봐도 이 무대의 주인공이다. 몇 달 바이올린을 쉬기도 했고, 무대에서 연달아 연주를 하는 게 처음이라 힘이 부쳤지만 도저히 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쿵쿵 심장을 울리게 하는 목소리가 나를 노래로 이끌어 흠뻑 빠져들게 했기에.


"이야~ 다들 에너지가 엄청나네요! 우리도 너무 신나서 달려버렸다니까요! 근데 이걸 어쩐담? 이제 마지막 곡밖에 안 남았어요."

오소마츠의 멘트에 관객들이 아쉬움을 토해낸다. 아쉬운 건 나도 마찬가지다. 몸은 기진맥진인데도 벌써 마지막이라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조금 더 이 떨림을 즐기고 싶어. 물로 목을 축이며 마지막 곡의 악보를 머릿 속으로 되짚었다. 마지막 엔딩 곡은 특히나 비트가 빠르다. 노래 중후반에는 모든 악기가 뮤트되고 오소마츠의 노래 소리만 남게 되고, 그 직후 기타를 필두로 다시 빠른 음악이 전개되는 식이다. 어렵긴 해도 그만큼 매력이 넘쳐서 제일 많이 고민하고 연습한 곡이기도 하다. 오소마츠의 멘트가 끝나고나자 쥬시마츠가 다시 힘차게 드림 스틱을 맞부딪혔다.


무대를 가득 채우던 소리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내 머리 위의 조명도 함께 사라지고 스포트라이트는 오소마츠에게로 쏠렸다. 정적인 공간에 오소마츠의 노래만이 감돈다.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고 아찔하며 지독하다. 나는 오소마츠의 턱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훔쳐보았다. 이제 곧 카라마츠의 솔로. 기타 소리와 보컬이 어우러지는 부분이니까 너무 튀지 않게 적당히 잘 뒷받침해야한다. 시선을 낮게 깔았다가 다시 앞을 보았을 때 오소마츠와 눈이 딱 마주쳤다. 한순간 보컬도 사라진 정적인 공간에서 시간마저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곳에서 오소마츠는 입 모양으로 내게 속삭였다.

너도 마음껏 연주해.

심장이 빠르게 뛴다. 짧고 강한 메세지는 오소마츠의 노래만큼이나 강렬했다. 그순간 기타 소리와 함께 다시 음악이 폭발했다. 급하게 바이올린에 갖다댄 활대는 손을 따라 잘게 떨리고 있었다. 마음껏?  이렇게 큰 소리가 주변에서 터져나오고 있는데 오소마츠의 메세지가, 처음 바이올린을 가르쳐준 삼촌 목소리가 귀에서 웅웅 울려댄다.

「삼촌은 왜 바이올린을 시작했어요?」

「음... 그냥 하고 싶어서?」

부끄럽게 웃던 삼촌을 기억한다. 멋진 연주라며 박수 치던 오소마츠 역시 기억한다. 바이올린 선율이 머리 속을 지나간다. 어릴 적 들었던 삼촌의 연주와 오소마츠와 처음 만났을 때 연주한 곡이. 난생 처음으로 악보대로 안 하고 애드리브를 섞어서 한 그 연주가. 한 순간 머리가 맑아지고 보컬이 뚜렷히 들려온다.

"외쳐!"

나는 있는 힘껏 활대로 현을 그었다. 악보따윈 없다. 생각해둔 것도 없다. 그냥 지금 내가 느끼는 그대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확연하게 변한 음색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꽂히는 게 느껴졌다. 물론 오소마츠도 포함해서. 이번엔 내가 오소마츠를 볼 차례였다.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듯한 개구진 웃음을 보니 나도 따라서 웃고 말았다. 어차피 나는 마이크가 없으니까 소리내서 말했다.

"같이 하자."

오소마츠가 웃었다. 도발적이면서도 뇌쇄적인, 지금까지와는 확연히 다른 미소에 심장이 뻐근하다. 오소마츠는 아예 내 쪽으로 몸을 틀어 노래하기 시작했다. 보석처럼 빛나는 붉은 눈동자에 오롯이 나만이 담겨져있다. 눈빛을 주고 받고, 동시에 호흡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함께 음을 맞추고 분위기를 띄우고 있으니 마치 듀엣이라도 하는 기분이다. 절정에 오를대로 오른 무대 분위기에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기타는 지지 않겠다며 따라붙고 드럼은 빠른 비트를 강렬하게 새기며 베이스와 키보드는 든든하게 받춰준다. 이토록 다른데도 겹치어져 조화로우면서도 역동적인 멜로디가 나오는 게 신기하다. 적당히 같은 건 개나 줘버리라고 해. 오소마츠와 마주 본 채 마음과 메세지와 멜로디가 교차되며  무대는 마지막 빛을 발하였다.

귀가 웅웅 울려댄다. 온 집중을 쏟아낸 탓에 몸엔 기운이 하나도 없고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뜨거운 조명에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우리는 시선을 주고 받았다. 다들 한결같이 후련하단 표정들이다. 나도 똑같겠지.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를 들으며 나는 입꼬리만 살짝 끌어 올린 채 웃었다.


이제 곧 여름인데도 밤공기가 차다. 밤이라서 차가운 것인지, 아까 무대 열기때문에 차게 느껴지는 건지는 모르겠다. 의상도 벗지 않고 라이브 하우스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만 멀뚱멀뚱 올려다보았다. 미치겠다. 열기가 가시질 않아. 여운이 남아있는 손바닥을 내려보다가 천천히 얼굴을 쓸었다. 이 기분을 대체 뭐라 해야할 지 모르겠다. 심장은 미친듯이 뛰고 흥분이 가라앉질 않는데 눈물마저 날 것 같다. 마지막 무대가 몇 번이고 머리 속에서 리플레이된다. 오소마츠와 둘이 폭주하던 그때의 감각이 아직도 생생하기만 하다.

"얍!"

"앗, 차가!"

"반응 엄청 나네."

콜라캔을 흔들며 오소마츠가 낄낄대며 웃는다. 인상을 찌푸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 옆에 자리를 잡은 오소마츠가 캔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라이브 잘 끝난 기념으로 건배할까?"

"콜라로?"

"탄산 있는 건 맥주랑 똑같잖아. 아님 진짜 맥주 사올까?"

"아서라. 미성년자가 맥주는 무슨."

진짜 사올 기세에 오소마츠의 옷자락을 잡아당겨 도로 자리에 앉혔다. 두 말 없이 캔을 따니 시원한 소리와 함께 달큰한 콜라향이 올라온다. 오소마츠가 붉은 콜라캔을 들어올렸다. 무대 위에서와 다른 느낌으로 신이 난 모습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온다.

"자, 건배!"

"그래, 건배."

캔 두 개가 둔탁하게 맞부딪히고, 나는 캔에 입을 대었다. 달콤한 맛과 함께 입 안에서 탄산이 톡톡거리며 터진다. 맛있다. 따끔거리는 혀로 마른 입술을 핥았다. 탄산 마시면 더 갈증이 심해진다던데 달고 시원하니 마시고 나니 오히려 진정되는 것 같다. 숨을 길게 내쉬고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깐 미처 보지 못 한 별이 딱 하나 빛나고 있다.

"고마워."

"응? 뭐가?"

아무것도 모른다는듯이 오소마츠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얼버무릴까 하다가 생각을 바로 잡고 다시 입을 열었다. 열기가 남아있는 지금이 아니면 못 말할 것 같았다.

"나... 바이올린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이런 연주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 수상과 재능을 떠나서 그냥 맘 편한 연주를. 그냥 자유롭게 내 소리를 내고 싶었어."

"흐응."

"나도 몰랐던 소원을 네가 이루게 해준 거야. 내게 바이올린을 주고, 자리를 줘서 고마워."

답답했던 가발을 벗으며 조심스럽게 웃었다. 생각해보면 오늘말고는 오소마츠를 보며 웃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새삼스러워서 눈썹을 늘어뜨리니 오소마츠가 갑자기 내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니, 이건 쓰다듬는 수준이 아닌데?!

"잠깐만! 그만해!"

더 웃지도 못하고 짜증내며 손을 쳐냈다. 안그래도 가발 쓰고 라이브해서 땀이 장난 아닌데 머리까지 엉키니 최악이다. 아쉬운대로 손으로 정리하고나자 오소마츠는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너무 기뻐서 주체가 안 된다는듯이. 밤인데도 눈이 부셨다. 그 날 삼촌과 함께했던 그 햇살이 눈 앞에 있는 것 같다.

"감사는 됐어! 나는 단지 그 날처럼의 연주를 또 듣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오소마츠..."

"그도 그럴게 나 그때 너한테 반했는걸."

"...하, 하아???"

손에 힘이 빠져 캔이 떨어지고 데굴데굴 바닥을 구른다. 남아있던 콜라가 검은 아스팔트 위로 퍼져나간다. 탄산이 와다닥 터지다가 사그라들었다.

"너, 너, 지금, 뭐, 라고...?"

"너한테 반했다고."

"두 번 말했다!!! 두 번 말했어!!!"

"네가 뭐라고 했냐고 물어봤잖아. 그리고 몇 번이고 말해줄 수 있다고? 쵸로마츠, 좋아해~"

"우, 우린 남자라고? 그리고..."

어, 그치만... 나쁘진 않은가...? 머릿 속이 뒤죽박죽이다. 콩쿠르에서 실수했을 때도 이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찌할 바를 몰라 바이올린 케이스로 얼굴을 가렸다.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에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뭐어 지금 당장 대답해달란 말은 안 해. 너도 알다시피 나 기다리는 거 잘 하거든."

"..."

"괜찮아, 괜찮아. 천천히 잘 생각해봐. 그리고나선 꼭 '나도 오소마츠가 좋아~'라고 대답해주는 거다?"

"내 대답을 네 멋대로 정하지 마!"

"에엥? 그치만 쵸로마츠 너."

손 위로 오소마츠 손이 겹쳐지더니 바이올린 케이스가 내려간다. 오소마츠의 웃는 얼굴이 바로 눈 앞에 있다. 가까워. 몇 달 같이 있으면서 이 거리감에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오소마츠가 손가락으로 장난스럽게 바이올린 케이스를 두드린다.

"이 바이올린도 안 쓰겠다고 했으면서 결국 썼잖아?"

"그,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바보야!!!"

"꾸엑!"

바이올린 케이스로 있는 힘껏 오소마츠를 때리고 앞뒤 안 재고 도망쳤다. 아니, 아니 도망치는 게 아니라 집에 가는 거지! 손에 땀이 나 바이올린 케이스가 자꾸만 미끄러진다. 큰일났다. 무대는 끝난지 오래인데 열기가 빠지질 않는다. 얼굴이 뜨거운 건 첫 라이브가 대 성공이여서 그럴 거다. 분명 그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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