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마츠상 2차 창작 백업

[오소쵸로]Rubato

2018. 7. 14. 작성 | 공백 미포함 15,776자 | 밴드마츠au

전편

[오소쵸로]Expressivo

※육둥이 모두 남남+동갑. 형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봄이 가려면 날짜 상으로는 아직 남았건만 햇살이 제법 뜨겁다. 한 손으로 해를 가리며 몸을 뒤로 물려 나무 그늘 아래로 숨었다. 나뭇잎 사이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햇빛에 내 손에 초록빛이 내려온다. 눈을 두어번 깜빡고는 손목시계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1시 27분. 곧 있으면 약속한 시간이었다. 카라마츠에게 조금씩 기타를 배우던 내가 기타를 보러가고 싶다고 하니까 카라마츠가 매우 기뻐하며 함께 악기점에 가자고 권한 게 어제, 그리고 약속 시간까지 이제 1분. 한숨을 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말이라 바삐 오가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속에서도 독보적으로 눈에 띄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카라마츠가 먼저 권하기는 했지만 그 녀석이 제 시간에 올 리가 없지. 헛웃음을 지으며 나무에 등을 기대었다.

"어."

익숙하고 낮은 목소리가 신경을 잡아끌었다. 발 앞에서 멈춘 그림자를 따라 시선을 올리다가 새하얀 마스크에서 잠시 멈추었다. 내가 아는 한 감기 걸리지 않았는데도 마스크를 하고 다니는 건 한 명밖에 없었다. 이치마츠. 이내 나른하게 잠긴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둘은 고양이의 눈키스라도 하는 것처럼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한 번의 깜빡임 속에 온갖 생각들이 나뒹굴었다. 그러고보니 나 얘랑 단 둘이 얘기한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본 적도 없는 상황과 마주치자 뇌가 삐그덕 거린다. 만약 지금 걷게 된다면 왼발과 왼손을 동시에 뻗을 것도 같았다. 나는 침착하게 반사적으로 올렸던 손을 작게 흔들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 안녕. 이치마츠..."

"어, 어.... 이런 데에서 다 보네, 쵸로마츠..."

"어디... 가...?"

"그... 악기점에 좀..."

"아, 그렇구나아... 우연이네. 나도 이제 카라마츠랑 가기로 했는데..."

"그, 그렇구나..."

하하하... 우리 둘은 서로를 보며 기계적으로 웃음소리를 냈다. 얼굴에서 땀과 함께 어색함이 뚝뚝 떨어진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속으로 물어도 자기 자신 외에 답할 이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치마츠는 땀이 찬 손으로 제 목을 쓸었다. 아무래도 목적지가 같다는 걸 알게 되어 자리를 뜨기 뻘쭘해하는 것 같다. 헤어졌다가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것만큼 뻘쭘한 게 또 있을까.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이 어색하지 않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나와 이치마츠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혹시라도 시선이 마주치면 멋쩍게 웃었다. 서로가 서로를 불편해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잘 느껴져서 더 불편했다. 안되겠다. 이러다간 여름이 오기도 전에 어색해서 죽겠어. 땀을 주륵주륵 흘리던 이치마츠가 눈을 꽉 감더니 조심히 입을 열었다.

"날씨 좋지...?"

"어? 어... 그렇네."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구름이 해를 가려 우리 얼굴에 그늘이 진다. 이리저리 눈동자를 돌리던 이치마츠는 뒷목을 쓸며 반쯤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내일 날씨도 좋을까?"

"좋, 을 거야. 응, 예보에서 그랬던 것 같아. 아마도..."

"날씨는... 정말 날씨야, 그치?"

"어, 응..."

이게 대체 무슨 대화야! 날씨가 날씨라니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이치마츠! 거기에 '응'이라고 대답해버리다니 나도 어떻게 된 거냐고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도망쳐봤자 분위기만 더 나빠졌을테니까. 물론 아무 짓도 안 해도 상황은 이미 나빴다. 나는 연신 눈을 깜빡였다. 실패하긴 했어도 이치마츠는 대화를 시도했다. 그럼 나도 그에 맞춰줘야하나? 그런데 날씨는 날씨라는 말 다음에 무슨 이야기를 해? 쵸로마츠의 작은 눈동자가 쉴새없이 방황하고 있다.

"기다렸나, 마이 브라더~ 훗, 미안하다. 카라마츠 걸이 나를─"

"어서 와!!!"

"어서 와!!!!"

"엇, 왜 우는 건가, 쵸로마츠? 에? 이치마츠도?"

평소엔 냉정하기 그지없는 우리가 자신에게 달라붙자 얼떨떨해하던 카라마츠는 환히 웃으며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둘 다 오늘 어울려줘서 고마워."

테이블에 트레이를 내려놓고 두 사람 앞에 각각 잔을 내려놓는다. 카라마츠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이치마츠는 블루베리 스무디. 플라스틱 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훗, Friend의 부탁이라면 언제든지..."

"딱히. 난 우연히 만났을 뿐이고. 이런 거 안 사줘도..."

"아니, 카라마츠는 전혀 도움 안 되었으니까. 오히려 이치마츠 만난 게 운이 좋았어."

단 둘이었다면 어색해서 죽었겠지만. 뒷 말은 라임 에이드와 함께 꿀꺽 삼켰다. 칭찬도 아닌 말에 뿌듯하게 웃던 카라마츠는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는 쿨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선 매우 자연스럽게 시럽을 몇 번이나 넣고 다시 돌아왔다.갖은 폼은 다 잡고 아메리카노 시키던 사람이 누구더라... 이치마츠는 나와 똑같이 질린 듯이 카라마츠를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 한 카라마츠는 시럽이 잔뜩 섞인 아메리카노를 빨아들이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면 설탕물 아닌가. 왜 아메리카노를 시킨 거야.

"그건그렇고 오늘 어땠나, 쵸로마츠? 마음에 드는 기-타는 발견했나?"

"아, 응. 이따 집에 가서 좀 더 검색해보고 사려고."

"훗, 나의 어드바이스덕분인가..."

"아니, 하나도 도움 안 되었거든? 너 기타 담당이면서 왜 하나도 모르는 거야! 오히려 베이스인 이치마츠가 더 기타에 빠삭했고!"

"저녀석 외관 말고는 관심 없으니까."

"으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식으로 눈을 깜박이는 카라마츠를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기타를 사고 싶은데 추천해달라는 말에 자기만 믿으라고 큰 소리 쳐놓고 막상 악기점 가서 한 이야기라고는 "이게 멋지다!"밖에 없었다. 이 기타의 어디가 좋냐고 물어봐도 같은 말만 반복하니 기타 브랜드 중 아는 게 있긴 한 건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더블 네크 기타를 추천할 때는 그야말로 기겁했다. 기가 차 말도 안 나오는 내 어깨를 두드린 것은 베이스 줄을 교체하고 온 이치마츠였다. 카라마츠를 한 번, 나를 한 번 본 이치마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자신이 아는 기타 정보를 술술 말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부실의 음악 잡지나 음반은 대부분 이치마츠가 갖고 온 것이었다. 눈에 그다지 띄지 않고, 본인도 그걸 바라지 않는 이치마츠지만 기본 실력을 가장 갖춘 것도 이치마츠였다. 그러고보니 밴드 초기 멤버도 이치마츠랑 오소마츠라고 하지 않았나? 어쩌면 밴드에서 가장 열정을 갖고 있는 건 가장 의욕 없어보이는 이치마츠일지도... 그렇게 생각하며 빨대로 에이드를 휙휙 저었다. 얼음끼리 맞부딪히며 달그락거렸다.

"어쨌든 쵸로마츠와 더블 기타를 하는 날이 몹시 기다려진다!"

"히힛, 그냥 쿠소마츠가 밴드 그만두고 쵸로마츠가 메인 기타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그건 No다, 쵸로마츠!!! 날 쫓아내지 마라!!!"

"안 쫓아내니까 이거 놔! 옷 다 늘어나겠다!"

소매를 붙든 카라마츠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평소엔 폼을 잡느라 날카롭게 빛나던 눈동자는 지금은 눈물로 빛나고 있었다. 입술에 침을 한 번 바르고 누가 뭐라해도 퍼스트 기타는 너라고 말하니 카라마츠는 언제 울먹거렸다는듯이 환하게 웃었다. 바보여서 다행이다. 카라마츠처럼 겉은 검지만 달기만 한 아메리카노를 바라보며 허탈한듯이 웃었다. 

"그러고보니 오소마츠와는 어떻게 되가고 있나?"

"푸흡!"

"아, 뿜었다."

"괘, 괜찮은가?"

라임의 새콤한 향이 코 끝까지 올라온다. 목 안 쪽에서 탄산이 타지는 것처럼 따끔따끔 거린다. 쉴새없이 기침을 내뱉자 카라마츠가 등을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가, 갑자기 오소마츠 이름이 왜 나와?!"

"둘의 관계가 얼마나 진척되었는지 궁금해서 말이지. 훗, 뭣하면 서포트해줄 수도 있다고?"

"우리 둘의 관계가 뭐! 누가 들으면 사귀는 줄 알겠네!"

"에? 사귀는 게 아닌가?"

"안 사귀어!"

"내 말 맞지? 둘이 아직 안 사귄다니까. 빨리 돈이나 내놔."

"크윽... 내 50엔이..."

"둘이 나랑 오소마츠가 사귀냐 안 사귀냐로 돈 걸었어?! 이치마츠, '아직'이라니 그건 또 무슨 의미인데!"

"히힛, 혼신의 츳코미 감사함다."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웃는 이치마츠를 보며 몸을 잘게 떨었다. 반쯤 감고 있는 눈동자는 밤 중의 고양이처럼 형형하고 의중을 모르겠다. 역시 이녀석은 무서워. 달달한 블루베리 스무디를 쪽쪽 빨고 있는 이치마츠는 무해해 보였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정말 안 사귀는가?"

"안 사귄다니까! 애초에 왜 사귄다고 생각한건데!"

"매일 붙어있고, 둘이 사이좋고, 오소마츠도 맨날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니지 않는가."

"그야말로 보는 사람이 배알 꼴릴 정도로."

"그건... 그녀석이 일방적으로 들러붙는 거고..."

그도 그럴게 나 그때 너한테 반했던걸.

오소마츠가 화사하게 웃으며 애정이 듬뿍 묻어나온 목소리로 말한 것이 생각나 황급히 라임 에이드를 들이켰다. 새콤한 맛에 눈이 절로 찡그러지고 미약한 탄산이 입 안을 멤돈다. 따끔따끔 거려. 휴지로 입가를 닦으며 조금 멍하게 오소마츠를 생각했다. 오소마츠와 있을 때도 이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횟수가 많아진 것 외에는 우리 둘의 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오소마츠가 나에게 들러붙는 거야 그 전에도 일상이었고, 다른 멤버들과도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게 오소마츠니까. 그렇지만 가끔씩 눈이 마주쳤을 때 곱게 휘어지는 눈꼬리나 가끔씩 닿는 손, 둘이 있을 때 묘하게 더 달콤해지는 목소리 등이 내 심장을 콕콕 찌르는 것만 같았다. 그때마다 고백 한 번 못 들어봤던 내가 괜히 이상한 말을 들어서 그런 거라며 마음을 다 잡았다. 명확한 답도, 선 긋기도 없이 평온한 일상을 이어나가도 오소마츠는 그저 웃으며 곁을 지킬 뿐이었다. 그 여유롭고 뻔뻔한 태도가 정말 싫다. 그런 거 아니라며 다시 한 번 못을 박았다. 카라마츠는 짐짓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인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만... 이치마츠는 둘이 안 사귀는 걸 어떻게 안 건가?"

"그야 오소마츠는 사귀었으면 100% 말했을 놈이니까."

"과연 그렇군."

"그런 이유로 납득하지 말아줄래?"

"그런 이유라니?"

왜 그러는지 모른다는듯이 멀뚱한 얼굴을 보고 열이 뻗쳐 빨대도 쓰지 않고 라임 에이드를 들이켰다. 새콤달콤한 맛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그녀석하고 나는 남자라고? 남자끼리 사귈리가."

"논논~ 이성간이든 동성간이든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다, 쵸로마츠."

"맞아. 이성끼리든 동성끼리든 커플은 짜증나.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어이."

"그러니 쵸로마츠."

응? 시선을 맞추니 카라마츠가 씩 웃는다. 웬일로 힘이 들어가있지 않은 잔잔한 미소다. 푸르고 깊은 눈빛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더해진다.

"솔직해져도 괜찮다."

이번엔 내가 멀뚱거릴 차례였다. 힌트를 요구하듯이 이치마츠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이치마츠는 고양이처럼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정말 모르는 거냐고 묻는 것처럼. 제법 진지한 분위기에 뭐라 할 타이밍을 놓챠 입을 다무는 것을 택했다. 침묵 속에서 진동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미안! 전화 좀 받고 올게!"

나이스 타이밍. 웅웅 울려대는 휴대폰을 챙겨들고 쵸로마츠는 도망치듯이 자리를 떴다. 휴대폰만큼이나 떨리는 심장을 지그시 누르고 고개를 저었다. 글쎄 아니라니까 다들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오소마츠도, 다른 멤버들의 뜨뜻미지근한 시선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숨을 길게 들이마쉬고 뒤늦게 핸드폰을 살펴보았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저절로 눈이 커졌다.


"삼촌!"

"오랜만이네, 쵸로마츠. 많이 컸구나."

삼촌은 자리에서 일어나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어렸을 땐 마냥 커보였던 삼촌과 제법 눈높이가 비슷해지니 조금 이상한 기분이다. 가만히 보니 삼촌 눈가에 주름이 늘어난 것도 같다. 시간의 흐름에 조금씩 풍화된 바위처럼 보여 조금 씁쓸해졌다. 그래도 삼촌의 사람 좋은 미소와 삼촌이 끓여주신 차향만은 그대로였다. 곁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을 감싸쥐었다. 더운 여름날 뜨거운 차라니. 그것마저도 삼촌다워서 웃음이 나왔다. 차를 조금씩 식히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별할 것 없는 시시한 이야기였지만 그동안 못 만난 만큼 즐거웠다. 

"그건그렇고 쵸로마츠 바이올린 다시 시작했다며?"

쿨럭. 차가 코로 들어가는 줄 알았다. 입가를 닦고 고개를 들자 삼촌이 어색하게 웃었다.

"어, 어떻게..."

"그야 형이랑 형수님한테 들었지. 아주 열심히 한다면서."

"안 들킨 줄 알았는데?!"

"쵸로마츠 넌 옛날부터 숨기는 거에 약했지."

삼촌은 다 식어버린 차를 홀짝였다. 평화롭기만 한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저 찻잔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고운 빛깔의 차 위에 자꾸만 부모님의 눈빛이 비추어보였다. 지쳐서 흐려진 두 분의 눈빛이. 내가 바이올린을 다시 시작하고서 아무 말씀도 없었던 건 또 그때처럼 차마 말릴 수 없어서인 게 아닐까. 나는 또 부모님을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목이 메였다. 손에 땀이 차 찻잔이 덜그럭거려서 찻물이 넘치지 않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넘실거렸다. 잔잔해진 표면에는 내가 비추었다. 입을 꾹 다물어버린 내가.

"형하고 형수님, 기뻐보이셨어."

"네?"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마주한 삼촌의 얼굴엔 잔잔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언뜻 아빠의 얼굴이 겹쳐보였다.

"너 바이올린 그만두고 많이 힘들어보였는데 다시 밝아졌다고 좋아하시더라. 그런데 네가 숨기고 있으니까 언제 말해줄 지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야."

"어, 어..."

"원래 이거 말하면 안 되는데 쵸로마츠 너는 끝까지 숨길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바이올린으로 뭐하고 있어? 콩쿠르는 아닐테고."

"그... 학교 동아리로 밴드..."

"밴드? 멋진걸. 청춘이구나~ 너하고도 잘 어울려."

"그, 그래요...?"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이자 삼촌이 시원스레 소리내어 웃으셨다. 삼촌은 어울린다고 다시금 말하며 빈 잔에 차를 채웠다. 희미하게 하얀 연기가 올라온다.

"사실 나는 네가 콩쿠르 나간다고 했을 때가 더 의외였어."

"네? 바이올린 가르쳐준 거 삼촌이잖아요."

"그때의 자유로웠던 너를 아니까 의외였지. 내가 가르칠 때만 해도 너 악보 안 지키고 마음대로 연주했잖아."

"윽. 그, 그거야 잘 몰라서 그랬던 거고..."

"그래도 즐거워보였어."

추억을 회상하듯이 삼촌의 눈동자가 어딘가 먼 곳을 향한다. 굳이 같은 곳을 보지 않아도 삼촌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따스한 햇살, 은은하게 퍼지는 차 향기, 부드러운 바이올린 선율과 웃고 있는 삼촌과 나의 모습. 나의 아름다웠던 유년 시절.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빙그레 입꼬리를 올린 삼촌은 거실 구석에 숨겨두었던 옛 바이올린 케이스를 들어올렸다. 그 표면을 쓸어내리는 손은 몹시 투박해보였다. 지금은 서류만 만지작거리는 저 손으로 아름다운 선율을 자아냈던 때가 그립다. 바이올린 현을 눌렀던 손에는 현보다 얇은 자잘한 주름들이 가득했다. 나이테만큼 삼촌에게 새겨진 무수한 시간들. 그만큼 삼촌은 깊은 목소리를 내었다.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쵸로마츠. 좀 더 감정에 솔직해진다면 다채로운 소리가 나올거야. 콩쿠르도 아니고 밴드잖아? 룰 없이 자유로운 곳이니까 그게 네 강점이 되줄거야."

"삼촌..."

"하하하, 네가 나보다 바이올린을 잘 하니 가르쳐줄 거라고는 이런 꼰대같은 소리밖에 없구나."

"으응. 아니에요. 무척, 도움이 되었어요. 밴드하고 있다고 부모님께도 꼭 제대로 얘기드릴게요."

삼촌 고마워요. 짧게 덧붙이니 삼촌은 진심으로 기쁜듯이 웃으셨다. 그 미소만큼은 예전 그때와 똑같았다. 나 또한 마주 웃으며 식은 차를 홀짝였다. 감정에 솔직해진다면... 그 말을 들은 이후부터 오소마츠, 네가 내 머릿 속에서 떠나질 않아.


"어라? 아무도 없어?"

두리번 거릴 필요도 없이 좁은 동아리 부실엔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 명도 없다니 이상하네.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방을 적당히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카라마츠랑 토도마츠는 오늘  청소 당번이라 늦는다고 그랬고, 쥬시마츠는 아마 야구부 도우미, 이치마츠는 고양이라도 보러 갔나? 그리고 오소마츠는...

"그녀석은 안 늦는 게 더 신기하지."

웃음 섞인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편하게 앉았다. 여기가 조용한 게 영 어색해서 눈만 깜박이며 다리를 흔들었다. 뭐할까. 바이올린 연습? 아니면 기타? 기타를 좀 만진다고 카라마츠 녀석이 화내거나 하진 않을 터였다. 그래도 이렇게 조용한 부실은 처음이고, 악기 연주는 이따 실컷할 테니까... 고민하다가 결국 이어폰을 꺼내들었다. SNS에 들어가 고양이 귀를 한 여자아이를 보자 자동으로 얼굴이 풀어진다.

"냐쨩 귀여워~"

휴대폰을 껴안고 데굴데굴 구르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라이브하우스에서 우연히 만난 나의 천사! 에메랄드같은 눈에 분홍색 긴 생머리 거기에 고양이 컨셉이라니 최고잖아! 노래하는 목소리도 고양이 울음소리처럼 너무 너무 귀엽다. 라이브하우스에서 자주 마주치지만 난 흑심을 품은 녀석들과는 다른 젠틀한 팬이니까 간단한 인사만 주고 받고 있다. 최근에 SNS로 친구를 맺어서 교류도 하고, 올라오는 사진이나 영상을 보며 힐링하곤 한다. 이걸 다른 멤버들이 봤다가는 또 오타쿠라고 놀리겠지만 어쩌라고 우리 냐쨩이 귀여운데. 아무도 없지만 이어폰을 끼고 냐쨩의 목소리를 만끽했다. 하도 많이 들어서 악보 없어도 연주할 수 있을 것 같─

"쵸~로마츠!"

"으악!"

귀 바로 옆에서 터져나온 목소리에 놀라 이어폰을 집어던지다시피하며 빼버렸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꾹 누르자 가까이에서 오소마츠가 씩 웃는다.

"뭘 그렇게 봐? 에엑 또 레이카인가 뭔가 보는 거야?"

"레이카가 아니라 냐쨩이라니까! 몇 번을 말해!"

"에잉 그딴 이름 틀려도 상관없잖."

"상관없기는! 누가 네 이름 이상하게 부르면 좋겠냐?"

"난 쵸로마츠가 불러주는 거면 뭐든 좋은데. 자기든 달링이든 여보야든."

"왜 다 그딴 호칭이야?"

"그렇게 불러줬으면 하니까."

붉은 눈동자에 오롯이 내가 담긴다. 얼굴에 열이 올라 고개를 홱 돌렸는데도 그런 건 신경쓰지 않는 건지 오소마츠가 내 옆에 앉았다. 애들도 없다고 아예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바짝 달라붙었다. 목에 숨결이 닿아서 소름이 돋는다.

"더워. 떨어져."

"싫어~ 주말동안 쵸로마츠 못 봤으니까 충전해야한다구."

"뭐야, 그게. 알 게 뭐야. 더우니까 떨어지기나 해!"

"그럼 쵸로마츠가 연주 하나 해주면 떨어질게."

안돼? 오소마츠는 올망졸망한 눈망울로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네가 토도마츠냐고. 토도마츠한테 이상한 것만 배워선. 소리내어 말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질 않는다. 미치겠다. 왜 저게 귀여워보이는 거야. 동갑 남자애가 저러면 징그러운 게 보통이잖아. 이건 다 주위의 부추김과 여름의 더위가 뒤섞인 결과다. 그럴 거다. 오소마츠쪽에 시선을 두지 않고 들으라는듯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뭐 연주해줬으면 하는데."

"아무거나!"

"제일 어려운 걸..."

"그러면 쵸로마츠가 지금 좋아하는 곡!"

"뭐가 달라진건데! 나참..."

여러 악보와 멜로디가 머릿 속에 뒤섞여 돌아다닌다. 지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라... 바이올린을 꺼내놓고 잠시동안 고민하다가 겨우 활을 들었다. 날 보는 오소마츠의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다. 약간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탓일까. 길게 숨을 내쉬고 눈을 살짝 감았다. 예전에는 바이올린을 들고 서있으면 항상 삼촌과 함께 있던 때가 떠올랐다. 조용하고 평화롭던 그때 그 장소에 있는 기분이 날 음악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시 눈을 뜨고 오소마츠를 보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너를 보며 슬그머니 웃었다. 이제 눈을 감을 필요는 없다. 시끄러워도, 정신없어도 네가 있는 곳이 내가 연주할 곳이니까.

힘차게 현을 그었다. 연주하는 곡은 첫 라이브 하우스 공연 때의 엔딩곡. 원래 기타 솔로가 돋보이는 곡이었지만 그때의 반응이 워낙 좋아서 바이올린 솔로 편곡도 해놓은 상태였다. 카라마츠 한동안 삐져서 좀 귀찮았었지. 그때 생각에 작게 웃자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똑똑히 나를 보며 바이올린 소리와 어우러진다. 그러고보니 그때도 듀엣하는 기분이었는데 이렇게 단 둘만 있으니 영락없는 듀엣이다. 드럼도, 베이스도, 기타도, 키보드도 없이 보컬과 바이올린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하며 원하는 대로 박자와 멜로디를 갖고 놀았다. 재미있어. 기분탓인지 오소마츠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통통 튄다. 분명 파워풀한 곡이었는데 뭐, 좋으니 아무래도 좋다. 가볍게 1절만 하고 연주를 멈추니 오소마츠가 생글생글 웃으며 곁으로 다가왔다.

"이제 만족해?"

"응! 대만족!"

"그거 참 다행이네."

"응. 쵸로마츠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아직 나여서 다행이야."

"뭐?"

그게 뭔 소리야. 어이없단 식으로 보니 오소마츠는 일부러 볼을 크게 부풀렸다.

"요새 쵸로마츠 맨날 레이카인지 렌카인지 하고만 놀잖아. 노래도 그것만 듣고."

"그러니까 냐쨩이라고!"

"그래도 뭐, 아직 내가 1순위인 거 확인했으니까 됐어!"

"누가 너따위가 1순위야..."

"에에? 그래도─"

오소마츠가 나를 거의 마주 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익숙해질만도 했지만 아직도 부담스러운 가까운 거리감에 몸을 주춤거리면 오소마츠는 기어이 나를 안는다. 허리를 팔로 감싸안았다. 바짝 당겨진 몸은 오소마츠에게 기대어졌고, 오소마츠는 뒷통수를 감싸 받쳤다. 오소마츠가 길게 숨을 뱉자 귀에 바로 숨결이 닿아 움찔거리고 말았다. 눈을 꾹 감자 웃음소리가 귀 속을 간질인다.

"─내 목소리 좋아하잖아?"

"읏!"

탐욕적인 목소리에 온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까의 통통 튀던 목소리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인지 지금 남은 것이라곤 나를 옭아매는 가시덩쿨뿐이었다. 이대로 건들여선 안 되는 부분까지 건들일 것만 같았다. 밀어내려고 하자 오히려 더욱 세게 나를 껴안았다. 숨이 막혀 바르작거리니 오소마츠는 부드럽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쵸로마츠."

날 부르는 소리에 평소와 달리 조바심이 느껴진다. 밀어내려던 손으로 오소마츠의 옷을 움켜잡자 오소마츠는 어리광부리듯이 내 어깨에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멀리서 애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너 좋아한다는 거 잊지마."

마냥 기다리는 것도 힘드니까. 알겠지? 오소마츠가 내 귀에 입을 맞추고 떨어지자 타이밍 좋게 동아리 부실 문이 열렸다. 태연히 인사를 건내는 오소마츠 뒤에서 나는 귀와 얼굴을 감싸고 쇼파에 몸을 숨겼다. 심장 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그것이 마치 도망가기만 하는 나를 비난하는 소리처럼 들린다. 정말 싫다. 바이올린에서 도망치던 나를 밴드로 잡아끌던 것처럼 이번에도 너는 내가 이 감정으로부터 도망가지 못하게 만든다.


"앗, 냐쨩!"

"JADE군, 안냥~ 신곡 기대하고 있다냥! 다음 무대 힘내라냥!"

"으, 응! 오늘 무대도 무척 좋았어, 냐쨩!"

총총거리며 사라지는 냐쨩을 보며 힘껏 팔을 흔들었다. 냐쨩이 힘내라고 해줬다! 나 힘낼 거야! 엄청 힘낼거야! 주먹을 불끈 쥐고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날 껴안았다. 누군지 굳이 눈으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아주 그냥 입 찢어지겠어?"

체온이, 숨결이, 그리고 그 목소리가 너라는 걸 알려주니까.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네 옷 소매를 움켜잡았다. 감정에 솔직하게. 그런 말을 들어도 난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 오소마츠.

"내 1순위가 누구인지 알았으니 만족한다며."

"어?"

"얼른 준비나 해, 망할 리더. 이번 라이브는 아주 중요하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줄래? 나는 멍청하게 서있는 오소마츠를 보며 설핏 웃은 뒤 무대 위로 올랐다.


조명이 뜨겁다. 숨을 천천히 고르며 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바이올린을 내려놓고 기타를 매는 사이 오소마츠는 재치있는 멘트를 쏟아낸다. 저기 웃고 있는 관객들은 제일 쌩쌩한 오소마츠도 땀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알까. 오소마츠 옆 모습을 훔쳐보다가 시선이 딱 마주쳤다.

"다음은 우리 신곡! 무려 바이올린이었던 JADE가 기타를 칩니다! 자, JADE군 한 말씀 하시죠?"

"에, 나?"

갑자기 들이댄 마이크를 통해 얼떨떨해하는 내 목소리가 크게 울린다. 갑자기 꽂혀드는 관심에 속이 울렁거리는 한편 기분이 고양된다. 도움을 청하듯 오소마츠를 보자 오소마츠는 그저 편하게 하라는 것처럼 가볍게 웃었다. 그 미소를 보니 조금은 속이 편안해졌다. 목을 잠깐 가듬고 겨우 첫 마디를 떼었다.

"그동안 카라에게 배우고 많이 준비한 곡입니다. 기타를 이렇게 무대에서 연주하는 건 처음이라 긴장도 되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자, 잘 들어주세요!"

"JADE군 귀여워!!!"

어찌저찌 멘트를 마치고, 처음 들어보는 말에 얼굴을 붉혔다. 귀엽다니. 귀여울만한 모습은 안 보였는데? 표정을 가까스로 갈무리하며 마이크를 넘기니 오소마츠가 마이크가 아닌 내 손을 잡았다. 엄청난 악력에 손이 다 얼얼해졌다. 마주한 눈동자는 불꽃을 삼킨 것처럼 뜨겁고 맹렬했다.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오소마츠는 웃음을 걸치고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JADE한테 집중이 쏠리니 이거 질투나는데요? 절 봐달라구요~"

장난스러운 오소마츠 말투에 관객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저게 다른 누구도 아닌 나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아니까. 질투.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길 봐달라는 말을 들었으면서도, 시선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이런 얼굴로 오소마츠를 볼 수가 없어서 뒤를 돌아버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우리들의 연주로 가득 찼던 무대가 이젠 내 심장소리로 시끄럽다. 이제 신곡 연주해야해. 집중, 집중... 억지로 기타 피크를 쥔 손에는 오소마츠의 열기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처음 선보이는 더블 기타 곡. 내가 기타 초보자라는 것을 배려해 내 연주는 어디까지나 카라마츠를 보조하는 것에 그쳤지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나는 기초에 충실한 연주를 하되, 그만큼 화려한 카라마츠의 독주로 밋밋한 부분을 채웠다. 저번에 퇴짜 맞았던 솔로 부분을 그대로 채용한 덕에 카라마츠는 아주 신났다. 흥분한 카라마츠를 따라 쥬시마츠도 점점 박자를 높이고 있어 따라가기가 벅차다. 눈치를 주며 어떻게든 손을 놀렸다.

그렇지만 제일 신경쓰이는 건 역시 오소마츠다. 이번 신곡은 어쩐 일로 오소마츠가 작사 작업에 참여했다. 사랑하는 이를 쟁탈하겠다는 주제의 가사. 왜 이런 노래가 탄생했는지는... 솔직히 알고는 있지만 지금은 살짝 모른 척 해두고 싶다. 어쨌든 자신의 생각이 들어간 가사라 그런지 평소와는 느낌이 다르다. 호소력이 더 짙다고 해야하나. 평소보다도 더 지독하다. 숨이 막힐 것만 같다.

무대에서의 첫 기타 연주라 긴장한 것이 무색하게 벌써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노래가 끊기고 기타 솔로만 남았다. 제대로 필을 받기라도 했는지 카라마츠는 무대 중앙으로 치고 들어오며 화려한 기교를 뽐내기 시작했다. 열기가 더욱 오르며 오소마츠는...

"어라?"

오소마츠는 내 쪽으로 물러섰다. 이상하다. 평소라면 카라마츠에게 지지 않겠다는 식으로 중앙에 버티고 서서 애드립을 넣을 녀석인데. 기타 메인이라서 배려해줬다고 하기에는 마츠노 오소마츠는 그럴 인간이 아니다. 어리둥절해하며 마지막 코드를 누르는데 오소마츠가 돌연 확성기를 든 손을 아래로 떨구었다. 거기에 시선이 팔린 사이, 내 뺨에 손이 닿았다. 눈을 한 번 깜박이니 오소마츠, 네 진지한 얼굴이 보였다. 또 한 번 깜박이니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쵸로마츠."

네 속삭임은 내 입 속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졌다. 일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입술에 닿은 감촉이 생경하기만 하다. 뜨겁다. 네 열기가 입술을 통해 내 전신으로 퍼져가는 것만 같다. 기타 피크가 내 발등 위로 떨어졌다. 첫 키스할 땐 종소리가 울린다더니 들리는 건 온통 경악밖에 없다. 혼란으로 뒤덮인 그 공간에서 오로지 너만이 기고만장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은 승자처럼.

"미안, 나 더는 못 기다리겠어."

전혀 미안한 표정이 아니잖아. 


"미쳤어?!"

"에에?! 지금 때렸어요, 이 사람!"

볼을 움켜잡고 올려다보는 모습에 한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도 이번은 그냥 못 넘어가, 오소마츠. 마음을 다잡고 다시 주먹을 쥐었다. 움켜쥔 주먹이 조금 떨렸다.

"무대에서 키스라니 제정신이냐고!"

"그치만 이제 우리 사귀는 거 아니야?"

네 1순위는 나잖아. 붉어진 뺨을 감싸고 있는 주제에 좋다고 웃는 꼴이 웃기면서도 귀엽다. 미치겠다. 이 녀석만 보면 울컥 솟아올랐던 화가 가라앉으려고 해서 곤란하다. 눈을 가리며 고개를 숙이니 뒤늦게 무대에서 내려온 애들이 우리 사이로 끼어든다. 나를 한 번, 오소마츠를 한 번 본 토도마츠는 가볍게 콧 방귀를 뀌었다.

"뭐야, 둘이 이제야 사귀어?"

"오소마츠, 쵸로마츠! 축하한다!"

"세크로스~!"

"커플 죽어..."

"뭐야, 그 반응들은!"

내 말에도 카라마츠를 제외한 애들은 태연하게 악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우리 둘 사이에 그렇게 관심이 많더니 막상 일이 이렇게 되니 반응이 차게 식은 걸 기뻐해야할지 슬퍼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몸은 이미 고민을 마치었는지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이녀석 앞에서 울기는 죽기보다도 싫었는데 걱정하며 안절부절 못하는 오소마츠를 보니 눈물이 흐르고 만다.

"그치만... 그치만...! 우리 부모님 와계셨단 말이야!"

"하??"

"그러니까 이번 라이브 중요하다고 한 건데 진짜 돌아버리겠네!"

삼촌과 만났던 그 날, 나는 겨우 부모님께 밴드를 하고 있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릴 수 있었다. 콩쿠르 나가던 애가 밴드를 한다는 사실에 상당히 놀라시는 것도 잠시 두 분은 환하게 웃으며 나를 응원해주셨다. 그 미소에 힘 입어 혹시 라이브하는 거 보러와주실 수 있는지 물어보고 오늘 라이브를 알려드렸는데... 밴드한다는 거 알고 처음 보는 라이브에서 키스 퍼포먼스라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웅웅 울리는 핸드폰 진동이 부디 내 것이 아니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눈물을 거칠게 닦아준 오소마츠는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뜨겁다. 부모님이 반대하신다고 해도 난 이 손을 놓을 수 있을까? 살짝 힘을 주어 손을 맞잡으니 오소마츠가 화사하게 웃었다. 아아, 아무래도 나는 착한 아들이 될 수 없는 운명인가보다.

"어쩐다... 아무리 카리스마 레전드인 나라도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데."

"내일 쵸로마츠 도시락은 팥밥이려나~"

"난 팥 별로인데..."

"이런 경사스러운 일이니 카라아게도 있겠지?"

"케이크는 없슴까?"

"이것들이 진짜 상황판단도 못 하고..."

이 멍청이들을 보고 있으니 눈물이 뚝 멈춘다. 헛웃음을 흘리며 바이올린을 챙기니 내 기타를 맨 오소마츠가 내 옆에 바짝 붙었다. 상견례는 언제 할까? 마냥 시답지만은 않은 농담을 건내는 오소마츠에게 대답 대신 미소를 건냈다. 좋아한다고, 아직 표현하는 게 낯간지럽지만 더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오소마츠를 위해 힘내야겠지. 지금은 좋아한다는 말보다는 부모님께 어떤 말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토도마츠 말대로 다음날 도시락은 팥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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