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마츠상 2차 창작 백업

[오소쵸로]동경, 선망, 애정 中

2018. 11. 9. 작성 | 공백 미포함 7,642자 | 아이돌au

전편

[오소쵸로]동경, 선망, 애정 上


"미치겠다..."

오랜만에 코디가 준비한 옷이 아닌 편한 후드 차림으로 탁자 위에 널부러졌다. 데뷔 후 첫 쉬는 날이지만 신나기 보다는 지쳐서 움직일 기력도 없다. 습관적으로 틀어놓은 TV에서 시트러스나 프루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움찔거리는 내가 싫다. 살짝 눈동자만 올려 TV를 보면 아니나 다를까 생글생글 웃고 있는 오소마츠 선배 옆에서 열을 내고 있는 내가 보인다. 그 날, 우리의 첫 예능은 말그대로 대박을 쳤다. 프루티의 버프도 있었지만 우리의 케미가 좋다나 어떻다나... 프루티 같은 경우에는 항상 오소마츠 선배가 장난을 걸고, 토도마츠 선배가 아무 일 없었던듯이 무시하는 것이 한 패턴으로 고착화되어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나라는 인물이 끼어들면서 새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놀리는 오소마츠 선배, 발끈하는 나, 신나서 더 놀리는 오소마츠 선배... 그 모습들이 팬들 마음에 든 모양이다. 반응이 좋으니 방송사측에서도, 기획사측에서도 프루티와 시트러스를 함께 밀어주기 시작했다. 같은 프로그램에 자주 나가고, 같이 안 나간다고 해도 프루티 이야기가 꼭 나오고... 덕분에 나만 죽을 맛이다. 아무래도 팬들 사이에 내 이미지는 '프루티의 진정한 성덕'정도로 찍혀있는 것인지 좋아하는 연예인과 같이 촬영해서 좋겠다고들 하지만 전혀... 나도 모르게 하나 하나 반응하게 되고, 목소리를 높이다보니 촬영이 끝난 후에는 기진맥진이 되어버린다. 그럴 때마다 오소마츠 선배가 다가와서 어깨 두드려주는데...

"악! 악!"

"왜 그러지, 쵸로마츠?"

"괜찮아! 쵸로마츠형 가끔 이래!"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카라마츠는 산처럼 쌓인 카라아게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카라마츠가 데뷔 축하 파티하자고 제안했을 때부터 예감하긴 했지만 역시나 카라아게 파티구나.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카라아게의 산은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지만 냄새만큼은 맛있었다.

"쵸로마츠, 좀 더 활짝 웃어라! 이카루스의 날개로 도무지 닿을 수 없었던 태양을 손에 넣은 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줄래?"

"실력 부족하다고 맨날 우울해하던 네가 드디어 데뷔했는데 표정이 왜 그렇냐는데."

"그걸 알아듣는 거야, 이치마츠...?"

"역시, 마이 파트너!"

"죽어."

카라마츠를 발로 뻥 찬 이치마츠는 카라아게 옆에 케이크 상자를 올려놓았다. 그래도 파티라고 케이크 사왔구나. 살짝 열어보니 나름 우리를 신경 쓴 것인지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 위에 레몬과 라임 조각이 올라가 있다. 보기만 해도 새콤한 비주얼에 침이 고이고, 어울리지 않는 섬세함에 살짝 웃음이 터졌다. 하여간 안 그래보여도 정이 많은 녀석이다. 파티 당사자들을 냅두고 치고 박고 있는 두 사람은 무시하고 쥬시마츠와 함께 케이크를 꺼내 초에 불을 붙였다. 한 낮이여도 작은 촛불은 영롱하게 타오른다.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카라마츠와 이치마츠가 박수를 쳤고, 둘이 동시에 입김을 불어 촛불을 껐다. 조촐하지만 소중한 데뷔 축하 파티 시작이다.


"오, 나왔다."

"퍼펙트한 의상이군. 잘 어울린다!"

"와~ 칭찬 받았다!"

"저기 우리 이거 꼭 봐야해?!"

커다란 TV에서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다같이 보고 있자니 부끄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다. 몇날 며칠 매니저 형의 부름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인 탓에 내 무대를 제대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데뷔 무대 때 실수하긴 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그때의 나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비록 스타다운 반짝임은 없지만. 짧은 무대가 끝나자 카라마츠는 크게 박수를 쳤다. 입에 걸려있는 크나큰 미소는 그야말로 뿌듯함 그 자체라 보는 내가 다 민망했다.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니 반대쪽에서 옆구리를 쿡쿡 찔러왔다. 게슴츠레 뜬 눈동자는 카라마츠와 달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어서 그만 흠칫 놀라버렸다.

"우리들은 하수구에 두고 너희들끼리 유명해지니 좋아?"

"이 일대 유명 2인조 밴드한테 그런 얘기 듣고 싶지 않거든?"

아쿠아. 단 2명으로 조직된 밴드. 실제 라이브 때에는 기타와 베이스가 제외된 반주를 깔고 연주를 하지만 2인이라는 독특한 체제와 탄탄한 기초, 그 날 그 날 다른 기타 솔로때문에 팬층은 꽤 확보되어 있다고 한다. 그 반주도 아쿠아 두 명이서 하느냐, 다른 조력자가 있느냐가 팬들 사이의 관심사라고 하던데 설마 최근에 데뷔한 시트러스가 그 반주자라고는 상상도 못 하겠지. 중학교 밴드 동아리에서 처음 만나서 그대로 밴드가 된 게 아쿠아, 아이돌로 전향한 게 우리 시트러스다. 기획사가 새로운 곡을 만들어주는 우리와 달리 아쿠아의 곡들은 대부분 그때 만든 곡의 리메이크들이다. 반주를 들으면 부끄럽기 그지없지만 카라마츠와 이치마츠의 손을 거쳐 새로 태어나는 노래를 듣는 건 제법 즐겁다.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아쿠아 노래에 작게 웃으며 사이다를 머금었다. 톡톡 쏘는 탄산에 입이 다 따끔거린다. 카라마츠는 자신들의 노래를 따라 작게 흥얼거리더니 짐짓 턱을 괴고선 물었다.

"프루티와 같이 자주 나오던데 사이는 좀 어떤가? 많이 친해졌나?"

"응! 오소마츠형도, 토도마츠도 엄청 친절하고 재미있어!"

"쥬시마츠! 선배라고 부르라니까!"

"방송도 아닌데 뭐 어때."

"그래서 쵸로마츠는 어떤가? 오소마츠를 좋아하잖아."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만한 말은 하지 말아줄래?!"

식겁해서 소리를 빽 지르자 카라마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듯이 눈을 깜박였다. 하여간 옛날부터 섬세함이라곤 부족한 리더다. 밖이 아니고 집 안이니 괜찮긴 하지만... 한숨을 푹 내쉬고 컵을 만지작거렸다. 그새 사이다 탄산이 제법 약해졌는지 올라오는 기포가 적다.

"쥬시마츠 말처럼 친절해. 같은 방송 나갔을 때 이끌어주고, 우리도 잘 챙겨줘."

과할 정도로. 뒷말은 차마 말하지 못하고 삼켜버렸다. 그랬다. 방송용인지, 아니면 본래 성격이 그런건지는 몰라도 오소마츠 선배는 겹치는 방송마다 우리를 잘 챙겨주었다. 그때마다 좋아죽는 건 팬들이고, 그냥 죽는 건 나다. 내가 자신의 팬이라는 걸 알아서 그런가. 기분탓일 수도 있겠지만 쥬시마츠보다 유독 나에게 더 살갑게 군다. 옆자리도 냉큼 차지하고 어깨동무도 잘 하고 그 가까운 거리에서 나 보고 웃으면...

"악! 악!"

"또 저러네."

"쵸로마츠형 자주 저래!"

"아까는 가끔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머리 속을 침투해오는 미소를 지워내며 고개를 들었다. 익숙하다 못해 질리는 면면들. 멍청하게 눈만 꿈벅이고 있는 세 사람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마음이 싹 가라앉는다.

"너희들이랑 있으니까 편하고 좋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모두와 있으니 좋다!"

"저거 분명 칭찬으로 한 말 아닐 테니까 우쭐해하지마."

"아하하~"


아무도 없는 대기실에서 기지개를 쭉 폈다. 바쁘게 오전 스케쥴을 끝내고서 조용한 공간에 오니 피곤함과 졸음이 몰려온다. 처음으로 쥬시마츠와 떨어져 혼자 해야하는 스케쥴인데 이러면 안 되는데...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매니저 형이 보낸 문자를 다시 한 번 살폈다. 이번 스케쥴은 한 예능 촬영과 관련하여 스태프 면담. 이미 한 차례 하긴 했지만 방송 내용이 내용이라 촬영 직전에 추가 면담이 필요하다고 했다.

혼자 나가게 된 예능은 리얼 버라이어티, 전혀 다른 두 사람이 같이 살게 된 일상을 고스란히 담는 내용이다. 실제 방송 촬영할 때까지 당사자들도 누구와 어디서 함께 하는지 비밀로 한다는 설정인데 이번에 살짝 알려주려고 부른 걸지도 모르겠다.

"누구랑 같이 지내게 되는 걸까..."

어른스럽고 취향이 잘 맞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출연한 방송들과 다르게 장기간 진행되니까... 시간을 체크해보니 약속한 시간까지 앞으로 3분. 조금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는 찰나 문이 느리게 열렸다.

"아, 안녕하..."

"여! 진짜 쵸로마츠가 있네."

"엥? 오소마츠 선배?"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의 등장에 인사하려고 일으켰던 몸이 엉거주춤하게 멈추었다. 선배니까 그래도 인사는 해야하는데 타이밍을 놓쳐 어정쩡하게 웃고 있는 사이 오소마츠 선배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정말이지. 어색함 분위기 깨는 이 능력은 좀 나눠갖고 싶다.

"오소마츠 선배가 여긴 웬일이세요?"

"쵸로마츠 너도 이번에 동거 예능 나간다면서? 나도 거기 출연하거든."

"네? 정말요???"

"응응, 진짜로. 그런데 아까 스텝한테 연락이 왔는데 그쪽 실수로 면담 장소가 바뀌었다고, 너도 마침 있을 테니 같이 와달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요...?"

"응. 일단 나가자."

나한테는 연락 안 왔는데... 알림 하나 없는 휴대폰을 보다가 오소마츠 선배의 보챔에 얼른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방송 일이 워낙 바쁘니 이런 헤프닝도 있겠구나 싶었다. 장소가 꽤 먼 곳인지 오소마츠 선배는 날 데리고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갔다. 매니저나 스탭분이 데리고 가주시는 건가 하는 찰나 오소마츠 선배가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자동차 키를 꺼냈다. 삑 소리가 조용한 주차장에 울려퍼졌다. 붉은 등이 빛나는 자동차를 한 번, 오소마츠 선배를 한 번 바라보니 오소마츠 선배는 입꼬리를 말아올리더니 조수석 문을 열었다.

"타시죠, 후배님?"


차창 너머로 풍경이 빠르게 지나간다. 차와 빌딩이 등 뒤로 사라지는 것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창문에 비친 오소마츠 선배의 옆 얼굴을 훔쳐보았다. 평소 방송에선 볼 수 없었던 후드티 차림의 선배는 핸들에 가볍게 손을 올려놓은 채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칠 걱정이 없어서 욕심을 내어 꼼꼼히 그 모습을 살펴보았다. 설마 진짜로 선배가 운전하는 건 줄은 몰랐다. 매니저분은 시트러스나 프루티 모두 다른 멤버의 스케쥴에 가있고, 스탭이 데리러 가겠다고 했지만 오소마츠 선배가 알아서 가겠다고 해서 오지 않았다고 한다. 나랑 둘이 가고 싶었던 걸까. 주제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콩콩 뛴다. 사실은 항상 바쁜 분이니까 잠시라도 편하게 있고 싶었던 것뿐이겠지. 그래도 그 잠시의 시간에 내가 함께 있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아 이건 이거대로 기쁘다. 신호에 걸려 차가 잠시 멈추자 오소마츠 선배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순 시선이 마주친 듯한 착각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가 너무 조용하게 있어서 그런가 싶어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그... 오소마츠 선배는 촬영 파트너 누구인지 알아요?"

"응? 그럼~ 난 벌써 만났는걸."

"진짜요? 저는 아직 안 알려주던데... 어떤 사람이에요?"

"음..."

아차. 무심결에 물었지만 나한테도 알려주면 안 되는 거 아닌가? 황급히 입을 막았지만 그렇다고 이미 내뱉어진 말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선배 눈치를 살피니 오소마츠 선배는 그저 한 번 씩 웃을 뿐이었다.

"일단 남자 아이돌이고."

"아, 네!"

"나보단 후배야. 데뷔한 지 오래되진 않았어."

"와, 저랑 똑같네요?"

"그리고 요즘 촬영 자주 같이 했던 사람이라서 이번 촬영도 기대돼."

"그렇구나..."

누구지?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남자 아이돌이라면 우리 시트러스를 제외하면 2팀정도 있다. 그 중 프루티와 같이 촬영을 해본 건 F6뿐. 그치만 기껏해야 2번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걸 자주라고 할 수 있나...? 어쨌든 F6라고 한다면 6명 중에 누구지? 저스티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나려는 찰나 돌연 오소마츠 선배가 웃음을 터트렸다. 소리를 숨길 생각도 없는지 핸들 위에 엎어진 채 끅끅거리며 웃던 선배는 숨을 가다듬고선 나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웃은건지 눈가엔 눈물까지 맺혀있다.

"이쯤되면 눈치 챌 만 하지 않아?"

"네?"

"내 파트너 너라고, 너. 쵸로마츠."

"...네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질러버리자 오소마츠 선배는 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웃느라 바빠 말을 하지 못하는 오소마츠 선배는 한 지점을 가리켰다. 조수석 차창 아래에 카메라 불빛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당했다.


"몰래 카메라한다는 말 없었잖아요!"

"그걸 말하면 몰래 카메라가 아니지. 그보다 너 반응 진짜 웃겼어!"

방송 나오면 너 표정 꼭 봐봐. 알겠지? 오소마츠 선배는 소리내어 웃으며 내 등을 팡팡 두드렸다. 주변에선 스태프들까지 숨을 죽인 채 키득거리고 있다. 등은 아프고 짜증나는데 방송이라서 입술을 악 물며 할 말을 참았다. 아직 방송 모르는 신인이라고 이렇게 뒷통수를 치시다니. 첫 리얼 버라이어티 신고식을 이렇게 하는 구나. 상황을 살피던 스탭 한 분이 다가오셔서 큐시트와 함께 집 열쇠를 건내주었다. 실내 촬영 준비가 끝나면 함께 지내게 될 집에 들어가는 것부터 촬영이 시작할 거라고 했다. 촬영을 위해 따로 준비한 것인지 작은 2층 주택 하나가 우리 앞에 서있었다. 은회색빛 열쇠가 햇빛을 받고 빛난다. 열쇠가 손 안에 있으니 다른 곳에서 지낸다는 게 실감이 난다. 방송 기간 내내 여기서 지내는 건 아니지만 쥬시마츠 혼자 괜찮을까. 그리고 하필이면 오소마츠 선배와 함께라니. 복잡미묘한 감정을 누르며 오소마츠 선배를 쳐다보니 오소마츠 선배는 무슨 문제 있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는 속 편해서 좋겠다. 곧 촬영 시작하겠다는 스탭분의 말이 떨어지고, 오소마츠 선배는 내 쪽으로 팔을 내밀었다. 마치 신부를 맞이하러 온 신랑처럼. 잡지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서있자 오소마츠 선배는 얼른 잡으라는 것처럼 팔을 더 쭉 내밀고 한 번 윙크했다.

"그럼 갈까, 허니?"

"누가 허니예요, 나 참. 그런 말은 카메라 돌 때에만 해도 충분하다구요."

"어라, 그럼 촬영 중에는 허니라고 해도 괜찮음?"

"아니요."

"이런, 단호하네~"

오소마츠 선배를 두고 먼저 건물 안으로 걸어갔다.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에 가슴을 지그시 눌러야만 했다.


슬레이트가 경쾌하게 쳐지고 모든 카메라가 우리 두 사람을 비춘다. 이제 슬슬 익숙해질 만도 했건만 아직도 이 소리를 들으면 움찔 몸이 굳는다. 나와 달리 오소마츠 선배는 편안하게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카메라가 돌든 안 돌든 똑같은 모습에 긴장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기운이 빠진다. 길게 지체하지 않고 바로 건물로 들어가기로 했다. 자그마한 마당을 지나 스탭분이 미리 주셨던 열쇠를 문고리에 꽂아넣자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처음 우리를 반긴 것은 새하얀 쇼파였다. 일부러 노린 건지 하얀 쇼파에는 빨간색과 초록색 쿠션이 하나씩 놓여져있고, 줄무늬 러그 위에는 작은 나무탁자가 있었다. 그리고 쇼파 반대편에는 거대한 벽 TV. 우리 집에 있는 것보다 훨씬 커서 순간 소리내어 감탄할 뻔 했다. 깔끔한 겉모습과 마찬가지로 내부도 깨끗하기만 하다. 우리가 첫 입주자인가? 마치 새하얀 눈밭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찍는 기분이다. 조금 신이 나서 집 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딱 둘이 쓰기에 적당한 주방과 식탁. 냉장고에는 이미 여러 식재료와 먹을 것들이 채워져 있었다. 욕실은 하나밖에 없어서 그런지 제법 넓고 깨끗해보였다. 아무래도 1층은 기본 생활 공간, 2층은 개인 공간으로 구별지은 모양이었다. 2층 한 켠에 작업실까지 마련되어 있었으니까. 벽에 쭉 붙은 포스터와 작은 책장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프루티와 시트러스의 모든 앨범을 괜시리 두근두근거렸다. 어디를 봐도 모든 인테리어 하나 하나에서 스탭분들이 신경을 썼다는 것이 느껴졌다. 대단하다. 바로 곁에 VJ분이 계시다는 것도 잊고 솔직하게 감탄을 흘려놓았다.

"쵸로마츠, 쵸로마츠 이리 와봐!"

"왜요?"

프루티 앨범을 서둘러 내려놓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2층 복도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을 밟으며 지나가자 오소마츠 선배는 여기 좀 보라는듯 한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급하게 부른 것치고는 방 안은 평범한 침실이었다. 다만 여긴 침실이라고 대놓고 외치고 있는 것처럼 거대한 침대가 방 가운데에 있는 게 독특했다. 침대 바로 옆에는 큰 창문이 있어서 지금은 커텐을 쳐두긴 했지만 아침이면 햇빛이 바로 쏟아져 내릴 것도 같았다. 아예 방 안에 들어가 쭉 살펴보기도 했지만 그냥 넓고 좋은 침실이라는 게 내 솔직한 평이었다. 대체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오소마츠 선배를 바라보자 오소마츠 선배는 헛웃음을 뱉었다. 뭐야, 뭐가 문제인데. 고개를 갸웃거리자 오소마츠 선배는 답지 않게 뒷목을 긁적거리더니 겨우 입을 뗐다.

"침실, 여기 하나밖에 없어."

"뭐라구요?!"

노렸지! 노린 거네! 아주 단단히 노렸어! 새 시즌 되고 작가 바뀌었다더니 컨셉도 동거에서 신혼으로 바뀐 거 아냐?! 목 끝까지 치고 올라오는 츳코미를 한숨과 함께 삼켜 내렸다. 차라리 오소마츠 선배라도 뻔뻔스럽게 행동하면 좋을텐데 천하의 오소마츠 선배도 이건 썩 당황스러운 눈치다. 내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며 코 밑만 문지르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붉어진 얼굴을 가리려 그냥 어이없는 척 이마를 짚었다. 실제로 여기서 쭉 생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침실이 있다는 건 오소마츠 선배랑 한 침대에 자는 모습을 찍긴 할 거라는 얘기겠지. 큰일났다. 상상만으로도 이렇게 열기가 오르는데 실제로 어떻게 촬영할 지 막막하다. 그래도 난 아이돌이다. 연예인, 프로라고. 침착하자, 쵸로마츠. 진정... 진정...

"엇, 쵸로마츠 이거 봐봐."

"또 뭐 있어요?!"

"진정하라구. 봐봐, 이게 첫 미션인가 본데?"

우리가 마지막에 침실에 오게 될 걸 예상이라도 했는지 베개 옆에 편지 봉투가 하나 있었다. 오소마츠 선배와 시선을 한 번 교환하고 나란히 침대에 앉아 편지 봉투를 열었다. 이 와중에 침대는 참 푹신했다. 내용물은 작은 엽서 한 장. 각종 꽃그림으로 장식된 엽서의 한 가운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인쇄되어 있었다.

"첫 번째 미션. 서로의 애칭을 정하시오..."

작가 누구야. 이거 아무리 봐도 신혼 프로그램용이잖아. 바다 건너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런 거 봤다고. 숨기지 않고 표정을 와작 구기니 오소마츠 선배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까는 나 못지 않게 어색해하더니 그새 풀린걸까. 역시 프로.

"애칭이라... 나 마침 쵸로마츠한테 듣고 싶은 호칭 있었는데!"

"달링은 싫어요."

"단칼같네! 애초에 그거 아니거든! 아니면 쵸로마츠 내심 내가 허니~하고 불러주길 바란거야?"

"..."

"...내가 잘못했어. 표정 풀어."

뭐, 허니도 나쁘진 않은데 말이지. 쓸데없는 한 마디를 덧붙이며 오소마츠 선배가 내 손 안에 있던 엽서를 가져갔다. 

"나 '형'이라고 불러줘! 그리고 존댓말 말고 반말 쓰기!"

"네?"

"반말 쓰라니까! 애초에 나한테 꼬박 꼬박 선배라고 하면서 존댓말 쓰는 거 너밖에 없거든? 쥬시마츠도 그냥 형하면서 반말하는데."

"그치만..."

"딱딱하게 그러지마~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우리 사이가 뭔데요.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갈 뻔 했다. 항상 그랬다. 카메라가 돌든 안 돌든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다. 원래 성격이 이래서 그냥 하는 말이라는 것도 알고, 팬들이 좋아하니까 더 그런다는 것도 안다. 

"그럼... 오소마츠형."

"응. 나 불렀어, 쵸로쨩?"

달콤한 목소리와 함께 붉은 눈이 곱게 접힌다. 나는 이런 미소를 언젠가 본 적이 있다. 그래, 맨 처음 오소마츠형을 보았을 때의 그 미소다. 그때의 오소마츠형은 객석에 있는 나와 멀리 떨어져 화려한 조명빛이 가득한 무대 위에 서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바로 내 앞에 있다. 커텐이 쳐져서 아른아른한 빛만이 존재하는 이곳에, 모든 이의 시선을 사로잡던 그가 오로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아. 무심결에 소리가 흘렀다. 심장소리가 그때처럼 내 귓 속을 가득 채운다. 그때처럼? 아니야. 이건... 이어지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봐선 안 될 것을 봐버린 기분이다.

"뭐예요, 그 쵸로쨩은."

"그치만 난 할 만한 별다른 애칭이 없었는걸? 이거 싫으면 허니로 할까?"

"아니."

"그럼 쵸로시코스키?"

"공중파에서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거 잘라주세요!"

다급하게 카메라를 가려버리자 감독쪽에서 무슨 사인이 들어왔는지 촬영은 일단 여기서 멈추었다. 아마 단순히 어느 정도 촬영 분량이 나왔으니 쉬어가잔 의미였겠지만 일부러 오소마츠형때문이라며 톡 쏘게 말하고는 1층으로 내려왔다. 15분 휴식하겠다는 스탭분의 말을 뒤로 하고 작업실에 틀여박혔다. 사람이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집 냄새가 났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 하게 문을 기대어 서고 있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 앉았다. 심장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그때처럼이라고? 이게? 뭔가가 자꾸만 울컥울컥 올라와 눈물로 변해 쏟아질 것만 같다 다르다. 그때와는 다르다. 같다고 하기에는 그 미소를 마주한 것만으로도 너무나도 괴롭고 고통스럽다. 이런 기분이 그때와 같은 순수한 동경과 선망일 리가 없다. 이건... 이건 마치...

"왜... 왜 하필 지금..."

스스로 느끼기에도 어그러진 목소리에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방에 붙은 프루티의 포스터가 날 내려다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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