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마츠상 2차 창작 백업

[오소쵸로]동경, 선망, 애정 下

2018. 12. 27. 작성 | 공백 미포함 7,727자 | 아이돌au

전편

[오소쵸로]동경, 선망, 애정 上

[오소쵸로]동경, 선망, 애정 中


얇게 눈꺼풀을 덮는 빛에 느리게 눈을 떴다. 낯선 천장에 잠시 여기가 어딘가 혼란스러운 사이 카메라의 빨간 불빛과 눈이 마주쳤다. 맞다. 촬영 일정 때문에 어제는 여기서 잤지. 그렇다면 내 뒤에 있는 건... 갑자기 등에 닿는 온기가 낯설게 느껴진다. 뻣뻣한 고개를 겨우 돌려 뒤를 보면 오소마츠형이 입을 살짝 벌린 채 자고 있다. 많이 피곤한 것인지 굳게 닫힌 눈꺼풀은 올라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깨워도 안 일어나겠지. 잠든 얼굴을 조금 더 훔쳐보고 싶은 마음과 카메라가 있다는 이성이 서로 부딪힌다. 결국 언제나 그랬듯이 마음을 지그시 누르고 허리에 감긴 팔을 풀러냈다. 깨지 않도록 이불에서 몸만 살짝 빠져나가자 서늘한 아침 공기가 온 몸을 감싼다. 이 찬기에 내 마음도 식으면 좋으련만 바람과 달리 오늘도 심장은 열심히 두근거린다. 이것도 앞으로 얼마 남았더라. 시간을 확인하는 척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등지고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D-14. 이제 곧 이 프로그램의 이번 시즌이 끝난다. 다음 주는 시즌 마무리로 다른 출연진들과 스튜디오 촬영이니 실질적으로 오소마츠형과 이렇게 있을 시간은 이번 주뿐. 3일. 3일에 걸친 촬영이 끝나면 오소마츠형과의 생활도 끝이다. 드디어 끝이 나는 거다.


"좋은 아침..."

"아침은 무슨. 벌써 점심이라고, 오소마츠형."

"어제까지 콘서트였으니까 하루쯤은 늦잠 좀 잘 수 있잖~"

"오소마츠형한테는 하루쯤이 아니라 쉬는 날마다 그러잖아. 그보다 가까워!"

"너한테서 맛있는 냄새 나... 쵸로마츠, 나 배고파~"

"알았어! 알았으니까 떨어져!"

얼굴을 잡고 밀어내자 오소마츠형은 잘생긴 얼굴 찌그러진다며 툴툴거렸다. 세수도 안 해서 수염이 까슬까슬한 얼굴을 들이대고선 무슨. 리얼이라지만 그래도 방송인데 너무 편하게 있는 거 아닌가 싶다. 츄리닝을 입고 배를 북북 긁으며 하품하는 꼴이 백수 그 자체다. 아이돌이 안 되었으면 진짜 백수가 되지 않았을까. 저런 인간을 프로니 뭐니 떠받들었던 내가 미쳤지. 도대체 나는 저런 인간의 어디가 좋은 걸까. 한숨을 삼키고 혼자 만들어 먹고 남은 볶음밥을 데워서 가져다주었다. 고맙다며 씩 웃길래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백수 같은 놈의 미소를 보고 심장이 뛰다니. 진짜 내가 제정신이 아닌 게 틀림없다.

"나 스케줄 있어서 슬슬 나가야 하니까 설거지랑 청소해놔. 알겠지?"

"뭐어라고~? 누가 주말에 일하지~? 악!"

"지금 여기 있는 것도 일하는 거거든?!"

"아! 그랬다!"

"바보야?! 이런 늦겠다. 그럼 나갈 테니까 설거지랑 청소량 빨래 잘 부탁해!"

"해야 할 게 하나 더 늘지 않았음? 아, 쵸로마츠 잠깐만!"

오소마츠형은 빨리 나가려는 날 잡아 세웠다. 머리를 정리해주려는 듯 몇 번 만지더니 아예 양손으로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말이 쓰다듬는 거지 그냥 마구잡이로 헝클어트리는 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나 일 가야 한다고 말했는데! 기겁하며 떨어지려고 하자 크게 웃더니 다시 머리를 매만져주었다. 다소 거칠고 어설픈 손길, 그대로 시선을 맞춘 채 오소마츠형은 씩 웃었다.

"잘 다녀와."

"...다녀올게."

그럼 늦었으니까. 그런 변명을 덧붙이며 나는 황급히 달려나갔다. VJ분이 다급하게 내 뒤에 따라붙었다. 이렇게 빨리 달리면 VJ분이 힘들고, 나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아도 속도를 줄일 수 없었다. 거울은 보지 않았지만 방송에 내보낼 만한 얼굴이란 걸 알 수 있어서. 싫다. 공과 사를 구별할 수 없는 내가. 화끈거리는 얼굴을 가리며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하아아..."

"형아, 우리 곧 나가야한당께요."

"알아, 알지만... 조금만..."

쥬시마츠의 말에도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침부터 오소마츠형하고 만난 날이면 기분이 싱숭생숭해서 기운이 나질 않는다. 예전에는 프루티 보겠다고 없는 기운도 내서 돌아다녔는데, 막상 만나고 친해지게 된 지금은 오히려 기운을 잃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크게 한숨을 쉬면 속이라도 풀릴까 싶었지만 갑갑한 속은 쉬이 가라앉질 않는다. 쥬시마츠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매니저 형이 사 온 샌드위치를 한입에 넣어버리곤 내 옆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설마 들고 가려는 건가. 느지막이 몸을 일으키니 쥬시마츠는 내 예상과 달리 머리를 토닥거려주었다. 왜 등도 아니고 머리? 어리둥절해 하는 날 보고 쥬시마츠는 해맑게 웃었다.

"있지, 쵸로마츠형. 나 좋아해?"

뜬금없이 무슨 소리래. 대답 안 하고 눈만 멀뚱히 깜박이니 쥬시마츠는 아예 내 머리 위에 자기 머리를 올리곤 대답을 재촉했다. 하여간 어렸을 때부터 내 머리 위에 올라가는 거 좋아한다니까. 피식 웃으며 쥬시마츠를 따라 쥬시마츠 머리를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그야 당연히 좋아하지."

"나도 쵸로마츠형 좋아해!"

머리 위에서 기운찬 목소리가 울린다. 어느새 싱숭생숭한 기분은 날아가고 없었다. 내 머리에 제 뺨을 비비적거리던 쥬시마츠는 슬슬 시간이 되어서인지 슬그머니 내려왔다. 거울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기껏 정리한 머리가 엉망이 되어있었다. 거울과 시계를 흘끗흘끗 쳐다보며 서둘러 머리를 다시 정리하는데 내 뒤에 있는 쥬시마츠가 거울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만 하면 돼, 쵸로마츠형."

"뭐?"

"방금 나한테 한 것처럼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 거야, 형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알겠지? 뒤돌아보자 쥬시마츠는 소매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미처 가려지지 못한 입가는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동생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슴다~!"

주변에 꾸벅꾸벅 인사를 하며 쥬시마츠와 함께 스태프 사이를 빠져나갔다. 이걸로 시트러스의 공식 일정은 끝. 쥬시마츠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지만 나는 이제부터 또다시 촬영 시작이다. 7시 30분까지는 촬영장에 도착해달라고 했으니 바로 가지 않으면 아슬아슬할 것 같다. 쥬시마츠랑 저녁이라도 먹고 헤어지고 싶었는데... 다른 스케줄이 있는데도 촬영, 그리고 촬영장인 집엔 오소마츠형만 있는 거니까 이번 촬영에서는 오소마츠형이 무슨 서프라이즈라도 하려는 걸까? 이번이 마지막 촬영이기도 하고, 시간도 딱 저녁때니까 요리라도 한 거 아냐? 이제 이쯤 되니 스태프분이 상세히 알려주시지 않아도 뭘 할지 조금 예상이 간다. 이젠 완전 예능 프로네, 쵸로마츠! 오소마츠형이 집안을 어떻게 꾸몄든지 간에 나는 프로니까 열심히 놀란 척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일단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매니저 형이 대기하고 있다는 뒷문으로 가서...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대기실 문을 열었다.

"여! 수고했어, 우리 후배님들!"

"엑시던트!!!"

"어? 오소마츠형이다!"

뒤로 넘어갈 뻔한 나를 받아준 쥬시마츠는 오소마츠형을 보자마자 오랜만이라며 쪼르르 달려갔다. 방긋 웃으며 이야기하는 쥬시마츠와 그런 쥬시마츠의 머리를 쓰다듬는 오소마츠형의 모습은 완전 형제나 다름없다. 누가 친형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왠지 가슴이 울렁거려서 평소 쥬시마츠가 하는 것처럼 쥬시마츠의 머리를 껴안았다. 짐짓 오소마츠형을 째려보니 잠시 멀뚱멀뚱 나를 바라보다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뭐야. 지금 질투하는 거야? 기왕이면 내 쪽을 더 질투해주지~"

"헤헤~ 내가 이겨버려서 미안해, 오소마츠형!"

"크윽, 졌다! 오히려 내가 쥬시마츠한테 질투해버렸어!"

"뭐라는 거야! 그보다 집안일 하랬는데 안 하고 왜 여기 있는 거야, 오소마츠형."

"내 쵸로쨩 보고 싶어서?"

"뭐래..."

짐짓 질색하는 척하며 쥬시마츠를 꼭 껴안으니 쥬시마츠가 내 머리를 톡톡 두드린다. 아까와 똑같은 손길에 쥬시마츠의 말이 떠오른다.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는 그 말. 나를 초롱초롱하게 올려다보는 눈빛은 그 말을 다시 한번 전하고 있는 것만 같다. 솔직하게? 헛웃음으로 답하며 쥬시마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차피 전부 방송인걸.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다는 듯이 예전으로 돌아갈 허상일 뿐인걸.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시간이 끝났을 때 너무 상처받지 않도록 이게 가짜라는 걸 잊지 않게 정신을 붙잡는 것밖에 없다. 쥬시마츠에게서 살짝 떨어져 오소마츠형을 보았다. 저 붉은 눈동자에 비치고 있는 내가 부디 태연해 보이길 바란다.

"그래서? 진짜 뭐하러 온 건데?"

"너무하네... 오늘 멋진 무대를 보여준 우리 후배들이랑 같이 밥이나 먹을까 하고!"

"와~ 신난다! 밥이다!"

"형이 뭐 만들어 온 거야?"

"아니, 이 프로그램 제작비로 사줄 건데. 내 요리 먹었다간 너희 죽어."

"너무 솔직하잖아!"

평소처럼 티격태격 싸우는 사이, 보다 못했는지 슬슬 이동해야 한다는 스태프분의 목소리가 떨어졌다. 아차. 바로 대답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황급히 탈의실로 들어가자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울린다. 또 뭐 전달 사항이 있나? 혹시 옷 맞춰 입고 촬영하나? 옷을 벗다 말고 어정쩡하게 멈춰 대답하니 작게 웃음소리가 들린다.

"오늘 무대 진짜 좋았어, 쵸로마츠."

많이 늘었더라.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는 누가 들을까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홀로 남겨진 나는 문에 기댄 채 그대로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진짜 이런 것 좀 안 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카메라도 안 도는데. 아무리 정신을 다잡아도, 흔들리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해도 단 한 마디에 무너져버리고 만다. 나도 안다. 당신이 나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하고 다정히 대해주려고 하는 것 정도는. 그치만 나는 그마저도 가짜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나와 상대의 마음이 같은 무게가 아니라는 걸 아는 순간만큼 비참한 순간이 없으니까. 아예 기대조차 품지 못하게 해줘. 불가능한 소망을 또 혼자 읊조린다.


"잘 먹었슴다~!"

"잘 먹었다니 다행이네! 그리고 내 돈 쓴 거 아니어서 진짜 다행이다!"

"내가 말했지. 쥬시마츠 잘 먹는다고."

"형제인데 쵸로마츠는 왜 이렇게 조금 먹는 거야? 그러니까 말랐지."

"아, 하지 마!"

내 허리를 콕콕 찌르던 오소마츠형은 아예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가늘어! 귀 바로 옆에서 터진 큰 목소리에 놀라 반사적으로 주먹이 날아갔다. 순간 아차 싶었지만 바로 일어서는 오소마츠형을 보며 표정이나 갈무리했다. 지금도 카메라는 돌고 있다.

"아이돌이니까 관리하는 거뿐이라고!"

"아이돌 얼굴 막 쳐도 됨?! 그리고 쥬시마츠는 그렇게 먹고서도 저 체형이잖아? 둘이 형제니까 체질 비슷한 거 아냐?"

"쟤는 맨날 야구하니까."

"오소마츠 형아도 할래~?"

"음~ 형아는 이제부터 쵸로쨩이랑 얘기할 게 있어서 패스~"

"얘기?"

"음~"

오소마츠형은 답지 않게 뜸을 들이며 나와 쥬시마츠, 그리고 VJ를 한 번씩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감고 뒷머리를 긁적이고선 내 손을 살짝 잡아 왔다. 오랜 기간의 촬영으로 손잡는 것쯤은 사사로운 스킨쉽이 되었지만 뭔가 평소와 달랐다. 힘있게 꽉 잡는 평소와 달리 어딘가 기운이 없는... 내 쪽에서 손을 꼭 잡아보자 오소마츠형은 한 번 피식 웃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마지막 촬영이잖아. 마지막으로 뭐 하고 싶은지 정하라고 하더라구."

"마지막..."

마지막 촬영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작가님에게 전해 들은 것과 오소마츠형에게 직접 들은 것은 무게가 확연히 달랐다. 그래, 마지막이야. 바라고 바랐던 일이었을 텐데 쓸쓸해 보이는 오소마츠형의 얼굴을 보니 괜히 나까지 쓸쓸해졌다. 이 사람 알고 보면 외로움 잘 타니까, 그러니까 누군가와 함께 지내는 생활이 끝나는 게 아쉬운 것뿐이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 동안 쥬시마츠는 먼저 작별인사를 하고 매니저 형이 미리 세워놓은 차를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남겨진 둘이 시선 교환을 할 즈음, 쥬시마츠는 돌연 나에게 달려와 내 손을 꼭 잡았다. 반짝거렸던 눈빛은 아까 대기실에서 본 눈빛과 어딘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쵸로마츠형, 홈런 쳐! 알겠지?"

"쥬시마츠, 이건 야구 아니니까."

"형이라면 할 수 있다 안 혀요~"

내 손을 위아래로 크게 붕붕 흔들고 쥬시마츠는 차를 향해 몸을 날렸다. 내 동생이지만 정말 어떻게 되먹은 신체 능력일까. 멍하니 눈만 깜박이니 오소마츠형이 내 손을 잡고 살짝 잡아당겼다.

"정말이지. 언제까지 질투하게 만들 셈이야?"

"내 친동생한테 무슨 질투를 하는 거야."

"지금은 나와의 시간이잖아. 나한테 집중해줘."

"...또 그런 소리나 하고."

프로 아니랄까 봐 이런 부끄러운 소리를 눈 한 번 깜박 안 하고 그냥 뱉는다니까. 어떤 의미론 카라마츠보다 굉장하다. 아무튼 이제야 자신을 본다는 사실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오소마츠형은 싱긋 웃었다.

"아무튼 아까 이야기를 이어서 하자면 마지막인데 하고 싶은 거 있어?"

"딱히 생각해둔 건 없는데."

"진짜?! 쵸로쨩 너무 무심한 거 아냐? 나 상처받는다?"

"시끄러워! 그러는 형은 생각해둔 거라도 있어?"

"당연히 있지!"

기고만장하게 말을 꺼낸 오소마츠형은 자신의 후드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이 한 장. 알록달록한 것이 역 앞에서 나눠줄 법한 전단지로 보였다. 뭐지, 이 프로그램 새로운 협찬이라도 받았나. 그런 생각 따위를 할 때 오소마츠형은 구겨진 종이를 서둘러서 폈다. 아타미. 제일 위에 크게 적힌 글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아래에 펼쳐진 바다와 온천 사진, 작은 글씨로 빼곡히 적혀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관광 안내서의 일부였다. 오소마츠형은 그걸 보란 듯이 내 눈앞에 흔들며 말했다.

"여행 가자."


기차 문이 열리고 찬 겨울바람이 물밀 듯이 들어온다. 어딘지 짭조름한 냄새에 정말 다른 곳에 왔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싱숭생숭한 기분을 끌어안고 캐리어를 끌어내리는 사이, 오소마츠형은 벌써 저만치 달려나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매고 있는 건 배낭 가방 하나. 방송에서 어느 정도 제공해준다지만 정말 저 정도 짐으로 여행이 되는 걸까. 보나 마나 나한테 빌릴 게 뻔해서 슬쩍 한숨을 쉬었다. 여행이라니. 어쩐지 마지막 촬영 날짜를 3일이나 뺀 게 수상하다 싶었다. 라이브 직후 밥만 먹고 바로 아타미행이라니. 제대로 안 알려주고선 스케줄 너무 빡빡하잖아. 괜히 VJ를 흘겨봤지만 그렇다고 일정이 취소될 리는 만무했다. 기차 안에서 자두긴 했지만, 아니 자다 깨서 오히려 더 피곤해진 몸뚱이를 끌고 오소마츠형에게 다가갔다. 조용한 역 내에 삑 하는 개찰구 소리만 유쾌하게 울렸다.

"쵸로쨩 얼마나 잔 거야. 머리 다 눌렸다구~"

"내가 알아서 정리할 테니까 만지지 마!"

또 헝클어트릴까 봐 잽싸게 몸을 빼자 오소마츠형은 키득키득 웃으며 내 캐리어를 잡아끌었다. 말릴 새도 없이 또 혼자 멀리 뛰어가 놓곤 빨리 오라며 재촉하는 오소마츠형을 보고 한숨을 삼켰다. 오소마츠형 분명 데뷔하기 전에 여자 여럿 울렸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심장이 뻐근했다. 그래도 이런 일도 이제 곧...

"쵸로마츠, 뭐해? 빨리 와!"

"가고 있어!"

가라앉으려는 생각을 몰아내며 역 밖으로 뛰어나갔다. 원래는 사람이 북적거렸을 상점가는 시간이 시간이라 그런지 제법 한산했다. 주변을 둘러보다 문득 오소마츠형이 안 보인다 싶을 때 바로 옆에서 경적이 터져 나왔다. 놀라서 귀를 막고 몸을 흠칫 떠니 차 창문이 내려가고 거기서 오소마츠형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날 검지로 가리키며 깔깔대면서 웃길래 아주 정중하게 꺾어버렸다. 이 인간 분명 매시간 날 어떻게 놀려먹을지 고민하는 게 틀림없다.

"악! 아파! 쵸로마츠 내가 잘못했어...!"

"그보다 웬 차야? 렌탈?"

"엉! 이거 타고 숙소까지 이동할 거니까 빨리 타! 우리 숙소 무려 온천까지 있는 료칸이래 료칸!"

"료칸 말이지. 돈 좀 썼겠네."

설렁설렁 대답하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안전띠를 매고 자리에 가만히 앉으니 오소마츠형이 백미러로 나를 보고한 번 씩 웃어 보였다.

"오늘은 그냥 거기서 자고 내일은 실컷 관광하다가 모레 점심쯤에 기차 타고 올라가면 돼. 갈 만한 곳 좀 봐두긴 했는데 특별히 가고 싶은데 있음?"

"어...?"

"뭐야, 표정이 왜 그래?"

"그 오소마츠형이 가이드 하고 있다고? 맨날 나한테 다 떠넘기던 오소마츠형이?"

"진짜 너무하네! 애초에 이 여행 내가 기획한 거거든!"

"스태프분들이 아니라?"

"나 그렇게 신용 없어?!"

갑자기 백미러가 아니라 내 쪽으로 아예 고개를 돌리길래 나도 덩달아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창 너머 가로등 불빛이 빠르게 내 뒤로 사라져 가고, 그 빛들 위로 흐릿하게 오소마츠형의 모습이 보인다. 신호에 멈춰 차가 멈추자 오소마츠형은 내 쪽으로 손을 뻗다가 도로 거두었다. 어째서. 내가 머리 만지는 거 싫어해서?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눈을 감았다.

"내가 책임지고 잘 에스코트 해줄 테니까 믿고 따라와 달라고."

"마지막은 마지막인가 보네. 쓰레기인 형이 이런 것까지 하고."

그래, 마지막이니까. 내 독백과 오소마츠형의 목소리가 겹쳐졌다. 제대로 확인사살을 받으니 이정도면 적당히 자를 분량이 나왔겠지. 그리 생각하며 나는 입을 꾹 다무는 것을 택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오소마츠형도 구태여 말을 걸지 않았다. 둘이 있을 때 이렇게 조용했던 적이 있었던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자 입김에 차창이 하얗게 물들었다.


비성수기라 그런지, 촬영으로 사용해야 해서 그런지 료칸은 사람이 적어 한적했다. 방으로 안내받고 스태프프분들은 카메라를 설치하신 후 편히 쉬라며 나가셨다. 카메라가 있는데 잘도 편히 쉴 수 있겠네요. 방구석에서 깜박거리는 붉은 불빛이 창밖 달빛과 너무나도 대조되어 보여 헛웃음을 터트렸다. 오늘은 이만 잘까. 라이브에, 갑작스러운 아타미행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겹친 탓인지 피로가 몰려왔다. 이틀간 촬영에 시달릴 걸 생각하면 푹 쉬어둬야...

"하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는다.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 걸까. 이젠 정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 멍하니 보름달을 바라보다가 발을 끌며 방 밖으로 나갔다. 어찌 됐든 카메라 앞에 있고 싶지 않았다. 긴 복도는 그 길이가 무색할 정도로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고급스러운 료칸이라 나무 바닥을 걸어도 아무 소리가 안 나 제법 으슥했다. 스태프분들은 다른 숙소에 묵으신다고 했지. 카메라도, 스태프도 없다고 생각하니 그제야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정처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걷다가 한 곳에서 멈춰 섰다. 담배 냄새. 료칸과 어울리지 않는 냄새에 나도 모르게 테라스의 문을 열었다. 훅 끼쳐오는 담배 냄새와 함께 오소마츠형이 그곳에 있었다. 은은한 달빛이 놀란 얼굴을 비추어 주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오소마츠형은 멋쩍게 웃으며 피우던 담배를 비벼 껐다. 아직 길게 남아있던 담배가 재떨이에 무참히 짓이겨졌다.

"담배 끊은 거 아니었어?"

"아하하... 그게~ 오늘은 좀 땡기더라구~"

"하여간... 카메라에 안 잡히게 조심해."

"괜찮아. 우리 방 말고는 카메라 설치 안 했다고 했어. 그보다 걱정하는 게 그거?"

오소마츠형이 제 옆을 가리키기에 잠시 머뭇거리다 그 옆으로 다가갔다. 테라스로 나가자마자 찬 바람과 파도 소리가 몰려온다. 겨울밤 바다 위에 비친 달빛이 일렁거린다. 아름다운 풍경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안 자도 돼? 피곤하지 않아?"

"피곤하긴 한데..."

"잠이 안 와?"

"그러는 오소마츠형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잠이 안 와서."

형도? 오소마츠형은 난간에 기대 멀거니 달만 올려다보았다. 슬쩍 제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더니 담배가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주먹을 움켜쥐었다. 나한테 담배 끊었다고 했으면서 거짓말쟁이. 애꿎은 담뱃갑만 만지작거리던 오소마츠형은 담배 연기를 뱉듯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끝내기 싫다..."

한숨에 섞여나온 중얼거림에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달을 담은 눈동자는 어딘지 서글퍼 보였다. 어째서.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물어선 안 된다고, 알아서 뭐 하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미 말은 내 곁을 떠나갔다.

"왜...?"

"쵸로마츠랑 계속 같이 있고 싶으니까."

묻지 말아 할 것을 묻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들었다. 내 쪽으로 몸을 돌리려는 오소마츠형의 모습에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것마저 보면 분명 돌이킬 수 없다. 아까보다 거세진 심장 박동이 날 채찍질한다. 정신 차리라고.

"있지, 쵸로마츠."

"...미안, 난 이만 가서 잘게."

"아, 그래. 많이 피곤하지? 잘 자."

"형은 안 자?"

"한 개비만 더 피고."

"몸에 안 좋아."

"이제야 내 걱정해 주는 거야?"

대답 없이 홱 돌아서자 좋은 꿈 꾸라는 말이 따라왔다. 방에 들어설 때까지 그 말은 내 다리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불에 쓰러지듯이 누워 베개를 끌어안았다. 좋은 꿈이라면 이미 많이 꿨다. 꿈이라면 깨야만 하고, 이제 곧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끝나게 되면 이젠 꿈이라는 변명도 통하지 않아.

"안돼... 끝나지 말아줘."

나는 현실과 마주할 자신이 없어. 이불 속에 파묻힌 채 한참을 뒤척거리다 겨우 잠들었다. 잠결에 느껴졌던 머리를 쓰다듬는 감촉이 부디 꿈의 일부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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