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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라온홍]애플파이 세 개

2019.07.24 작성 | 공백 미포함 6,969자

케일이 또 쓰러졌다.

온은 울거나 놀라는 대신 그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젠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으니. 이 사실이 오히려 케일이 쓰러진 것보다 더 슬펐다. 아주 익숙하게 케일을 받고, 눕히고, 살피고, 각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 틈으로 온은 다른 두 동생과 함께 걸어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평균 9세들은 케일이 누워있는 침대 한편에 옹기종기 모여 케일을 바라보았다.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케일의 얼굴은 원래 그랬던 건지, 쓰러질 만큼 아파서 그런 것인지. 온은 생각하기를 관두고 동생들 몰래 또 한숨을 푹 쉬었다. 어차피 쓰러졌다면 좋은 꿈이라도 꿨으면 좋겠는데 케일의 얼굴이 워낙 파리하고 미동도 없는 터라 좋은 꿈은커녕 살아있는 게 맞긴 한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배를 보며 그래도 케일이 살아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온이 처음으로 케일에게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용했다. 언제나처럼. 안정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고요해서 오히려 더 위태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온은 그 모든 풍경을 작은 눈에 똑똑히 담았다. 그리고선 굽어있던 허리를 애써 쭉 폈다.

언제나 이렇게 가라앉은 채로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 최한이 든든하게 문 옆을 지키는 것처럼, 론이 능숙하게 케일을 보살피는 것처럼, 비크로스가 묵묵히 모두의 식사를 챙기는 것처럼, 에르하벤이 그런 모두를 지켜보는 것처럼. 온도 이렇게 우울해하지만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온의 시선이 두 동생에게 향했다. 활기찬 홍의 성격을 보여주듯 언제나 쫑긋 세워져 있던 귀는 축 처져있었다. 항상 자신은 위대하다면 자신만만하게 웃던 라온은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상태로 코를 킁 하고 삼켰다. 온은 두 동생을 보자마자 자연스럽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누나니까. 동생들을 챙기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항상 걱정만 시키는 이 바보 같은 케일이 말없이 몇 번이고 가르쳐준 것이, 더 정확히 말하면 주변 사람을 보며 온이 혼자 배운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존재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 온은 이번엔 한숨을 쉬지 않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얀 매트리스 위를 사뿐사뿐 걸어 아직도 웅크려 있던 두 동생 앞에 섰다. 동생들의 시야에 들려고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케일의 머리맡에 설 수밖에 없었다. 온은 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케일을 한 번, 촉촉이 젖은 눈망울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두 동생을 한 번 보고는 일부러 웃으며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러지 말고 케일이 일어나면 먹을 수 있도록 애플파이를 만드는 건 어떠냐는 건데!"

"애플파이?"

홍이 되묻자 온은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온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홍이 말뜻을 채 헤아리지 못하고 눈만 끔벅거릴 때, 위대한 라온은 작은 날개를 쫙 펼치며 둥실 날아올랐다. 눈물 두어 방울을 또르르 흘린 눈동자는 눈물이 아닌 의지로 초롱초롱 빛났다.

"좋은 생각이다! 약한 인간 일어나면 많이 배고플 테니 우리가 최고로 맛있는 애플파이를 많이 만들어서 먹이는 거다!"

"그렇구나! 역시 누나는 똑똑하다는 건데!"

금방 밝아진 두 동생의 목소리에 온의 얼굴에 아까와 달리 만들어진 미소가 아닌 진심으로 기쁜 미소가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방안을 가득 채운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평균 9세들을 지켜보던 최한, 에르하벤, 론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케일이 쓰러진 후. 항상 조용하기만 했던 시간에 처음으로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비크로스는 늘 단정하고 깔끔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티끌 하나 묻어있지 않은 그의 겉모습처럼 그가 일하는 부엌 역시도 그러했다. 헤니투스가의 부엌뿐만이 아니라 그가 서 있는 모든 곳이 깨끗해야 직성이 풀렸다. 이른 새벽, 부엌에서 항상 하얀 장갑으로 먼지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부터 그의 하루가 시작했다. 제삼자가 본다면 깨끗하기만 한 부엌도 먼지 한 톨도 놓치지 않고 쓸고 닦고 한 후에야 겨우 칼을 들었다. 그래야만 겨우 요리할 마음이 들었으니까. 갑자기 부엌에서 강자를 만나 싸우기라도 않는 이상, 그의 부엌은 더러워질 일이 없었다. 그런 비크로스는 오늘 처음으로 자신의 주방이 요리로 더러워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맛있는 거 만드는 비크로스야! 애플파이 만드는 법 가르쳐달라!"

자신의 앞에서 눈을 빛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평균 9세들 때문에. 온과 홍은 이미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한 후였다. 요리할 생각 만만인 세 아이를 보던 비크로스가 문 쪽에 서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무덤덤해 보이는 자기 아들이 제법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론이 그저 허허 웃었다. 자신의 아들과 손주뻘 되는 아이들이 요리할 모습에 벌써부터 흐뭇해하는 인자한 할아버지 미소였다. 케일의 곁을 비울 수가 없어서 에르하벤과 최한은 위에 남아있었지만 아마 이 아이들을 봤더라면 비슷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물론 최한은 안 알려주고 뭐 하냐며 비크로스를 노려봤을지도 모르지만. 답지 않게 시덥잖은 생각을 잠시 한 비크로스는 다시 눈을 돌려 아이들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부디 요리가 최대한 깔끔하게 끝나길 바라면서.


비크로스의 예상과 달리 평균 9세들과 함께 하는 요리는 매우 순조롭고 깔끔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원체 똑똑하기도 했거니와 케일과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이었으니까. 의욕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 한마디, 손짓 한 번을 놓치지 않고 유심히 살펴보며 열심히 따라 하는 아이들을 보며 비크로스의 입꼬리가 아주 미미하게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열심히 하는 것과 별개로 서툴기는 했으니 밀가루가 바닥에 튄 탓이었다. 비크로스가 그 잠시를 참지 못하고 바닥과 작업대를 잠시 치우는 사이 아이들의 손에서는 동글동글한 시트 반죽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손을 탁탁 털고 새 흰 장갑을 낀 비크로스는 아이들의 반죽을 한 것을 한 번 봐주고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그리고는 평소 들고 다니던 대검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작은 과도를 꺼내 들었다. 애들이 요리하겠다고 했으나 칼을 들기에는 아직 어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반, 실수로 베여서 다치기라도 했다간 돌아올 반응을 상상도 하기 싫었던 마음이 반이었다. 한 손에 사과를 들고 비크로스가 능숙하게 껍질을 깎기 시작했다. 케일의 머리색만큼이나 붉은 사과 껍질이 한 번도 끊기지 않고 빙글빙글 회오리를 그리며 하얀 조리대 위에 쌓여갔다. 지금 요리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입을 헤 벌린 채 비크로스를 보던 아이들은 껍질이 뚝 떨어지고 사과가 완전히 새하얗게 되자 너나 할 것 없이 입을 열었다.

"껍질이 한 번도 안 끊겼다!"

"대단하다는 건데!"

"나도 해보고 싶다는 건데!"

홍이나 라온이 자기도 해보겠다고 나서긴 했지만 비크로스가 과도를 쥐여주는 것보다 사과를 다 자르는 것이 더 빨랐다. 애들이 입술이 비죽 내밀기 전에 비크로스는 이제 사과를 조릴 거라고 말을 선수 치며 세 냄비에 조각이 난 사과를 공평하게 나누어 넣어주었다. 그새를 못 참고 통통한 손으로 사과 한 조각을 날름 먹은 홍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과가 시다는 건데?"

"애플파이에 들어갈 사과는 단 것보다 신 게 더 나아."

설탕을 넣고 달게 조리니까. 설명을 들어도 여전히 고개를 기울이는 홍의 앞에 비크로스가 미리 계량한 설탕과 시나몬, 그리고 레몬 몇 개를 가져다 놓았다. 레몬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온과 홍 아이들이 뒤로 주춤거렸다. 지금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고양이는 고양이였기에 저 시큼한 것이 꺼려지기만 했다. 그 샛노란 빛깔과 코를 찌르는 향을 맡고 있자니 눈까지 따가운 기분이었다. 세 아이 중 태연한 것은 라온뿐이었다.

"애플파이인데 레몬이 들어가나?"

"즙을 짜서 넣습니다."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을 알기에 즙을 짜는 것도 자연스럽게 비크로스의 몫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각자의 냄비에 설탕을 넣게 하고, 비크로스가 적당량 레몬즙을 짜서 넣었다. 훅 풍기는 레몬의 향에 온과홍이 또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탄다."

비크로스의 한 마디에 바로 돌아오긴 했지만.  아이들은 모두 야무지게 냄비 안을 뒤적거리며 사과를 졸였다. 달콤하고도 새콤한 향이 냄비에서 피어오르더니 이내 뒤섞여 달짝지근한 사과 조림 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웠다. 덕분에 홍과 라온은 사과를 졸이는 내내 침을 꼴깍꼴깍 삼켜야 했다. 굳이 파이에 넣지 않아도 맛있을 게 뻔한 이것을 꼭 파이에 넣어 케일에게 줘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시나몬까지 넣었을 땐 '맛있게 만들려면 맛을 봐야 한다'며 결국 먹긴 말을 했지만 그래도 잘 버티었다.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 제대로 식히지도 않고 먹었다가 혀가 데이긴 했지만 말이다.

반죽이 세 개, 사과 조림도 세 개. 그러니 이제는 파이 세 개를 만들 차례였다. 비크로스가 잘 밀어주고 잘라준 반죽을 만지작거리며 아이들이 끙끙 씨름했다. 이제 모양만 잘 만들면 되는데 그 간단해 보이는 격자무늬가 뭐가 이리 어려운 것인지. 라온은 그 통통한 발로 잘 밀린 반죽을 저도 모르게 꾹꾹 눌러버렸고, 홍은 자꾸 중간을 빼먹어 다시 되돌려야만 했다. 그런 와중에 온은 침착하고 꼼꼼하게 반죽을 이리저리 얽혔다. 처음 만든 티가 나긴 하지만 스스로 봐도 처음 만든 것치곤 괜찮은 모양새에 온은 후 숨을 내쉬었다. 한숨이 아닌 뿌듯함에 흘러나온 숨을.

"잘 만들었네."

"역시 누나라는 건데!"

"나도 지지 않게 예쁘게 만들 거다!"

"우리 막내 분명 엄청 예쁘게 만들 수 있을 거라는 건데!"

그 작은 소리가 들렸는지 온이 손을 떼기 무섭게 말들이 날아왔다. 능청스레 받아친 온이 어느새 다시 열중한 두 동생을 보며 작게 웃었다. 집중한 얼굴들이 퍽 귀여웠다. 도와줄까 하다가 그래도 혼자 힘으로 하려고 할 아이들인 걸 알아서 그냥 가만히 속으로 응원하기로 했다. 두 동생이 마저 파이를 만들 동안 한가해진 온이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 즙을 짜고 남은 레몬을 잠시 바라보았다. 시큼한 향이 제법 익숙해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호기심에 혀를 슬쩍 가져다 댔던 온은 인상을 팍 쓰며 혀를 내밀었다. 역시 익숙해진 건 아닌 것 같다고 결론 내리며. 급하게 마실 물을 찾던 온은 문득 고여있던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싫다는 것을 온몸으로 티 내듯 인상을 팍 쓴 얼굴. 그걸 보고 있자니 불현듯 누군가의 표정이 떠올라 온은 활짝 웃었다. 아이처럼 해맑게, 그리고 그 누군가처럼 사악하게. 온은 그토록 싫어하던 레몬을 양손에 꼭 쥐고 총총거리며 아직도 부엌 구석에 조용히 서 있던 론에게 다가갔다. 온이 가까이 오자 론이 허리를 숙여 작은 아이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온도 시선을 맞추려 반대로 허리를 꼿꼿이 피고 까치발도 든 채 조심스레 말했다.

"저 레몬에이드도 만들고 싶은데..."

"허허."

론은 그만 웃어버렸다. 레몬을 싫어하는 이 아이가 가까이 있던 비크로스도 두고 굳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아서. 자신만큼은 아니지만 케일의 가까이에서 케일을 지켜봐 온 아이가 아니던가. 케일이 레몬에이드를 싫어하는 것도, 자신이 그걸 알고 일부러 레몬에이드를 주는 것도 다 알고 있을 터였다. 알기에 만들고 싶단다. 목소리를 높이며 제멋대로 투정하는 두 동생 뒤에서 얌전히 한숨을 쉬는 어린아이. 어른스럽지만 그래도 역시 어린 이 아이가 열심히 생각해서 동생들을 웃게 하고, 곧 일어날 케일에게 나름의 투정이라고 부리는 것이 고작 레몬에이드란다. 그것이 참 온답기도 하고 퍽 귀엽기도 해서 론은 온의 은빛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론은 생각했다. 툭하면 쓰러지고 걱정만 끼치는 우리 강아지 도련님 곁에 이렇게 영특한 고양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론은 온의 손에 들려있던 레몬을 가져가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라면 내가 비크로스보다 더 잘 알려줄 수 있을 것 같구나."

론의 말에 온은 활짝 웃었다. 순수하고도 장난스러운, 어딘가 조금 케일을 닮기도 한 그런 미소였다.

"아주 아주 시게 만들건데!"

"그래, 아주 시게 만들자꾸나."

강아지 도련님 눈이 번뜩 뜨일 정도로 시게.


케일이 정신을 차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만 차렸다. 눈은 여전히 감은 채 지금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하기 위해 비몽사몽한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몸은 무거웠지만 푹신한 침대에 누워있는 것인지 편안하기도 했다. 막 깨어나 잘 들리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라온과 홍이 힘찬 목소리로 뭔가를 말하고 있고, 온이 밝게 한 마디씩 보태주었다. 그런 아이들에게 최한이 조금 즐거운듯한 목소리로 꼬박꼬박 대꾸해주었고, 그런 애들을 에르하벤이 지켜보고 있는지 작게 흐르는 헛웃음에서는 애들을 기특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시끄럽지 않을 정도로 딱 적당하게 뒤섞인 소리들에 케일은 생각했다. 꿈이구나. 자신은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고, 아이들은 잘 뛰어놀고 있는 백수의 꿈이 진짜 꿈으로 나타났구나. 케일은 몸에 힘을 쭉 빼고 가만히 있었다. 모처럼 즐거운 꿈이라 깨기 아까우니 조금만 더 만끽할 생각이었다. 현실에선 아이들이 울면서 기다릴 테니 아주 조금만. 그런 케일의 귓가에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일의 안일한 생각을 마치 잘 갈아진 칼날로 단숨에 그어 끊는 것처럼.

"도련님, 또 자는 척이십니까."

헉. 케일은 놀라 헛숨을 들이키며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론의 인자한 미소였다.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 입과 달리 예리한 그 눈빛은 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뭐야. 꿈이 아닌가? 케일의 의문에 대답해주듯이 라온이 냉큼 케일에게 날아갔다.

"인간! 이제 일어났나! 거의 하루만이다!"

커헉. 케일이 기침을 토하며 안긴 건지 몸통 박치기를 한 건지 모를 라온의 몸을 받아들였다. 또 울었겠지 싶어 라온을 바라본 케일은 내심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자신이 쓰러지기만 하면 옆에 딱 붙어 킁킁거리며 콧물을 삼키던 라온이 눈물 자국도 보이지 않는 파란 눈동자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통통한 앞발엔 방금 막 만들었는지 따끈따끈한 애플파이도 들려있었다. 설탕에 푹 절인 사과 조림 향기가 코를 찌르는듯 했다. 아니, 나 쓰러지기 직전도 아닌데 애플파이는 왜? 케일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사이, 라온의 뒤를 따라 온 붉은 고양이와 은빛 고양이, 아니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아이와 은빛 머리카락의 여자아이 손에도 애플파이가 들려있었다.

"약한 인간! 애플파이 먹어라! 많이 먹어라!"

"최고로 맛있는 애플파이 만들었다는 건데!"

"우리 다 같이 열심히 만들었다는 건데!"

"...너희가?"

케일의 말에 세 아이가 동시에 빠르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애들이 끄덕일 때마다 사과조림 향이 더 진하게 퍼져나갔다. 그 향에 이끌린 것처럼 근처를 지키던 최한과 에르하벤이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둘 다 흐뭇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한 채였다.

"케일님이 쓰러져 계신 동안, 케일님이 일어나면 드리겠다고 애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래?"

"이것 봐라, 금용 할배야! 위대한 내가 만든 위대한 애플파이다!"

"그래, 잘했다."

라온에게 한 말이었지만 에르하벤의 시선은 온에게 향해있었다. 애플파이를 만들어 아이들이 웃을 수 있게 하다니 잘했단 칭찬임을 알아챈 온이 수줍게 웃었다. 하여간 박복하지만 애들 복은 좋은 놈. 에르하벤은 그 말을 쏙 삼키며 피식 웃고는 온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미처 생각 못 한 칭찬에 쑥스러웠는지 온이 제 얼굴을 가리듯 애플파이를 케일 앞에 쑥 내밀며 외쳤다.

"비크로스가 가르쳐줬다는 건데!"

"맛은 괜찮습니다."

자기 이야기할 것을 안 것처럼 어느새인가 비크로스가 슬쩍 다가와 한 마디를 툭 던졌다. 비크로스의 말에 케일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크로스가 알려줬다면 먹고 죽을 정도는 아니겠지 싶어 안심한 것이다. 그 반응에 아무도 모르게 아주 잠깐 웃은 비크로스는 그 정도로는 모자랄 테니 음식을 준비해오겠다며 바로 밖으로 나갔다. 묵묵히 나가는 등을 보던 케일은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안 모자랄 것 같은데, 이거. 애플파이가 세 조각도 아니고 자그마치 세 개였다. 게다가 이 어린 애들이 무슨 손이 이리 큰지 파이 하나가 거의 케일 얼굴만 했다. 그렇다고 애들이 만든 걸 안 먹을 수도 없고. 더는 못 기다리겠는지 라온이 케일 입에 애플파이를 들이밀었고, 늘 그랬듯이 케일이 그것을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비크로스 말대로 맛은 있었다. 너무 달아서 물리고, 목이 막혀서 그렇지. 그동안은 쓰러지지 않으려고 정신없이 먹느라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애플파이란 그거 하나만 계속 먹기에는 부적절한 음식임을 이제 알았다. 거기다 지금 먹는 건 라온 눈물에 젖어있지도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먹긴 계속 먹어야 했다. 홍이 옆에서 들뜬 표정으로 오매불망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돌겠네. 알베르의 입버릇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케일은 열심히 애플파이를 우물거렸다.

"도련님."

그런 와중 들린 론의 목소리는 오아시스와 같았다. 입에 남아있던 애플파이를 겨우 넘기고 론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의 손에는 익숙하디익숙한 레몬에이드가 들려있었다. 아, 마실 거다. 평소라면 질색하며 마셨을 레몬에이드가 지금은 좀 반가웠다.

"드시죠."

"음."

태연하게 냉큼 레몬에이드를 받고 한 모금 마신 케일은 익숙하지 않은 맛에 인상을 팍 썼다. 뭐가 이렇게 셔? 이게 레몬에이드야, 레몬즙이야? 자신이 무슨 일을 쳤을 때 론이 일부러 더 시게 만드는 일은 종종 있었으나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또 뭘 했나. 기억을 되짚어봐도 이렇게까지 신 레몬에이드를 먹을 정도로 뭘 한 것 같지는 않았다. 일이야 치긴 쳤고, 쓰러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라온 말에 따르면 단 하루 만에 일어난 건데 이렇게까지 시게 만들어야 했나. 그런 의미를 담아 론을 보니 론은 그저 인자하게 웃었다. 케일은 그 미소가 더 무서웠다.

"온이 만들었습니다."

"내가 만들었다는 건데!"

"맛있네."

거의 반사적으로 맛있다고 한 케일이 레몬에이드를 한 모금 더 삼켰다. 천하의 케일마저 표정 관리가 안 될 정도로 너무 셔서 말과 행동이 따로 놀고 말았지만. 성공이라는 건데! 온이 재미있다는 듯 꺄르르 웃었고, 케일은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일부러구만. 애들이 어른들 보고 나쁜 것만 배웠어. 한숨을 푹푹 내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케일이 레몬에이드를 한 모금 더 삼키고 홍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온의 애플파이를 먹고 온의 레몬에이드를 먹었으니 이제 홍의 애플파이도 먹어줘야 하지 않은가. 활짝 웃으며 제 손에 파이 한 조각을 올리는 홍을 보며 케일은 작게 침음했다. 진짜 남기면 안 되겠다고, 이러는데 어떻게 남기냐고.

결국 일어나자마자 애플파이를 3개나 해치운 케일은 탈이 나고 말았다. 기껏 만든 요리가 식게 생긴 비크로스의 눈총과 이렇게 약해서 어떡하냐며 난리 치는 라온, 그리고 저마다의 한숨들 속에서 케일은 끙끙거렸다. 그 곁에서 우아하게 꼬리를 흔들던 온은 작은 목소리로 다음엔 레몬 타르트 만들 거라며 조용하고 묵직한 엄포를 놨다.

"봐주라..."

온에게만 들릴 정도로 나직한 목소리에 온이 웃었다. 나름대로 사악하고, 망나니답게.

"싫은데!"

케일의 생각대로 케일을 보고 나쁜 것만 배운 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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