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신주아

검은 흔적들

개인로그

로나OC by 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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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희신이 편의상 '발찌'라 부르는 A등급 장비는 20대 시절에 만들었던- 소위 말하는 '필수 아이템'이었는데, 그것의 진짜 아이템명은 '높이높이' 다. 하지만 그 발찌의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배희신이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여 입 밖으로 뱉은 것이 손에 꼽기 때문이다.

'높이높이' 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1년 전 사별한 동반자이자 파트너인 도선혜다. 당시의 배희신은 극렬하게 반대했다. 차라리 이름을 붙이지 않고 놔두고 말겠다며 펄쩍 뛰었지만 도선혜 또한 완고했다. 이름이 없다니, 그게 무슨 눈동자 없는 용이냐면서. 화룡점정을 들먹인 도선혜가 '높이높이' 아니면 '점프점프',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며 선택지를 내밀자 배희신은 눈물을 머금고 전자를 선택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장비를 만든 주인인 배희신이 도선혜의 고집에 말려들어야 할 이유는 없었으나, 굳이 이유를 만들어내자면 배희신이 도선혜를 좋아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었다. 원래 더 많이 좋아한 사람이 지는 법 아니던가.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높이높이'의 이름은 '발찌'로 결정되었을 것이다.

물론 객관적으로 보자면 둘 다 구리다. 아티팩트에 자아가 있었다면 둘 다 싫다고 했을지 모르지만, 배희신이 알 바는 아니다.

'슬슬 따뜻해지는군.'

매섭던 칼바람이 어느 새부턴가 잦아들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겉옷을 벗고 아직은 이른 시기에 반소매 티를 자랑하는 배희신은 킁킁거리며 옅게 남은 찬 냄새를 들이켰다. 그리고 오늘 발찌와 함께 활약해줄 동료, 웨어러블 워치를 내려다본다. 손목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감긴 시계가 오후 1시를 나타내고 있었다.

시계라고는 하지만 어디 한국의 전자기기가 기능 하나만 달고 나오는 걸 사람들이 용납하겠는가. 배희신이 시계를 조작하자 촬영 모드로 바뀌어 사방의 풍경을 담아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스마트폰이나 간신히 들고 다니는 배희신이였지만 오늘만 특별히 아는 사람에게 빌린 것이었다. 허공에 떠 있을 때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지나가 버리면 손 쓸 도리가 없으니까. 허둥지둥 스마트폰을 꺼내다가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그날이 바로 스마트폰의 제삿날이 되어버린다. 돈을 벌만큼 벌었다고 생각하는 배희신이라도 아까운 건 아까웠다.

허리에 작은 가방을 메는 것으로 준비를 마친 배희신은 가볍게 가로등 위로, 창문턱 위로, 그리고 건물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배희신이 무릎을 굽히고 발끝에 힘을 주어 디딜 때마다 발찌가 붉게 빛나며 호응했다. 가벼운 바람이 인다. 콘크리트 끝자락에 조르륵 일렬로 앉아 한가롭게 햇볕을 쬐던 비둘기들이 화들짝 놀라 날갯짓을 했지만 날아가지는 않았다. 배희신은 빌딩 숲에서 나는 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은 비둘기를 밟지 않는 요령에는 도가 텄다.

"잠깐 지나가겠습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무도 없음에도 허공에 형식적인 인사를 건네며 빠르게 도시를 가로지르던 배희신은 몇몇 곳에서 '그을음'을 발견했다. 배희신은 그 그을음이 화재나 불을 다루는 언커먼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확인한 후에야 사진을 남겼다. 다각도로 사진을 찍고 위치를 기록한 배희신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검댕 묻은 새가 비틀비틀 부딪히고 다니면 이런 느낌일까? 어쩌면 피닉스처럼 몬스터의 몸뚱이가 그 자체로 발화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일부러 지정된 장소에 뿌린 표식일지도 모르지.'

마지막이 정답이라면 곤란해질 게 뻔한데. 배희신은 자신의 걱정이 걱정으로만 남기를 바랐다. 위험한 일을 예측해낸 사람보다야 허황한 추측이나 하는 얼간이로 남는 쪽이 훨씬 이득이다. 배희신은 보고서에 작성할 내용을 대충 메모한 뒤 자리를 떴다.

어느 골목에는 알처럼 생긴 검은 돌이 굴러다녔다.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이었다면 누가 버린 장난감이라든지, 특이하게 매끈한 돌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지나쳤을 생김새였다. 배희신은 살면서 별의별 것을 다 경험하고 살아왔기에 조금 이상하게 생긴 것 가지고는 눈길 하나 주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앎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는 시간을 가졌다.

배희신은 얇은 라텍스 장갑을 꺼내어 끼고 돌을 집어 들었다. 혹시 모를 위험한 징조를 대비해 감각을 곤두세웠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배희신은 돌의 겉면을 더듬고 통통 두드려보기까지 했으나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쯤 되니 다행이라기보단 실망감이 강하게 들었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위험한 게 도로에 아무렇게나 뿌려져 있는 걸 멋모르는 사람이 집어 들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배희신은 검은 돌을 허리 가방에 잘 챙겨두었다.

"14시 51분. --길 --로 왼쪽 건물..."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는 것이 귀찮아 음성인식 기능을 켜놓은 채 중얼거리던 배희신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그때, 검은 무언가가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을 목격한 건 우연이었다.

"저...!"

목이 막힌 듯 한순간 목소리가 멈추고, 눈동자가 커지며 단숨에 최대 출력으로 뛰어오른 건 배희신의 직감이다. 배희신은 허공에서 재빠르게 눈을 굴려 검은 존재가 날아가는 방향을 확인하고, 웨어러블 워치의 동영상 촬영 기능을 켰다. 키 높은 구조물을 밟아 다시 몸을 가속한다. 허술하게 묶은 머리카락이 마구 흔들리다가 머리 끈은 기어코 미끄러져 풀렸지만 다시 추스를 새는 없었다. 배희신이 아무리 빠르게 쫒아가도 검은 존재는 더욱 빠르게 멀어져 갈 뿐이었다.

배희신은 짧게 혀를 차고는 손톱을 세워 머리를 긁어내렸다. 이 상황에 머리가 가려워진 것은 아니었다. 곧 손끝에 걸려 나온 것은 그가 끼고 있었는지도 모를 얇은 실핀이다. 검은색의 평범한 실핀처럼 보였으나, 그것을 손바닥에 꾹 쥐자 희미한 붉은 빛이 새어 나오며 피아노 줄 같은 매끄러운 와이어가 손 틈새로 뽑혀 나왔다. 나이 먹은 소수의 언커먼 사이에서나 알음알음 도는 S등급 장비 '양자택일'이었다.

"저거 잡으면 보너스는 나오려, 나!"

와이어의 한쪽 끝을 손바닥에 감고, 낚시하듯 팔을 휘두르자 아까 그 실핀이 변화한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와이어가 화살처럼 곧게 검은 존재의 뒤를 쫒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별 반응 없던 검은 존재가 위협이라도 느꼈는지 이리저리 들썩였다. 좋은 반응인가? 그럴 리가 없다.

와이어가 검은 존재의 끝자락을 낚아채려 하는 순간 검은 존재로부터 무언가가 떨어져나와 배희신의 머리를 향해 꿰뚫을 듯 돌진했다. 마침 도약하여 허공에 떴다가 떨어질 차례였던 배희신은 급하게 와이어를 거둠과 동시에 손을 들어 얼굴 앞을 막았다.

퍽-!

손에 무언가가 틀어박혔다. 야구공이라도 받아낸 것처럼 묵직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기도 전에, 배희신은 날카로운 것이 손바닥 피부를 뚫고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미친."

짧게 욕설을 뱉은 배희신은 어설프게 착지한 탓에 바닥을 굴렀지만 머리가 깨지진 않았으니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손바닥은 문제가 맞았다. 손바닥을 뒤집어보니 검은 돌이 배희신의 손에 붙어 슬금슬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분명 골목에서 발견했던 건 아무런 반응도 없었는데!

당황은 찰나였다. 배희신은 냉정한 얼굴로 판단을 마친 후, 와이어로 알과 손바닥의 접촉면을 두바퀴 감아 그대로 잡아당겼다. 단 한 번도 배희신을 상처입힌 적 없는 와이어는 주인의 의지에 따라 먹잇감을 붙든 올가미처럼 좁아져 그대로 배희신의 피부를 갈랐다. 팔이 푸들푸들 떨릴 만큼의 날 선 통증과 함께 피가 흥건히 배어 나왔지만 정체불명 물체의 침범을 허용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배희신은 그대로 끝내지 않고 다시 한 번 와이어를 움직여 검은 돌의 면 하나 보이지 않을 때까지 칭칭 휘감아 묶었다. 검은 돌은 몇 번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뭐야?"

배희신은 천천히 숨을 고르고 손바닥에서 흐른 피를 굳혀 임의로 지혈했다. 하지만 시선은 와이어로 감싼 돌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순간 허리 가방에 넣어둔 돌이 생각나 가방을 더듬었지만 딱히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특별한 지시에 따른 공격 반응인가? 주운 돌과 방금 뱉어낸 돌은 다른 물건인가? 성질이 다른가? 돌이 반응하는 조건이 따로 있는 건가? 이젠 사라져버린 그 검은 존재가 역광의 균열에서 튀어나온 것이 아닌, 다른 무언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머리를 굴리던 배희신은 한숨을 내쉬고 여전히 촬영 중이던 동영상을 종료시켰다. 생각하는 것까지는 제 임무가 아닐 테다.

영상이 저장되었다는 안내 메시지를 확인하고 멀쩡한 손으로 와이어를 집어 들어 일어섰다. 돌을 닦을 새도 없이 감아버린 탓에 와이어 사이로 피가 뚝뚝 떨어지는 꼴은 어느 호러 영화에서 볼 법한 생김새였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배희신은 옷자락으로 대충 물기나 털어내고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치료가 먼저일까, 보고가 먼저일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나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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