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로나
[루바토] 배희신 & 은주아
은주아가 열린 문 밖으로 세찬 빗소리가 들렸다. 비가 오는게 아니라 양동이째로 쏟아붓는 것처럼 매섭다. 문이 사라지자 소리가 뚝 끊겨 대장간은 다시금 고요해진다. 그가 올 것을 알고 미리 음료를 골라 빼둔 배희신은 차게 식은 병을 건넸다. "웬일로 이 시간에 온다 했더니." "비가 오니까 움직이기 귀찮더라고요. 좀 그치면 갈게요." 익숙하게 공간을 가
짙은 어둠 속 푸르스름한 조명만이 옅게 깔린 공간은 바람 한 점 불지 않아도 팔뚝에 소름이 돋을 스산함을 자아낸다. 오로지 듣는 이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겠다는 일념 하에 제작된 배경음이 심장을 두드릴 듯 낮게 울렸다. 이쯤되면 사람들은 잔뜩 긴장해 몸을 움츠린다. 다시 뒤로 돌아가고 싶을 쯤, 용기를 내어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으면 유난히 큰 발소리가 빠
'화염의 대장간'은 제법 아늑한 공간이었다. 담금질과 망치질이 필요치 않은 그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한 장소는 대장간의 이름과 다르게 불도 망치도 모루도 없다. 있는 것은 침대만큼이나 널찍한 소파와 전기를 쓰지 않는 냉장고, 예의상 놓여있는 것 같은 탁자와 의자정도다. 마치 무도회장 하나를 통째로 옮겨놓은 것처럼 거대한 공동은 바닥에 넓게 깔린 색색의
후줄근한 차림새에 제대로 된 것은 위에 걸친 하얀 루바토의 코드 한 벌. 한 손에는 만개한 붉은 장미 꽃다발이 들렸다. 그나마 대충이라도 묶어내렸던 머리칼은 머리끈 한줄 온데간데 없이 풀려 바람결에, 발걸음에 한들한들 흔들린다. 아무리 잘 닦인 길이라지만 거무죽죽한 낡은 슬리퍼를 신고도 잘만 걷는다. 터덜터덜 걷는 모양새는 양반이 저리가라 느긋하게 평
배희신은 균열 근처에서 간신히 회수해 온 장갑을 둘러보았다. 재즈가 팔을 잃으며 함께 잃어버렸던 장비다. 본판이 배희신의 특별한 혈액으로 이루어진 터라 수복은 그의 능력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했지만, 문제는 이제 더는 장갑을 쓸 만한 요건이 안된다는 것이다. "하여간." 괜히 혀를 쯧 차고는 장갑 '붉은 가시'의 형태를 허물어뜨려 뭉글뭉글한 액체로
메시지를 보낼 수 없습니다. 선택한 대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반투명한 가이드 창이 무심하게 문장을 띄웠다. 목소리가 있다면, 온기 한 점 없으리라. 괜찮아? 상황은 어때. 다시 한 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깨 위에 내려앉은 나비는 느릿느릿 날개를 접었다 펴며 새로운 명령을 기다릴 뿐이었다. 언제부터 눈을 감고 있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매일같이 피를 보는데 또 피를 보면 질리지 않느냐?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에게 배희신은 질리는 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배희신은 천성이 그런지, 아니면 이 또한 능력의 일부인지 피의 비린내나 붉은색에 불쾌함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게다가 능력을 사용하여 정화한 피는 비린내가 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선짓국은
배희신이 사는 오피스텔에 방문하는 디안드레의 두 손은 먹거리로 가득했다. 중요한 점은 그것들 중 재료라고는 한 톨도 없이 모두 완제품이라는 사실이다. 배희신과 디안드레 모두 어디선가 부정이라도 탄 양 요리를 못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수제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디안드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문 앞에 섰다.
"다급하게 부른 것치고는 얌전한 상황이잖아요." "아까는 진짜 위험했습니다만. 다 같이 독물을 뒤집어쓰고 죽을 뻔했다고요." 투덜대는 제갈쯔완과 이야기를 나누며 차연우의 창으로 만들어낸 수조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아마 '춘복'일까. 그럼 그 옆이 윤서영이겠군. 언젠가 본 적이 있던가... 아니면 처음 보던가. 지난 언커먼 활동들을 멍하니 돌이키던
배희신이 편의상 '발찌'라 부르는 A등급 장비는 20대 시절에 만들었던- 소위 말하는 '필수 아이템'이었는데, 그것의 진짜 아이템명은 '높이높이' 다. 하지만 그 발찌의 진짜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배희신이 그 이름을 부끄러워하여 입 밖으로 뱉은 것이 손에 꼽기 때문이다. '높이높이' 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1년 전 사별한 동반자이자 파트너
배희신은 문화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과 놀랄 만큼 비교되어서, 아름다운 것을 보면 부끄러웠다. 추할 만큼 질투가 났다. 세상의 불공평함이 피부 위를 징그럽게 기었다. 종이 위에 선하나 예쁘게 긋는 것이, 둥그런 찰흙에 눈구멍 하나 뚫는 것이, 물에 부어야 하는 간장의 양을 가늠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배희신에
"어이, 비비. 있는감?" 여자는 빠끔히 열린 문 틈새로 눈을 흘끔 들이밀었다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에서는 빨간 무드등이라도 켜놓은 양 불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잠잠해지며 본래의 부드러운 빛을 되찾은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 반가움도, 퉁명스러움도 어느 것 하나 들어있지 않은 단조로운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