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발레리나를 위한
배희신이 사는 오피스텔에 방문하는 디안드레의 두 손은 먹거리로 가득했다. 중요한 점은 그것들 중 재료라고는 한 톨도 없이 모두 완제품이라는 사실이다. 배희신과 디안드레 모두 어디선가 부정이라도 탄 양 요리를 못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수제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디안드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문 앞에 섰다. 아까 언급했다시피 손이 가득 찬 탓에 어떻게 할까 짧은 고민을 하다가 봉투를 쥔 손가락 중 검지만을 내밀어 초인종을 누른다.
배희신은 집 안을 부드럽게 울리는 음악을 들었지만, 당장 손 뗄 여유가 없었다.
"리마. 문 열어."
[네.]
대신 가전 네트워크 총괄을 담당하는 인공지능 '리마'가 디안드레를 맞이했다. 저절로 잠금이 풀린 문을 열고 들어선 디안드레는 현관까지 뻗어나오는 붉은빛을 익숙하게 바라보았다. 벽장들이 이어진 짧고 좁은 통로를 지나 거실로 나가는 벽 사이에는 붉은 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디안드레는 먼저 손에 든 음식들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 컬링스톤을 밀듯 마룻바닥에 미끄러뜨렸다. 그리고 겉옷을 벗어두고는 영화 속의 첩보 요원이 레이저 보안 장치 사이를 통과하듯 실과 실 사이를 요령 좋게 건너 거실에 들어선다.
곳곳에 붙은 실의 출처는 거실 가운데, 실에 의지하여 허공에 매달린 붉은 덩어리였다. 마치 번데기 고치처럼 보였고, 그것이 사방으로 흩뿌리는 빛은 다각도로 세공한 루비에 빛을 투과한 듯 맑고 아름다웠다.
배희신은 그 덩어리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다. 붉은 고치에서 뻗친 실은 배희신의 손에 수도 없이 얽혀있었다. 그가 손가락 하나를 움찔거릴 때마다 그에 호응한 고치가 심장이 맥동하듯 빛을 흘렸다. S급 아티팩트는 특히나, 자그마한 움직임에도 구조가 뒤바뀌어버릴 수 있는 탓에 배희신은 오랜 시간 팔을 들고 있는 와중에도 손을 떨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했다.
배희신이 명명한 바로는 이것은 '회로 안정화' 단계로, 아티팩트에 대강 심어둔 능력을 사용자가 효과적으로 끌어낼 수 있도록 세부적인 조정을 한다. 얼기설기 형태만 잡아 둔 찰흙에 조각칼로 섬세한 모양을 내는 것과 같았다. 아티팩트의 등급이 높고 능력이 복잡하거나 강력할수록 조정 난이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졌다.
A급 장비부터는 꽤 버거운 집중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배희신은 언제나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량을 조절했다. 그것을 위한 러닝머신 등의 기계와 보조도구가 넓은 거실 구석에 널려있다.
"음..."
배희신은 특수 제작한 선글라스를 쓴 채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까딱이다가, 푸후우- 길게 숨을 내뱉으며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실은 힘없이 끊겨 다시 고치로 흡수되었다. 환했던 빛이 사그라진다.
"쉰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디안드레는 식탁에 음식을 꺼내놓으며 물었다. 그러자 배희신은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팔뚝으로 대강 문질러 닦으며 식탁으로 다가와 말한다.
"그러려고 했는데, 손님이 좀."
"누구?"
"주아씨."
"아아."
S급 방어 장비 '필멸의 염원'을 만든 후 당분간 쉬겠다 선언했던 배희신이 다시 제작에 나선 이유다. 웬만한 손님이었다면 볼 것도 없이 미뤄두어 돈 벌 줄 모르는 언커먼이라는 소리나 들었겠지만, 상대가 루바토의 길드원이니 별수 있나. 배희신은 선글라스를 벗고 눈그늘이 짙게 깔린 눈을 비볐다.
"배고파 죽겠다."
"얼른 먹게. 얼마나 굶은 건가?"
"글쎄... 오늘이 며칠이더라."
날이 지나는 줄도 모르고 일에 열중하던 배희신은 식탁 앞에 앉아 타인의 정성이 가득 들어간 요리로 위장을 채웠다. 살 맛 난다는 게 이럴 때 하는 말이겠지. 배희신은 누그러진 얼굴로 부스스한 머리칼을 한 번 쓸어올렸다.
"그나저나 길드는 좀 어때. 뭐 재미있는 일 없어?"
"재미있는 일은. 알다시피 다들 임무 뛰느라 바빠."
그러고보니 그런 게 있었지. 배희신은 전달받은 공지사항을 떠올렸다. 이미 부지런한 사람들이 움직였을 테니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지는 않겠지만, 월급을 받으려면 뒤늦게나마 활동할 필요가 있다. 배희신은 제작 활동만으로 큰돈을 벌어들였지만, 월급쟁이의 묘한 습성이 있었다.
배희신이 금세 흥미를 잃고 김치를 집어 먹는 사이, 우물쭈물 망설이던 디안드레가 슬그머니 입을 연다.
"...이건 딱히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니다만. 물어볼 게 있네."
"뭔데?"
디안드레가 서서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우연히 같은 시간에 회의실에 앉아 노가리를 까던 몇 사람이 디안드레를 향해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것. 연예인, 술, 주량 등에 이어 나온 굿즈라는 주제에 디안드레가 꺼낸 말은...
"크흑..."
배희신은 이마를 짚고 식탁에 기대어 반쯤 흐느꼈다. 올라간 입꼬리는 예의상 가려줄 법도 하건만 배희신에게는 자비가 없었다. 그 반응을 본 디안드레의 큰 몸이 쪼그라드는 듯했다.
"한국 헛살았네, 디디. 걔들이 너를 신고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알아."
"그 정도인가...?"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얘기했다는 걸 알았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사달 하나 났을걸."
■■가 뭐야, ■■가. 숭하다며 호들갑을 떠는 척하자 디안드레는 멋쩍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한바탕 디안드레를 놀려대던 배희신은 밥 두 공기를 비우고 자리를 치웠다. 남은 국과 반찬은 각각 냄비와 반찬 통에 옮겨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이것들은 나머지 제작기간 동안 배희신을 먹여 살릴 것이다.
"사다 줘서 고마워. 나중에 한잔 사지. 휴지 2000개를 주문하지 않을 정도로만 말이야."
"제발 그러길 바라지..."
마지막까지 말꼬리를 물고 늘어진 후에야 디안드레를 보낸 배희신은 다시 적막한 거실로 들어섰다.
허리에 손을 올리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던 배희신은 10분가량이 지난 후에야 다시 움직였다. 사람 하나는 족히 들어갈 법한 큼지막한 상자를 연다. 하지만 그 안은 텅 비어있었다. 평소에 미리 뽑아놓은 혈액 팩을 보관하는 상자였는데, 하나둘 꺼내 쓰다 보니 어느새 여분도 없이 모조리 써버리고 말았다.
"나 원..."
배희신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고치를 거실에 고스란히 두고 채혈기를 설치해둔 방에 들어갔다. 일단 재료가 있어야 뭘 만들든 할 것 아닌가. 단 하나의 재료만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극단적인 장단점을 가지는 법이었다.
"까맣...네요."
물론 완전히 검지는 않으나, 언뜻 보면 다를 바가 없었다. 은주아는 배희신의 손끝에 걸린 반지를 보았다가 그의 전신을 흘끔 훑어보았다. 오늘도 주렁주렁 매달고 온 귀걸이며 반지나 발찌가 선명한 붉은색을 띠는 데에 반해 유독 까만 반지와 암밴드는 선명할 정도다.
"S등급이니까. 여기에 퍼부은 피의 양만 따지면 징그러울 정도일걸."
"하지만 그만큼 효과는 확실할 테죠."
"그렇게 봐주니 고맙군."
배희신이 피곤함에 늘어진 얼굴로 가볍게 웃고는 반지를 빈 새끼손가락에 꼈다.
"요청한 대로 아티팩트를 사용하면 통증을 느낄 수 없을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신경에 스며들어 통각을 제어하는 거지."
손바닥을 쫙 펴자, 반지로부터 먹물이 퍼지듯 붉은색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손가락부터 손바닥, 손목과 팔뚝- 어깨에 이르러 문신을 새긴 양 불규칙한 무늬가 그려졌다. 오늘은 어째 민소매를 입고 왔다 했더니, 이걸 보여주려고 한 거였구나. 은주아는 그제야 깨닫는다.
"하지만 완전히 감각을 차단하면 내가 뭘 만지고 있는지, 뭐가 닿았는지 알 수 없으니 약간의 압박감은 남겼어. 뭐가 누르는구나... 싶은 정도? 이건 다시 조절할 수 있으니까 테스트 먼저 해본 다음에 얘기하자고."
배희신은 붉은 무늬로 둘러싸인 손가락을 까딱였다. 화려한 장신구에 화려한 문신까지 더하니 어디 뒷골목을 나돌아다녀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다.
"아티팩트 재사용을 위한 대기 시간은 사용시간의 5분의 1. 즉 5분 사용하면 1분은 쉬어줘야 한다는 소리지. 하지만 대기 시간은 축적형으로 설계해뒀어. 최대 50분... 그러니까 250분까지는 한 번 해제했어도 다시 사용할 수 있다. 그렇게나 오래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족히 4시간이 넘도록 계속 싸울만한 상황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말을 가만히 듣던 은주아가 고개를 기울인다.
"그럼 대기시간 50분을 넘기면요?"
"사용불가. 아티팩트 스스로 능력을 해제할 거다. 얼마나 썼는지 알아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이 아티팩트의 색을 보는 거야. 쓸수록 점점 색이 빠져 하얗게 변할 거고, 해제하면 다시 색이 차올라. 다른 하나는 이쪽이다."
배희신은 아티팩트가 침범하지 않은 반대편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등엔 붉은 글씨가 작게 떠올라 있다.
[ 00 : 20 ]
"20초가 쌓인 거군요."
"그래. 아직 아티팩트를 발동 중이니 내버려두면 계속 오를 거다."
그렇게 설명한 배희신은 아티팩트를 해제했다. 한 팔뚝을 감싸던 문신이 사라지자 20초를 가리키던 시간이 하나 둘 줄어들더니 0이 되고 나서는 언제 있었느냐는 듯 모습을 감추었다.그러고나서 배희신은 아예 반지를 손가락에 뺐다.
"만약 여기에서 대기시간을 단축하고 싶으면 내 피를 사용하면 되지만... 남의 피를 가지고 다니라는 게 그다지 좋은 얘기는 아니니까. 나중에 필요하면 받으러 와."
"흐음."
또 뭐가 남았더라. 배희신은 자신이 말하지 않은 주의사항이 있었는지 가만 떠올렸다. 장비 계약서에 꼼꼼히 적어두긴 했지만 그걸 한 번 죽 훑어보는 것은 제법 번거로운 일이었다. 어차피 이따 사인할 때 다시 보게 될 텐데 이 정도면 됐나. 그렇게 생각하던 배희신은 어쩐지 불퉁한 시선의 은주아를 마주했다.
"...뭐 잘못됐나?"
"한가지 굉장히 안타까운 점이 있죠."
"......?"
"내가 원하는 형태는 반지가 아니었으니까요."
그 말에 눈을 둥글게 뜬 배희신이 이내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은주아는 왜 웃느냐며 더욱 불만스러운 얼굴을 지었고, 그에게서 미움을 사고 싶지 않았던 배희신이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아냐, 아냐. 이건 단지 내가 가지고 다니기 편하게 주물러 둔 것뿐이지."
배희신이 손끝의 붉은 큐빅을 바늘로 변형시키자, 은주아는 미심쩍은 눈을 하면서도 익숙하게 손을 내밀었다. 바늘이 하얀 손끝을 찌른다. 금세 동그랗게 핏방울이 맺혔다. 배희신은 조심스레 잡은 손가락을 기울여 핏방울을 반지에 떨어뜨렸다.
톡, 반지에 핏방울이 닿은 순간 반지는 빛을 내며 한 점도 놓치지 않고 모두 흡수하고는 순식간에 몸집을 부풀렸다. 은주아는 반사적으로 손을 거두었지만 변화하는 것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내 배희신의 손바닥 위에 남은 것은 다름 아닌 검붉은 토슈즈 한 쌍이다. 벨벳으로 감싼 듯 부드럽게 빛나는 질감은 그것이 피로 만들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섬세했다. 배희신은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토슈즈를 은주아의 발 앞에 내려두었다.
이 순간 배희신은 A급 언커먼이나 '피의 대장장이'로 수식되지 않는 평범한 구두장이에 불과했다. 가시밭길 위에서 춤추는 이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을 튼튼한 신발을 선물할 수 있다면 그 하나만으로 부족함 없을. 배희신은 그대로 은주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 아이의 이름을 지어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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