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은 한데 문제가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매일같이 피를 보는데 또 피를 보면 질리지 않느냐?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에게 배희신은 질리는 게 아니라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배희신은 천성이 그런지, 아니면 이 또한 능력의 일부인지 피의 비린내나 붉은색에 불쾌함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게다가 능력을 사용하여 정화한 피는 비린내가 나지도 않았다.
그런데 선짓국은 사람의 피로 만든 것도 아니고 그냥 음식일 뿐인데 똑같은 피로 취급해서 질색할 이유가 있겠는가. 배희신은 커다란 덩어리를 숟가락으로 잘게 쪼개어 밥알과 고루 비볐다. 그대로 뜨거운 국물과 한 숟갈을 입에 넣으니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온기가 선명하게 느껴진다. 데이는 게 아닌가 싶어 자르지 않아 투박한 깍두기를 통째로 으적으적 씹자니 문득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든다.
맞은 편에 앉은 은주아는 식사를 위해 긴 머리칼을 가볍게 묶어내린 채였다. 그는 숟가락을 들다 말고 어디 굶고 다녔느냐고 묻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뭘 그리 며칠 굶은 사람 보는 것처럼 쳐다봐?"
배희신은 생각한 걸 입 밖으로 꺼냈다. 저 시선의 의미가 생각과는 다를지도 모를 일이다. 급하며 먹으면서 얼굴에 김칫국물이 튀었을 수도 있고. 배희신이 빈손을 들어 턱을 만지작거릴 때 은주아가 대답했다.
"그런 사람처럼 보이니까 그렇죠. 굶었어요?"
답은 생각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배희신은 자신의 눈썰미-라기보다는 눈치-를 칭찬해줘야 할지 고민하며 먹던 것을 깔끔히 넘기고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는."
굶으면 굶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배희신의 애매한 대답에 은주아가 이어 묻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작업 후반쯤에는 디디... 디안드레가 식사를 사다 줬거든. 전에 말했던가? 나 요리 못 하잖아."
물론 요리'도' 못하는 것이다. 능력을 사용하는 것외의 손재주는 괴멸적이라해도 좋을 만큼 문제가 심각하다는 사실은 은주아가 소장중인 '황천의 뒤틀린 백조의 절규'로써 잘 알 수 있다. 만약 배희신이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밥을 해먹는 날은 세계 식량 위기가 닥쳤거나 당장 보급품을 받을 수 없어 풀뿌리라도 캐먹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일 것이다. 배희신은 말하는 동안 뒤적거려 한 김 식은 선짓국을 다시 들이켰다.
은주아가 그런 의심을 할 만한 배희신의 식사법의 이유는 별 다른 게 없었다. 원래도 느긋하게 먹는 성격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남이 사주는 밥을 먹으니 맛있었을 뿐이다. 배희신이 그렇게 대강 둘러 얘기하니 은주아는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다가 비어가는 접시에 깍두기를 듬뿍 덜었다. 배희신은 은주아가 접시를 내려놓기가 무섭게 하나를 더 가져가 앞니로 반을 뚝 잘라 먹었다.
두 사람이 어느정도 식사를 끝마치고 입가심할 무렵 배희신이 말을 꺼낸다.
"아가씨. 아까 발찌 얘기했잖아."
"네. 가능하죠?"
너무도 당연하게 그러리라 믿은 클라이언트의 신뢰에 기분이 좋다고 해야 할지. 하지만 가능하니 뭐 불평을 할 건덕지도 없다. 배희신의 아티팩트가 인기를 얻는 이유 중 하나에 변형 가능한 점이 꼽히기도 했으니 안된다고 하면 자존심 구길 일이다.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배희신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한다. 이미 굳혀버린 아티팩트를 손상시키지 않고 다시 곱게 풀어내는 것은 조금 어려웠지만 겉으로 보이는 기능 자체는 길게 구상할 것도 없었다.
"처음에는 발찌 형태로 쓰고 발동하면 직접 리본을 묶을 필요 없이 발과 다리를 감싸 착용 되게끔 하면 되겠지."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보통 방어구로 쓰이는, 몸에 착용하는 종류의 장비들은 대다수 그렇게 만들어진다. 배희신은 두 손으로 허공에 둥글게 감싸는 시늉을 하다가 손을 내려두며 팔을 탁자 위에 올렸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좀 있어."
"듣기로는 멀쩡할 것 같은데요."
"아니. 기능은 멀쩡한데. 아무래도 발찌면 커플 아이템처럼 보일까 봐."
"......?"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이런 헛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 사람은 은주아도 살면서 얼마 못 봤을 게 분명하다. 어쩌면 처음 목격하는 중일지도 모르고. 세상에는 몰라도 될 일이 하늘의 별처럼 많은데, 그중 하나를 알아버린 은주아는 대놓고 질색하는 얼굴을 만들었다. 세련되지 못한 아저씨의 저질스러운 농담에 걸맞은 반응이었다.
배희신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가 몇십 년 전부터 늘 착용하고 있던 발찌 '높이높이' 였다. 다만 이 발찌의 특별한 점은, 다른 장비들은 사용할 때 장신구에서 무기로 변하지만 발찌는 별다른 변화 없이 증강 효과를 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배희신과 몇 번 던전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은 그가 그런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은주아에게는 하등 쓸모가 없었다.
"내가 아저씨 발목에 뭐가 달렸는지 일일이 관심 두는 사람처럼 보여요?"
그 물음 아닌 대답에 배희신은 큭큭 웃음을 흘렸다. '커플 아이템'이라는 단어보다는 은주아 자신이 그에게 신경을 쓸 것이라는 오해 자체에 집중한 말이었다. 배희신은 농담으로 얻은 반응치고는 격렬한 것이 꽤 재미있다는 짓궂은 생각을 한다.
"아."
그렇게 있자니 은주아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는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기색을 엿보이더니 결국 입을 연다.
"회심의 플러팅이었다면 미안해요. 배희신씨는 내 스타일이 아니라."
"풉."
"왐마야..."
은주아의 말에 물을 마시던 배희신은 입 밖으로 액체를 뱉어내려던 걸 간신히 참아냈고, 미리 상을 치우러 다가왔던 사장님이 감탄사를 흘렸다. 사장님은 두 사람을 흘끔흘끔 쳐다보더니 안타까운 눈으로 배희신을 슬쩍 바라보고는 빈 그릇만 후다닥 챙겨서 부엌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후 부엌이 묘하게 조용해졌는데, 직원들과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맛깔나게 나누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졸지에 식당에서 미인을 꼬시다가 차인 사람이 되어버린 배희신은 휴지 한 장을 뽑아 축축한 입술을 닦았다. 입안 가득 물을 한 번에 꿀떡 넘겨버린 탓에 목 안이 얼얼하다. 배희신은 몇 번 기침을 하여 간신히 졸린 목구멍을 풀었다.
"이거 뭐... 그거냐? 시작도 안 했는데 끝나버렸다는?"
배희신이 몇 백년 전 아이돌이 불렀던 노래 가사까지 떠올리며 황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그렇다쳐도 옛날엔 연애라면 일가견이 있다 자부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디 레스토랑이나 하물며 볕좋은 공원도 아닌 곳에서 플러팅 치다 차인 사람이 되다니. 만약 배희신이 과거의 보잘 것 없는 영광을 그리는 사람이었다면 그 위대한 업적을 줄줄이 읊어 은주아의 경멸을 샀겠지만 다행히도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은주아는 배희신의 목소리와 표정이 어떻든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누가 장난치래요."
"그래, 다 내 업보지."
배희신은 제 앞머리를 흩뜨렸다. 그 말대로 자신이 시작한 일이었으니 고소하냐고 물으려다 말았다. 어쩌면 이미 대답을 알 것 같아서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발찌 디자인이나 보내줘. 또 쓰지도 않을 것에 내 돈 쓰고도 잔소리 듣고 싶지 않으니까."
"알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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