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신주아

after waking up

미션

로나OC by 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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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를 보낼 수 없습니다.

선택한 대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반투명한 가이드 창이 무심하게 문장을 띄웠다. 목소리가 있다면, 온기 한 점 없으리라.

괜찮아? 상황은 어때.

다시 한 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깨 위에 내려앉은 나비는 느릿느릿 날개를 접었다 펴며 새로운 명령을 기다릴 뿐이었다.


언제부터 눈을 감고 있었지? 어느 순간부터 짙은 어둠이었다. 끊어질 듯한 두통 속에 기억을 더듬어봐도 마침내 상황이 정리되어 안심한 나머지 힘이 빠져 쓰러졌다- 같은 안락한 마무리 따위는 없었다. 시멘트에 파묻힌 양 차갑고 뻣뻣한 숨이 매캐한 목구멍을 몇 번 드나들고 나서야 배희신은 간신히 눈꺼풀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그마저도 몹시 무거운 나머지 포기할 뻔했지만, 기어코 빛을 눈에 담는다.

"정신이 드세요?"

가물거리는 시야에 누군가가 있다. 그 사람은 코앞에 있으면서도 마치 멀리 있는 사람을 부르는 것처럼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정말로 먼 곳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귀가 먹먹하다. 배희신은 한 번 더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고 나서야 자신이 누워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린 것은 바닥에 고인 핏물이 고막에 들어찬 탓이었다.

"뭣…"

무어라 말을 하려는 순간 진흙덩이를 삼킨 양 속이 텁텁하여 쿨럭거리며 기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가슴팍을 세게 걷어차인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눈을 감고 있을 때부터 줄곧 그를 괴롭히던 두통도 사라질 기미 없이 온 머리를 왕왕 울려댄다. 배희신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킬 엄두도 내지 못했다. 단언컨대, 이토록 괴로운 고통은 난생처음이다.

그런 배희신의 상태를 지켜보던 사람은 오히려 안도한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의사는 제 옆에 두었던 하얀 상자를 부스럭부스럭 분주하게 뒤적거렸다. 배희신은 찡그린 눈으로 그 사람을 살핀 후에야 그가 의사임을 알았다. 잔뜩 더럽혀졌지만 못 알아보려야 못알아볼 수 없는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정리해보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모를 이 의사가…

"들리시죠? 심장이 잠깐 멈췄었어요."

"지랄…"

의식의 흐름을 붙들지 못하고 순식간에 비속어를 내뱉은 배희신은 양심의 가책 하나 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살면서 한 번 겪으면 끝인 게 당연해야 할 죽음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정신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라고는 하지만 사실 배희신은 그 '몇' 중 하나에 속했다. 제정신이었으나,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체력이 없었을 뿐이다.

의사는 '멀쩡해 보이시네요.' 하고 침착한 진단을 내린 후 액체가 담긴 병의 마개를 열어 배희신의 발에 훌훌 뿌렸다. 차가운 것이 닿자 발가락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 자극을 기점으로 간신히 한 조각의 이성을 되찾은 배희신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뇌를 힘겹게 굴린다.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었다.

"왜…?"

배희신의 사인(死因)은 무엇인가.

아까 그가 스스로 되짚었듯, 배희신은 죽기 직전의 기억이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몬스터에 습격당한 적도 없고, 머리 위를 보호하던 '필멸의 염원' 덕에 검은 비를 뒤집어쓴 적도 없다. 도통 그럴듯한 이유를 생각해낼 수 없었다. 만약 배희신이 언커먼이 아니었다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레 알 수 있었을 이유를.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예요."

의사가 조금은 한심하다는 듯, 그리고 걱정스럽게 답을 알려주었다. 배희신은 그제야 놀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의사가 자신의 발에 뿌린 것이 포션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레 깨닫는다. 평소대로라면 박힌 가시를 빼냈을 때 자연스럽게 아물었어야 했을 상처가 남은 것이다. 배희신은 상처가 아물며 올라오는 따가움과 간질거림을 느꼈다.

"살았어? 죽었어?"

혼란스러워 한 마디 제대로 못 하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던 배희신은, 이번에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는다. 바닥을 딛고 달려오는 발소리. 고개를 흘끔 돌리니 머리카락에 무언가를 둘둘 감아 든 채 가까워지는 재즈가 보였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배희신은 생각하던 것도 잠시 잊고 탄식을 뱉으며 제 눈을 쓸어내렸다.

"쟨 왜 저래."

"적어도 제가 저분을 만났을 때엔 이미 저 상태였어요."

팔이 똑 떨어졌잖아.

배희신은 예의 그 짜증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이리저리 살피려 드는 재즈의 팔뚝에 시선을 던졌다. 베였다기보단 뜯겼다는 쪽이 더 어울릴까. 서포트 메신저로부터 소식을 들으려 한 적이 없었기에 던전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모르지만, 피차일반으로 위험한 상황이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재즈는 배희신이 눈을 뜨고 움직이는 것을 보며 그가 살아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의사가 배희신에게 심장 마사지를 시도하고 있는 걸 보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배희신에게 돌려보내려던 나비도 주인을 인식하지 못한 채 허공을 맴돌더니,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가이드 창을 띄웠다.

메세지를 입력해주세요.

수신자 : 배희신

서로를 탐색하는 것도 잠시, 재즈는 깜빡 잊었다는 듯 자신이 가져온 것을 의사 앞에 내려두었다.

"이게 진짜 필요해?"

재즈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바라보니 수혈팩이다. 배희신은 재즈와 똑같이 물어보고 싶었으나 눈치껏 입을 꾹 다물었다. 의사는 재즈가 가져온 수혈팩을 관에 연결해 끝에 달린 주삿바늘을 배희신의 혈관에 꽂아넣었다. 팩이 홀로 허공에 떠오르는 걸 보면 던전 부산물로 만든 특수 아이템이거나, 의사가 치료에 관련된 능력을 갖춘 듯했다.

재즈는 여전히 이상하다는 눈초리다. '피의 대장장이'가 남의 피를 수혈받고 있다니 스스로도 믿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언커먼이 되기 전에는 크게 다친 적이 없고, 각성한 후로부터는 수혈은커녕 매일같이 헌혈하고 있었으니.

배희신은 밀려드는 추위와 혼곤함을 참아내며 재즈를 올려다보았다.

"앉아서 얘기 좀 해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거지?"

"얘기는 무슨… 나 바빠. 다른 사람한테 듣든가."

재즈가 투덜거리며 자리를 뜰 기색을 보이자 배희신이 재빨리 말을 잇는다. 명백히 한심하다고 여기는 목소리였다.

"그 팔로 어딜 가서 뭘 하려고? 너도 여기 누워서 수혈받고 싶어? 도움받던 민간인도 네 꼴을 보면 벌떡 일어날 거다. 병자를 일으키는 기적의 언커먼이라도 될 모양이지."

배희신의 신랄한 문장에 재즈의 얼굴에 화가 올라 붉어졌지만, 웬일인지 곧장 날아올 것만 같던 대꾸는 없었다. 재즈를 붙잡으려고 일부러 더 험한 말을 꾸며냈던 건데 효과가 너무 좋았는지. 재즈는 땅을 한 번 세게 걷어차더니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옆에서 우물쭈물 상황을 지켜보던 의사가 응급상자에서 붕대를 꺼내 처치를 시작한다.

"길드장이 죽었어."

재즈가 대뜸 결론부터 꺼냈다. 하지만 배희신은 그게 결론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배희신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생각하다가, 결국 말문을 튼다.

"어디 길드장?"

"루바토지 어디긴 어디야?"

"임한얼?"

"아, 몇 번을 말해!"

빽 소리치는 것을 듣자 그제야 실감이 난다. 배희신은 저도 모르게 번쩍 뜨고 있던 눈을 반쯤 나른하게 내리 접었다.

"...그런가."

죽었나, 그 애송이 길드장이.

짧은 감상이 스친다. 슬프다기엔 얄팍하고 아무렇지 않다기엔 무거운 감정이 머리를 내리눌렀다. 언커먼으로서 살아간다는 건 언제나 죽음을 곁에 둘 수밖에 없음을 몇십 년 동안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는데.

배희신이 한마디를 끝으로 다시 입을 다물자, 재즈의 말이 이어졌다. 던전에 나타난 기괴한 몬스터들, 정체불명의 봉인구, 마지막 방에서 나타난 보스 몬스터로 추정되는 거대한 존재와- 사람들을 탈출시키고 찢겨나간 임한얼까지.

"잘한 선택이었어. 결론적으로 희생을 최소화했으니까."

재즈는 찝찝한 표정으로 마지막 말을 마쳤다. 모두가 죽었어야 했을 운명이 단 하나의 목숨만으로 끝났다는 건 성과라면 성과겠지. 그렇게 던전을 빠져나온 이들에게 더 나은 상황을 안겨줄 수 없었다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배희신은 생각의 진로를 돌려 가이드 창에 떴다던 메시지에 대해 떠올렸다.

"조건이 맞지 않았다라. 어이가 없군."

"여태껏 그렇게 제멋대로였던 던전은 없었을걸."

당시를 떠올리는지 재즈는 잠시 입을 다물고 허공을 응시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 또한 어떠한 이름 모를 감정을 곱씹는걸 지도 모른다. 배희신은 방해하지 않고 늘어뜨린 손을 까딱이며 단어를 여럿 떠올렸다.

"중간에 '월'이 들어갔다면 초월자가 가장 그럴듯한가. 다른 건 뭐…회귀자 같은 거라든지."

"진심이야?"

"절반은."

재즈가 미묘한 얼굴로 말했지만 배희신은 아무렇지 않게 되받아쳤다.

"너도 그 이상한 꿈을 꿨을 것 아니냐. 가이드 창에도 떴고."

되돌릴 것인가, 나아갈 것인가.

"...하지만 정말 그랬다면… …빌어먹을."

만약 조건 중 하나가 '회귀자'라면 아직 그들은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던 것이다. 재즈는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지?"

배희신은 조금 허탈한 목소리로 말했다. 첫 번째 시도에서는 절대로 트루엔딩을 볼 수 없는 게임 같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게임의 설계자에게 욕이라도 날려줘야 속이 시원하겠다.

"레벨이 부족했던 거지. 레벨이…"

농담같은 말이었지만 침잠하는 목소리는 그가 가벼히 말한 게 아님을 알려주었다. 레벨이 부족하다 뿐인가. 사망한 캐릭터가 소지품을 잃어버리듯, 배희신은 자신이 무언가를 빼앗겼음을 안다. 누군가에겐 당연했을 쉬이 돌아오지 않는 상처와 타인의 피를 필요로 하는 몸.

그것은 아마…

"......"

재즈는 별말 없이 이제 거의 눈을 감은 배희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흐린 초점은 무언가 다른 것을 보는듯하다. 그들의 침묵은 눈처럼 고요히 속절없이 밀려드는 멸망 위에 내려앉는다. 그 순간만큼은 꼭 거짓말처럼 평화로운 것만 같았다.


의사는 자리를 떴다. 수혈이 끝나기도 했고, 연구소 근처에는 당장 구해야 할 사람이 많았다. 거동이 힘든 배희신을 위해 구급차를 불러주겠다고는 했지만, 이 부근이라면 차가 부족해 기다림이 길어질 것이 뻔했다.

배희신은 갈비뼈가 부러졌으니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당부하는 의사에 말에 어쩐지 가슴팍이 아프더라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아프더라니- 하고 끝날 통증은 아닐 테지만 원체 고통에 익숙해져 온 몸이기도 했고, 인벤토리를 탈탈 털어 나온 진통제를 먹은 후라 그럭저럭 건사할 수 있었다.

배희신은 언제부터 짱박아둔건지 살짝 가물거리기 시작한 심율하의 증혈제도 찾아내어 말끔하게 비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10개들이로 왕창 사둘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그때 미래를 읽을 수 있었다면 사경을 헤맬 일도 없었겠지.

재즈도 제 갈길을 찾아가 다시 홀로 남겨졌을 무렵, 코끝에 나비가 나붓이 내려앉는다. 배희신의 눈앞에 붉은빛이 어른거렸다. 하필 앉아도 왜 이런 곳에 앉아서는. 배희신은 굳이 두 눈동자를 가운데로 모으려 하지 않고 손을 휘저어 전령 나비를 날렸다.

"...배희신씨?"

흐린 목소리가 들렸다. 역시 익숙하다. 배희신은 돌아온 전령 나비의 주인을 바라본다. 부러진 가로수 기둥에 기대어 앉은 덕에 힘겹게 고개를 들지 않아도 상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탁. 탁.

금속이 바닥을 짚는 규칙적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지만, 잠깐이라도 부정하고 싶었다. 배희신은 종아리 아래로 텅 빈 은주아의 왼쪽 다리를 오래 보지 않았다. 엉성하게 끊긴 파이프를 지팡이 삼아 선 은주아와 배희신은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지 못한 채 맞닥뜨렸다.

재즈도 그렇고, 이들은 왜 어딘가 하나씩 날려 먹은 게 당연한 것처럼 다가오는지. 배희신은 리플리마저 어딘가 떨어져 나갔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지만 잠시 생각을 접고 겨우 마른 입술을 뗐다.

"필요하지?"

주어가 없었으나 의미는 확실하다. 은주아는 엉망진창 더러운 몰골을 한 배희신을 보고 망설이는 기색이 있었지만 늦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희신은 감히 그를 이해한다. 불편한 다리로 이곳까지 걸어온 이유, 그건 배희신을 걱정해서도 뭣도 아니다.

“...미안해요. 당신도 멀쩡하지 않은 걸 뻔히 보고도 부탁할 수밖에 없어서.”

은주아의 간절함은 이곳에 없다. 더 먼 곳으로 향하기 위해 멈출 수밖에 없는 역참일 뿐. 배희신은 그걸 자랑스레 여겨야 할지, 안타까이 여겨야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숨을 가다듬는 동안, 은주아는 다시 한 번 미안하다 읊조렸다. 배희신은 그제야 차게 식은 손을 움직인다.

“사과하지 마. 아가씨는 좀 더 이기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어. 미리 더 챙겨줄 걸 안일했던 거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먹을 꾹 움켜쥐자 아무렇게나 흩어져있던 피가 스멀스멀 모여든다. 몬스터를 막아내느라 소모된 것을 제외하면 양은 제법 되었다. 평소처럼 직접 피를 내지 않고 이미 흘린 것을 주워담는 모습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기를 바랐다. 은주아가 냉정하게 상황을 살필 여력이 못 된다는 사실이 이점에서만큼은 다행이다.

넘실넘실 모여든 피가 은주아의 오른쪽 다리의 토슈즈에 빨려 들어간다. 피가 사라지는 만큼 발등에 새겨진 시간 또한 빠르게 줄어들어, 이내 0을 나타냈다. 배희신은 그치지 않고 은주아에게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은주아가 비틀비틀 다가오면 손바닥으로 그의 발등을 덮는다.

토슈즈는 두 짝으로 이루어진 별개의 물건으로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하나의 장비다. 은주아의 다리가 훼손되며 신고 있던 토슈즈 한 짝이 함께 떨어져 나갔던들, 금세 제 쌍을 찾아 들러붙었을 터. 배희신은 두 팔을 잃은 재즈를 떠올렸다. 그리 오래지 않은 날 그에게 제작해주었던 장갑도, 손 하나만이라도 지켰다면 쉽게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배희신이 천천히 손을 떼어내자 방울방울 피어오른 핏빛 조각이 새로운 짝을 만들어낸다. 은주아는 조금 놀란 것 같았어도 시선은 회의적이었다. 더는 신을 발이 없는 탓이다. 배희신은 마치 신데렐라의 유리구두처럼 덩그러니 남은 토슈즈를 쥐었다.

"튼튼한 신발이면 충분할 거로 생각했는데, 조금 더 욕심을 내야겠군."

배희신은 토슈즈의 모양을 흩뜨렸다. 말랑한 찰흙처럼 울렁이는 덩어리를 은주아의 다리 밑에 갖다 대자 기다렸다는 듯 철썩 들러붙은 것은 바닥을 향해 길게 뻗어 디뎠다. 단순하고 투박한 모습이었지만 잠시간 빈자리를 채우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배희신은 씁쓸한 입맛을 삼켜내고 말한다.

"아가씨가 가고 싶은 곳에 다다를 때까진 버텨보라 할게."

얕은 장난기를 품은 목소리다. 배희신은 남은 피를 있는 대로 긁어모아 둥근 구슬 형태로 뭉친 것을 은주아에게 건넸다.

"급하면 이거 쓰고. 다음에 다시 만나면 네 다리, 완벽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무리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모두가 건조한 공기 속에 서서히 말라죽는 금붕어처럼 필사적으로 퍼덕이고 있을 따름이다.

은주아가 다시 한 번 미안하다며 입을 달싹였으나, 소리는 나지 않았다. 배희신은 한 번 타박하려다 말았다.

"무사하세요. 더 다치지 말고."

"그래."

"이따 봐요."

짧은 인사는 바람처럼 흩어졌다. 배희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떠나가는 은주아를 배웅했다. 그리고 그제야, 아까부터 시야 한구석에서 존재감을 잃지 않는 푸른 가이드 창으로 시선을 돌린다.

01. 되돌린다

02. 나아간다

'이따' 란 과연 언제가 될는지. 과거? 미래?

배희신은 자신의 상실을 깨달았을 때만 해도 굳건했던 선택지를 쉽사리 누르지 못했다. 혼자였다면 망설이지 않았을 텐데. 이미 비어버린 것들을 본 후였다.

"돌겠네."

배희신은 무엇도 누르지 못하고 가이드 창을 내렸다.


그가 [ 나아간다 ] 를 선택한 것은 며칠이 지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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