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이유
배희신은 균열 근처에서 간신히 회수해 온 장갑을 둘러보았다. 재즈가 팔을 잃으며 함께 잃어버렸던 장비다. 본판이 배희신의 특별한 혈액으로 이루어진 터라 수복은 그의 능력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했지만, 문제는 이제 더는 장갑을 쓸 만한 요건이 안된다는 것이다.
"하여간."
괜히 혀를 쯧 차고는 장갑 '붉은 가시'의 형태를 허물어뜨려 뭉글뭉글한 액체로 되돌린다. 원래 장비 변경은 추가금을 받아야 했지만 정산금을 따지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일단 몸에 걸칠 수 있는 적당한 장신구로 만들어 두고 재즈에게서 새 의뢰를 받을 셈이었다.
[ 네 장갑 찾았는데 그대로 쓰긴 뭐할 거 같아서 다른 걸로 바꾸려는데 괜찮지? ]
재즈에게 메시지를 보낸 배희신은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다가, 금방 돌아온 답장에 의외라는 듯 다시 화면을 켰다.
[ 맘대로 ]
"...흠?"
답장을 읽은 배희신의 표정이 미묘해진다. 아무리 메신저라고는 해도 이런 맹맹한 느낌으로 보낼 사람은 아니었는데. 배희신은 문득 헤어지기 전의 재즈가 평소보다 조금 더 조용했다는 것을 떠올린다.
[ 진짜 맘대로 만들어? 뭘 만들 줄 알고 ]
[ 상관없어. 하고 싶은 대로 해. ]
이건 좀 심각할지도 모르겠는데. 배희신은 메신저를 내려두고 냅다 전화를 걸려다가 말았다. 어쩌면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에 잠시 차분해졌을 뿐일지도 모르니까. 조금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지 누가 알아. 그게 아니라면 장비를 전달하면서 슬쩍 들여다보면 될 일이다.
-가는 걸 그대로 보내는 게 아니었나. 짧은 후회도 해보고.
[ 나중에 후회하지 마라 진짜? ]
그렇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내고는 이번에야말로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깊숙이 밀어넣었다.
배희신은 약간의 피를 내어 형태를 잃은 재즈의 장비를 둘둘 감싸 두었다. 그리고 인벤토리에 넘쳐날 정도로 꽉 채워 둔 증혈 포션 하나를 꺼내어 입에 털어 넣는다. 급하게 공수해 온 물품이었기 때문에 효능 외에 단 1mL도 고려하지 않은 지독한 맛이다. 배희신의 얼굴이 해괴하게 일그러지자 벤치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던 은주아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부터 뭘 그렇게 마셔요?"
"영양제. 병원에서 잘 먹으랬거든."
"그런 거치고는 굉장한 얼굴인데."
"지겨워서 그래. 지겨워서."
배희신은 은주아가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가능하면 자신이 회복 능력을 잃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길 바랐다. '피의 대장장이'에게서 장비를 받아갔던 사람들이 하나둘 찾아오려 연락을 해오는 이 시점에 "다음에 오세요." 라며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어디가 안 좋은 건데요."
하지만 대놓고 물어보는 것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배희신은 은주아가 벗어둔 토슈즈 한 짝, 그리고 간이 의족 한짝을 양손에 들었다. 삐딱한 고개와 삐딱한 시선으로 은주아를 쳐다보았지만, 은주아가 그런 것에 겁을 먹을 위인이었다면 애초에 질문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은주아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낸다.
"내가 하나하나 추리해서 스스로 답을 내길 바라요?"
"모른 척해주길 바라지."
땅에 버려진 피를 다시 한방울 한방울 그러모으던 모습을 봐버린 이에게 안 통할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 멀쩡한 줄 아는 척. 그냥 받을 거 다 받아먹길 바라지."
"진짜 말이 되는 소리를 해요. 이런 때에도 헛소리가 가만있질 않네."
은주아의 신랄한 말에도 배희신은 태연하게 '영원의 춤'을 뭉그러뜨렸다. 은주아는 배희신이 하는 일을 빤히 바라보다가 제 멀쩡한 무릎을 세워 끌어안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이 무리하는 작업이라면 그거 안 받을 거예요. 피를 더 뽑아야 한다거나, 더 많은 피가 필요하다거나."
"이미 다 알면서 묻네?"
배희신은 어이없다는 듯 말하고는 준비해 온 얇은 줄자를 꺼내어 은주아의 발치에 다가가 빈손을 까딱였다. 끌어안은 다리를 얼른 내놓으라는 신호였지만, 그렇기에 은주아는 거부한다. 대신 대답이나 하라며 재촉했다. 배희신은 갑갑한 마음에 헝클어진 머리칼을 길게 쓸어올렸다.
"그런 거 아니야. 이미 있던 거 재활용하는 거라니까."
"사실이라는 증거는?"
"있겠냐고. 만드는 동안 계속 감시라도 할 거야?"
짜증스레 말하고는 다시 손을 까딱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억지로 발을 잡아챌 기세다. 은주아는 배희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가늠하며 그의 표정을 한차례 살폈다가 결국 발을 내려주었다. 탑 위 라푼젤의 머리칼을 기다리던 왕자의 심정이 이랬을까. 배희신은 속으로 투덜대며 발과 다리의 치수를 꼼꼼하게 쟀다.
평소대로라면 간단하게 피를 내어 본을 떴겠으나 그랬다가는 눈앞의 아가씨가 훌렁 떠나버릴 게 뻔하니 약간의 수고로움을 감수할 필요가 있었다. 그 사이는 짧은 정적이었다. 근처에 세워진 구호소의 떠들썩함이 온 사방을 뒤덮고 있었으나 며칠 새에 익숙해져 버린 소란이다.
아까 재즈의 장비를 만질 때 냈던 손가락의 상처가 아직도 낫지 않은 것을 눈치챈 은주아가 넌지시 입을 연다.
"...이번 건 갚을게요. 어떻게든."
"그러든지."
배희신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괜찮다며 겸양을 떨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장 낫지 않은 몸으로 은주아를 도왔던 것이 자신의 고집이자 의지였던 것처럼, 은주아도 제 마음 편한 대로 움직이면 그만이다. …뭐, 거절하는 것이야 나중에 해도 되는 거고.
각각의 숫자를 모두 입력하고 저장한 배희신은 그제야 빈 다리를 돌아보며 둥글게 뭉친 핏덩이를 들었다. 토슈즈였던 그것은 금방이라도 주인에게 돌아가려는 것처럼 뭉글뭉글 울렁였다.
“그러고보니 너도 선택지가 떴겠지.”
“네. 다른 언커먼도 마찬가지인 것 같던걸요.”
배희신은 줄자의 끝을 잡고 그 반대편의 손잡이를 발로 밟아 늘였다. 자유로운 손으로 핏덩이를 가볍게 주무르자 매끈한 원통형을 띠며 모습을 바꾼다. 배희신은 그것을 다리의 단면에 한 번 갖다 댔다가 떼고 조금 더 매만졌다.
“옛날에 어떤 애가 그러더라고.”
시답지 않은 이야기라도 하듯 느린 숨이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배희신은 이상하리만치 고개를 들지 않아서, 은주아는 본능적으로 입을 다물고 가만히 들었다.
도선혜는 몸이 약했다. 50년 살아온 세월을 기적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그 탓에 그가 죽음을 준비해 온 시간은 벌써 20년이 넘었으며 목숨을 연명하는 하루하루 그만둔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제는 괜찮을 거라며 부드럽게 타이르는 주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안주하지 않았으므로.
"오래 살았지."
도선혜가 흡족한 목소리로 말했다. 투명한 산소마스크에 김이 서렸다 사라진다. 그 뒤로 '조금 지겨울 정도였어.' 라고 덧붙이는 바람에 침대 옆에 앉은 배희신이 머리맡 나무장식을 무식한 손아귀 힘으로 쥐다 못해 기어코 부러뜨리고야 말았다.
배희신은 자신을 질책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도선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목구멍에서 뒤엉킨 문장을 풀어내는 데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부서진 나뭇조각이 손에 파고들었으나 빼내면 그 정도의 상처는 금세 사라진다. 배희신은 손을 두어 번 쥐락펴락하고는 도선혜의 늘어진 손을 겹쳐 잡았다.
"왜 그런 말을 해."
"사실을 말하는 게 뭐 어때서."
정작 당사자는 태연했다. 도선혜는 입술을 질근질근 짓씹는 배희신을 한 번 흘겨보더니 한숨을 폭 내쉬었다.
"추하게 이러지 말자. 잘 보내주기로 약속했잖아."
"알아. 아는데…"
배희신은 가빠지는 숨을 삼켰다. 어쩌면 그의 누나인 배희연보다 더 오래 붙어 지낸 사람이다. 마치 제 몸뚱이가 떨어져 나가려 하는 것만 같았다. 작별인사를 할 새도 없이 모르는 어딘가에서 쓰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축복이라 할 수 있었으나, 배희신은 그런 것에 감사하고 싶지 않았다.
배희신은 도선혜의 손을 조금 더 세게 움켜쥐었다. 목구멍 가장 아래. 꺼내고 싶지 않았던, 그러나 수도 없이 준비해왔던 문장을 끄집어낸다.
"만약, 진짜 만약에. 내가, 너, 를 어떻게든 살릴 수 있는 방도를 찾아본다고 한다면…"
"배희신."
어느 때보다도 단호한 목소리가 배희신의 말허리를 잘랐다. 꺼져가는 숨결 위에서도 빛나는 눈이 있다. 배희신은 표정을 잔뜩 일그러뜨렸지만 한 번 다문 입은 열지 않았다. 가타부타 말을 이었다면 잔뜩 채찍질해 줄 요량이었던 도선혜는 얌전한 모습을 보곤 날세웠던 목소리를 누그러뜨렸다.
"들어봐, 희신아."
“잃어버린 안경 하나, 리모콘 하나 찾는 데에도 허리를 굽히고 소파 밑을 들여다보고 이불을 들쳐내는 것처럼 노동력이라는 대가를 내야만 하는데 커다란 것을 되찾기 위해서는 무엇을, 얼마나 많은 걸 소모해야 할지 누가 아느냐고.”
배희신은 1년 전 그날, 결국 준비했던 것을 제 용도로 쓰지 못했다. 도선혜에게 바치고자 했던 ‘검은 심장’은 그의 무덤 앞에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20여 년간 죽음을 준비했던 여자와, 20여년간 삶을 준비했던 남자는 그렇게 엇갈렸다.
“그래서 되돌린다는 선택지를 못 눌렀어. 미안하다.”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는다. 배희신은 집중하는 척- 여전히 뻔하기만 한 거짓말을 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사실 그는 이제 알고 있다. 이 발레리나의 상실이 자신의 신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단지 동료의 무사를 확인하고자 했던 배희신이 예기치 않은 누군가의 비극을 알게 된 것은 본의가 아니었다.
은주아는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마주치지 않는 남자를 그대로 두고 허공을 내다보았다. 잘려버린 새하얀 머리칼이 어깨 위로 살랑거렸다. 계절에 맞지 않는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다.
“그게 왜 미안할 일인가요? 당신에게도 그런 사정이 있듯이, 제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었으니 서로가 다른 선택을 한 것뿐이잖아요. 게다가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래.”
배희신은 어느새 완성된 뼈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변함없이 심드렁한 얼굴로.
“그럼 못들은 걸로 해. 의족은 처음부터 만드는 게 아니라서 하루면 충분하니까 연락하면 찾으러… 아니, 갈게.”
한 번 크게 숨을 들이켠 배희신은 잠시 그대로 멈췄다가, 이내 푸우- 털어놓듯 내쉰다. 버릇처럼 뒷목을 긁적였다.
“모두의 바람이 이뤄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애새끼 같은 말이나 하게 되네.”
그러나 그럴 일은 단연코 없으리라 생각하는 걸 보면 이미 찌들대로 찌든 어른일 수밖에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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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신아. 나를 사랑해?”
“사랑해.”
“어쩜 좋아. 결혼 안 해줘서 서운하겠네.”
“한때는 그랬는데. 이제는 안 그래.”
“어머.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변해. 그리고 가족이랑 결혼할 순 없잖아.”
“가족이라니, 막이래. 희연언니가 서운해하겠다.”
“헌 동생 버리고 새 동생 생기면 더 좋아할 사람이니까 신경 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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