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않았어
개인로그
후줄근한 차림새에 제대로 된 것은 위에 걸친 하얀 루바토의 코드 한 벌. 한 손에는 만개한 붉은 장미 꽃다발이 들렸다. 그나마 대충이라도 묶어내렸던 머리칼은 머리끈 한줄 온데간데 없이 풀려 바람결에, 발걸음에 한들한들 흔들린다. 아무리 잘 닦인 길이라지만 거무죽죽한 낡은 슬리퍼를 신고도 잘만 걷는다.
터덜터덜 걷는 모양새는 양반이 저리가라 느긋하게 평탄한 산세를 가로지른다. 길 옆으로 높이 뻗친 나무는 서늘한 그늘막이 되어 걷는 사람으로 하여금 얕게 난 땀조차 금세 식게 만든다. 고되지 않아 사람들에게 인기있을 법한 길은 최근 들어 시들했다. 삶이 치열하여 취미에 여념을 두지 못했으므로, 반드시 오고자 하는 사람들만이 이 길을 지났다.
이윽고 도착한 전망이 탁 트인 낮은 동산은 넓은 부지에 크기가 서로 다른 묘목이 넓은 간격으로 몇 개 심겨있다. 배희신은 익숙하게 한 나무를 찾아갔다. 다른 나무들에 비해 현저히 어려보이는 얇은 가지를 지닌 나무 뿌리 부근에는 푯말이 심겨있다.
"오랜만인가. 그동안 좀 바빴어."
아무렇지 않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장미 꽃다발을 나무 앞에 내려두며 그대로 바닥에 털퍽 주저앉아버린다. 양반다리를 하고 등을 늙수구레 굽힌 채 나무 밑기둥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올 적엔 늘 할 말이 많았다. 오늘도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튀어나오지 않아 머릿속만 하염없이 맴돌았다. 사실 잃었다는 게 잘난 말솜씨였던 모양이지. 나무의 주인이 알았다면 한 마디 해주었을 볼품없는 모양새다. 배희신은 그 사실을 알았기에 큼직한 두 손으로 제 얼굴과 머리를 마구 문질렀다.
더욱 형편없어진 남자는 그제야 입을 연다.
"살거야."
속이 갑갑하여 목소리마저 억눌린 듯 흐렸다. 그럼에도 배희신은 다시 한 번 말한다.
"괜찮아. 너보다 두 배는 살거니까."
배희신이 가볍게 손짓하자 병 하나가 튀어나온다. 이전까지 먹던 증혈제와는 다른 거무죽죽한 색이 그를 반겼다.
[ 부작용이 있어. ]
의외라면 의외라고 해야 할지. 새로운 포션, 그 제작자를 소개해 준 것은 다름아닌 재즈였다. 그가 이전에 다니던 연구소였다던가.
[ 신경 안 써. ]
배희신은 재즈가 일러준 용법을 머릿속으로 차분히 떠올리며 뚜껑을 열고 그대로 목구멍에 꽂아넣었다. 차가운 액체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감각이 선명하다. 병이 모두 비고, 남은 한 방울까지 아깝다는 듯 탈탈 털어마신 후에야 팔을 내렸다.
길게 자란 여린 잔디가 맨 다리를 간질인다. 돋아난 잎사귀 몇 장이 고작이라 앙상하기 짝이 없는 나무지만 바라만 봐도 질리지 않는 것이, 마치 그 아래 묻힌 사람과 닮았다. 불현듯 사무쳤으나 울지 않았다. 대신 눈물샘으로부터 굵게 방울져 떨어진 것은 색을 지닌 것이다.
그것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보석처럼 빛을 내며 허공에 떠올랐다. 배희신은 붉게 번진 흰자를 부릅뜬 채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염없이 흐르는 피는 턱 끝에 맺혀 떨어지는 족족 그의 '재료'가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면 현장은 이미 참혹한 꼴이 났을 것이다. 배희신은 짧게 혀를 찼다.
"효과 죽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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