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에 도달한 후엔
개인로그 / 엔딩로그
'화염의 대장간'은 제법 아늑한 공간이었다. 담금질과 망치질이 필요치 않은 그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한 장소는 대장간의 이름과 다르게 불도 망치도 모루도 없다. 있는 것은 침대만큼이나 널찍한 소파와 전기를 쓰지 않는 냉장고, 예의상 놓여있는 것 같은 탁자와 의자정도다.
마치 무도회장 하나를 통째로 옮겨놓은 것처럼 거대한 공동은 바닥에 넓게 깔린 색색의 무늬 러그 덕에 그나마 공허해보이지는 않았다. 배희신은 대다수가 술로 이루어진 음료들과 약간의 안줏거리 사이에서 작고 뚱뚱한 캔 하나를 꺼내들고 뒤를 돌아 그 빈 공간을 바라본다. 뒹굴뒹굴 누워 쉬기에는 좋지만 정말 빈말으로라도 멋지단 얘기는 나오지 않는 곳이다.
[ 네 상상력이 빈곤해서 그런 게 아니더냐. ]
툴툴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꼭 천장 한가운데에 스피커를 달아둔 것처럼 웅웅 울린다. 밖에서는 가이드 창을 통해 간접적으로 메시지를 전했던 ‘가장 뜨거운 쇳물’은 대장간 안으로 들어오면 스스로 말을 걸었다. 이곳에서는 자신의 힘을 조절할 수 있다나 뭐라나,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은 적이 있었지만 배희신은 주의깊게 듣지 않아 기억하는 것은 없다.
배희신은 익숙하게 목소리를 무시했지만, 이 공간이 이런 꼬라지가 된 것이 자신의 몫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만약 배희신이 소망하는 것이 많았다면 성좌의 수식언처럼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쇳물이 흐르는 폭포라도 만들 수 있었을 테지만, 배희신은 그런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소박한 주문 하나만이 이 공간에 반영되었을 따름이다.
‘뭐, 이제 이곳을 오래 쓸 일이 있을까 싶긴 하지만.’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세상을 떠올린다. 크나 큰 상처를 입었지만 아무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언커먼들이 또 다른 무기를 필요로 할 것이며, 또 회수하게 될 것인가? 실낱같은 직감이 그것은 흔치 않으리라 말한다.
“당신은 안 가?”
배희신이 허공에 묻자 목소리가 돌아온다.
[ 남는게 싫은가? ]
“어차피 이제 더 볼 것도 없으면서. 원래 영화가 끝난 후 극장을 뜨는 것이 관객의 도리가 아니겠냐고.”
뚜껑 딴 술을 홀짝이는 동안 짧은 침묵이 스쳤다. 사실 배희신은 이 성좌가 남든, 떠나든 별 감흥이 없었다. 단지 궁금했을 뿐이다. 멸망이라는 자극적인 컨텐츠가 끝난 이 세계에 성좌가 남아있을 이유가 있는지.
[ 어차피 필멸할 인간의 생은 짧디짧아서 좀 늦게 간다고 달라질 것도 없는 것을. ]
“그거 되게 후회할 걸. 뒤에 남는 건 재미없는 광고뿐이라고.”
[ 네가 언커먼이라면 아무리 몸을 사려도 결국 또 다른 사건에 휘말리고 말테니까. ]
“차라리 저주를 내려라.”
배희신은 쯧쯧 혀를 차며 잠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이내 표정을 풀어버린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걸. 나는 평범한 사람이니까.”
[ 언커먼이? ]
“상관없이.”
배희신은 자신의 능력을 귀히 여겼으나 남다르다 느끼진 않았다. 어느 누구나 자신의 특별한 점은 하나씩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고, 자신에겐 그것이 ‘언커먼’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을 뿐이었다. 모두가 특별하다는 것은 결국 모두가 평범하다는 말과 다를바 없었다. 그러므로 배희신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언제나.
“음?”
그때 눈 앞에 장비 수리 요청창이 뜬 것을 본 배희신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무리봐도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한, 꼭 날파리라도 쫓는 모양새다.
“이제 눈 감아. 손님왔다. 고상하신 성좌님도 프라이버시는 지켜주셔야지.”
[ 너란 녀석은… ]
‘가장 뜨거운 쇳물’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다 이내 시선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언제든 나타날 것이다. 아직 떠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배희신은 이 성좌가 언제쯤 자신에게서 흥미를 떨굴지 감히 예상치 못했고, 그래서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절뚝이며 빈 공동을 가로지른 배희신이 이윽고 손님을 초대했다. 곧 환한 빛이 허공으로부터 한 사람을 툭 뱉어낸다. 배희신은 어느샌가 제 발치에 머리를 부비는 까만 고양이- 이코르를 흘끗 내려다보았다가 팔짱을 끼며 손님을 마주보았다.
“이번엔 뭘 망가뜨려서 오셨나.”
많은 것이 변했으나, 다시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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