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롬_즈라한] 정오의 대련


@셜 님의 리퀘였습니다 :)

정오의 대련

 

 

 

야외 단련장은 아발론 왕성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많은 것들이 깨어있는 한낮의 태양빛이 눈 부셨다. 그 화려하게 쏟아지는 황금빛 속, 수많은 단련들로 거칠어진 흙바닥에 틈틈이 고이는 것은 서로를 마주 본 크롬과 즈라한의 낮은 숨소리 뿐이었다. 

 

즈라한의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그 번뜩이는 안광을 올곧게 받아치며 크롬은 생각한다. 좋은 눈이다. 누가 뭐래도 여태 녹슬지 않은, 황야의 혼이 가시지 않은 전사 그 자체. 그 커다란 눈동자를 응시하던 크롬은 잠시 시린 눈을 감았다. 수많은 것들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길고 긴 전쟁이 끝난 후 플로렌스를 등지고 아발론에 든 지가 어느덧 반년이다. 그리운 고향이 반년만큼 멀어져버렸단 뜻이다.

 

언젠가 아발론의 군주가 그런 말을 했었다. 

  

나는 조금 편리한 눈을 가졌지. 크롬 그대는 물의 속성을 타고 태어났어. 

  

그 조곤조곤한 어투를 되짚으며 크롬은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의 준비를 인내심 있게 기다려주는 즈라한은 말 그대로 거대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자세는 매우 고집스럽고 기개는 기가 막힐 정도로 굉장하다. 보기 드문 꼿꼿함을 바라보며 크롬은 다짐해본다. 대지의 속성이라고 했지. 대지는 물길을 막아버린다지만, 두고보라. 해일처럼 모조리 집어삼켜 버리겠다. 나는 크롬 레디오스, 명예를 알고 승리를 귀하게 여기는 자. 질 수 없다. 지지 않겠다.  

 

 

“즈라한 경, 준비되셨습니까?”

 

 

톤이 낮은 음성이 오늘따라 카랑카랑하게 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당한 장신인 크롬인데도 즈라한의 머리꼭지를 볼 수가 없었다. 거기에 대충 훑어도 단단해 보이는 어깨와 널따란 가슴. 자신도 꾸준히 단련을 해온 육체라지만 즈라한의 그것과는 차이가 굉장해 보였다. 해서, 크롬은 오히려 대범한 웃음을 지어 보인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아. 미안하구려. 갑자기 예전에 뭔가가 생각나서..”

“하하, 여유가 넘치시는군요. 긴장이 별로 안 되십니까?”

“무슨 소리를. 오랜만에 진검 승부를 하려니 떨리는구려.”

 

 

말끝과 함께 즈라한은 자신의 장봉을 내밀었다. 크롬의 심장을 향해 내밀어진 장봉의 끝으로 크롬의 장검이 십자로 엉기었다, 스르릉 풀려났다. 이것은 무언의 맹세 같은 것. 대련에 정정당당히 최선을 다하되, 무슨 일이 있어도 적의는 발하지 않기를.

 

하나, 둘, 셋, 넷, 다섯. 둘은 엇비슷한 속도로 뒷걸음질을 했다. 대련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가겠습니다!”

 

 

크롬의 오른발이 뒤로 푹 밀려나며 추진력을 도모하자,

 

 

“오시오!”

 

 

하늘을 쩌렁 울리며 즈라한 역시 빠르게 달려들었다. 

 

 

“흐아압-!”

 

 

기합소리와 함께 달리며 장검을 쳐들은 찰나의 순간, 크롬은 벼락 같은 본능의 감으로 휩싸인다. 빠르다. 예상보다도 더 빠르다. 게다가 장봉의 사정거리가 넓다. 거기에 저 키와 몸집. 단순한 힘싸움으로 흘러가면 볼 것도 없이 나의 패배. 그렇다면…! 

 

다시금 우렁찬 기합과 함께 득달같이 달려들며 크롬의 상체가 현저히 낮아진다. 목표는 대지를 디딛고 선 저 허벅다리. 무게 중심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된다. 특히 거대하고 무거운 것은, 더더욱-!

 

그러한 약점을 파고들려는 크롬의 속도가 만만치 않은 만큼, 수많은 전장을 지나온 즈라한의 감각 또한 수준급이다. 장검을 쥔 폼과 들이닥쳐오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답이 나왔다. 즈라한은 맞공격 대신 재빨리 수비를 취한다.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장검을 단박에 내칠 생각이었다.

 

순간, 저 멀리 새가 날았다. 

 

 

푸드득-! 

 

 

산새가 하늘을 쏜살같이 활공하는, 지금 이 순간. 아마도 낙엽빛 날개를 했을 새의 소음에 잠시 오감을 붙들려버린 즈라한은, 

 

 

“흐억!” 

 

 

다급한 외마디와 함께 몸을 팩 틀었다. 힘의 분배가 순식간에 망가진 장봉의 무게에 더해져, 발목이 시큰할 정도로 몸이 돌아가버렸다. 자칫하면 한 방 먹었을, 아슬아슬했던 순간. 조금만 행동이 굼떴더라면 꽤 위험할 뻔 했다. 상처가 난다면 솜씨좋은 아발론의 정령사가 치료를 해주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황야의 전사라는 긍지에 상처를 아로새기고 싶지 않다. 자존감에 금이 가는 걸 용납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설령 오래되어 빛이 바랜 유적 같은 것이라 해도. 

 

헝클어지는 속을 가다듬은 즈라한은 다시금 장봉을 고쳐쥐었다. 아까보다도 다부지게 굳센 손이었다. 이대로 물러나진 않겠다는 강경한 눈빛. 

 

그런 기세를 읽어, 크롬 역시 더욱 기합이 들어갔다. 우드득, 목을 꺾어 풀고 날 선 눈매를 해선 검의 끝으로 즈라한을 겨눠본다. 눈매 만큼이나 아찔한 끝이 저를 겨눠온 순간 즈라한은 시퍼렇게 튀는 불꽃을 보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도깨비불 같은 푸른 빛에 지레 겁먹고 도망가겠지만, 전사의 후예는 달랐다. 오히려 전장의 의지를 가다듬는 것이었다.

 

 

“…쉽지 않겠군.”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크롬은, 오히려 웃었다. 즐거워하는 미소였다. 그 웃음기를 읽은 즈라한이 장봉을 대차게 휘두르며 조금씩 뒷걸음질을 하기 시작한다. 장검을 다시금 고쳐쥔 크롬의 얼굴에 어느새 웃음기가 가셨다. 깊고 진하며 강대한, 대장군의 기개. 빠르게 멀어지는 즈라한을 눈으로 좇는다. 저벅저벅, 앞을 향해 걷는다.

 

아무래도 허점은 체중이 중중히 실린 허벅다리인데, 저 성가셔죽겠는 장봉 때문에 칼끝을 욱여넣을 기회가 오질 않는다. 어찌나 빠르게 휘둘러대는지 정신이 아찔할 정도다. 때문에 크롬의 전진은 잠시 멈추어버리고, 그 틈을 타 즈라한은 빠른 몇 걸음을 뒤로 달음박질하였다. 

 

장봉의 수비가 느슨해진 틈을 타 자세를 낮추어 내달리려했던 크롬은, 

 

 

“!”

 

 

반사적으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바짝 젖힌다. 번뜩이는 정오의 해가, 빛나는 장봉의 끝이, 펄럭이는 흰 색의 깃들이 시선을 무섭도록 장악해온다. 

 

 

“황야의 혼이 나와 함께 한다!”

 

 

드높은 곳에서부터 내리꽂는 속도와 하중은 무섭다못해 공포스러울 정도다. 순간 아찔해진 크롬은, 하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곤 재빨리 몸을 피한다.

 

 

 

쿵! 

 

 

천지를 가르는 듯한 소리. 드세게 착지한 즈라한의 주변으로 흙먼지가 거대하게 날았다. 어지러운 흙먼지도 잠시, 순간 크롬의 눈앞으로 즈라한의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처럼 들어온다. 흩어진 무게중심을 잡기 위해 구부러진 무릎이 천천히 세워지는 그 때, 지금이다! 거대한 몸이 가누어지는 찰나를 잡아낸 장검의 돌진은 머리의 사고보다도 빠르다. 흩날리는 흙먼지 안으로 장렬히 돌진한다.

 

 

“아니…!”

 

 

당황에 가득 찬 외마디 보다도 장검을 칼집에 스릉, 끼워넣는 크롬이 조금 더 빨랐다. 즈라한의 반대 방향으로 저벅저벅, 걷는 뒤로 흙먼지가 느슨하게 가라앉았다. 

 

 

“…….” 

 

 

그리고 가라앉은 흙먼지 위로는, 날카롭게 베어진 조인족의 흰 깃털이 사붓 떨어져있었다.

 

 

“아… 아하하, 아하하핫!”

 

 

철푸덕, 아이처럼 흙바닥에 구겨져 앉은 즈라한의 웃음소리가 드높다. 눈물이 어릴 정도 하하 웃어대던 즈라한이 철퍼덕, 뒤로 넘어간다. 정오가 살금 지났지만 태양은 여전히 꼭대기에 걸려있었다.

 

 

“역시 대장군답구려. 나의 깃털을 이렇게까지 베어낸 자는 크롬 경이 거의 유일할 거요.”

 

 

즈라한을 향해 천천히 뒤돌아서는 어깨가 후련해보였다. 저벅저벅 다가온 크롬이 즈라한의 옆으로 철퍽, 앉았다. 가벼운 몸짓.

 

 

“황야의 전사 중 대전사라시더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키와 몸집에서 그렇게까지 빠르고 몸이 가볍습니까?”

“끊임없는 수련의 결과 아니겠소이까. 크롬 경도 상당한 장신인데, 그렇게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빠르더이다. 게다가 검의 사용이… 마치 공간 자체를 베는 듯한 검술이었소.”

“저 역시 단련을 많이 해온지라. 하, 이런 대련을 할 수 있었다니, 영광입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요. 하핫.”

 

 

동시에 웃음을 터트리며 크롬 또한 뒤로 넘어간다. 헉, 허억, 밭은 숨소리가 크다. 찌는 듯한 태양을 향해 크롬은 웃었다. 정오를 살짝 넘긴 태양마저도 웃음짓는 듯했다. 

 

문득 크롬은 생각했다. 이런 개운함은 도대체 얼마만인가. 플로렌스 생각이 났다. 팔을 들어 눈을 가렸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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