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나와 비앙카가 체스 두는 글
* 아주 약간의 리카비앙 요소가 있습니다.
로잔나와 비앙카가 체스 두는 글
“간만에 휴무 같은 휴무를 보내나 했더만.”
말은 그렇게 해도 별 싫은 기색 없이 비앙카는 재빠르게 외출복을 챙겼다. 얼마 전 산 와이셔츠가 상당히 맘에 들었다. 새하얀 셔츠를 꿰어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는 비앙카의 핏은 항상 그렇다. 붕 뜨듯이 여유로운 듯, 착 감기듯이 달라붙는 듯. 숨 막힐 정도로 꼭꼭 껴입어야 하는 함대장의 제복조차 그랬다. 그래서 그런 걸까, 무릎 아래까지 오는 긴 기장의 모직 코트 차림도 그다지 부담스럽지가 않다.
“열두시 까지 오라고 하셨으니.”
가볍게 돌아본 탁상시계는 오전 11시에 닿을락 말락. 심적인 여유가 조금은 생겨, 비앙카는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피곤이 잔뜩 물든 눈가 하며 버석해진 뺨과 입술. 근래 들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가뜩이나 적은 수면 시간을 더 줄일 정도로. 짧았던 금발의 곱슬이 어느덧 목덜미를 우수수 덮어버렸다. 손끝으로 머리칼의 끝을 툭툭 정리하며 중얼거린다.
“…머리를 좀 잘라야겠다.“
메디치의 대저택에서 로잔나 통령의 관저까지는 썩 멀지 않다. 보기와는 다르게 평상시 걸음이 꽤 느린 비앙카도 이십 분 정도면 충분히 도착하는 거리이다. 게다가 슬슬 봄이지 않는가. 그래서 괜찮겠거니 하고 목도리를 두르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러나 저택으로 돌아가는 대신 비앙카는 깃을 잔뜩 세우고 앞섶을 단단히 틀어 쥐는 것이다. 성격 특유의 고집스러움. 애매하게 길어버린 앞머리가 휘날리며 가끔씩 시야를 방해했다.
관저의 로비로 들어서며 비앙카는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열 한시 삼십 오 분. 조금 일찍 도착했다 싶었지만 통령의 성격상 늦는 것 보단 훨씬 나았다. 굳이 안내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관저 3층에 있는 로잔나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윽고 달한 집무실의 방문은 언제 보아도 화려하다. 양각과 음각으로 빼곡하게 장식한 고급 원목의 문. 똑똑, 노크하는 손이 참으로 단정하고 절도있다.
“누구?”
“접니다. 비앙카.”
“문 열렸다, 들어와!”
제복이 아닌 외출복 차림이래도 비앙카 데 메디치 제 3함대장은 자신의 직위를 잊지 않아 절도있는 걸음걸이이다. 그런 비앙카를 바라보는 로잔나는 폭신해보이는 느낌의 원피스를 차려 입었다. 앳된 외모에 양갈래가 제법 귀엽고 애살스러운 외형. 거기에, 작고 사랑스러운 소녀답지 않게 길다란 소파로 비스듬히 앉은 로잔나는 군인 특유의 딱딱한 경례가 자신에게 붙여지자 손사레를 쳤다.
“어휴, 됐다, 됐어. 오늘 같은 날에는 가볍게 묵례 정도만 해도 괜찮아. 의복을 입은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비앙카는 속으로 그런다. 오랜만에 주신 휴무일인데, 바로 그 휴무일에 호출한 분이 어디 사시는 누구…? 하지만 생각을 발화하지 않고, 그저 머릿속에서 끝내야만 하는 때가 있기 마련이고, 오래되고 다양한 결의 경험들은 서로서로 달라붙고 합쳐지고 감싸안아 보다 현명하게 굴 수 있게 해주었다. 그 ‘때’가 지금인 걸 비앙카는 잘 알았다.
그래서 비앙카는 작은 손의 손짓을 따라 로잔나의 맞은 편에 앉았다. 허리를 쭉 펴고 주먹을 가볍게 말아 무릎 위로 올려놓은 부동자세. 그러며 비앙카는 문득 제 뺨을 간지럽히는 귀밑머리를 느낀다. 창문을 조금 열어둔 듯 했다. 통령 앞이어서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대신 곁눈질만 했다. 역시나. 적당한 냉기가 작게 열린 창문의 틈으로 밀물처럼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낮은 온도에 실린 겨울의 냄새에 비앙카는 누군가를 연상한다. 겨울에 태어난 사람. 높은 체온에 반해 감기에 잘 걸리는 사람. 적어도 삼, 사개월은 못 볼 사람.
“……왜. 추워? 창문 닫을까?”
로잔나의 꼬리가 톡 튀는 질문에 비앙카는 벼락같이 생각을 중지한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 아닙니다.”
“흐응.”
“그나저나 어쩐 일이십니까? 전령이 급하게 왔던데.”
“응, 간만에 체스나 한 판 둬.”
“……네? 부르신 이유가 그…?”
“발터는 뭐만 하면 바쁘다며 빼고, 아니, 헬가는 대체 언제 돌아오는 거야? 망할 아발론의 애송이.”
“…….”
“뭐, 비앙카 네가 마냥 한가하단 뜻은 아니고. 저 장 윗칸에 체스판 있어. 꺼내다 줘. 홍차?"
“예.”
체스는 오랜만이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통령과의 체스’ 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로잔나와 자신의 진영에 체스말들을 차근차근 제자리에 두며 비앙카는 오래된 옛날을 회상해본다. 열 살이었나, 열한살이었나. 그쯔음 통령에게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것은 고급 체스 세트였고, 한참 어린 나이에도 불구, 그 복잡하고 우아한 게임에 비앙카는 굉장한 흥미를 가졌드랬다. 십대의 초중반까지만 해도 종종 마주앉아 체스를 하던 두 사람이었다. 로잔나와 비앙카가 각자의 사정으로 바빠지고나서는 어쩌다 한 번이나 겨우 마주앉았다. 정말 오랜만이구나, 생각하며 말들을 차곡차곡 자리에 놓는 손동작이 어딘지 설렜다.
“리카르도는?”
첫 폰을 느릿하게 전진시킨 로잔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질문이었다. 요새 하는 훈련은 어떤 상태인지, 해군들의 전체적 사기나 분위기 등은 어떤지, 뭐 그런 걸 물어올 줄 알았다, 바로 전 리카르도를 떠올렸던 비앙카는.
그래서,
“예?”
답지 않게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체스판에 눈을 뜨지 않으며 로잔나가 되묻는다. 이번엔 좀 더 차분한 말꼬리.
“리카르도는.”
비앙카는 잠시 답변을 보류한다. 오랫동안 봐온 통령이지만 잘 모르겠는 때가 많다. 적당한 답을 찾기 위해, 일부러 보란 듯이 일렬의 폰을 훑어낸다. 어느 순간 멈추곤, 소제를 게을리하지 않아 단정한 손끝으로 어느 폰의 대가리를 톡 건들곤 전진시킨다.
“오늘 아침에 서신을 받았습니다.”
“뭐라디?”
“잘 도착했고. 큰 환대를 받았고, 대우도 좋고.”
“그리고?”
“통령님과 의견이 비슷해 잘 처리가 될… 서신 따로 못 받으셨습니까?”
“받았지.”
“…….”
“나는 좀 더 개인적인 걸 묻는 거야.”
또다시 전진해오는 로잔나의 폰. 그 말의 작은 몸집과 동그란 대가리가 왜 이리 커보이는 걸까. 잠시 고민하다 비앙카 역시 폰을 한 칸 더 밀어낸다. 일부러 대적의 것과 비대칭인 형태가 되도록.
“잘 만나고 있습니다.”
“끝?”
“예.”
“흠. 그래. 좋아.”
그리곤 둘 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요한 집무실의 공중을 맴도는 소음은 별 것도 없다. 화려한 원석을 세공해 만든 체스 말들이 고급 원목 체스판 위로 자박자박, 놓여지는 정도일 뿐. 그마저도 그다지 크지 않아 누군가 소리만 들으면 낮잠이라도 즐기는 줄 알 정도이다.
한참 말이 없던 로잔나가 비숍의 목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대각선으로 느릿하게 달린 비숍은 비앙카의 룩을 경쾌하게 잡아먹는다. 잠시 딴생각을 감실감실 하던 비앙카는 조금 난처해진다. 이러면 조금 어려워지는데. 어렸을때야 아무리 해봐도 로잔나를 이기기 힘들었지만, 키가 훌쩍 크고 솜털이 가신 후에는 종종 체크메이트를 외칠 수 있게 되었다. 지는 건 싫다. 아무리 좋아하고 사랑하고 진심으로 따르는 통령이라지만, 지는 건 정말 싫다. 이를 악다물어 원목판을 훑은 비앙카가 나이트를 잡았다. 유일하게 타 기물을 뛰어넘을 수 있는 말. 제 앞을 막은 폰을 뛰어넘으며 비앙카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나이트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예민함을 알아챈 로잔나는, 하지만 모른 척을 해준다. 그리곤 입을 연다.
“비앙카.”
“예.”
“너는 내가 체스 말이라면, 뭐일 거 같아?”
“통령님 말이십니까.”
“어.”
상체를 굽혀 비앙카는 깊게 턱을 괴었다. 말끔한 검지의 끝으로 제 뺨을 톡톡톡. 일종의 습관이자 버릇, 무언가를 어느 말을 어떻게 옮겨야 할지도 정신 없는데, 번뜩 대답을 내놓기가 어려운 질문까지. 비앙카는 이내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킹 아니겠습니까.”
비앙카의 퀸이 전장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판의 끝자락에서 혼자 놀던 룩을 가져오는 입매가 싱긋 솟았다. 그 미소에 로잔나의 눈썹이 잠시 찌푸려졌다가,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유는?”
“이유랄 것이 있습니까. 통령님은 사르디나의 가장 무거운 닻 아니십니까.”
“흠.”
“제자리를 지키고… 승패에 결정적인 말이어서입니다.”
“그래?”
“예.”
“응. 틀렸어.”
“…그럼?”
“어. 나는.”
단아함과 함께, 로잔나의 앳된 손에 들린 폰이 체스판의 맨 반대를 찍는다. 아차 하는 비앙카에게 쌔액 웃어보이곤 한다는 소리가,
“퀸으로 승진. 너무 방심한 거 아니야, 비앙카?”
“…….”
“내가 누누이 말했지. 항상 의심하고 생각하라고.”
“…예.”
“그리고 나는 이 폰 같은 사람이야.”
퀸으로 승진한 폰이 호기롭게 판을 달린다. 기물을 훌쩍 뛰어넘었던 비앙카의 나이트가 맥없이 먹힌다.
“내가 왜 킹이야. 내가, 뭐, 씨이, 이백년 넘게 나이먹어가면서 제자리에서만 왔다갔다 한 줄 알아.”
“…이해했습니다.”
“빨리 사과해. 노력과 피와 땀이 들어간 내 과거한테 사과해.”
“…죄송합니다.”
“근데, 너는 킹이 되도록 해.”
다다음 수를 머릿속으로 짚어보던 비앙카가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당신은 제자리만 오고가던 킹이 아니라면서, 저에게는 오히려 킹이 되라라고 하신다. 그리 말하는 이유를 참 묻고 싶은데 아직도 이런 때의 로잔나는 어렵다. 하지만 어쩌랴, 이야기가 시작이 있으면 끝맺음도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비앙카는 무덤덤한 어조로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져본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연유가…?”
“비앙카 너도 잘 알겠지만, 내가 이래저래 많이 바빴다. 잡을 건 죄 잡아놨고, 뭉개야하는 건 다 뭉게두었고. 살릴 건 또 살려놓았고.”
“…….”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앞길 다 닦아놨으니까, 너는 굳건한 킹이 되도록 해. 체크메이트를 당하지 않으려면 다른 말들을 잘 다루어야 하는 거 알지?”
“예.”
“대답에 기합이 없어.”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곤 또다시 침묵. 비가시적인 머리싸움이 치열한 가운데, 로잔나의 빈틈을 놓치지 않은 비앙카가 싱긋 웃었다.
“체크 메이트.”
엣된 입매가 잠시 꿈틀, 하더니, 아주 가까운 몇몇에게나 겨우 보여주는 온화함을 띄었다.
“비앙카. 네가 지금 몇 살이지?”
“올해 여름이 오면 스물 아홉이 됩니다.”
“그래. 판은 네가 치우도록 해. 나 바쁘다.
“예. 정리해놓고 나가겠습니다.”
달그락 달그락, 체스말 정리하는 소음이 꽤 크나. 로잔나는 조금 열어둔 창문을 닫은 뒤 의자로 앉아 서류철을 꺼내들었다. 오늘 하루 꼬박 걸려 처리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도 짬을 낸 것이었다. 그래도 괜찮은 시간이었어, 속으로 중얼거린 로잔나가 문득 고개를 든다.
“정리 다 했습니다, 통령님.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래.”
“예.”
“종종 놀러와.”
“예?”
“말했잖아. 발터도 자주 못 오고, 헬가는… 말 해서 뭐 해. ”
중얼거리며 로잔나가 깊게 턱을 괴었다. 빛이 잘 드는 남향이어서 커다란 통유리로 오후의 볕이 우수수 쏟아진다. 그 화사함을 뒷모습으로 받아내는 로잔나의 역광에서 비앙카는 통령의 외로움을 새삼 인지한다.
“알겠습니다.”
“응. 가봐.”
“예.”
아주 작은 소음조차 없이 문은 닫혔다. 손끝을 책상 위로 토도독, 토도독, 튕기던 로잔나가 마음을 다잡고 서류를 꺼낸다. 내용을 검토하고 통령의 직인을 찍어댄다. 하지만 일에 집중하는 것도 잠시, 자꾸만 다른 생각에 빠지고, 빠지고, 빠지는 것이다.
“올해 여름이 오면….”
사르디나의 가장 무거운 닻, 그 이명을 내려놓아야 할 날이 머지 않았군. 자신이 없을 사르디나를 짊어지고 갈 비앙카가 깊이 걱정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늘 나눈 체스 한 판에 많은 것을 걸어도 되겠지, 희망으로 가득찬 미래를 쉬이 꿈꾸는 로잔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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