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자루미] 별이 우네요, 별이 울어요, 아주 아름다워요

별이 우네요, 별이 울어요, 아주 아름다워요 

"나! 는 나아느은, 난- 워어언래- 그런, 그런! 사람이지이-"

다그락다그락 다기를 만지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루미에는 어릴적부터 그리 여겨왔다. 생명에게 고유의 속성이 주어져 태어나는 거라면, 자신은 답도 없이 칠흑처럼 시커먼 어둠뿐일 거라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두 눈과 귀와 코와 입술, 자신을 지탱하는 온 몸의 뼈와 전신을 타고 흐르는 모든 피와 그 위를 아낌없이 덮고 있는 살갗, 살아 꿈틀거리는 장기와 최후의 심장마저 예전부터 시커멓게 물들어있는 채로 태어났을 거라고. 

"어디 보자... 오늘은 무슨 차를 끓일까? 아 그래, 오늘은 이걸 마시자. 유난히 바람이 센 거 같으니까, 특별히 귀한 걸로다가!"

쓸쓸한 기색 하나 없이 명랑한 자문자답을 하는 루미에는, 그래서일까. 꽁꽁 얼어붙어버린 문레이크에서 매일매일 잎차를 끓였다. 귀중하게 타오르는 불에 깨끗한 얼음을 담은 물주전자를 올리고, 불길에 녹은 물이 펄펄 끓으면 물주전자를 다탁으로 조심스레 옮긴 후 뚜껑을 열어 김이 조금 빠지게 했다. 보통은 기다리며 그냥 두었지만, 가끔은 호호 입김을 불거나 손부채질을 하기도 했다. 한 김이 가신 물이 말린 잎을 우리기에 좋다는 걸 알아서였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음. 딱 세 개만 더 넣을까? 열 개 딱 맞춰서? 아니지. 그럼 너무 진하려나?"

물이 적당히 식기를 기다리며 루미에는 찻잔 안으로 찻잎을 하나하나 세어가며 넣곤 했다. 별 뜻이 있는 건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생긴 버릇이었다. 하지만 언제쯤부터 그랬는지를 루미에는 굳이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끓던 물이 좋은 온도가 되었다 싶으면 루미에는 기억 속 오래된 자장가를 흥얼거리며 찻잔에 물을 부었다. 올곧게 떨어지는 물줄기를 따라 찻잎들은 제각각 춤을 추었다. 그 묵묵한 잎들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춤 속에서 루미에는 항상 절망을 읽었다. 그래서 루미에는 매일매일 필사적으로 잎차를 끓여냈다. 

"......어?"

그런데, 오늘은 무언가가 달랐다. 입술 틈으로 새던 오래된 자장가가 뚝 끊겼다. 루미에는 눈을 크게 떴다. 항상 어김없이 절망만을 빙글빙글 웃으며 일깨워주던 찻잎들의 흐름이 오늘은 매우 달랐다. 

"...친구? ...친... 구?"

루미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찻잎을 헤아리고 또 헤아렸다. 눈으로만 좇던 것을, 나중엔 손끝으로 하나하나 짚어나갔갔다. 마치 자신이 매우 피곤했다거나, 혹은 잘못봤다거나, 그런 이유등으로 점괘를 잘못 읽은 것이라 여겨서였다. 하지만 찻잎이 전해주는 미래를 서른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은 후 루미에는 손으로 제 입을 가릴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차갑기만 하여 무뚝뚝했던 양 손이 떨려왔다.

"루미에, 루미에 미라티사, 진정해. 진정."

후우, 후, 깊은 심호흡을 하며 루미에는 제 심장에 손을 얹었다. 툭, 툭,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오는 박동이 컸다. 눈과 바람과 얼음으로 봉인되어 외롭고 또 괴로운 문레이크를 홀로 지키던 루미에는, 문득 어울리지 않는 눈물 한 방울을 뚝 떨어트렸다. 

"친구. 친구. 친구..."

중얼거리며 루미에는 창가로 다가섰다. 성에가 유리창에 잔뜩 끼어있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아도 알았다. 혹한이 몰아치는 바깥. 

"...이렇게 추워서야, 친구가 여기까지 올 수나 있겠어?"

중얼거리며 루미에는 조금 웃어보였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자신의 희망을 거세게 짓밟아보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은 매우 정직해, 결국 루미에는 얼어붙은 유리창으로 검지를 뻗어 조그맣게, 하지만 분명하게 끼적였다. 

친 구 .

루미에는 그날부터 매일매일 절실한 기도를 올렸다. 

신이시여, 그 찻잎의 흐름이 당신의 실수나 장난이 아니었음을 제가 오롯이 알게 해주시옵소서. 제 육신과 심정은 차가움에 너무나도 지쳐있으니, 부디 춤추던 찻잎 속에 담겨있던 바를 재빠르게 도달하도록 헤주시옵소서. 만약 제가 읽어낸 그 뜻이 저의 생각대로가 아니라면, 차라리 얼어붙기 직전인 심장을 아주 멈추게 해주시옵소서. 

루미에의 그런 기도는, 안타깝게도 빠른 현실이 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억지로 잠재웠던 희망을 들쑤셔 일깨워낸 점괘는 곧바로 현실에 안착하진 않았던 것이었다. 간절한 기도는 삼 일이 지나고, 일주일이 흐르고, 한 달이 하루가 부족한 날이 되었을 때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어느때보다도 큰 절망에 빠진 루미에는 식음을 전폐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럴거면 들쑤시지나 말지, 분과 실망이 어린 혼잣말과 함께.  

그리고 다음 날 늦은 아침, 제 침대 위에서 몸을 둥글게 말아 늦장을 부리던 루미에는 귀를 의심했다. 똑똑, 작은 집의 작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다. 믿을 수 없어 벌떡 일어난 루미에의 귀로, 이번엔 좀 더 크고 강한 노크소리가 꽂혔다. 똑똑똑!

"누, 누구세요?"

다급히 실내용 슬리퍼를 꿰차곤 문으로 튀어나간 루미에는,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다 말고 멈추었다. 이것이 환청이라면? 문을 두드린 것이 그저 거센 바람이었다면? 하지만 주저하던 루미에의 귓전을 두드리는 소리는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대륙의 길을 잃은 방랑자에요. 조금 실례해도 괜찮을까요?"

루미에는 홀린 듯 문을 열었다. 눈앞에는 하얀 털망토를 길다랗게 걸친 여자의 긴 회갈빛 머리카락이 사선으로 흐트러지고 있었다. 누가 보아도 확연한 미인인 그녀의 눈동자가 루미에를 향해 빛을 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문을 열어주셔서. 이 곳은 정말 춥네요."

"......"

"아, 저는 아까 말씀드린대로 방랑자입니다. 길을 잃어 헤메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어요."

"......"

"...저기?"

"...아. 아... 아. 들어오세요!"

여자는 입매를 곱게 끌어올리곤 루미에의 집으로 발을 들였다. 루미에의 머릿속에 한 단어가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친구'. 

그렇게 루미에는 체자렛 알티온을 알게 되었다. 

체자렛이 루미에의 거처에서 머물게 된지 한 달이 조금 넘어가고 있었다. 

루미에의 눈에 체자렛은 신비한 수수께끼처럼 보이곤 했다. 아무리 방랑자라고 하여도, 눈과 얼음으로 뒤덮힌 문레이크까지는 어떻게 오게 된 걸까? 그도 그럴것이, 처음 그녀와 만난 날 체자렛은 챙이 넓은 모자와 털옷으로 가린 어깨위로 눈이 잔뜩 쌓여있었지만 지치긴커녕 힘들어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해서, 체자렛이 평범한 인간은 아니겠구나 생각하는 루미에였지만, 매번 호기심은 꿀꺽 삼켜버리곤 했다.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려고 하면 그녀는 신기루였던 것처럼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루미에는 찻잎의 점괘가 데려다준듯한 체자렛을 떠나보나고 싶지 않았다. 더이상 아무 온기를 잃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도 루미에는 식탁에 앉아 체자렛이 찻잔에 따스한 물을 붓는 모양새를 바라보았다. 체자렛은 루미에의 거처에 머물게 된 이후로 매번 대신 차를 우렸다.   

몽글몽글 오르는 김이 좋아 입김을 호호 부는 루미에를 향해 체자렛이 웃어보였다.

"차 온도가 괜찮나요, 루미에?"

"그럼요. 누가 타준 차인데요."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서 차가 맛이 없었죠?"

"처음엔 누구나 다 그렇죠."

"맞아요."

"고마워요 체자렛."

"뭐가요?"

"그냥... 이것저것?"

"이것저것?"

"네."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동시에 푹 웃었다. 루미에는 체자렛이 잠시 뒤를 돈 사이 제 심장으로 손바닥을 가져다대었다. 희망의 점괘를 가져다준 찻잎을 읽었던 그 날처럼 심장은 툭, 툭, 크게 뛰고 있었다. 루미에는 언젠가 체자렛이 해주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루미에, 그거 알아요? 아주아주 오래된 고대의 언어로 루미에 는 빛 이라는 뜻이랍니다. 루미에 그대는 그대의 생각처럼 어둠이 아니에요. 오히려 빛이에요. 밤하늘이 어두울수록 더더욱 밝게 빛나는 별 같은 빛이에요.

차가 적당히 우러나자 루미에와 체자렛은 서로를 마주보고 식탁에 앉았다. 평소에는 말이 많은 루미에인데, 오늘은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침묵마저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을까, 이제는 체자렛을 생각하는 심리적 거리가 한 뼘 길이 만큼이나 매우 가까워진 루미에였다. 

김이 오르는 차를 한 입 넘긴 체자렛이 문득 입을 열었다. 

"루미에."

고개를 숙인 채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던 루미에가 이마를 들었다. 

"네?"

"나랑, 함께 갈까요?"

"어디를요...?"

"그냥 날 따라와요, 그럼 내가 손을 잡아줄게요."

"......"

"싫은가요?"

"...많이 먼 곳인가요?"

"응. 멀어요. 아주 많이 멀어요."

"......"

"그러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루미에의 손을 놓지 않아요. 절대로 놓지 않을테니. 부디 함께 갈까요?"

루미에를 향해 체자렛의 긴 손이 우아하게 내밀어졌다. 홀린듯 일어난 루미에는 그 손을 잡았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 손가락 사이사이로 미끄러지듯 손깍지를 껴온 체자렛은 루미에를 이끌어 문을 나섰다. 흰 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그 수분의 덩어리 사이사이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비어있는 손으로 밤하늘을 가리키며 체자렛이 말했다.

"별이 우네요, 별이 울어요. 아주 아름다워요."

"네... 정말 그렇네요..."

"루미에. 내 이야기를 들어줄래요?"

"그럼요. 얼마든지."

새하얀 눈이 아름답게 내리는 풍경 속에서 체자렛은 루미에에게 속삭였다. 그러며 어떨 때는 루미에의 드러난 어깨에 손을 얹기도 했고, 어떨 때는 루미에의 귓전으로 낮은 웃음을 흘리기도 했다. 그렇게 체자렛은 루미에의 귓가에 대고 아주 많은 단어들을 어지럽게 속삭였다. 꼭 맞잡아 빈 틈이 전혀 없는 손을 절대로 놓지 않은 채. 

이윽고 체자렛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기나긴 속삭임의 마침표가 주는 여운에 조금 멍하게 눈을 깜박이던 루미에는, 문득 정신을 차리곤 체자렛의 손을 뿌리쳤다. 그 힘에 잠시 크게 떴던 눈매를 부드럽게 휘어내며 체자렛은 웃었다. 

"싫은가요?"

"......"

"나랑 함께 가기가 싫어졌을까요?"

"...당신 뭐야. 정체가 뭐야?"

"나 말인가요? 나는 체자렛 알티온, 그대의 친구랍니다."

"개소리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당신 뭐야? 뭐하자는거야?"

날이 바짝 선 루미에의 새된 외침에 체자렛은 어깨를 으쓱하곤 입매를 씩 올려냈다.

"그럼 다시 소개할게요. 만나보아 반가워요, 루미에 미라티사. 갈루스 제국의 황실 마도사 체자렛 알티온이에요."

"......"

"보아하니 이젠 저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어보이는군요."

"......"

"굉장히 안타깝네요. 그대라면 갈루스의 훌륭한 인재가 될 거라 생각했는데."

루미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부릅뜬 눈으로 체자렛을 노려보며 새빨갛게 얼어버린 손만을 덜덜 떨 뿐이었다. 베어문 아랫입술로 잇자국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소복하게 내리던 함박눈은 점점 거센 진눈깨비로 변해갔다. 칼날같은 바람이 춤을 출수록 루미에의 길고 긴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입가로 웃음을 띈 채 체자렛이 말했다.

"내가 그랬죠. 별이 우네요, 별이 울어요. 아주 아름다워요. 라고."

"......"

"나의 말을 잊지 마세요, 루미에. 루미에가 밤의 하늘을 바라봤을 때 별들이 울고 있어 아주 아름답다면, 내 이름을 하늘에 속삭이세요. 그럼 내가 그대를 찾아올테니까. 그리고 그대를 그대와 어울릴만한 곳으로 데려다줄테니까."

"......"

"그때는 동행을 거부해도 소용없어요. 그러니까 잊지 마세요 루미에. 문득 올려다본 밤하늘의 별들이 울고 있다면, 그래서 아주 아름답다면, 내 이름을 하늘에 속삭이세요." 

아득한 메아리같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번쩍! 섬광이 터져나갔다,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강렬한 빛의 충격에 눈밭으로 푹 주저앉았던 루미에는 한참 후에야 일어날 생각을 했다. 다리에 힘이 빠져 몇번이나 얼어붙은 대지를 맨손으로 짚어냈는지 몰랐다. 

비척비척 힘겨운 걸음으로 루미에는 거처로 돌아갔다. 중앙의 불이 타오르며 공기를 데우고 있었다. 

거처를 찬찬히 돌아본 루미에는 습관처럼 꿰차던 실내화를 벗어서 집어던졌다. 밋밋해보인다며 체자렛이 색색의 실로 수를 놓아준 것이었다. 

그리곤 식탁의 화병에 꽂혀있던 나뭇가지를 뚝 부러트렸다. 눈 덮인 산 아래 어디쯤을 함께 산책하던 체자렛이 장식으로 좋겠다며 꺾어준 것이었다. 

그 후 루미에는 망설임 없이 장을 열어 검은 손수건을 꺼냈다. 곱게 개어진 그것은 언젠가 무언가에 베인 루미에의 손가락으로 체자렛이 감아줬던 것이었다. 

날선 가위질로 고급의 검은 천을 난도질한 루미에는 재빠르게 벽걸이로 눈을 돌렸다. 체자렛의 챙이 넓은 모자가 걸려있었다.

낚아챈 모자와 꺾어버린 나뭇가지, 이젠 걸레짝이 된 검정의 고급 손수건, 체자렛이 손길이 담긴 실내화, 그리고 그녀가 타준 마지막 잎차가 담긴 두 개의 찻잔을 불길 속으로 내던진 루미에는 결국 울고 말았다. 주저앉아 손바닥에 얼굴을 푹 묻은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불은 활활 타올랐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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