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드로이드를 위한 여행 안내서
아르테미스Artemis는 연중무휴, 24시 운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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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101시, 휴게소 앞에서
지직거리며 TV 역할을 하는 스크린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몇 년전 우수한 성적으로 지구로 여행을 가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의 홍보 영상이었다. 아주 지겹게도 봤다. 이 곳에 있는 모두가 아마 그를 알고 있을 거였다. 쾌활한 성격에 갈색머리의 소년. 그의 영상은 이 곳에서 유명했다. 다만 혜운에게는 오늘은 그런 것을 볼 여유가 없었다. 혜운은 침대에 앉아 시계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숫자들이 복잡하게 쓰여 있는 시계의 바늘들이 101시를 가리킬 때까지. 째깍거리는 반복적인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시곗바늘이 오늘따라 늦었다. 초조한 듯 손톱 옆 거스러미를 긁으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 방에서 휴게소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분. 지금 출발해야 늦지 않았다. 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왜 하필 그 사람에게 주고 싶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러고 싶었을 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혜운은 일기장을 써 내려갔던 만년필의 펜촉으로 자신의 신원을 확인하고 출입문을 통제하는, 기계의 모서리에 비스듬히 꽂아 넣어 플라스틱 덮개를 뜯어냈다. 옛날에 책에서 보던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한 거였다. 이곳에서는 책으로만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지구에 있다는 휴대전화도, 인터넷도, 학교도 없었다. 그냥, 어느 순간 말을 하고 걸을 수 있게 됐다.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처음 기계를 다루는 손길이 떨리기 시작한다. 아주 살짝 떨기 시작했던 손이, 눈에 띌 듯 행동이 커지면 다른 한 손이 혜운의 왼쪽 손을 잡아 고정한다. 바코드를 인식해 소리를 내는 전선을 마침내 잘라냈다. 힘없이 떨어진 분홍색 줄이 다른 전선들 속으로 들어가 더 이상 꺼낼 수 없게 됐다. 혜운은 손목을 바깥쪽으로 돌려 바코드를 찍었다.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100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약속을 지키려면 25분 안에 가야 했다. 소리 없이 열린 문 안쪽은 불이 꺼진 탓에 시커멨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일기장을 가져갈까 한번 바라보다가, 이내 품 속으로 일기장을 챙겼다. 도망 가서도 일기는 써야하지 않겠나. 혜운의 발이 겁도 없이 어둠을 밟았다. 익숙한 대리석 바닥과 기둥들을 지났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번째 기둥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휴게실이 있었다. 혜운의 발걸음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저 멀리 어둠 속에 비상등처럼 밝게 빛나고 있는 곳이 보였다. 한 걸음 더 내딛으려는 순간, 경비병의 안드로이드가 플래시를 비추며 혜운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숨을 수 있는 곳은 거대한 기둥 하나뿐이었다. 다만 안드로이드가 기둥을 비추면 들킬 수 있을 확률이 높았고, 그 애가 왔을 때는 이미 잡혀가 버렸을지도 몰랐다. 걸리지 않으려는 방법을 머릿속으로 굴리는 순간에도 불빛이 가까워졌다. 혜운의 발걸음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뒷걸음치는 혜운을 끌어당긴 것은 서늘하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온 힘을 다해 끌어당기는 힘에 혜운은 저항할 틈도 없이 휴게실 옆 방으로 들어와지며 자신을 끌어당긴 사람과 엉덩방아를 찧는 소리를 냈다. 어둠 속이라 보이지 않았지만 누군지 알 것만 같았다.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이 손이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안드로이드의 불빛이 문 앞을 스쳐 지나갔다. 백색 빛이 지나치고 사라져갈 때쯤 파란색이 걸렸다. 시야를 가득 채운 파란 빛이 다시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혜운의 입을 막은 손이 떨어지며 낯선 소리가 낮게 공간에 깔린다. 빈손에 쥐어지는 간이 손전등을 건네주며 말하는 소리가 퍽 다정했다.
“갑자기 끌고 와서 미안해. …여혜운, 맞지?”
손전등이 비추는 빛이 101시를 가리킨 시계와 그 애를 선명하게 비췄다.
마침내.
***
본인이 맞냐고 물어보는 말에 혜운은 입을 두어번 달싹거리다 한참의 침묵을 지킨 뒤에야 말했다. 조금은 당황한 목소리로.
“…진짜로 나와줄지 몰랐어.”
“안나왔으면 네가 기다리고 있을까봐.”
…그건 그렇지. 그 애가 안나올거라는 경우를 생각하지 못했다. 실수였다. 아까도 그렇고, 나오지 않았을 때의 일을 생각하지 못했다. 얼이 빠진 혜운의 얼굴을 보고 어떤 상황이었는지 짐작한 그 애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혜운은 그 소리를 듣고 자신도 모르게 안심했다. 어쨌든 너도, 나도 서로를 보기 위해 이 곳에 왔으니까. 큰 일도 없었고. 혜운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쩌면, 너도 나도 서로에게 이끌렸던 건 아닐까.
“안녕. 여혜운이야, 편하게 불러.”
“…제레미야. 잘 부탁해.”
안녕, 이라는 말이 뒤따라왔다. 우리는 침묵 속에 서로의 다정한 인삿말을 꺼내며 두 손을 마주했다. 스치는 온기가 퍽 따스했다.
05. 모두가 잠든 이 밤에
“…그래서, 왜 보자고 한 건데?”
“조금 이상한 소리일 수도 있는데. …같이 도망가줬으면 해. ”
어디로, 어떻게? 이렇게 갑작스럽게? 제레미의 대답이 나오기도 전에 방금 전 혜운이 손에서 놓친 손전등이 굴러가 어둠에 가려진 공간 안을 꽉 비췄다. 저게…. 뭐야. 경악하는 혜운의 목소리에 제레미는 고개를 혜운이 향한 쪽으로 돌렸다.
수많은 사람들. 각자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실험장 안의 쥐처럼 호흡기 하나만을 달고 있는 사람들. 아니, 사람인가?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건가? 답이 들리지 않는 질문들이 두 사람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도망가야 한다는 질문에 대한 답은 흩어진 지 오래였다. 그가 홀린 듯이 유리관에 갇혀있는 사람에 다가가면, 자신과 똑같은, 아니 비슷한 코드가 적혀 있다. J-30456. …사람인가? 혜운의 중얼거리는 소리가 고요하게 퍼져간다.
“아니, 안드로이드야. 여기에 적혀있어.”
질문에 대답하는 소년의 표정을 눈에 띄게 굳어있었다. 각각 유리관 앞에는 작은 책이 있었다. 그러니까, 여행안내서라고 적힌…. 일종의 선별 작업이 적힌 책이었다. 혜운은 눈을 뗄 수 없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리고 언젠가 다른 행성으로 여행을 떠났던 사람과 모습이 똑같은 애가 이곳에 있었다. 기억하고 있다. 매일 같이 틀어주는 영상의 그 애가 아닌가. 방에서 나오기 전에 봤던, 갈색 머리의…. 침음하듯 목구멍 밖으로 꺼내지는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안드로이드라고? 얘가?”
“…그런 거 같아. 여기에, 아르테미스의 실험체는 클론과 안드로이드 둘뿐이라고 적혀있어. 그리고 그걸 관리하는 건….”
제레미가 가리킨 곳은 지침서라고 적혀있는 글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혜운은 떨리는 손을 붙잡으며 페이지를 읽어 내려갔다.
J-30456.
J-30456의 원형은 지구에서 사망 후 부모가 전달한 DNA를 바탕으로 제작함.
제작 목적은 지구 멸망을 대비한 목성 개발 팀 사체이며, 해당 개체의 인간 프로그래밍은 12/18일에 시행될 예정. (각주: 인간 프로그래밍: 안드로이드가 스스로 인간으로 태어났음을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만드는 코드를 말한다) 인간 프로그래밍은 모든 안드로이드에게 실행해야 하며, 출고된 후 음식과 에너지 동력을 제공해야 함. 구 안드로이드의 경우 기름을, 신형일 경우에는 전기를 공급. 이 형태는 음식물을 섭취하는 과정에서 이뤄져야 한다.
매일 같은 시간 ‘인간’이 감정과 건강 문제를 연구실에서 확인해야 하며, 이때 해체하기 위해 마취를 할 것.
※만약 음식물을 거부할 시에 담당 안드로이드는 강제로 식도에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게 한다.
아니, 잠깐만. 음식물을 거부할 시에? 문장을 읽은 혜운의 등골에 쭈뼛하고 소름이 돋았다. 온 몸의 신경이 바짝 세워지는 기분이었다. 불길한 기분마저 들었다. 식사 방법, 이름 대신 불리는 코드, 연구실에서 매번 잠들었던 것. 너무 나와 상황이 똑같지 않나? 만약, 이라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내가, 안드로이드라는 거야? 인간이 아니라?”
“…일단 진정해. 아닐 가능성도 있어.”
“아니, 똑같아, 제레미. 식사할 때의 방식이나 전부. ……너는 아니야?”
“음식을 강제로 섭취한 적은 없어. 연구실에서도 잠든 적 없었고. …클론이랑 취급이 다른가 보네.”
하. 어이없는 소리의 한숨이 혜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어쩐지 도망치고 싶더라니. 마른 얼굴을 쓸어 넘기며 제레미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저 새파란 존재가 사그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장 먼저 앞선다. 처음 봤을 너인데. 처음 보는 너일 텐데. 이름 한 글자, 목소리 한마디가 어떤 존재보다 선명했다. 둘 사이의 침묵이 길어졌다. 혜운은, 생각했다. 클론은 취급이 좋아 보이니까, 내가 느끼던 위화감과 반항심 따위는 느끼지 않을 테니까. 유성이 떨어지는 창문을 바라볼 때마다 소원을 빌지 않아도 될 테니까. 지금 상황에는 이게 최선이었다.
“…우리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네가 도망가, 제레미.”
“……뭐?”
“나는 다시 생겨날 거야, 저 애처럼. 그러니까 네가 도망가야 해.”
그게 맞아. 혜운의 얼굴이 서늘했다. 두 손을 맞잡은 온기와 다르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거절의 의사를 밝히기도 전에 소년은 제 앞의 존재가 이끄는 대로 발을 한 걸음씩 디딜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맞잡은 두 손이 떨리지만, 강하게 붙잡았고, 함께하고 싶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줘서. 길은 알고 있는 건지, 지도는 어떻게 구했는지 제레미는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어진 기분이었다. 낯설었다. 그렇게 유명했던 애였는데. 소문이 다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윽고 혜운이 발걸음을 멈춘 곳에서 녹슨 쇠의 소리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사람 하나가 들어갈 것 같은 크기의 환풍구가 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지도가 적힌 일기장을 소년의 손에 쥐여줬다.
“여기로 가면 빈 우주선이 하나 있어. 오늘 정비 완료됐다고 했어. 빨리 가자. 곧 경비들이….”
CODE ZERO, CODE ZERO. E-043H, 탈출. 전 대원에게 알립니다. 좌표 38.88303417817275, -77.01667621260677. 다시 한번 알립니다. CODE ZERO, CODE ZERO. E-043H, 탈출. 좌표 38.88303417817275, -77.01667621260677….
“…….”
요란한 사이렌이 울리며 혜운이 있는 좌표를 스피커에서 시끄럽게 알려댔다. 아무래도, 안드로이드라서 이상한 위치 추적 기능이 있나 싶었다. 혜운은 닫혀있는 환풍구의 입구를 힘을 주어 뜯어냈다. 손에 상처가 났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피 같은 건 없는 기계일 테니까. 그는 소년을 향해 먼저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아니, 나는….”
“… 부탁이야, 제레미. 나도 너랑 같이 가고 싶어.”
아무 일 없을 거야. 다짐하듯 덧붙이는 말이 불확실했다. 아직 시간 있으니까 얼른 가야 해. 어서. 소년을 채근하는 목소리가 떨린다. 여기서 싸울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뒤를 힐끗거리는 그가 무슨 생각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서.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빠르게 움직이는 것뿐이었으니까.
“…지금 네가 멋대로 하고 있는 건 알지?”
“…알아, 네가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도. ”
“…꼭 같이 가야 해.”
“그래, 그러려고 멋대로 구는 거니까. 약속할게.”
그리고 멋대로 굴어서 정말 미안해. 덧붙인 말은 머쓱함이 묻어나왔다. 환풍구 안에 몸을 구겨 넣어 조금씩 나아갈 때마다 철과 뼈가 부딪치는 소리가 좁은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가다 보면, 막혀있지 않은 반대쪽의 빛이 보였다. 아직 도색 안 된 우주선, 보여? 뒤에서 혜운의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 대답하기 위해 제레미가 시선을 정비실의 우주선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려한 색들이 즐비해지고 있는 수많은 우주선들 사이에 아무 색도 없는 은색의 우주선 한 대.
“있어, 얼른 가자.”
“먼저 가, 나 입구 잠그고 올게. 키 꽂혀 있을 거야. 시동 키고 빨간 버튼 누르면 돼.”
그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언제부터 준비해 왔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 질문을 던질 시간도 없었다. 제레미는 환풍구에서 내려와 곧장 빈 우주선을 향해 달려갔다. 우주선에 도착했을 때, 그는 입구를 주변에 있는 물건들로 막고 있었고, 안내방송은 이곳의 좌표를 방송 중이었다. 시동을 켜고, 빨간 버튼을 누르는 동안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흘러갔다. 수많은 경비 안드로이드와 문을 잠그고 소년을 향하는 그가 보였다.
소년을 향해 그가 달렸다.
닫았던 문이 강제로 열렸다.
우주선의 조종기에 출발 카운트 다운이 떴다.
전투 준비를 하는 안드로이드가 보였다.
달려오는 그를 향해 총알이 발사된다.
그가 쓰러졌다.
그가 다시 일어나 달려왔다.
또 한 발, 그의 다리에 맞는다.
그가 일어나지 않았다.
소년을 태운 우주선이 출발했다.
그가 고개를 들어 소년을 바라봤다.
소년은 그의 입모양을 읽었다.
‘약속해.’
06. 언젠가로 보내는 희망
‘…지구에서 언젠가 날 찾으러 와줘, 제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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