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로 감상문을 가져올 줄 알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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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희신은 문화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과 놀랄 만큼 비교되어서, 아름다운 것을 보면 부끄러웠다. 추할 만큼 질투가 났다. 세상의 불공평함이 피부 위를 징그럽게 기었다.
종이 위에 선하나 예쁘게 긋는 것이, 둥그런 찰흙에 눈구멍 하나 뚫는 것이, 물에 부어야 하는 간장의 양을 가늠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배희신에게는 그랬다. 그런 사람도 있지- 라는 둥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대신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심지어 병원에 가보자는 권유도 받았지만 거절했다. 만약 정말 병이 원인일지라도, 갈증은 해소될 리가 없었다.
아름다움을 순수하게 마주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용기, 혹은 체념이.
그렇게 18세의 어느 날 각성한 배희신은 첫 아티팩트를 만든 후 제 발로 걸어 전시회를 다녀왔다. 부끄럽지 않았다. 질투 한 점 없이 올곧은 눈으로 작품을 마주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지만, 적어도 하나쯤은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았는가. 그걸로 되었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날 얻은 것이 용기와 체념 중 어느 쪽인지는 오늘날까지도 알 수 없었다.
"이게 뭐예요?"
은주아는 배희신이 내민 두툼한 서류철을 바라보았다. 사이를 슬쩍 훑어보니 껴있는 A4용지가 족히 20장은 넘어 보인다. 은주아는 선뜻 손을 내밀지 않고 팔짱을 낀 채 서류철의 정체를 밝히라며 종용하는 시선을 보냈다.
"사람들이 보면 내가 폭탄이라도 내민 줄 알겠어."
"만약 이상한 계약서라면 폭탄보다도 더할 테니까요."
철저하군. 하지만 사회인의 이런 철저함은 방패이자 무기가 된다. 하물며 무대 위에 서는 이에겐 얼마나 중요했겠는가.
배희신은 장난스레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는 서류철의 위 덮개를 열어 안쪽을 보여주었다. 가장 윗장은 텅 빈 종이 한가운데에 세글자만 덜렁 쓰여있는 표지다.
[감상문]
정갈하지는 않고, 조금 날렸지만 언뜻 보면 제법 세련되었다 할 수 있는 폰트... 아니, 글씨체였다. 그것이 인쇄한 게 아니라 볼펜으로 직접 적었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은주아는 아까보다도 더 의심이 강해졌지만, 곧 기억을 떠올렸다. 던전에서 했던 이야기다. 감상문을 써오라는 말에 생각해본다더니.
"이렇게 본격적일 일이에요."
그제야 경계심으로 무장한 팔짱을 푼 은주아가 서류철을 받아들었다. 뒷장을 가볍게 팔락팔락 뒤져보자 장난은 아니었는지 꼼꼼하게 쓰인 글자들이 까맣게 수를 놓았다.
"쓸게 이렇게나 많았나요?"
"가끔 그림도 그렸어."
"그림?"
왜, 있잖아. 보고서 쓸 때 꼭 사진 몇 장 삽입하고... 배희신의 뒷말은 '그림'이란 단어와 비교하면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은주아는 아까보다 조금 더 천천히 뒷장을 넘겨 배희신이 그렸다던 '그림'을 찾아냈다. 쇠꼬챙이에 목이버섯이라도 달린 모양새였지만 감상문의 주제를 생각하면 그것은 발레리나임이 분명했다.
"세상에. 황천의 뒤틀린 백조의 절규에 이은 신작이네요."
은주아가 조금 놀랍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황천의 뒤틀린 백조의 절규]는 옛날에 배희신이 은주아의 초상화를 그리겠다며 설치다가 세상에 탄생시키고만 저주받은 작품이었다. 처음에는 금방 찢어버리려고 했지만 결국 은주아의 손에 걸려 어딘가에 고이 걸려있을 그림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 배희신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건 역시 들키기 전에 버렸어야 했는데, 더욱 재빠르지 못했던 자신이 원망스럽다. 배희신은 앞머리를 한 번 싹 쓸어 넘겼다.
"그때보단 조금 더 나을걸."
"그럴 리가요."
빈말 없는 은주아가 본 그대로의 감상을 내뱉자 배희신은 비틀거리는 시늉을 했다. 배희신의 그림 실력은 여태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계속 나아질 일이 없으므로 당연한 결말이었다.
그림을 들여다보던 은주아는 표지 뒤의 2페이지로 되돌아갔다. 배희신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여기서 읽게?"
"싫어요?"
은주아는 서류철을 한 번, 배희신을 한 번 바라보고 말을 잇는다.
"혹시 이 안에 뭐 욕이라도 써놨다면 그럴 만도
"그럴 리가 없잖나. 읽어라, 읽어."
배희신은 손을 툴툴 털고는 은주아의 반대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의자에 늘어져라 앉아서는 고개를 홰까닥 뒤로 젖힌 꼴을 빤히 바라보던 은주아는 다시금 감상문으로 시선을 내렸다.
첫장부터 얼마간은 던전 내에서의 관찰기였다. 던전 내부의 환경, 상황, 들이닥친 몬스터의 종류, 그 몬스터를 공략하기 위해 은주아가 선택한 방법까지. 감상문이라기보단 아까 흘려들은 보고서가 더 어울리는 내용이다. 이대로 연구소에 제출한다면 제법 시선을 끌 정도는 될 테다.
그 뒤로 은주아를 모티브로 한 아티팩트 구상이 이어졌다. 이 부분은 앞장의 글씨체보다는 악필로 변했는데, 머릿속에 있는 상상을 끄집어내느라 글씨를 다잡는 쪽의 집중할 새가 없었던 탓이다.
그중에서는 비단 무기뿐만이 아니라 오르골과 같은 단순한 장식품이나 장난감도 있었다. 종종 스케치하려다 말았는지 수정테이프가 찍찍 그어진 자국이 있다. 은주아는 손톱으로 긁어내 볼까, 충동이 들었으나 말았다. 위에 빼곡히 채운 글씨가 상해버릴 위험이 있는 탓이다.
능력을 사용할 때, 본인은 물에 젖지 않지만 옆 사람은 그렇지 않다. 옆에 서 있다가 사나운 해일을 맞이해야만 했던 지난 던전 -9p '불운한 고래의 울음' 참고- 을 토대로 고민한 바가 있다. 온몸에 두르는 방수 슈트 따위를 만드는 것은 효율이 높지 않다.
대신 소환하여 휘두르는 물에 뒤섞이는 것은 어떨까? 주아 씨가 아닌 그 소환수 '지젤'의 서포터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렇게 방패처럼 덮쳐오는 물 안쪽에 또 다른 방패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안전성도 높아지고 갑자기 쫄딱 젖은 생쥐가 되지는 않으리라는...
'진심인가.'
이런 생각이 들게까지 하는 대목도 있었다. 그리고 배희신이 생각보다 뒤끝이 길다는 사소한 정보도 알게 되었다. 은주아는 붉은 덩어리를 허공에서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한 배희신을 흘끗 바라보았다가 다시 감상문으로 시선을 내렸다.
감상문은 이윽고 막바지에 다다른다. 한 페이지를 더 넘긴 은주아는 문득 기묘한 감상에 사로잡혔다.
재능이 눈을 현혹한다면, 노력은 마음을 휘두른다. 10년 전 내한 공연 '----' 에서 바라본 무대가 오로지 재능으로만 이뤄진 것이었다면 나는 절대로 '은주아'라는 이름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은주아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알고 있었네요?"
"그렇지."
배희신은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배희신도 고개를 들었는데, 뻐근했는지 어구구 소리를 내며 몇 번 좌우로 돌리고 나서야 제대로 자리를 잡았다.
"나는 예술을 사랑하거든. 공연을 보러 간 건 우연이었지만. 한국에 잘 들어오지도 않더만."
티켓을 구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손님 중 하나가 취소해야 할 표를 양도해준 것이 계기였다. 그곳에는 눈부신 재능이 있었다. 눈이 멀 것 같던가, 숨이 막혔던 것도 같다. 용기든, 체념이든 그 순간만큼은 어느 것도 상관없었다. 처음으로 갔던 그 전시회에서 얻은 것이 없었다면 공연을 볼 수도 없었을 테니까.
허나 노력도, 재능도 운명의 농간 앞에는 무력했다. 사고의 흐름은 은주아의 사고소식을 들었던 날을 떠올리게 했으나 경솔하게 입밖으로 꺼내지도, 표정을 내비치지도 않았다. 그의 인생이 어떻다 재단할 자격따위는 없으므로 '안타까운 일어었다' 라는 둥 어줍잖은 위로를 건넬 생각은 없었다.
있는 것은 단 한 가지의 사실이다. 그 날 보았던 무대가 너무도 훌륭했다는 것.
"한 번쯤은 아가씨를 위한 물건을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는데. 이제 이룰 수 있는 건가?"
배희신은 쿡쿡 웃었다.
"역시 돈은 받을 거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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