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준비
"어이, 비비. 있는감?"
여자는 빠끔히 열린 문 틈새로 눈을 흘끔 들이밀었다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안에서는 빨간 무드등이라도 켜놓은 양 불길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잠잠해지며 본래의 부드러운 빛을 되찾은 방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들어와."
반가움도, 퉁명스러움도 어느 것 하나 들어있지 않은 단조로운 목소리다. 하지만 여자는 익숙하게 그제야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배희신은 풀어놓았던 머리칼을 주섬주섬 그러모아 고무줄이 송송 삐져나온 머리끈으로 대강 묶어버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나를 찾아와 무기를 들고 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배희신은 이제 갓 만든 듯한 귀걸이 하나를 손에 얹어둔 채 여자를 슥 훑어보았다. 여자에게는 하루 이틀 만에 무기를 부숴놓고는 다시 만들어달라고 조른 전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에, 배희신의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받는 일에 억울해할 처지가 아니었다. 여자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듯 두 손을 제 머리 옆으로 들어 보였다.
"아니, 아니. 저번에 준 건 잘 쓰고 있어. 다른 게 갖고 싶어서 그렇지."
여자가 가져간 것은 채찍이었다. 길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고, 피를 묻힌 일정거리의 대상을 추적할 수 있는 기능을 넣어달라고 했던가. 까다로운 주문이다. 마법과 같은 능력을 추가하려면 꽤나 정교한 조작이 필요한 탓이다.
배희신은 말의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여자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밀어 두면 그 날카로운 눈에 지레 겁을 먹을 법하다. 여자는 잘못한 게 없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눈을 굴리다가 배희신이 들고 있는 귀걸이에 눈독을 들였다. 그러자 배희신은 그것을 감추기라도 하듯 가볍게 주먹 쥐었다.
"내가 전에 말했을 텐데. 아티팩트를 여러 개를 사용하는 건 위험한 짓이라고."
배희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다가섰다. 한쪽 벽면에는 이미 수많은 붉은 장신구들이 주렁주렁 걸려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희신은 흘끗 둘러보다가 빈 고리에 귀걸이를 걸어 올렸다. 여자는 마치 벌서듯 들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내가 죽으면 이 모든 게 단순히 썩어빠진 핏덩이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하지만 비비-. 희신씨. 나한테는 여기만큼 편하게 물건을 구할 수 있는 곳도 흔치 않다고. 게다가 값도 싸고. 그리고 주 무기를 구하는 거 아냐. 그냥 가벼운 건틀릿정도면 되는데. 응?"
여자가 애교 있게 눈을 휘자 주름이 자글자글 지며 제법 순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배희신은 그 표정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와 알고 지낸 지도 꽤 됐지. 자신이 만든 아티팩트의 위험성을 모를 리도 없고 과신할 일도 없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면 그저 괘씸하다는 것 정도일까.
"조건이 있다."
그 말에 여자가 귀를 쫑긋 세웠다. 이건 긍정의 의미였으니까.
"이번에 만들어주는 걸 일주일 이내에 깨부숴오면 앞으로 1년간은 네 의뢰를 받지 않을 거야."
...아닐지도? 격투 타입의 언커먼이자 본성마저 과격하기 그지없는 여자가 지키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여자는 끙끙대다가 결국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이고 만다.
"아-알았어. 노력해볼게."
"노력해야지. 손해를 보는 것은 내가 아니니까."
하지만 사실 여자가 손해를 볼 일도 없다. 편하게 무기를 얻을 수 있다고 말은 했지만 세상에 자신보다 더 좋은 무기를 만들어내는 제작자야 널리고 널렸으니까. 여자는 단지 어느 분야에서 게을렀고, 정에 이끌려 단골손님이 되어버린 케이스일 뿐이다. 코웃음을 친 배희신은 팔짱을 낀 채 세 개의 손가락을 펴 보였다.
"늘 그랬듯이 사흘이다. 그 후에 찾으러 와."
잘 보면 정에 약한 것은 이 남자도 다를바가 없다. 매정하게 밀쳐내는 것 같다가도 어느정도 치근덕거리면 받아주고 만다. 물론 그것이 배희신이 정한 어느 선을 넘지 않은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여자가 느끼기에 배희신의 선은 멀고 깊은 곳에 있었다. 아직은 닿으려면 멀었다는 소리다.
여자는 씨익 입꼬리를 말아올려 웃었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 폐기처리가 진행되고 있을 자신의 갑주는 더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었으니 골치썩던 머리도 훌훌 날아갈듯 했다.
배희신은 그런 여자의 홀가분한 얼굴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런 배희신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문쪽으로 발을 옮기던 여자가 기어코 한번 더 입을 열고 만다.
"근데 기왕이면 칼 하나 더..."
"나가."
배희신은 한겨울 서릿바람보다 차갑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정도대면 이제는 칼을 들이대도 허락하지 않는 상태다. 여자는 미련없이 방을 떠났다.
홀로 남은 배희신은 뽑아놓은 혈액팩이 얼마나 남았나 수를 셈해보다가, 곧 위스테리아에서 행사를 한다고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얼음꽃 축제, 였던가. 배희신의 머릿속이 순식간에 아름다운 조형물의 상상으로 가득찼다. 딱딱하게 굳었던 입술이 허물어지고 들릴듯 말듯한 웃음소리가 헛숨처럼 흘렀다.
"...재밌겠네."
말해 뭐하랴. 배희신은 그런 행사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가기 바빴다. 자신의 피로 만들어내는 아티팩트 외의 제작물들은 죄다 기괴한 저주인형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극악의 손재주를 가진 배희신이 좋아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눈부시게 빛나는 타인의 재주를 구경할 수 있는 기회라니, 축복이나 다름없다.
배희신은 방 안을 슥 둘러보았다. 축제에서 파는 얼음꽃을 사다둘 자리를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미 돈을 쓸 생각이 만만한 배희신은 기분좋게 방 정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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