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케일] 7월 7일
케일을 만나러 차원을 건너는 에르하벤
2019년도에 작성, 2020년도에 발행되었던 글입니다. 따라서 설정이나 캐해가 다를 수 있습니다.
(탈고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가볍게 읽어주세요!)
케일의 몸이 빛에 휩쌓인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얀 별이 죽었다는, 길고 긴 싸움이 끝났다는 기쁨을 누릴 세도 없이 환한 빛이 터져나왔다. 당황한 주위 사람들과 저를 부르는 비명과도 같은 외침 뒤로 케일의 시야가 흐려졌다. 다급하게 달려오는 아이들을 보면서도 손끝하나 움직이지 못했다. 아,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후회인지 한탄이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애석하게도 제 역할을 다 한 케일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걸 막을 길이 없었다. 평소와 다르게 격양된 목소리로 제 이름을 외치는 에르하벤의 모습을 끝으로 케일의 의식이 멀어졌다.
7월 7일
케일이 지구로 돌아온지 벌써 일 년이 지났다. 어떻게 된 일인지 본래의 모습이 아닌 케일의 모습으로 돌아와 막막했던 것도 잠시,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김록수라 부르는 것에 안도했던 그 날도 이제는 가물거렸다.
케일이 에르하벤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기절했다가 깨어났을 때 눈 앞에 보인 것은 익숙한 천장이었다. 고풍스러운 샹들리에도, 침대에 달린 휘장도 아닌 여기저기 곰팡이가 껴 흐릿해진 흰 천장이었다. 돌아왔구나. 고개를 돌리자 주위에 널부러진 '영웅의 탄생' 책이 보였다. 케일은 차마 그 책을 건들 생각도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 몸이 뻐근한 게 그새 푹신한 침대에 익숙해졌나 싶었다. 긴 꿈을 꾼 건가. 아직까지도 생생한 목소리들과 달리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현실감이 없었다.
케일은 우선 핸드폰부터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 0건. 아무도 연락을 안 한 건가. 씁쓸한 마음으로 액정을 내려다보던 케일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불안함인지 뭔지 모를 감정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무시하며 상단바를 내렸다. 핸드폰에 적힌 날짜는 영웅의 탄생을 읽었던 날로부터 딱 하루 지나 있었다. 그래서였나. 평일 아침 7시임을 알리는 화면을 끄고 핸드폰을 내려두었다. 어쩌면 이 모든게 꿈은 아니었을까.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출근이나 해야지. 뒷목을 주무르며 화장실로 향한 케일은 거울에 비치는 붉은 머리카락을 확인하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거울 속의 인물은 김록수가 아니었다. 케일 헤니투스. 이제는 김록수라는 이름보다 더 익숙해진 이름을 중얼거리며 케일은 손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사람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활짝 웃는 아이들의 모습, 함께 싸우던 동료들의 얼굴, 새로운 가족,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금방이라도 나타나서 무슨 일이냐고 물을 것만 같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케일이 제일 잘 알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상실감은 이전보다도 지독했다. 더는 잃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는데. 그보다, 이제 하얀 별은 없으니 내가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을텐데. 그럼에도 심장을 옥죄는 지독한 상실감은 케일을 괴롭혔다. 의연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만 도저히 의연할 수 없었다. 자꾸 못해준 것들이 떠올랐다. 그래도 아이들이 다 크는 건 보고 싶었는데. 결혼은 못해도 약혼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문득 약혼이라는 글자를 떠올린 케일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억지로 끊어냈다. 천천히 손을 내린 케일은 거울 너머 잔뜩 피곤한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케일은, 김록수는 그 날 출근하지 않았다.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겠다. 다섯 권보다 훨씬 많은 '영웅의 탄생' 책을 가지런하게 정리해놓고는 하루 종일 딱딱한 매트리스 위에 누워있었다. 이상했다. 금방이라도 들릴 것 같은 어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밥을 먹으라며 재촉하는 목소리도, 푹신한 침대로 가서 누우라며 혼내는 목소리도 없었다. 김록수의 집은 조용했다. 그 적막이 이상해서 케일은 고집스럽게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되뇌었다.
무엇하나 빠짐 없이 기억나는 일들을 곱씹으며 케일은 감정을 정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합리화를 했다. 그래, 애들도 이제 독립할 때가 됐지. 다들 처음에는 슬퍼하겠지만 금방 괜찮아질거야. 약혹 그까짓게 뭐가 중요하다고. 멍하니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던 케일은 습관적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래도 한 번 경험했었다고 제법 침착하게 구는 자신이 우스웠다. 케일은 마음 깊숙한 곳에 묻히게 될 감정에 작별을 고하며 자리에서 털고 일어났다. 김록수는, 케일은 그 다음날 정시에 출근했다.
무단결근하더니 용모가 확 바뀌어서 온 것에 대해 뭐라고 말해야할지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평소처럼 케일을 맞이했다. 팀장님 어제 말도 없이 빠지셔서 놀랐잖아요! 그러실 분이 아닌데 얼마나 아픈 건가 싶었어요. 얼굴 보니까 멀쩡한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우수수 쏟아지는 걱정의 말에는 왜 머리 색이, 얼굴이, 체형이 바뀌었냐는 물음은 없었다. 자신을 배려해서 그런 건가 싶었지만 다른 팀의 사람들도 익숙하게 김록수를 부르는 것을 보니 그건 아닌 듯 싶었다. 그럼 셋 중 하나겠지. 사람들의 기억이 바뀌었다거나, 제 눈에만 케일의 외형으로 보인다거나, 사실은 자신의 기억이 잘못되었다거나. 잠시 고민하던 케일은 아무렴 어떠나 싶어 그만뒀다. 이제와서 이유가 중요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케일은 무난한 하루를, 익숙한 한 달을, 지루한 일 년을 보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이 날뛰고, 길드랍시고 돈 받아쳐먹는 놈들은 허구한 날 뒷통수를 쳐대고, 팀원이 사라지고, 새로운 팀원이 생기고. 케일로서 살아가기 전과 다를 것 없는 일 년을 지냈다.
케일이 아닌 김록수로 살아가는 일은 힘들지 않았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들이, 거울 속에 비치는 붉은 머리칼이, 집 안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영웅의 탄생' 책이 케일을 숨막히게 했지만 케일은 그 어느 것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고 그럭저럭 잘 살았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팀장님, 저희 회식하러 가요! 누군가 외친 말에 팀원 모두가 좋다고 나섰다. 남들은 회식의 히읗자만 들어도 기겁한다던데. 집에서 가서 저녁 먹어야 합니다, 차갑게 대꾸해도 뭐가 좋은지 실실 웃으면서 저를 이끌었다. 일 년 넘게 회식 없던 건 저희뿐이라고요! 오늘은 저희랑 좀 놀아주시죠! 양 팔을 잡은 채 대답하는 얼굴이 신나보였다. 결국 케일은 어쩔 수 없이 질질 끌려갔다.
회식장소랍시고 도착한 곳은 치킨집이었다. 이왕 먹을 거면 소고기가 좋지 않나. 케일이 묻자 팀장님 통장 사정 아는데 얻어먹는 주제에 소고기는 염치없다며 치킨집 문을 열었다. 회사 카드로 살 생각이었는데 꼼짝없이 지갑 열리겠네. 돈 많은 백수라는 오랜 소원이 한 발자국 멀어지는 게 탐탁치 않으면서도 달가워서, 케일은 못 이기는 척 안으로 들어갔다.
억지로 끌고온 것과 다르게 저들끼리 왁자지껄하는 모습을 보니 조금만 더 앉아있다가 계산해주고 사라지면 딱이겠다 싶었다. 이것저것 질문하던 사람들이 전부 사라져 한가해진 케일이 가게를 둘러봤다. 괴물이 판을 치는 세계에서 치킨집이 웬 말이야. 케일은 퍽퍽한 순살 치킨을 입에 넣으며 새삼스러운 고민했다. 그보다… 맛 없어. 이딴 치킨, 레시피만 알려주면 비크로스가 훨씬…. 문득 떠오른 이름에 케일은 무의식적으로 술잔을 들었다. 텁텁해진 입 안을 헹궈야지 싶었다. 팀원 중 누군가 말아줬던 소맥을 단숨에 비웠다. 팀장님 멋져요! 환호 소리가 들려왔지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입이 쓴 이유가 술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그 후로 팀원들이 만들어준 특제 폭탄주를 여섯 잔이나 비우고 나서야 가게를 벗어날 수 있었다. 괜찮냐는 물음에 대충 손을 저으며 가게를 벗어나자 더운 공기가 훅 끼쳤다. 벌써 여름인가. 몸에 딱 맞는 정장이 갑갑해져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언제 괴물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도 거리는 번화했다. 반짝이는 네온 사인과 시끄러운 사람들. 그 가운데 혼자만 이방인 같아 케일은 집으로 가는 걸음을 빨리했다.
이십여분을 걷자 저 멀리 아파트 단지가 보였다. 밝은 불이 몇 없는 걸 보면 시간이 늦었나 싶었다. 지금이 몇 시지. 시간을 확인하려 핸드폰을 꺼내던 케일은 손이 미끄러져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서있는 곳이 경사진 탓에 저 멀리 미끄러진 핸드폰을 보며 머리를 짚었다. 젠장, 완전 박살났겠네. 핸드폰을 줍기 위해 터덜터덜 내딛던 걸음이 뚝 멈췄다. 핸드폰 앞에 신발 하나가 나타났다. 케일은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과 그 앞에 선 누군가의 발을 보며 생각했다. 이상한데. 왜 신발이 익숙하지.
흔한 신발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만한 신발이다. 그럼에도 익숙한 이유는. 케일은 떨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익숙한 신발, 익숙한 바지, 익숙한 셔츠, 그리고 익숙한 얼굴. 아. 그렇구나. 그래서 익숙했구나. 케일은 작은 탄성과 동시에 발을 뗐다. 팔을 벌리고 선 채 웃고있는 얼굴을 보니 익숙하지 않은 무언가가 터져나올 것 같아서, 케일은 단숨에 거리를 좁혀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단단하게 받쳐주는 품이,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전해져오는 온기가 모두 다정했다. 케일.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실감이 나지 않아 안은 팔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박복한 인간아. 특유의 호칭에 웃음이 비져나왔다. 다시는 못 들을 것 같던 말이었다. 뭐라고 답해주고 싶었지만 목이 메여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큼지막한 손이 뒷머리를 쓰다듬었고, 여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사랑하는 사람 한 번 보겠다고 차원을 이동하다니. 내 팔자야."
그러게 누가 찾아오라고 했습니까. 네가 그랬지. 제가 언제 그런 말을 했습니까? 투덜거리는 목소리와 달리 케일은 얌전히 품에 안겨있었다. 축축해진 옷이 여름의 습기 때문은 아닐거라 생각하며 에르하벤은 웃었다. 언젠가 흘러가듯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웃지 말라는 말에도 과거의 잔상을 돌아보던 에르하벤은 케일의 아프지 않은 공격에 몇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달빛을 닮은 백금색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조금 떨어진 채로 마주보는 이 상황이 못내 기뻐서 케일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에르하벤 님. 그래. 에르하벤 님. 왜 자꾸 부르고. 에르하벤. 어쭈? 사랑합니다. 케일의 부름에 성실하게도 대꾸해주던 에르하벤은 말 없이 웃어보였다. 대답보다 더 좋은 말이 있었다.
"그래, 나도 사랑해."
케일은 오랜만에 환히 웃었다. 깨진 핸드폰도, 눅눅한 공기도, 아무래도 좋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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