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망되

[최한케일] Remember Me

기억을 잃은 케일로 최케가 보고 싶었을 뿐인데...

滅字存亡 by Ruī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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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힘 왕창 쓰고 쓰러졌는데 일어나니까 기억 날아간 케일로 최케 보고 싶다..

(19년도에 원고용으로 쓰다가 관둬서 탈고도 안 된 글이지만 요청이 있어서 발행합니다.)




김록수는 눈을 간지럽히는 햇살에 미간을 찌푸리며 이불을 끌어올렸다. 일어나기 싫다는 듯 칭얼거리며 뒤척이던 록수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습관처럼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곧 옆을 더듬던 손길이 뚝 멈췄다. 손 끝에 느껴지는 감각은 서랍장이나 핸드폰 따위의 딱딱함이 아니었다. 그것보단 조금 더 푹신한…. 푹신? 이상한데. 록수는 서늘해지는 뒷목을 무시하며 억지로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김록수는, 아니 케일 헤니투스는 눈 앞에 펼쳐진 관경에 얼어붙었다.

 

"어?"

 

케일의 입에서 얼빠진 탄성이 흘러나왔다. 손을 뻗은 상태에서 조각상이라도 된 듯이 움직이지 않던 케일은 애써 외면하던 한 존재의 외침에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약한 인간아! 드디어 일어난 건가!"

 

도마뱀 형체에 날개가 달린, 소위 말하는 용의 모습을 한 검은 생명체가 날개를 파닥이며 외쳤다. 이어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한 마디씩 던지기 시작했다.

 

"케일 님. 괜찮으신가요?"

 

선한 인상의 흑발 소년을 지나,

 

"도련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인상 좋은 얼굴로 웃으며 묻는 백발의 노인까지.

 

손에 잡혔던 붉은 고양이와 그 옆에 있는 은색 고양이도, 그 외에 사람들도 뭐라 입을 열었지만 이미 과부화된 케일에게는 닿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 케일이 상황파악을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동안 방에 있던 일행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평소라면 괜찮다는 말이나 아무렇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행동을 취했을텐데, 지금의 케일은 당황한 얼굴로 눈만 데굴 굴리고 있었다. 마치 나쁜 짓 하다가 들킨 어린 아이처럼 눈치만 보는 케일의 행동에 다들 머릿속에 물음표가 그려졌다. 라온 역시 끝이 조금 축축한 애플파이를 아공간에 집어넣고는 케일 주위를 바쁘게 날아다녔다.

 

"인간아, 너 지금 이상하다. 힘을 너무 많이 써서 어디가 이상해 진 건가? 그러다가 또 쓰러지면 왕궁 다 날려버리고 짱돌 저택에서 못 나가게 할 거다!"

 

감금한다는 협박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짧뚱한 용의 협박에 케일이 속으로 기겁하며 곁눈질로 용을 관찰했다. 검푸른 눈을 가진 검은 용. 2미터 조금 안 되는 길이의 용을 바라보던 케일의 머리로 한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어제 밤, 자기 전에 읽던 영웅의 탄생. 그곳에서 저 용과 똑같은 용이 나온다. 그 용은 이미 폭주해서 최한이라는 주인공 손에 안식을 맞이했지만. 

잠시만, 최한? 케일의 눈동자가 휙 방향을 바꿔 선한 인상의 소년에게 향했다. 소년보단 어른스럽고 어른보단 덜 여문 티가 나는 남자는 선한 얼굴에 걱정만을 드러낸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최한으로 추정되는 남자를 빠르게 훑어본 케일은 확신했다. 저건 최한이다. 최한이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곁에 있던 얼굴들이 하나둘 이해되기 시작했다. 머리가 하얗게 센 저 노인은 분명 암살자이자 몰란 가문의 가주였던 론일 것이다. 그 옆에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남자는 그의 아들 비크로스일 것이고. 저 회색 머리 소년은 차기 늑대왕이 될 라크고, 그 옆에는…. 케일은 엘프 뺨을 세 번쯤 칠 만큼 아름다운 백금발의 남자와 고양이 둘은 알아보지 못한 채로 머릿속에 물음표를 그렸다. 저 사람과 이 둘은 누구지. 책에서는 못 봤는데. 케일이 의아해 하는 사이 최한이 케일을 불렀다.

 

"케일 님."

 

케일은 그 호칭에 자신이 어떤 몸에 들어온 것인지도 파악했다. 주인공인 최한에게 술주정하다가 두드려 맞는 사람. 케일 헤니투스. 케일은 최한의 부름을 모른 척 하며 창을 내다봤다. 정확히는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붉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미인. 어떻게 봐도 김록수의 모습은 아니었다. 

절로 나오는 한숨을 삼키고 여전히 걱정스러운 표정의 일행을 훑어봤다. 케일은 자신이 영웅에 탄생에 들어왔고 주변에 있는 존재들이 누군지 얼추 알아냈으나 제일 중요한 것을 알지 못했다. 왜 저런 얼굴로, 저렇게 애달프게 부르는 건지를 알 수 없었다. 케일은 분명 최한에게 두들겨 맞고, 비크로스와 론은 그런 최한과 떠나가고, 저 어린 용은 최한의 손에서 안식을 맞이했어야 하는데, 왜 그렇게나 애타게 케일을 불러대는 것인지 도저히 모르겠는 것이다.

게다가 저 정체를 모를 두 남자와 말하는 고양이도 이상하다. 자신이 본 5권 안의 내용에서 저 넷은 등장하지 않는다. 즉, 저 넷은 5권 이후에 등장한 인물이라는 소리었다. 물론 온과 홍은 5권 속에 등장했지만 이를 알 리가 없는 케일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나는 5권 이후의 케일의 몸에 들어온 건가. 그럼 죽었다던 용과 여전히 제 곁에 있는 주인공 일행도 조금은 일리가 있다. 케일 헤니투스가 망나니짓 하다가 엮였나? 가볍게 생각하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저들이 자신을 저런 눈으로 쳐다볼 이유는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새삼 최악의 상황이라 생각하던 케일은 다시 한번 최한과 눈을 마주쳤다. 이제는 의문과 걱정을 함께 띄운 얼굴은 지나가다가 욕을 내뱉어도 내 귀가 잘못된 거라고 생각될 정도로 선하게 생겼다. 허리춤에 달린 검이 아니었다면 사람은 물론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일 만큼 순해 보였다. 

그러니까 저 얼굴로 암 단원 수십 명을 몰살시키고 이 몸의 주인을 두드려 팼다는 말이지. 케일은 그렇게 행동한 원인을 생각하다가 작게 혀를 찼다. 케일은 그 작은 소리를 들은 일행이 움찔거린 걸 까맣게 모른 채 영웅의 탄생 작가를 열심히 욕하고 있었다. 저런 애한테 그런 시련을 주다니. 이런 빌어먹을 영웅의 탄생. 애한테 뭐하는 짓이야?

깨어난 지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생소한 얼굴로 일행을 돌아보는 케일의 모습에 다들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불안감은 케일의 혀 차는 소리에 꽃을 피우다 못해 열매까지 맺을 지경이었다. 침묵을 견디지 못한 버드가 케일을 부르려 했지만 케일의 말이 더 빨랐다.

 

"누구세요?"

 

그 말에 방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파에른 2월경의 바닷가마냥 싸늘해졌다. 그리고 케일은 혼자 난 아무것도 몰라요 표정을 지은 채 사람 좋은 미소를 띠었다.

 



케일의 선택은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최선이었다. 케일이랍시고 어설프게 행동했다간 다른 사람인 걸 눈치 챈 이들한테 철저하게 고문 당한 후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비약적인 상상이지만 조합을 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었다. 그래서 케일은 기억 상실을 핑계로 대기로 한 것이다. 케일의 상황을 봤을 때 핑계가 아니라 아주 정확한 자기 판단이었으나 기억을 잃은 케일이 그걸 알 리가. 다들 모여 있는 것과 걱정하는 걸 봐서 케일 헤니투스가 안 좋은 일이라도 당했나보지. 그 일 때문에 정신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충격을 받아 기억을 잃었다고 주장하면 저들도 별 수 없을 거다. 그래서 케일은 대뜸 물었다.

 

"누구세요?"

 

당황을 넘어 싸늘해진 공기에 주춤거렸지만 케일은 일명 영업용 미소를 입가에 그려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도 있지 않던가. 이러면 적어도 맞진 않을 것이다. 아니지, 이미 맞았으려나? 반대로 조용해진 주위에 생각을 이어나가던 케일은 음험한 인간인 론의 질문에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게 언제입니까?"

 

그 말에 기억을 잃은 척 하는 케일은 가볍게, 그리고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음. 최한에게 맞았을 때?"

 

…네? 영문을 표하던 일행을 고개를 홱 돌려 최한을 노려봤다. 이제 방 안의 공기는 파에른의 2월 바닷가를 넘어 파에른 절망의 호수에 불어치는 눈보라보다 더 차갑고 따끔거렸다. 그 따끔거림은 모두 최한에게 향했고, 영문을 모르는 최한만이 당황한 채로 굳어버렸다. 케일은 그 모습에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무슨 일 있었나. 자신이 맞았다는 소리에 최한을 저렇게 노려보는 걸 보면 분명 잠깐 엮인 건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태평한 케일과 달리 최한은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급히 손사래를 치며 케일의 말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는 케일 님을 때린 적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다급하게 쏟아낸 말에도 따가운 눈초리는 거둬질 생각을 안 했다. 케일은 최한의 말보다 자신의 말을 믿는 모습에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게다가 자꾸 뒷통수가 쎄한 것이 최한에게 못할 짓을 하는 것 같아 절로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것을 본 일행의 표정이 더욱 살벌해졌으나 의외로 이런 데서 둔한 케일은 아무 것도 모른 채로 한숨을 폭 내쉴 뿐이었다.

 

"최한이 약한 인간 때린 건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날려버릴 거다. 물론 사실대로 말해도 최한은 많이 혼날 거다."

 

아까의 협박은 장난인 걸 알려주듯 살벌하게 마나를 두르고 눈을 치켜뜬 용은 귀엽지만 무서웠다. 물론 최한은 라온이 그런 말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지만 억울한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케일 님을 때릴 리 없지 않는가.

최한은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케일을 돌아봤으나 올곧은 눈빛에 자신이 진짜 케일 님을 때렸나 싶었다. 아닌 걸 알지만, 케일의 한 치 의심도 없이 확신하는 눈을 보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몽유병이라도 생겨 케일을 때린 건지 의심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이미 라온이 물벼락이라도 부어줬을 테니까. 최한은 마음을 다잡으며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케일 님을 때리다니, 꿈에서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단호를 넘어서 비장한 얼굴에 다들 납득한 듯 케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들 케일의 말에 앞뒤 생각 없이 최한에게 날을 세웠지만 최한이 그럴 리 없다는 건 그와 조금만 같이 지내도 알 수 있었다. 최한은 클로페만큼은 아니더라도 케일 님의 말이라면 뭐든 따를 것처럼 굴었으니까. 그렇기에 설명을 요구하듯 케일에게 시선을 옮긴 것이었다. 그 시선을 받은 케일은 순간 오싹했으나 덤덤하게 답을 내놓았다.

 

"내가 주정부려서 최한 네가 때렸었는데. 물론 내가 잘못한 거긴 하지만."

 

자세한 설명 없이 툭 던진 말에 다시 시선은 최한에게로 향했다. 최한은 다급하게 머릿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케일 님이 술을 드셨을 때? 너무 많다. 그럼 술을 마신 날 중에 내가 때렸을 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었다. 술을 마셔서 기억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케일 님이 술을 마시는데 옆에서 한가하게 같이 술을 마신다? 그런 정신 나간 짓을 자신이 할 리가 없었다. 실제로 없기도 했고.

게다가 케일 옆에는 라온이 매일같이 딱 붙어 있는데 최한이 어떻게 케일을 때린다는 말인가. 최한뿐만 아니라 모두가 케일의 말이 이상하다고 느낀 건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케일을 눈에 담았다. 결백하다는 표정이었으나 오래 지내온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케일이 엄청나게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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