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의사와 심판관과 조향사

555 타입, 사이퍼즈 니콜라스 드림 / 6,35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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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운이 좋네요.

니콜라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 부드러운 음성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으로, 여자는 돌연히 니콜라스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겁 없는 여자로군. 니콜라스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여자는 니콜라스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고, 그래서 더 서슴없이 말을 던진 것 같았다.

저 향수 가게 말이에요, 문을 여는 날보다 그렇지 않은 날이 많은데. 오늘은 아침부터 문을 열었어요.

노래를 부르듯 들뜬 목소리였다. 장갑을 낀 여자의 손끝이 길모퉁이 작은 상점을 가리켰다. 따뜻한 색의 가림막과 그 아래의 격자 창문, 하얗게 칠한 아치형 문마다 도시의 매캐한 매연이 묻어 조금씩 색이 바랬다. 전쟁통에도 간간이 명줄을 이어가는 숱한 구멍가게 중 하나로 특이한 점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도 창문의 커튼이 한 차례 흔들리고, 이어 그 뒤에서 나타난 인물을 본 니콜라스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쩌면 니콜라스는 정말로 운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에는 부드러운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이제 막 가게를 연 모양이었다. 단정한 셔츠에 흰색 면장갑을 낀 남성은 바깥 창틀을 따라 가지런히 놓인 화분에 물을 뿌리다, 여성이 니콜라스의 곁을 떠나 창가로 다가오자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여자와 니콜라스는 그가 눈을 접어 웃는 것을 같은 순간에 다른 장소에서 보았다. 친절한 웃음이다. 뭐라고 말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여성은 뺨을 붉히며 그에게 마주 웃어 보였다. 누구를 위해 향수를 사는 것일까. 아마 그녀의 남편을 위한 향수는 아닐 것이다. 그리고 여성의 어깨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그때 니콜라스는 광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가로등의 행렬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고, 목 아래로 전부 검은 옷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고철을 굳혀 만든 조형물 중 하나처럼 보이기도 했다. 반면 로웰은 그를 둘러싼 따뜻하고 온화한 것들과 닮아 있었다. 온색의 커튼과 그의 밀색 머리카락은 잘 어울렸고, 세상 어떤 시름도 없을 것 같은 여자와도 나란히 서 있기에 괴리감 없어 보였다.

그러나 로웰은 사실 그곳에 속하지 않은 이였다.

로웰은 처음부터 니콜라스가 그곳에 서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눈이 마주쳐도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았다. 여자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줄곧 니콜라스를 흘끔거리던 그는 말끝에 입꼬리를 부드럽게 올리며 웃었다. 분명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니콜라스는 미간을 얕게 좁혔다. 오물을 씹은 것처럼 언짢았으나 그 이상의 반응은 할 수 없었다. 로웰은 자신의 관심을 갈구할 뿐 호의를 바라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에게 먹이를 주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경멸과 혐오는 그에게 어떤 감상도 주지 못했다.

그저 보기 드문 광경을 보았으니 여자의 말대로 운이 지독하게 좋았던 셈이다. 아니면 끔찍하게 나빴거나.

*

지난번에는 좀 서운했네요.

뭐가 말입니까?

그의 시답잖은 말에는 대체로 대답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한 귀로 흘릴 새도 없이 불쑥 물음이 튀어나왔다. 기가 차는 말이다. 서운하다니.

광장에서 말입니다. 거기 서서 나를 줄곧 보고 있었죠? 그런데 눈이 마주쳐도 아는 척 한 번 않고요.

바닥에 떨어져 있는 파편을 유심히 골라 주우며 로웰이 대답했다. 아무런 무게도 담기지 않은 그 가볍고 즐거운 투정에 니콜라스는 짧게 혀를 찼다. 듣는 입장에서는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이렇게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만 골라 하는 것도 능력이었다. 갈등을 빚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니콜라스는 그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나 다른 곳에 시선을 두었다. 니콜라스의 관심이 떠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웰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거긴 내가 운영하는 향수 가게입니다. 가끔 열긴 하지만 즐겨 찾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울리지 않는군요.

어떤 부분에서?

많은 부분에서. 당신 같은 사람과 자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고요.

하하… 당신도 알겠지만 나는 코가 굉장히 좋거든요. 조향은 꽤 즐거운 작업입니다. 전혀 다른 향을 몇 개 섞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새로운 향이 탄생하고, 그 향은 곧 값비싼 향수가 되어 누군가를 대표하는 향이 되죠.

노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 니콜라스는 문득 광장에서 로웰을 바라보던 여자를 떠올렸다. 아마 그녀의 관심사는 로웰이 얼마나 향을 잘 빚어내는지, 얼마나 뛰어난 조향사인지가 아닐 것이다. 로웰의 가식은 그녀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저들과 같은 족속이라고 착각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그에게 순수하고 신실한 기쁨 따위는 없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가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불투명한 막 너머의 촉각, 지나치게 선명한 피비린내, 그리고 고통에서부터 피어나는 저열한 만족감뿐이다.

니콜라스는 장갑을 낀 손으로 건물의 잔해에 튄 핏방울을 가볍게 훑었다. 손끝에 묻은 혈액은 반쯤 굳어 끈적거렸다. 이곳에서 죽은 이의 피는 진작에 굳어버렸을 테니 이건 분명 로웰의 것이다. 니콜라스는 로웰이 살짝 흥분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처 입고 피를 흘릴수록 감정의 폭이 넓어지는 이상한 성정을 지니고 있다. 당장 그에게도 혈향이 이토록 짙으니 로웰에게는 아마 온몸에 생피를 끼얹은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가 도맡는 곳마다 이렇게 피투성이가 되니 안타리우스의 입장에서도 웬만한 현장이 아니면 로웰을 부를 수 없었다. 의도치 않게 자꾸 로웰의 업무를 담당하게 되는 니콜라스의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난잡한 전투나 아수라장을 즐기는 편이 아니었다.

가죽에 묻은 핏자국을 엄지와 검지로 문지르며 물끄러미 바라보던 니콜라스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세상에 조향사가 당신만 있는 건 아닙니다. 그건 장의사도 그렇고, 청소부 또한 그렇죠. 향수를 어떻게 만드는지는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도 알고 있을 겁니다. 계속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다가는…….

그렇지만 나 같은 조향사는 드물어요. 나는 향을 섞는 것뿐만이 아니라 해체할 수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즐겨 뿌린다는 볼드뉘는 사실 아주 약간의 베르가못을 더해주지 않는다면 평범한 꽃향기에 지나지 않죠. 그리고 심판관, 당신에게서는…….

그만.

또다. 은근하게 사람의 속을 떠보는 듯한 저 천박한 말투. 첫 만남에 그가 내뱉었던 모욕이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면 지금은 분명 의식적인 도발이다. 니콜라스는 능청스러운 듯 의표를 찌르는 그의 화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적당히 못 들은 체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다. 니콜라스의 손안에서 검은 채찍이 순식간에 형체를 갖췄다. 허공을 찢는 위협적인 소리와 함께 바닥을 내리치자 로웰이 어이쿠, 하며 어깨를 움츠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니콜라스의 매질이 진짜로 두려웠다면 그처럼 반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어 아이를 달래듯 달콤한 목소리가 기분 나쁘게 귓전을 간지럽힌다. 네에 네에. 그에게는 능력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권한이 주어져 있다. 로웰에게는 바투 잡은 목줄, 팽팽하게 그를 당기는 구속구가 필요하다. 빌어먹을 입을 다물게 할 재갈과 함께.

조금 심기가 거슬린 채로 뒤를 돌아보면 로웰은 어느샌가 일을 끝내고 우뚝 선 채 니콜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랐다고 해야 할까, 유난히 불쾌했다고 해야 할까. 니콜라스의 입매가 굳는 것을 로웰은 놓치지 않았다.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로웰의 동공은 평소보다 확장되어 있었다. 걷어 올린 팔에는 길게 벌어진 상처가 나 있었고, 그곳에서부터 채 멎지 않은 피가 손끝을 타고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위험한 징조는 아니었다. 그의 몸 안에서는 혈액이 빠져나가는 만큼이나 빠르게 재생되고 있다. 니콜라스는 로웰이 고통과 죽음을 조금이나마 늦출 수 있다는 존재라는 게 마뜩잖았다. 니콜라스가 그를 ‘심판’하는 순간이 온다면… 로웰은 그때도 좀처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쉽게 죽지 않을 것이다.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니콜라스는 날을 벼린 말을 씹어 뱉으며 웃었다.

당신의 가식이 우습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형편없는 자가 다른 사람들이랑 멀쩡한 척 얼굴을 마주하고 웃을 줄 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나빠서요.

누구에게나 가면은 필요한 법이죠.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로웰의 금빛 눈이 니콜라스의 눈동자를 흔들림 없이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을 이렇게 마주 볼 수 있는 이는 흔치 않았고, 그는 가끔 로웰이 그를 들여다보려고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마 성공할 날은 영영 오지 않겠지만, 그런 시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건방지다.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잦아들었다.

또 그 혀로 화를 부르려 하는군요. 입을 조심히 놀리라고 분명히 경고했습니다, 장의사.

아, 심판관. 그러고 보니 당신도 그런 가면을 이미 하나 갖고 있지 않나요?

그 순간 니콜라스는 거칠게 손을 휘둘러 그의 목을 잡아챘다. 비스듬히 내려다보이는 그의 목은 생명력이 넘쳐 보였고, 손에 잡히는 순간 빳빳한 가죽 너머로도 그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철저히 누르고 있던 능력의 억제를 조금씩 늦추자 주변이 형언할 수 없는 검은 형체들로 뒤덮이며 차츰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로웰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로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건 공포를 마주한 사람의 생리적 반응이다. 그러나 원래라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할 만큼 공포에 잠식되어야 마땅할 순간, 로웰은 뒷걸음질 한 번 치지 않고 그의 손아귀에 잡혀 들었다. 니콜라스는 그 눈동자 안에 비이성적이고 거대한 두려움을 심어 넣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

중심이 무너지고 두 쌍의 다리가 엉키면서 니콜라스와 로웰은 함께 바닥에 나자빠졌다. 완충재 하나 없는 시멘트 바닥에 등을 부딪친 로웰이 큭, 소리를 내며 몸을 들썩였다. 그러나 니콜라스는 그에게 숨을 고를 시간을 주지 않았다. 숨과 피가 흐르는 목을 힘껏 틀어쥐자 가죽 장갑이 피부와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근육이 한껏 긴장하고 손등에 핏줄이 솟았다. 로웰이 켁켁대며 호흡을 구걸하듯 니콜라스의 손목을 더듬었다. 그가 몸부림칠 때마다 그를 깔고 앉은 몸이 얕게 들썩였다. 그러나 그는 본래 공포와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보잘것없는 발버둥은 일종의 역할극일까, 아니면 그에게도 도피 본능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일까. 그러나 로웰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니콜라스는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붉어진 눈가와 괴로운 듯 벌리고 있는 입, 그것은 비단 강렬한 쾌감에 젖어드는 사람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낯짝이 두꺼운 자, 질긴 껍데기를 뒤집어쓴 자, 그리하여 가시에 찔리면 기뻐하는 자. 그리고 로웰은 니콜라스의 분노 또한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가 니콜라스에게 있어 구제할 수 없는 죄인이자 죽일 수 없는 눈엣가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로웰의 손이 닿는 곳마다 그의 피가 주체할 수 없이 묻어났다. 장갑과 소매 사이 맨 살갗에 스며드는 기분 나쁜 체온에도 니콜라스는 눈을 부릅뜬 채 목을 조르는 손에 힘을 실었다. 그리고 숨을 들이쉬기 위해 고개를 비트는 로웰의 얼굴을 눈에 똑똑히 담았다. 그것만이 니콜라스가 로웰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는 증거였고, 그 증거만이 로웰에게 있어 니콜라스를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임무에서 복귀하자마자 니콜라스는 제키엘에게서 부름을 받았다. 그 장의사를 예의주시하라는 한 줄의 명령이 온갖 오만하고 건방진 수식어구로 부풀려 내려졌다. 니콜라스는 그런 작자와 계속해서 엮이게 되는 게 내키지 않았다. 또한 평소와 달리 직접 얼굴을 보고 분부하는 강화인간의 의중 또한 불분명했다. 니콜라스는 임무에서 달리 부적절한 상황이 있었는지 곱씹어보았다. 짐작 가는 부분이 너무 많아 할 말이 없었다. 평소라면 비열할 정도로 중립 자세에서 벗어나지 않는 로웰이 니콜라스의 앞에서는 유난히 입이 가벼워졌다. 조만간 오해할 만한 상황이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계획에서 벗어나는 건 질색인데 말이다.

제키엘의 목소리가 그를 심중에서 깨웠다.

다 끝났으니 그만 나가보거라. 짐승 냄새가 역겹기 짝이 없구나.

니콜라스는 번쩍 고개를 들고 눈을 크게 뜬 채로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제키엘을 바라보았다. 아연실색한 그의 얼굴과 눈이 마주친 제키엘은 짧게 입바람을 부는 시늉과 함께 손을 휘휘 내저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머리가 복잡했으나 곧 능숙하게 불쾌감을 감춘 니콜라스는 짤막하게 눈인사했다. 다만 돌아 나오는 걸음이 차츰 성급해졌다.

어느덧 옷자락을 휘날릴 정도로 성큼성큼 걷던 니콜라스는 모퉁이를 돌자마자 옷깃을 한껏 잡아당겨 제 코를 묻어보았다. 여기저기 코를 대고 숨을 들이마셔 보아도 아무런 냄새도 맡을 수 없었지만 그가 어떤 냄새를 이야기하는지는 명확했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풍기던 피비린내가 몸에 밴 게 틀림없었다. 여태껏 로웰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도 모자라 피범벅인 바닥을 뒹굴기까지 했으니 냄새를 못 맡는 게 당연했다. 결코 익숙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로웰의 무질서한 방식에 한순간이나마 동화된 것이다.

그리고 무심코 들여다본 소매의 안쪽에는, 아직도 그의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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