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ll Be Home for Christmas

토막글 타입, 1차 / 2,342자

SAL by 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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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국가 레비온의 평온한 교외에서 히르칸 리그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군 시절에는 입에도 대지 않았던 술을 조금씩 마시게 된 건 막심 때문이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가 종종 음주와 흡연을 즐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 가까워질 때까지만 해도 그와 술잔을 부딪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노란 조명이 켜져 있는 펍의 내부는 쌀쌀한 날씨에도 훈기가 감돌았다. 간판이 작고 내부가 좁은 이 술집은 손님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그래서 막심과 히르칸이 종종 방문하는 곳이 되었다. 작게 속삭여도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는 그 공간을 두 사람은 제법 좋아했다. 그게 낭만적이라서, 혹은 그저 편해서. 그런 이유로. 이곳에 오면 막심과 시시콜콜한 옛날이야기, 혹은 어제 있었던 일, 아니면 내일 있을 일… 그런 이야기를 자주 했다. 위스키의 향과 웃음기가 섞인 대화 아래로는 내내 느린 템포의 블루스가 흘렀다.

밤 10시가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이제는 드나드는 사람 없이 주로 한 사람이나 두 사람 정도가 각자의 사정으로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막심과 히르칸도 마찬가지였다. 술을 제법 마셔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얼음이 녹아가는 잔을 손에 쥔 채로 히르칸은 자신의 집을 떠올렸다. 잘 다듬어진 잔디와 관목이 있는 마당, 지금쯤은 하얗게 눈이 쌓였을 경사진 지붕과 크리스마스 장식이 달린 현관문을 그려본다. 막심은 이 주 전부터 히르칸에게 집을 어떻게 단장할지 늘어놓곤 했지만 그의 머릿속에선 거의 한 달 전부터 모든 계획이 세워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취향이 요란하지 않은 건 그나마 좋은 일이었다. 물론 이러나저러나 히르칸에게는 똑같이 거추장스러운 장식일 뿐이지만…….

 

지금 다른 생각 하죠?

 

막심의 목소리가 히르칸을 깨웠다. 히르칸은 턱을 괴고 있다가 자세를 바로 하고 막심과 눈을 마주쳤다. 그렇지 않다. 히르칸은 막심에 대해서 생각하는 중이었다. 히르칸에게 있어 돌아갈 집을 생각한다는 건 곧 그런 뜻이니까. 그렇다면 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애인의 마음은 눈 녹듯 녹아내릴 테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는 히르칸은 그저 요령 없이 대답한다.

 

언제까지 있을 건가 해서.

아직 10시밖에 안 됐는데요.

 

흘끗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막심의 목소리가 조금 칭얼거리는 듯했다.

 

술은 집에 가서 마셔도 되잖아.

아니면 기왕 나온 김에 한 잔만 더 마시고 가도 되죠.

 

그리고 집에 갈 땐 아무도 없는 길로 가요. 그렇게 말하면서 막심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히르칸에게로 몸을 조금 기울였다. 그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히르칸의 손을 잡았다. 막심에게선 익숙한 향수와 달콤한 술의 향기가 뒤섞여 났다. 그리고 꼭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제발, 그렇게 해요.’ 뭔가 바라는 게 있을 때면 막심의 눈동자는 늘 그렇게 애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막심은 이런 데에 재주가 좋은 남자였다. 히르칸은 부쩍 가까워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이고선 툭 내뱉었다.

 

고집이 세네.

글쎄요, 크리스마스니까.

 

그렇게 대답한 막심이 몸을 도로 물리며 수줍게 웃었다. 조도가 높지 않은 조명 아래서 청년의 뺨은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히르칸은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가끔은 그가 꼭 수줍음 많은 소녀처럼 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걸 비우고 집에 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쨌거나 이럴 때 마주 고집을 부려본 적은 없었다. 애인의 애원을 무시할 만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대답을 고르며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비운 히르칸은 빈 잔을 내려다보았다. 잔을 쥐고 있는 제 손에는 험악한 흉터가 빼곡히 박혀 있었고, 그중 네 번째 손가락에는 가느다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썩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 눈에 띄었다.

역시 그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히르칸은 불쑥 대답했다.

 

그래, 그럼 한 잔만 더.

 

그리고 다시 눈을 든 히르칸은 무심코 웃었다. 마주친 막심의 두 눈에서 따뜻한 것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사랑과 충족감, 사소한 승리, 또 한 번의 확신, 연약하지만 결코 깨지지 않는 사랑. 막심이 손을 좀 더 꽉 쥐어왔다. 낯설었다. 히르칸은 자신이 이런 짓을…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낄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러나 한 시대가 막을 내리며 많은 것이 변했고,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조차 조금은 달라졌다. 흙먼지와 피비린내는 차츰 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되어갔다. 더는 전쟁터로 몸을 던지길 소망하지 않았고, 한때 그의 육신을 지배하던 분노와 폭력 또한 천천히 깎여나갔다.

 

무엇보다도 히르칸을 놀라게 만든 것은 그 자신이 감성적이고 나약한 것을 썩 좋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서정시와 티타임을 사랑하고, 겁이 많고 섬세하며, 한시라도 혼자 있고 싶지 않아 하는 그 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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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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