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항로에, 길잡이별은 겨울의 다이아몬드

프로젝트 세카이 마후유 x 카나데

어느 평론가가 말했다. 성공한 작품에는 일상의 의외성과 비일상의 친숙함이 공존한다. 세상은 일탈을 꿈꾸게 해주는 이야기를 좋아할 뿐, 일탈을 유발하는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나 품고 다니는 극히 날것의 욕망, 있는 그대로 직시하기엔 때로는 추악할 수밖에 없는 그것을 조금 색다르면서 정당한 모습으로 바꿔 선보여주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받아들이기 쉬운 익숙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 하지만 익숙한 이야기를 익숙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걸 듣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틀을 깨는 창의성이 향신료로 요구되는 거다. 수용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평소와는 조금- 조금만 다르게.

그렇기에 보편 가치를 독특하게 채색할 줄 아는 감각은 창작자에게 있어 귀중한 미덕이다. 그 감각을 얻기 위해 인류 예술사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뇌해왔는지. 이전까지 누구도 끌어내지 못한 표현의 영역을 찾아 예술가들은 때로는 평생을 바친다. 때로는, 평생을 단 한순간의 깨달음을 위한 판돈으로 쓰기까지 하면서.

<날아다니는 새의 감정을 알고자 절벽에서 몸을 던진 사례는 세계 각지에 있거든. 겨울의 혹독함을 알고자 홀로 눈보라 몰아치는 산으로 들어간 사람도 있고, 경계에 머문다는 신을 영접하고자 치사량의 마약을 들이킨 사람도 있고. 성화를 그리기 전 탄압당한 성자의 심경을 알고 싶어서 스스로를 토굴에 생매장한 화가도 있었대.>

<뭐야, 그게. 그러다가 죽어버리면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하는 거잖아.>

<그만큼 영감을 얻고자 하는 열망이 절박했단 말이겠지. 으음, 에나낭도 창작자로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지 않아?>

<아무리 그래도 극단적인 방식은 쓰고 싶지 않거든. 잠깐만, 어쩌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된 거지?>

<K가 또 슬럼프에 빠졌다고 해서, 해결법을 찾느라.>

<......윽.>

몰아닥치는 삭풍마냥 간결하게 핵심을 꺼내는 목소리에, 겉옷을 잃어버린 채 겨울의 냉혹함을 마주한 방랑자마냥 소녀는 어깨를 움츠렸다. 감정을 표현하기에는 다소 건조한 어조는 무채색이기에 날카로운 악의 또한 담는 법이 좀처럼 없지만, 그럼에도 특유의 무게감에 의해 말 한 마디에 어마어마한 압력이 실린다. 아니, 감정을 담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실은 모니터 너머로 살며시 흘겨보는 눈짓을 했을지도. 책임감에 눌려 K, 요이사키 카나데가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는 동안 명랑한 웃음기 감도는 목소리가 구원 신호를 보낸다.

<매순간 절호조일 수는 없는 법이랍니다. 저번 곡, 최고로 좋았으니까 K도 영감 충전을 할 필요가 있는 거라구. 말했잖아, 성공한 작품에는 일상과 비일상이 공존한다. 그 중 비일상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게 바로 독자적인 경험이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경험 같은 거?>

<무, 무리야......>

<뭐, 옛날에는 그랬다는 거고. 과거에는 지금보다 무언가를 체험할 수 있는 수단이 부족했으니 말야. 현대 문명 사회를 살아가는 입장에선 더 많은, 동시에 한결 세련된 선택지들이 있다는 말씀.>

<이래저래 말이 길어지는데 Amia는 같이 외출하자고 권유하고 싶은 거 아냐? 미스터리 투어 때랑 흐름이 비슷해.>

날카로운 지적에 뜨끔했는지 흥이 올랐던 목소리가 잠시 침묵 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특유의 새침한 말투에 적의는 없었지만, 쿡 찌르며 들어가는 화법은 아무래도 상대의 기를 죽이게 되는 법이다. 딱히 반대하는 게 아니라고, 오히려 얼마 전까지 묘하게 거리를 두던 Amia가 평소대로 돌아와 먼저 말을 꺼내주는 거라면 환영이라고 덧붙여서 말하는 게 좋으려나. 에나낭, 시노노메 에나가 혼자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을 무렵 다소 풀죽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긴, 옛날에 비해 요즘 너무 자주 만났지. 아무래도 다들 질렸으려나.>

<아니, 질렸다는 말이 아니구! 그냥 저번에도 비슷한 흐름이었구나, 하는 감상을 말한 거야! 나도 여름축제나 나들이 다녀오자고 권유하기도 했었고, 그러니 오해 금지!>

<난 인형전도, 미스터리 투어도 그리 나쁘지 않았어. 내 입장은 에나낭과는 달라.>

<그러니까 질린 게 아니라니까! 유키 너! 사람을 이상한 방향으로 몰아가지 마!>

<인형전 때는 내가 이야기를 꺼냈었지. 나도 다들 함께 모임을 가지는 게 좋았어. 다만 다시 심령 체험하러 간다거나, 다소 과격한 활동을 하러 가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워. 예를 들어......번지 점프, 라든가.>

말을 꺼내는 도중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순간을 상상이라도 한 걸까. 번지 점프라는 단어를 꺼낸 직후 스피커 너머로 듣기에도 확연하게 떨리는 카나데의 목소리를 듣고, 다들 잠시 경건해진다. 정말 귀엽다.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공유할 수 있는 감상을 각자 마음 속에 담아둔 뒤 다시금 대화로 돌아온다. 옹호해주는 분위기에 기운이 났는지 Amia, 아키야마 미즈키는 한결 쾌활해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겁내지 않아도 괜찮은 기획이야. ‘감각의 확장 : 신세계 - 설치미술의 장’ 이란 전시회가 열리고 있단 소식. 여러 예술가들이 참여했고, 무려 새로 개장한 4층 규모의 대형 예술관 전체에 걸쳐 전시가 이뤄지나봐. 위치는 메구로 역 근처, 도쿄도 정원 미술관도 가까이에 있어. 어때? 다양한 형태의 체험 예술이라면 기발한 착상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새로 개장한 미술관 전체를 쓰는 전시회라, 입장료는 얼마인데?>

<학생 요금이 인당 1,500엔에, 귀여운 사람 한정 특별 우대 할인을 적용하면 4명 다 귀여우니까 합쳐서 6천엔이네.>

<뭐야, 그 영양가 없는 할인 정책. 날짜와 시간대는?>

<아무래도 설치할 때도 철거할 때도 손이 많이 가서 그런지 꽤나 장기간 전시하는 모양이더라. 오전 10시 개장에 오후 8시에 폐관, 휴무일은 격주 수요일. 오래 끌 이유도 없으니 다들 괜찮다면 이번 주 주말에 갈래?>

금방 수긍하는 카나데, 에나와는 달리 남은 한 명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는다. 일정을 확인하는지 무언가를 뒤적거리는 소음이 회선을 통해 전달된다. 묘한 긴장감 속에 다들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토요일 점심 무렵이라면 괜찮을 거 같네. 유키, 아사히나 마후유의 간결한 대답을 듣고서 입안자인 미즈키는 낮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나이트코드 멤버들의 외출 일정은 확정이다.

<자아, 그렇게 되었으니 K도 마음 편하게 있어. 급하게 무리하다간 바늘 끝만 부러진다고 하잖아.>

<응, 고마워, Amia. 기대되네.>

<실내 활동이 대부분이겠지만 혹시 모르니 일기예보 확인해볼까. 으음, 어디, 여름의 끝을 알리는 선선한 가을 날씨, 외출하기 좋은 날이 되겠지만 일교차에 대비하세요, 라. 괜찮겠다.>

<아앗, 에나낭의 그 말 때문에 토요일에 난데없이 여름 마지막 소나기가 주륵주륵 내리는 거 아냐?>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약속했던 토요일, 하늘은 비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빙하빛 음료에 크림 소다를 살짝 섞은 칵테일처럼 진하고 높은 하늘 사이로 샛노란 태양이 레몬맛 캔디볼마냥 동동 떠다닌다. 가을을 도화지 삼아 그 위로 여름의 색채를 칠한 듯한 날씨였다. 소나기 운운하는 말을 꽁하게 담아두고 있었던 모양인지, 메구로 역을 나서자마자 에나는 하늘을 가리키며 ‘완전 좋은 날씨’ 를 강조해서 말했다. 정말로 외출하기에 상쾌한 날씨였기에 다들 좋은 기분이 되어 분위기에 어울려준다.

“날씨도 좋고, 다들 평소보다 귀엽게 입고 나왔고, 최고로 좋아!”

“호들갑은. 그래도 확실히 카나데가 져지 외에 다른 옷을 입고 나온 건 신선하네.”

“여름용 얇은 옷에 어쩌다 얼룩이 좀 많이 묻어서......낮엔 해가 뜨거울 거라고도 하고, 어쩔 수 없었어.”

“자켓으로 단단히 방어하는 게 답답해보이긴 하지만, 카나데다워서 좋을지도. 카나데는 뭘 입든 잘 어울려. 다음엔 좀 더 캐주얼한 방향으로 시도해보자!”

“오오, 이것저것 입혀보고 꾸미는 일이라면 나도 참가할래!”

나들이에 어울리게 예쁘장한 여름 원피스를 차려입고 가을 바람 대비로 가벼운 케이프까지 두르며 잔뜩 꾸민 두 사람 사이에 놓이자 딴에는 신경 쓴 옷차림이 한순간에 초라하게 보인다. 한 걸음 떨어져 걷고 있는 마후유도 연보라색 쉬폰 셔츠에 깔끔한 바지 차림으로 제법 멋들어진 모습이어서 카나데는 한층 고립된 기분을 느꼈다. 소녀가 스스로를 낮게 평가할 뿐, 지나가는 사람들 눈에는 무척 귀여운 아이들 넷이 나란히 걸어가는 걸로 보이겠지만.

무척 귀여운 아이들의 모임이었지만 누군가의 애교 섞인 선언과는 달리 특별 우대 할인은 없었다. 입장료를 내고 전시관에 들어선 순간 아가씨들은 각자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감탄을 내비쳤다. 4층 천장까지 뚫려있는 메인 홀 위로 하나의 우주가 여백을 채우고 천차만별의 천체들이 그 속을 운항하고 있었다. 어떤 기술로 조형했기에 저 많은 천체들이 서로 엉키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순환하는 걸까. 작게 입을 벌린 채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자신들이 입구에 멈춰서 있단 걸 깨닫고는 카나데는 친구들이 이끄는대로 걸음을 옮겼다.

전시회는 각 층마다 별개의 테마를 두고 조성되어 있었다. 층 내에서도 세세한 기준에 따라 구역이 나뉘어졌고, 하나의 구역을 돌아보는데만 짧게는 몇 분, 길게는 10여 분의 시간이 걸렸다. 구역을 채우는 구성도 충실했다. 가볍게 즐기고 넘어가라는 의도로 만들어진 작품도 있었고, 나름의 사유를 안겨주는 작품도 있었다. 이 정도면 입장료가 아깝지 않겠는데. 1층을 돌아본 다음 에나가 지나가며 중얼거린 말에 카나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2층을 절반쯤 돌아봤을 때였다. 체스판의 폰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조각들이 흑백의 판 위에 모여있는 작품 앞에서 일행은 걸음을 멈췄다. 조각들은 사이 좋게 둘러 모여있는 모습이었으나, 자세하게 살펴보면 하나씩 서로 다른 이유로 중심과 거리를 두는 형태였다. 하나는 남들과 다른 색상의 칸을 밟고 있고, 다른 하나는 보는 각도에 따라 확연히 중심에서 떨어진 위치에 있으며, 또다른 하나는 백색인 조각들 중 홀로 검은색을 하고 있다. 집단이란 결국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개인의 단순 합이며, 단결이라는 미명 하에서도 괴리를 완전히 지우는 건 불가능하다. 안내판에 적혀있는 창작자의 제작 의도는 다소 무성의하다 싶을 정도로 간결했다. 하지만 그 염세적인 주제의식을 전하기에는 충분하고도 남았다. 외로움을 알고 있는 이의 마음을 들쑤시고, 찢어놓기에.

“......흐아, 그러고보니 제법 걸었네. 조금 지쳤다. 난 잠깐만 숨 돌리고 올게. 먼저들 보고 있어.”

“......미즈키?”

“벌써 지쳤어? 다른 사람 체력에 대해 말할 게 아니라니깐. 그럴 거면 같이 쉬면 되잖아. 잠깐, 뭐야. 야, 미즈키, 잠깐만!”

바로 직전, 비치는 풍경을 기묘하게 뒤틀어 만화경 속의 세상처럼 보여주는 전시물 앞에서는 얼굴 두 개가 마주 붙은 일행의 모습을 보며 쾌활하게 웃음을 터뜨리던 미즈키였다. 그랬던 이가, 어두워진 낯빛으로 친구들의 반응도 상관않고 잰걸음으로 걸어가버린다. 다른 방향을 쳐다보느라 툴툴거리는 대꾸만 하였다가,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에 뒤늦게 상황을 알아채고는 에나는 황급히 뒤를 따라 나섰다. 멀어지는 친구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어쩌면 좋을지 카나데는 당혹스러움을 삼켰다. 역시 따라가야하나 생각하지만 곁에 남아있는 마후유는 그럴 의사가 없어보였다. 그저 가라앉은 눈으로 물끄러미 미즈키와 에나가 걸어간 쪽을 쳐다볼 뿐.

“먼저 돌아보고 있자.”

“두 사람은......”

“혼자 있을 때에만 마주보게끔 허락되는 게 있고, 네 사람이기에 만들 수 있는 작품이 있고, 두 사람만 있기에 꺼낼 수 있는 말도 있는 법이야. 우리가 모두 따라가면 미즈키는 항상 보이는 모습 밖에 보이지 않겠지.”

“......그런 걸까. 마후유, 방금 말......”

“의미는 딱히 없어. 이해하고 말하는 건 아니니까.”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마후유가 모두를 아끼고 있구나 싶은 기분이 들어서 기뻤어. 냉정하게 딱 잘라 입을 막아버리는 마후유의 화법에 더는 말을 꺼내지 못한 채로, 조용히 곁을 따라걸으며 카나데는 생각을 삼켰다. 잡념이 많아져서일까. 의도가 기발하고 재밌는 전시물을 마주하지만 아까처럼 순수하게 경탄하며 집중하지 못한다. 홀로 걸어가버린 미즈키와 그 뒤를 따라간 에나, 그리고 지금 곁을 지켜주고 있는 마후유에게 계속해서 신경을 기울이게 된다.

“카나데, 집중하고 있어?”

“응?”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상태로 접하는 체험으로는 무엇도 얻을 수 없을 건데.”

탓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그게 언제나처럼 그녀의 언어가 무미건조한 색을 하고 있기 때문인지, 혹은 반대로 평소와 달리 희미하게나마 염려하는 기색이 묻어났기 때문인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카나데를 빤히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몸을 돌렸다. 예전이라면 혼자 앞서 성큼성큼 걸어갔을 그녀는, 지금은 동행이 다가와 보폭을 맞출 때까지 여유를 두었다. 마후유, 표현은 여전히 무심하지만 분명 상냥해졌어. 속으로 중얼거리곤 카나데는 곁을 흘끔 바라보았다. 꽃은 아름다웠다. 모래 언덕에 홀로 피어나 시들어가던 라일락은 이제 비와 햇살을 기다릴 줄 알게된 걸지도 모른다.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서 카나데는 한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상기된 얼굴로 돌아다니는 관람객들 사이로 친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가자. 나지막한 재촉에 미련이 남는 얼굴로 소녀는 층계를 올랐다. 걸음마다 분위기가 조금씩 바뀐다. 일상의 재발견이란 테마를 중심으로, 전반적으로 환하게 개방된 형태로 디자인된 2층과는 달리 3층은 층계 중간에서 경계를 느낄 정도로 조명이 어두웠다. 어둑한 공간에는 나름 익숙한 편인 카나데도 체감되게 구분되는 경계 위에서는 점차 깊어지는 그늘에 긴장했다.

일상과 낮의 세계를 표현하던 하층과 대비되게 3층은 어둠을 테마로 잡고 있는 모양이었다. 유일하게 환한 광원 아래 자리잡은 안내판 앞에 서서 두 사람은 주의사항을 읽었다. 내부가 상당히 어두우니 충돌을 예방하기 위해 너무 급히 움직이지 말아달라는 부탁과 함께 다양한 안전 장치들이 사고 예방을 위해 작동하고 있다는 안내였다. 의도된 기획에 따라 일정 시간마다 조명의 형태가 바뀌는데, 그럴 때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앞서서 예고음으로 방송될 거란 설명과 함께.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고마워.”

어둠 속 항해라는, 제법 거창한 제목을 달고 있는 전시관이었다. 영화관의 입구마냥 겹으로 둘러진 두꺼운 암막을 걷으며 들어서자 예상과는 달리 희뿌연 조명으로 밝혀진 공간이 나타났다. 상당히 어둡다는 경고와는 달리 전시장 내부가 속속들이 보인다.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바닥을 경유하는 조형물은 전혀 없었고,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벽면에 달려있었다. 여태 감상한 아래층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심심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구성이었다.

출입구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액자 앞에 멈춰섰을 때였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전시장을 채운다. 몇 초 정도 지났을까. 공간을 밝히고 있던 안개 같은 빛이 돌연 밀려든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조명이 바뀐다는 안내는 읽었지만, 예상하고 있더라도 너무 급작스런 변화였다. 움찔, 어깨를 떨면서 카나데는 저도 모르게 마후유에게로 손을 뻗었다. 더듬거리며 붙든 옷자락은 얇고 부드러워서, 아마 마후유가 입고 있던 쉬폰 셔츠의 소매인 듯 싶었다. 반사적으로 저지른 행동이 부끄럽지만 시야를 완전히 잃었다는 불안감 속에서는 의지할 게 필요했고, 카나데는 움켜쥔 걸 놓지 않았다.

서서히 빛이 돌아온다. 처음처럼 전시장 전체를 밝히는 조명은 아니었다. 드문드문 떨어뜨리고 간 조약돌 같은 작은 광원들이 바닥을 따라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꺼지기 직전의 등불이 낼법한 약한 조명이 벽면의 작품들을 간신히 비추고 있기도 하였다. 어둡기는 하나 옆에 있는 사람의 얼굴은 알아볼 정도는 된다. 머뭇거리며 곁을 훔쳐보았다가, 별다른 내색 없이 차분한 얼굴을 한 마후유를 확인하고는 카나데는 조심스레 손에 쥐고 있던 걸 놓았다.

“그림이 바뀌었어.”

“응? 어라, 정말이네.”

“조명 시스템이 작품의 일부라면, 금방 또다시 어두워질 거야.”

조명이 꺼졌다가 다시 켜진 사이 액자 속 그림이 다른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불이 꺼지기 전만 해도 서로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던 마상 시합의 기사들은, 지금은 상대의 가슴팍에 목제 랜스를 동시에 박아넣은 끝에 호쾌하게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중이었다.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져 첫눈에 알아보기 어렵지만, 액자 속에 캔버스 대신 액정 스크린이 들어있는 모양이다. 전시관의 특색에 맞게 만든 거겠지. 마후유의 지적대로 조명의 변화로 완성되는 설치 미술이라면 제법 넓은 전시장을 둘러보는 동안 방금과 같은 암전 현상을 몇 차례나 더 겪게될 터.

예고도 없이 따뜻한 온기가 손을 감싼다. 흠칫 놀라며 내려다본 시선 끝에 수줍게 옷자락을 쥐었던 그 손을 움켜쥐고 있는 누군가의 손이 닿는다. 마후유가 내 손을 잡았어. 이해가 인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탓에 카나데는 한 박자 늦게 반응을 하였다. 급하게 숨을 들이삼켰다가 고개를 푹 숙여버린다. 금방 다시금 어두워질거니 손을 잡고 다니자. 알기 쉽다면 알기 쉬운 행동원리로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잡은 거겠지만, 맞닿은 피부를 통해 전해지는 온기와 떨림은 결코 간단히 넘길 수 있는 게 아닐 건데.

“소, 손이......”

“가자.”

떨림을 숨기지 못하는 목소리와 언제나처럼 나직하게 감정없는 목소리가 대비된다.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가, 가볍게 이끄는 손길에 카나데는 걸음을 옮겼다. 마후유의 태도가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이 태연해서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딱히 부끄러워할 일도 아니란 걸까. 친구 사이에 필요에 따라 잠시 손을 잡는다. 거기에 괜한 의미를 부여하는 쪽이 이상하려나. 혼자서 부끄러워하고 있는 건 호들갑 떠는 거 밖에 되지 않을지도. 그러니까, 마후유에겐 정말 별 의미가 없는 행동이겠지. 긴 머리카락에 스치는 귀가 후끈대며 간지러운 게 안 봐도 벌겋게 달아올랐을 테지만 카나데는 내색할 수 없었다.

액자에서 액자로 건너는 도중 예고된 밤이 찾아온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내려앉는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손을 맞잡은 채로 새로운 조명이, 길잡이가 되어줄 별이 뜨기를 기다리는 동안은 정말로 밤의 물결 속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기분이 들게끔 하였다. 만약 곁에 아무도 없었다면, 마후유가 손을 잡아주고 있지 않았더라면 홀로 남아 표류하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몰라.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감각은 이토록 따뜻하구나. 생각하며, 소녀는 상대의 체온이 전해지는 손을 살짝 매만졌다. 정말 희미한 움직임으로. 그녀가 손을 맞잡는 일에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행위에도 딱히 별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리라. 그런 계산도 조금은 하면서.

다음 조명은 선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마치 모든 고난이 끝을 맺었음을 암시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비구름을 뚫고 내리쬐는 햇빛마냥 천장의 좁은 틈새로 환한 빛줄기가 서너 개 쏘아내린다. 균형 있게 전시장 내부를 밝히는 형태는 아니었기에 조명이 중첩되는 쪽은 환해지고 외면받는 쪽은 어둑해졌다. 나아가야할 방향은 어둑한 쪽이다. 그러나 조명이 돌아온 다음에도 마후유는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마후유?”

“......어두운 곳에 혼자 있으면, 점차 잊혀져가는 기분이 들어. 세상이 나에 대해 잊어가고, 나 또한 스스로에 대해 잊어가. 아마도 그건 두려운 일일 터인데도, 그에 안심하고 해방감을 느끼는 내가 있어. 모든 게 잊혀지고, 모든 걸 잊는다면 무엇도 고민할 필요 없을 거니까.”

“그건 안 돼. 마후유가 잊혀지길 원하더라도, 내가 마후유를 기억할 거야.”

“......알고 있어. 카나데라면 그렇게 해주겠지. 여기 들어와서 처음 어두워졌을 때, 사라지려고 했던 순간에 대해 생각했거든. 그런데, 카나데가 날 붙잡았어. 그건, 잘 모르겠지만, 나쁘지 않은 기분이 들었어. 어둠 속에 있더라도, 누군가 곁에 있어줄 때에는 전혀 다르구나. 제대로, 붙잡아주는 거구나.”

마지막 말은 속삭임처럼 들렸다. 이어져 있던 마후유의 손이 박동하듯 움찔 떨렸다. 겉으로는 티도 나지 않을 그 작은 움직임이 맞잡은 손을 통해서는 너무나 뚜렷하게 전달되어서, 카나데는 지금 자신이 마후유의 심장박동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해버렸다.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차라리 악보를 채워넣는 일이 더 간단하였다. 마디에서 마디로 이어지는 선율 간의 대화에는 나름의 규칙성과 그에 의거한 해법이 있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니, 지금 이 순간 그녀와 자신 사이에 흐르는 대화에 어떻게 말하는 게 명확한 해법으로 이어질지, 카나데는 확신할 수 없었다. 무지한 건 아니다. 그저, 터질 듯 떨리는 감정에 익숙하지 않을 뿐.

“당연하잖아. 절대로 놓치지 않아.”

“......후훗.”

살며시 곁을 돌아보는 얼굴에 옅은 미소가 흐른다. 초목 사이로 피어난 꽃이자, 밤하늘을 적시는 은하수. 밤의 바다에서는 변함없이 반짝이는 별이 길잡이가 된다. 때로는 북극성이, 때로는 스피카가, 때로는 그 계절을 가장 환하게 수놓는 별세계의 보석이. 파도 소리가 이어지는 어둠 속에서 길잡이별은 지침이자 목표가 되고, 그리하여 희망으로 피어난다. 요이사키 카나데는 생각한다. 그녀를 구원해주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은 무엇을 목표로 하여 나아가고 있는지. 한순간 엿보이는 맑은 미소는, 항로를 이어줄 길잡이별로 충분하지 않은지.

희미한 낮과 고요한 밤이 반복되고, 소녀들은 액자에서 액자로 나아갔다. 서로를 이어주고 있는 손은 놓지 않은 채. 어쩌다 액자 앞에 머물게 되는 때에도 둘은 별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속 터지는 녀석을 붙잡고 2층에 있는 카페테리아에 와 있으니 나중에 합류하자는 에나의 연락을 확인했을 때에만 잠시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그마저도, 그 짧은 순간 흐릿한 조명 아래에서 맞닿은 시선이 부끄러워져 얼굴을 붉히고 만 카나데에 의해 원래의 간격으로 돌아왔지만.

“한 바퀴 돌아서 처음 입구로 돌아오는 구조였구나.”

“두 사람에게 3층으로 올라오라고 하면 되겠네. 전시관 앞에서 만나자고 하면 될 거야.”

“응.”

연락을 보내기 위해 카나데가 단말기로 시선을 떨구고 있는 사이, 마후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차례 암전이 지나간 뒤 이제 막 전시장에 들어온 관람객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그녀들처럼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서 돌아오는 이들은 익숙해졌는지 킥킥대며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그 중, 구석진 자리에서 제법 과감한 애정 표현을 나누고 있는 연인의 모습이 보인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어둠이 남들의 시선을 가려줄 차단막처럼 느껴진 걸까. 뒤늦게 주변이 환해진 걸 깨닫고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그들을 무감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다가 마후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곧 올라오겠대.”

“그래. 그럼, 다음 조명이 바뀌면, 나가자.”

처음 감상했던 마상 시합 기사들의 그림 반대편에 있는, 연유는 몰라도 이미 벼락을 맞아 새까맣게 타버린 호랑이의 그림 앞에 멈춰선다. 이 전시관, 어둠 속 항해의 핵심 요소는 조명의 변화를 통한 예상치 못한 경험이고, 걸어둔 액자들은 사실 그리 예술적 의미를 담고 있진 않은 모양이었다. 한 차례 둘러보며 그 점을 깨달은 건지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마지막에 위치한 액자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전시관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사람들은 오고가지만 누구도 눈길은 주지 않는 장소에 서서 소녀들은 다가올 밤을 기다렸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고, 밤이 찾아든다. 관람객들의 발소리도 한순간에 멎어 전시관 내에는 인위적인 고요함이 호젓하게 차올랐다. 생각해보면, 굳이 조명이 한 차례 더 바뀔 때까지 전시관 내에 있을 필요가 있었나. 바깥에 설치된, 환한 조명 아래의 안내판 근처에서 계단을 올라올 에나와 미즈키를 기다리고 있으면 될 건데. 의아해하며 카나데가 고개를 갸웃거렸을 때였다.

더듬거리는 손길이 뺨을 가리며 흘러내리는 은빛 긴 머리카락을 걷어낸다. 가는 손가락 끝이 뺨을 건드리는 감각에 소녀가 반응하기 전에, 따스하면서도 촉촉한 무언가가 살결에 닿는다. 쪽. 기분 좋게 말랑한 게 뺨에 닿고 있다는 둔한 인식은, 열기 머금은 숨결이 뺨에서부터 아래로, 목덜미까지 간지럽히고 있다는 보다 노골적인 깨달음 속에 녹아버린다. 마후유. 이름을 부르려는 입술 위로 머리카락을 걷어냈던 손가락이 포개어진다. 그 모든 게, 그로부터 전해지는 온기가 너무나 포근해서.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약속, 기억할 거야.”

어둠을 매개로 전해지는 속삭임에서는 라일락의 향기가 났다. 피어난 꽃들이 미풍에 물결치며 달콤하게 웃는다. 뺨과 입술을 살며시 애무하던 손가락들이 봄비로 맺힌 이슬처럼 흘러내렸다. 머금고 있는 향기를 옷깃이 젖어들 때까지 전한 꽃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더없이 의뭉스럽고 얄미운 그 모습을 누가 지켜볼 수 있었을까. 일련의 사건이 마무리된 다음에야 조명이 켜진다. 흡사 상황을 지켜보던 무언가가 필요에 맞춰 세상의 빛을 거둬갔던 것마냥.

재합류한 미즈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쾌활한 모습이었다. 곁에 있는 에나가 한결 안심한 기색인 동시에 은근히 짜증이 감도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걸로 미루어보아 둘 사이에 제법 장대하고 복잡한 대화가 오고갔을 듯 싶다. 하지만 마후유와 카나데 어느 쪽도 친구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한쪽은 그럴 생각이 애초에 없고, 다른 한쪽은 그럴 정신이 지금은 없었다.

“카나데? 얼굴이 약간 붉어보여. 피곤한 거 아냐?”

“으, 응? 아냐, 괜찮아. 으음, 조금 오래 걸었으려나.”

“그렇겠지. 보나마나 어느 분께서 중간에 쉬지도 않고 여태 카나데를 끌고 다닌 게 뻔해. 배려심 부족이야.”

“미즈키, 에나가 지금 누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건지 알겠어?”

“아하하, 그럼 이렇게 하자. 나하고 에나가 3층을 둘러보는 동안 두 사람은 쉬고 있어. 역시 신관이라 그런지 카페테리아 시설이 좋더라구. 적당히 느긋하게 돌아보고 올게.”

체력이 바닥난 상태이기도 하여 카나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보이는 미즈키와 무언가를 눈치챘는지 날카로운 의구심이 담긴 눈으로 마후유를 쏘아보는 에나가 전시관의 암막 너머로 사라진 다음, 다시 단둘만 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카나데는 시선을 폭 떨구었다. 전시관을 나오기 직전 있었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머리카락을 걷어넘기고, 뺨을 매만지고, 그리고......

“그럼 갈까.”

“......읏.”

“왜 그래, 카나데?”

가자고 말하며 마후유는 자연스럽게 카나데에게 손을 내밀어왔다. 마치 지금까지 항상 그래왔다는 것마냥 망설임 하나 없이. 거리감, 너무 갑자기 바뀌어버린 게 아닌가. 이래서야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을지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린다. 마후유가 다가오는 게 어떠냐고 하면, 그거야 당연히 싫지 않고......나아가 받아들여준 게 기쁘지만. 사람에게는 적응을 위한 여유 기간이라는 게 필요한 법이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익숙하게 마주할 방법 따위는 없다. 그게, 그렇지 않은가.

“마후유, 그게......”

“말했잖아.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상태로 접하는 체험으로는, 무엇도 얻을 수 없을 거야?”

그러니, 집중해줘. 입모양으로 전해지는 말을 듣고서, 카나데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무엇보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공언한 건 카나데 자신이었으니까. 잡아주길 원하는, 아마도 만났을 때부터 말없이 내밀고 있었을 손을 조심스레 움켜쥔다. 한번 더, 그녀가 미소를 지어준다. 빛나고 있는 별은 분명 겨울 밤하늘의 다이아몬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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