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르티아의 구제

프로젝트 세카이 마후유 x 카나데

제자백가 중 하나인 열자가 남긴 말이다. 궁도란 무심의 경지에 달해 활을 쏘는 것이기에, 유심의 상태로 당기는 활로는 그저 궁술을 행할 뿐이다. 무심에 이른 이는 화살이 과녁에 닿을지 염려하지 않는다. 그저 시위에 물린 화살을 때가 되어 놓아줘 자연히 목표에 닿게끔 만든다. 주변이 아무리 소란스럽더라도 마음은 한 점 흔들림 없이 평온하여 올곧게 나아간 화살은 필히 과녁을 꿰뚫게 된다. 마침내는 활과 화살을 쓰지 않고 궁도를 이루게 되니, 안으로는 자신을 토대로 하는 이치를 깨닫고 밖으로는 삼라만상의 조화를 관망하게 된다. 공자 또한 군자 되는 자라면 필히 활을 쓸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으니, 무심은 곧 궁도의 요체이자 덕목이라 하겠다.

사선에 섰을 때 잡념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 채로 임하면 되는 거야. 미야마스자카 여학원 궁도부의 고문 선생은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곤 했다. 말하는 당사자가 틈만 나면 손목시계를 살피며 퇴근까지 남은 시간을 재는 인간이었기에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부원은 딱히 없었지만. 한창 신경 쓰고 싶은 게 많은 10대 소녀의 감성을 부활동에서의 성과를 위해 버리고자 하는 아이가 있을 리가 있나. 한번 뿐인 학창시절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 부활동을 하는 거지, 천하를 호령하는 신궁이 되고자 궁도부에 신청서를 넣었을 리도 없지 않는가.

그렇기에, 현 미야마스자카 여학원 궁도부에서 아사히나 마후유가 주목받게 되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던 거다.

소녀는 한번도 몸을 떨지 않았다. 사선에서 아득하게 작게만 보이는 과녁을 무미건조한 눈길로 바라볼 때에도, 활대를 붙들고 있느라 실핏줄이 터져나간 팔에 멍자국이 여럿 생겨났을 때에도, 궁도부 사람들이 선망의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도. 마후유가 해야할 일은 그저 활 시위를 당겨 재었던 화살을 날려보내는 것에 불과했고, 소녀는 망설임도 기대도 없이 그렇게 하였다. 과녁에 명중하든 말든 상관은 없었으나, 활을 다루는 방식에 나름 익숙해진 이후로는 한번도 화살이 빗나가는 일은 없었다. 아사히나야말로 우리 궁도부의 신궁, 나스노 요이치의 재림이다! 지금의 실적이라면 다음 연맹 주최 대회에 출전해도 입상은 이미 확보한 거나 마찬가지. 혼자 신이 난 고문 선생이 다른 부원들 앞에서 그렇게 떠들어대었을 때에도 소녀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비울 것을 요구하는 세계에 이미 텅 비어버린 상태로 발을 들였다는 건, 분명 재능을 타고난 거라고 말해도 좋겠지. 그 나스노 요이치조차 야시마의 비바람 사이로 적군이 도발하며 내걸었던 부채를 쏠 때 군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가호를 청했다. 빌헬름 텔조차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쇠뇌로 겨누던 때 실패를 대비하여 복수를 위한 두 번째 화살을 품에 숨겼다. 아사히나 마후유는 그 무엇에게도 기원을 올리지 않는다. 과녁을 맞추겠다는 필승의 투지도, 쏘아내는 화살에 담는 신뢰도, 나아가 활 시위를 당기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마음조차도 없다.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심상에는 정중앙이 꿰뚫린 과녁지들만 썩어가는 낙엽처럼 굴러다닐 뿐.

궁도에 있어 무심의 경지에 도달한 이는 입선을 이루었다고 본다. 달리 말해 그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 사소한 일에 화내고, 기뻐하고, 웃고, 우는......그런 한없이 평범하고 하찮은,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거라고. 경지에 이른 신선에게는 오로지 속세와 거리를 두고 타인의 인생을 관망해야만 하는 은둔자로서의 삶이 남았을 따름이라고.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한 발의 화살에는 그저 화살 하나의 가치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 그 이상 어떤 의미를 담아야만 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소녀는 당겼던 시위를 놓는다. 화살이 공기를 찢고, 과녁이 꿰뚫리고, 이제는 놀라움의 기색도 가신 환호성이 정해둔 대본을 따르는 것마냥 작게 터져나온다. 그 모든 광경은, 하염없이 무채색을 머금고 있었다.


<맞다, K. 혹시 그 영상 봤어? 여러 무술가들의 무술 시연 과정에서 나오는 소리들을 이어붙여 곡으로 만든 영상! 악기를 쓰지 않고 만들어낸 무술의 찬미가란 제목이었던 거 같은데.>

<인기 영상으로 올라온 거 말이지? 떼어서 들으면 요란한 쇳소리였을 건데 그를 소재로 곡을 만들다니 재밌었어. 중간중간 이건 어딜 봐도 따로 삽입한 음이잖아 싶은 구석이 있긴 했지만.>

<그랬어? 눈치채지 못했는데, 같이 나오는 영상이 현란해서 거기에 현혹되어버린 걸까나. 역시 K네. 음악과 관련해서는 누구보다도 예리해.>

<뭐야, 둘이서만 말하지 말고 뭔지 알려줘.>

<예이- 여기, 링크.>

나이트코드의 채팅창에 활성화된 주소 하나가 올라온다. 마후유는 딱히 그를 신경쓰지 않았다. 가사를 다듬는 일에 더 신경을 기울이고 싶다. 마후유 자신이 대화의 주축으로 있는 동안 권유를 받은 거였다면 영상을 봤겠지만, 이번엔 딱히 그렇지도 않았으니. 이미 친구들이 나눈 대화를 통해 링크를 눌렀을 때 어떤 게 나올지 대충 알만했다. 자기 머리를 막대기로 내리치며 거기서 나오는 소리로 곡을 만들었답시고 영상을 올리는 작자도 있는 세상에서, 깡깡대는 쇳소리를 재료로 만든 곡이라고 해봤자 창의적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악기를 쓰지 않고 만들어낸 곡이란 문장을 제목이랍시고 붙여두다니, 그네들은 문명 이전의 시대에 인류가 어떤 형태로 음을 향유했는지 모르는 걸까.

<그러네. 슬쩍 꾸며서 넣은 소리들이 많잖아. 이래놓고 순수하게 무술로 이루어진 음악이라니, 완전 사기꾼 확정.>

<K가 미리 말해주지 않았다면 에나낭, 지금쯤 신기하다고 감탄하고 있었을 건데에->

<아니거든! Amia가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지!>

<뭐, 뭐어, 그런 부분을 차치하고서라도 볼거리로는 좋은 영상이라고 생각해. 무술 시연이라. 직접 볼 수 있다면 신선한 체험이려나.>

<앗, 그렇다면 가까이에 좋은 상대가 있잖아?>

방금 써넣은 단어, 아무래도 거슬린다. 중복되는 의미를 담을 수 있는 표현은 재밌는 장치로 쓰일 수도 있으나, 무엇을 전달하는지 알 수 없게끔 불분명해질 수도 있다는 게 문제다. 여기서는 그냥 직설적인 표현을 넣는 게 좋으려나. 그런 생각에 잠겨있다가, 마후유는 묘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각자 떨어져 있는 공간에서 나이트코드에 접속하고 있는 중이었으나 한순간 다른 아이들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우리에겐 유키가 있는걸. 무려 궁도부 소속의 인재! 걸핏하면 지쳐버리는 가녀리고 연약한 멤버들 사이에서 빛나는 희망!>

<나는 왜 끼워넣는 거야. 나는 요즘 운동하고 있거든.>

<그거야 최근 나 아니면 남동생 군이나 아이리랑 자주 이것저것 먹으러 다녀서 그거 만회하겠다고 체조만 대충 하는 정도잖아. 그마저도 시작 부분의 팔 들어올리기만 하면서.>

<자, 잠깐, 어떻게 아는 건데!>

<흐흥, 에나낭은 뻔하게 알기 쉬운 여자니깐.>

<......그래서 내 이름은 왜 나온 거야?>

<K가 무술 시연하는 걸 보고 싶대! 멀리 갈 필요 없이 유키가 궁도부 활동하는 걸 참관하면 되지 않으려나- 하는 생각?>

말하고는 귀엽게 에헷- 웃는 소리를 낸다. 뒷풀이로 만난 자리였다면 깜찍하게 고양이마냥 두 손을 들어 애교부리는 모습을 보였을지도. 자신을 앞에 내세워 말하는 Amia의 술수에 K가 멋쩍은 듯 웃는다. 그를 듣고는 마후유는 고개를 옆으로 슬쩍 기울였다. 부활동 참관이라니. 미야마스자카 여학원이 그런 이유로 외부인의 원내 출입을 허용했던가? 부활동에 참여하는 다른 학생들의 의사도 확인해야만 할 거고. 허락을 받더라도 ‘아사히나 마후유의 아는 사람’ 이란 꼬리표를 달고 궁도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 온갖 호기심 섞인 시선을 받게될 터인데. 그 은근하면서 노골적인 관심을 나이트코드의 멤버들이 과연 견뎌낼 수 있을까.

<무-리. 부활동 하는 중이면 해가 한창 떠 있을 시간일 건데 그때 학교를 가야한다니 믿을 수 없어. 그거도 남의 학교를. 난 싫어.>

<음, 하긴 그러네. 에나낭의 적극적이면서 진취적인 의견은 그렇다쳐도, 생각해보니 무작정 찾아간다고 해봤자 유키에게도 우리들에게도 부담이 되겠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으려나.>

<세카이에서 시연해보이는 건? 미쿠도 보고 싶어할 건데.>

<궁구를 함부로 반출할 수는 없어.>

<쳇,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네.>

본격적인 장비들을 갖추지 않더라도, 어린이를 위해 만들어진 과녁 맞추기 세트를 쓰면 되지 않겠느냐는 Amia의 제안은 누가 듣더라도 웃자고 하는 소리였기에 마후유는 거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애당초 무얼 위해 활을 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걸까. 그건 그저 짜맞춰진 일련의 동작 나열일 뿐이다. 마후유에게 있어 궁도부란 평범한 학교생활을 위한 구성요소 중 부활동이라고 되어있는 칸에 적당히 끼워맞춘 장식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에는 동경도 자긍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부활동을 하는 걸 구경해봤자 별 의미도 없을 터인데. 아까부터 신경에 거슬리던 단어 위에 두 줄을 쭉 그어버리며 마후유는 생각했다.

<폐가 된다면 어쩔 수 없겠네. 언젠가 기회가 되어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K, 보고 싶어?>

<응, 무술 시연도 좋지만, 그보다 유키가 부활동하는 모습이 어떤 느낌일지 궁금해. 요즘 자주 만나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서로가 모르는 일상이 있을 거니까.>

<......알았어. 잘 안 쓰이는 과녁판 하나 쯤은 없어져도 티나지 않을 거야. 그거랑 사선을 표시할 모래 약간이랑, 화살은 예비로 두는 한 묶음이면......>

<아예 궁도장을 통째로 훔쳐오지 그러니? 그럴 바엔 차라리 부활동 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오면 되는 거 아냐? 활 쏠 때 주변 사람에게 촬영해달라고 하면 될 거고.>

<아, 에나낭 그거 묘안! 현장감은 떨어지겠지만 우리들에겐 그게 더 좋을지도. 멋진 영상이 나오면 내가 편집해서 MV처럼 만들어줄게. 투고하진 못하겠지만 우리끼리 보면 되니까. 미쿠에게도 보여주고.>

그렇게 말하고는 마치 안건이 확정되었다는 것마냥 Amia는 환호하며 박수를 짝짝 쳐댔다. 하여간 호들갑은. 그렇게 톡 쏘아붙이면서도 에나낭은 그런 분위기가 싫지 않은지 뒤이어 킥킥 웃었다. 그래도 괜찮을까. 구렁이 담 넘어가듯 결론을 내려버리는 흐름에 정작 당사자인 마후유의 의견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K가 조심스레 의견을 물어왔다. 마후유로서도 불편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빼돌린 비품들로 세카이에 간이 궁도장을 하나 차릴 계획을 세우는 거에 비하면 동영상 촬영 쪽이 비교도 되지 않게 간단하다.

<그럼 다음 부활동 때 영상을 찍어볼게. 활을 쏠 때의 모습이면 되는 거지?>

<응, 기대하고 있을게.>

인형전도, 미스터리 투어도 이전까지 하지 않았던 일을 일부러 경험해본 활동이었다. 나이트코드의 멤버들과 ‘여태 해보려고 한 적 없었던 일’ 들을 할 때마다 소녀는 자신의 안에서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체감했다. 그 변화가 자신을 어떠한 곳으로 이끌지 아직은 알 수 없었으나, 마후유는 그 생경함이 싫지 않았다. 부활동하는 모습을 촬영하는 일 또한 소녀에게 예상하지 못한 풍경을 보여주게 될지도 모른다.

쭉 그어버렸던 선 위로 보다 알기 쉬운 단어를 적어넣는다. 이 편이 낫네. 그렇게 평가하고는 마후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선에 섰을 때의 모습을 촬영해도 되냐고?”

흐린 날이든 실내에서든 늘상 쓰고 다니는 스포츠 선글라스를 슬쩍 밀어올리면서 고문 선생은 현 궁도부의 에이스를 돌아보았다. 방긋 예쁘게 웃고 있는 아이가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자기 표출을 하고 싶어하는 한창 때의 아이들이다. 멋지고 예쁜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욕구가 가득하리라. 연습 도중의 영상을 찍는다면 좀 더 직관적으로 자세를 확인할 수 있고, 자기 발전에도 도움이 되겠지. 습관적으로 손목시계를 한 차례 들여다본 다음 선생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 구해야하는 건 영상을 찍어줄 사람이다. 연습장 옆으로 개방된 형태로 붙어있는 대기실에서 마후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평소보다 일찍 부활동을 하러 나온 탓에 다른 학생들은 아직 탈의실에서 환복을 하는 중인 모양이었다. 누구에게 맡기더라도 자신보다는 영상 촬영에 익숙할 터. 누구랑 더 친하고 누구랑 덜 친하고 하지도 않으니 처음 나오는 상대에게 부탁하자. 만에 하나 거절당한다면 그 다음 나오는 상대에게. 그렇게 생각하며 마후유는 탈의실로 이어지는 복도에 서서 기다렸다.

“어머, 아사히나 씨, 오랜만이야.”

“히노모리 씨, 안녕. 오늘은 부활동 나왔구나.”

마주친 건 다소 의외의 인물이다. 시선이 맞닿자마자 환하게 미소짓는 얼굴에는 어떠한 정제도 거치지 않은 본연의 선함이 한껏 묻어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숨에 매료시키고, 속이 뒤틀린 부류에겐 지독한 질투를 품게 만드는 아름다운 미소. 그녀가 대기실로 한 걸음 들어오는 순간 스피아민트의 향취를 연상케하는 청량감이 주변 공간을 채운다. 예술의 신이 세상이란 화폭에 정성껏 그려넣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압도적인 미모가 불러일으키는 착각인지, 아니면 정말로 히노모리 시즈쿠의 체향에서 풀빛 내음이 묻어나는 건지. 백색과 남색의 하카마를 걸치고 있을 뿐인데도, 이 순간 그녀가 존재한다는 이유 하나로 궁도부의 대기실이 공연 무대로 변모한 느낌이다. 잘은 몰라도, 이런 걸 두고 아이돌의 존재감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그간 자주 얼굴 비추지 못해서 미안해. 부활동, 즐거우니 꾸준히 계속하고 싶은데, 바쁜 일들이 많았어.”

“히노모리 씨가 열심히 지내고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걸. 부담 가지지 말고 즐겁게 하는 게 제일이야. 간만에 찾아온 히노모리 씨에게 부탁 하나 해도 괜찮을까?”

“부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도와줄게.”

“그리 어려운 건 아니고, 나중에 연습할 때 내 차례가 되면 휴대폰으로 영상 촬영을 해줬으면 해. 활을 쏘는 모습이 잡힐 수 있게 약간 거리를 두고 옆에서.”

“기록을 남기는 거구나! 마침 잘됐어. 나도 요즘엔 촬영하는 일에 경험이 생겼거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아사히나 씨를 멋지게 찍어줄게.”

대단한 관직에 임명받은 사람마냥 들뜬 표정으로 자신만만하게 답한다. 하긴, 아이돌이라면 아무래도 현장에서 일하며 촬영과 관련해서 얻는 경험이 많겠지. 웃는 얼굴로 감사를 표하며 마후유는 자신의 단말기를 꺼내들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한 보안 잠금이 2단계에 걸쳐 적용되어 있으니 건네주기 전에 해제할 필요가 있다. 잠금을 풀며 마후유는 생각했다. 히노모리 씨라면 멋대로 촬영 기능 외에 다른 걸 뒤져보거나 하진 않을 거야.

“자, 여기......”

“서, 선배님 잠깐만요. 폐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찍어드려도 괜찮을까요?”

“응?”

시즈쿠가 단말기를 받아들기 직전, 부원 한 명이 다급히 곁에 다가왔다. 시즈쿠의 뒤를 따라 대기실로 들어서던 부활동 후배들 중 하나였다. 감히 끼어들어서 송구하다는 듯 선배들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후배는 필사적으로 마후유로부터 단말기를 건네받으려는 몸짓을 하였다. 자신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마후유의 단말기를 받아들었을, 시즈쿠의 들어올려진 손을 바라보며 진땀을 흘려댄다. 그러고보니 이 애, 이런 일에 익숙하다며 입부하고 곧바로 비품 관리를 맡게된 아이였지. 전자 장비도 관리하고 있어 캠코더로 홈페이지에 올릴 궁도부의 소개 영상을 찍기도 했던가. 만약 마후유가 세카이로 방치된 비품 일부를 빼돌렸다면 이 후배가 맞지 않는 현황표를 붙들고 괜한 마음고생을 했을지도 모른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평소부터 아사히나 선배님을 존경해서! 이런 일에서도 꼭, 도움을 드리고 싶어서요!”

“어머나, 아사히나 씨, 사랑받고 있구나.”

“마음을 써주다니 고마워. 하지만 히노모리 씨에게 먼저 부탁을 드리던 터라.”

“난 괜찮아. 기꺼이 양보할게.”

마음 따뜻해지는 미담을 목격했다는 듯 감격해하며 시즈쿠는 한 걸음 물러섰고, 자연스레 후배가 단말기를 받아들었다. 마후유의 단말기를 품에 드는 후배는 존경하는 선배를 돕게 되어 기뻐보인다기보다는, 참사를 막아낸 직후의 안도감에 한숨 돌리는 모습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믿어달라는 듯 잔뜩 기합 들어간 얼굴을 한다. 마후유는 빙긋 웃어보였다. 누가 맡아주더라도 딱히 상관없는 일이기는 했다.

부활동은 평상시와 다를 바 없게 흘러갔다. 시작에 앞서 부원들 모두 좌선을 하고서 명상에 들어가고, 선생은 명상을 돕는 건지 방해하는 건지 뭐라고 중얼대며 아이들 주변을 걷는다. 그런 다음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간다. 아직 활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아이들은 대기실의 한 켠에 모여 활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하고, 숙련된 부원들은 궁도장으로 나와 각자 차례를 기다린다. 누구나 인정하는 에이스이기 때문일까. 마후유는 매번 처음으로 사선에 올랐다. 그건 오늘도 예외가 아니었다.

과녁의 준비가 끝났다는 신호를 확인하고, 시위를 당긴 뒤, 재었던 화살을 날린다. 그게 전부다. 언제나 하던 일을 반복하면 영상은 알아서 촬영될 터였다. 사선에 올라서 마후유는 생각을 정리했다. 옆을 살짝 돌아보면 촬영 준비가 끝났다는 듯 단말기를 들어올리고 있던 후배가 엄지를 치켜세웠다. 고개라도 끄덕 흔들어줘야하나. 마후유가 잠깐 고민한 사이, 과녁 준비가 끝났다는 외침이 들려왔다.

막이 오른다. 상연되는 극의 내용은 언제나와 같다. 배경은 무채색, 배우는 한 사람, 관객들은 환성만이 적혀있는 대본을 받아들고 오히려 배우 대신 극의 일부가 된다. 개막의 순간부터 결말이 훤히 보이니 어찌 지루하지 않을 수 있으랴. 안정적인 수익만을 좇아 매번 비슷한 줄거리만을 선보이는 극단들을 조롱했던 이의 외침이 울린다. 그렇다, 이 모든 건 헛되고 지루한 일인 거다. 조소를 삼키며 마후유는 천천히 시위를 잡아당겼다.

“......아.”

문득 의식하게 되어버린다. 자세를 잡은 순간부터 촬영이 시작되었겠지. 자신의 모습이 기록으로 남겨지고 있다. 어째서 영상을 찍으려고 했더라. 그건, 나이트코드의 멤버들에게......그리고 그녀, 요이사키 카나데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영상을 보게될 그녀는 지금 사선에 서 있는 아사히나 마후유를 보게 되리라. 그 말은 즉, 이 자리에서 카나데가 지켜보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터.

소녀는 상상했다. 기대감도 없이 확신을 하고 있는 부원들 사이로 그 아이가 서 있는 모습을. 시위를 힘껏 잡아당긴 팔을 쳐다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과연 과녁을 맞출 수 있을지 그녀 자신이 사선에 서 있는 양 긴장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다. 슬쩍 시선을 돌린 자신과 눈길이 맞으면 그 작은 손을 꼭 쥐어보이며 응원할지도 모른다. 마후유, 힘내. 작게 옴싹이는 입술로 소리없이 모양만 내면서. 그 광경이 어째서인지 한 폭의 풍경화처럼 선명하게 그려져, 마후유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리고 말았다.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든 빗나가든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하지만, 카나데가 지켜보고 있다면, 그리고 날 위해 응원해주고 있다면......가능한 멋지게 명중시키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화살이 과녁을 꿰뚫었을 때 터져나오는 환호성 속에, 다른 누구보다 너의 목소리가 들렸으면 좋겠어. 그런 마음을 품는 순간, 마후유는 과녁이 까마득하게 멀리 물러나버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렇게나 멀었던가. 지금까지 자신은 어떻게 저 작은 목표를 간단하게 꿰뚫었던 걸까. 맞출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는 막막함이 손끝을 떨게 만든다.

궁도란 무심의 경지에 달해 활을 쏘는 것이기에, 속세의 감정에 붙들린 마음으로 당기는 활로는 그저 궁술을, 인간으로서의 기교를 행할 뿐이다.

[푸욱]

과녁판 근처의 바닥에 화살이 박힌다. 누가 보더라도 완벽한 낙시. 더없는 실패. 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침묵을 건드렸다가, 뒤이어 낮은 술렁거림을 끌어낸다. 자신을 향해 모여드는 걱정 어린 시선들을 느끼면서 마후유는 손등으로 이마를 닦아내었다.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부에 닿는 진득한 물기가 체감했던 긴장이 착각이 아니었음을 말한다. 아사히나 마후유는 긴장했다. 어깨가 굳고, 손끝이 떨릴 정도로 긴장하고 말았다. 과녁을 맞추지 못한다. 그 만약의 경우를 떠올리며 몸을 떨었던 거다.

공기가 정체되어 있었다. 몇몇 1학년생들은 지상으로 추락하는 신을 목격한 신도들마냥 충격받은 모습이었다. 아사히나 씨, 오늘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은 걸까. 그런 걱정을 바닥에 깔면서, 동시에 더 심각한 문제가 원인일 바에 차라리 그러는 편이 좋을 거라는 불안감이 부원들의 얼굴에 흐른다. 아사히나, 괜찮냐. 주변 분위기를 살피던 고문 선생이 그렇게 말하며 나서려고 한 순간이었다. 짝, 가볍게 손뼉을 치는 소리가 좌중의 시선을 붙들었다.

“아사히나 씨, 괜찮아! 촬영 중이라는 거, 익숙하지 않으면 엄청 의식하게 되거든. 나도 처음엔 긴장해서 얼마나 실수를 많이 했었는지 몰라.”

“아, 아아, 그러고보니 아사히나, 오늘 사선에 서는 모습을 촬영하고 싶다고 했었지. 그랬던 거구나. 하핫, 촬영하느라 긴장했다니 아사히나도 의외로 인간미 넘치는 모습이 있었네. 히노모리가 한 말대로다. 처음엔 누구나 긴장하는 법이지, 암. 나도 처음에 대회에 나갔을 땐 바닥을 쐈다니까.”

“아사히나 선배, 괜찮아요!”

자칫 에이스의 부진으로 비춰질 순간이 반전되어 부활동 도중 있을 법한 재밌는 일이 생겼다는 흐름으로 넘어간다. 어색하게 웃어보이며 뒷머리를 만지작대는 마후유의 곁으로 다가와 고문 선생은 신경쓰지 말라는 격려를 남기고 돌아갔다. 평소 소녀를 궁도부의 비밀병기마냥 대하던 느낌과는 달리, 보살피고 있는 학생을 대하는 선생의 모습으로. 쪼르르 달려와 응원의 말을 전하는 후배들에게 신경써줘서 고맙다고 답해주다가, 마후유는 다음으로 사선에 오를 준비를 하는 시즈쿠와 눈이 마주쳤다.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보이는 그녀에게 마주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도와줘서 고마워. 잘 찍혔니?”

“네에. 선배. 찍는 건 문제없이 찍었어요. 여기요.”

단말기를 맡아주고 있던 후배가 정중한 자세로 물건을 되돌려줬다. 그를 받아들고 마후유는 녹화된 영상을 확인하였다. 화면 속의 마후유는 시위를 메기고 있었다. 그 자세를 유지하다가, 화살을 날린다. 손바닥에 들어오는 작은 화면으로는 과녁까지의 먼 거리를 담을 수는 없었기에 낙시의 순간에도 초점은 마후유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손등으로 이마를 닦아내는 소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영상은 끝을 맺었다.

“충분해. 잘 찍어줘서 고마워.”

“그게, 선배께서 조금 아쉬우시다면 부활동 끝난 다음에 잠시 시간을 낼 수 있어요. 정리를 하기 전에 여유를 내서요. 아무래도 주변이 조용할 때 임하시면 평소대로의 모습으로 찍으실 수 있을 거구요.”

“괜찮아. 평소와 달랐기 때문에 한층 더 마음에 들어. 잘 간직할게.”

마후유의 대답을 절치부심의 각오로 이해한 건지, 후배는 제법 감동한 눈치였다. 실패를 피하지 않고 딛고 올라설 줄 아는 자만이 마침내 성공한다. 그런 류의 격언을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르지. 딱히 그 오해를 풀어줄 이유는 없었기에 마후유는 생긋 웃어보이곤 몸을 돌렸다.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더라. 단말을 켜 그를 확인한다. 아사히나 마후유가 형편없이 실패해버린 날. 사선에서 식은땀을 흘리던 그 순간, 치밀어올랐던 건 어쩌면 분하다는 감정이었을지도. 답답하기는 했지만 싫지는 않은 기분이었어. 아직도 가슴에 아릿하게 남은 잔향을 더듬으며 마후유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득한 옛날, 신들의 시대에 있었던 일이다. 여러 권능을 나눠가진 수많은 신들 중 사냥꾼들을 수호하고 궁술을 전파하는 신이 있었다. 그의 궁술은 문자 그대로 신묘하여 활과 화살을 들지 않고 허공을 튕기기만 하여도 목표로 한 과녁이 꿰뚫릴 지경이었다. 비록 모셔진 신당이 작은 들판에 초라하게 있고, 가난한 사냥꾼들만이 그를 추종하였으나 그가 이룬 경지에 경탄하여 신들은 그를 정중히 대했다.

신들의 축제가 벌어진 어느 날이었다. 술의 신이 나눠준 음료로 취기가 한껏 오른 신들은 흥미로운 볼거리를 원했다. 다양한 재주들이 연회장 중심에서 펼쳐졌지만 신들의 무료함을 풀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때 장난기 많은 한 신이 외쳤다. 활과 화살의 신이여. 이 작은 유리 피리가 보이는가. 만약 이 손가락 마디마냥 얄팍한 물건을 저 멀리 나뭇가지에 걸어둔다면 그대는 자랑하는 활솜씨로 이를 맞출 수 있겠는가.

많은 신들이 박수를 치며 새로 시작된 재주넘기에 기대감을 표했다. 빼앗긴 유리 피리의 원래 주인이었던 음악의 신만이 서글픔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뿐이었다. 활과 화살의 신은 말없이 자신의 활을 집어들었다. 시위를 탄 화살이 기묘한 궤적을 그리다 한참 멀리 떨어진 나무에 박혔다. 화살은 흙바닥에 박혔고, 화살은 처음 장난을 제의한 신의 발치에 박혔다.

조롱당했다고 생각한 신들은 분노했다. 과녁을 맞추지 못하는 활의 신은 신계에 있을 자격이 없다. 신으로 숭배받을 도리 또한 없으리라. 입을 모아 말한 그들은 활과 화살의 신을 추방하였다. 지상으로 쫓겨난 신은 곧 그 격을 잃고,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었다. 추락한 신의 실패담을 인간들은 원형의 극장에서 가면을 쓰고 연기하였다. 그건 인간으로 남게된 신을 모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를 위로하며 숭배하는 의식이었다.

아아, 하마르티아, 닿지 못한 화살이여. 기꺼이 인간으로 남기를 택한 그대여.


찍은 영상을 나이트코드로는 공유하고 싶지는 않다는 마후유의 선언에 한 차례 투닥거림이 지나가긴 했으나, 직접 만나서 그를 보여주고 싶단 본인의 의사는 곧 수용되었다. 뒷풀이하러 모이려면 빨리 작업해서 얼른 투고하는 수밖에 없겠네. 유키가 당근으로 동기 부여를 하는 기술을 익히게 되다니. 놀랍다는 듯 Amia가 그런 소리를 하기는 했으나 마후유는 굳이 헛다리를 짚는 중이라는 지적은 하지 않았다.

곧바로 공유하지 않겠다는 이유는 단순했다. 마후유는 반응을 지켜보고 싶었다. 단순히 전해듣는 감상으로는 부족하다. 영상을 접한 순간 상대가 내보이는 모든 반응을 관찰하길 원했다. 자신이 활을 잡아당겼던 순간 떠올렸던 상상 속의 모습과 비교해, 그 아이가 실제로 그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지 확인하고 싶다는 게 본심이었다. 고작 이런 이유로 고집을 부리다니. Amia와는 다른 이유로, 마후유는 스스로에 대해 조금 놀랐다.

곡이 전달되고 그 위에 가사가 덧입혀진다. 여러 장의 컨셉 아트가 공유 폴더에 올라왔다가 내려가길 반복한다. 그림으로 그려진 세계에 움직임이 부여되고 생동감이 퍼진다. 작업의 막바지에 이르러 마후유는 몇 번이나 달력을 바라보았다. 투고가 이루어진 뒤 모두가 모일 뒷풀이를 기다리게 된다. 나, 기대하고 있구나. 이미 수십 차례 보았던 영상을 재생하며 마후유는 턱을 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날이 찾아온다.

“자아, 그럼 여태 숨겼던 영상을 보여주실까! 얼마나 대단하길래 동기 부여를 위한 당근으로 쓸 생각이었는지 확인해야겠어.”

“에나, 기대하고 있어?”

“뭐, 뭔 소리야. 그냥 네가 답지 않게 조건을 걸고 질질 끌어댄 게 신경 쓰여서 그런 거지.”

“네에- 에나낭은 있지- 너무너무 기대되어서 밤에 잠도 못 잤단 말야. 흠모하는 유키 님, 빨리 보여주세요-”

“미즈키!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난 그런 목소리 안 낸다고!”

에나낭, 시노노메 에나에게 볼을 붙잡힌 Amia, 아키야마 미즈키가 우는 소리를 내며 팔을 파닥거린다. 다 큰 처자 둘이 패밀리 레스토랑 구석의 자리에서 엎치락뒤치락 까불어대는 꼴을 지켜보며 K, 요이사키 카나데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유키, 아사히나 마후유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사람마냥 무심하게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점심 시간을 피한 덕에 매장 내에 다른 손님들이 별로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유치하게 놀던 분위기는 영상이 재생되는 순간 깔끔하게 사라졌다. 사선에 서서 커다란 활을 잡아쥐는 마후유의 모습을 보며 멤버들은 숨을 죽였다. 미즈키는 평소의 장난기를 싹 지우고 집중하는 얼굴이었고, 에나는 팔짱을 끼고 새초롬하게 눈썹을 찡그린 모습이긴 했으나 한순간도 화면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카나데는, 그 작은 손을 꾸욱 쥐며 가슴 앞에 기도하듯 모았다. 마후유가 자신을 빤히 지켜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하고.

화면 속의 소녀가 시위를 천천히 잡아당긴다. 카나데의 하얀 목덜미가 침을 삼키며 얕게 움찔거렸다. 작고 귀여운 입술이 옴싹이며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곁에 앉아있는 마후유에게 그 움직임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작게 확신을 품는다. 아아, 역시 그렇게 말해주는구나. 길게 늘어진 앞머리가 시야를 살짝 가리게 되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몰두하고 있는 카나데를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기대했던 모든 걸 이 순간 받은 기분이었다.

“......대단하다. 마후유, 정말로 멋져. 활을 쏜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맘에 들었어?”

“응, 진심으로. 언젠가 꼭 마후유가 활을 쏘는 걸 직접 옆에서 보고 싶어.”

“......그래.”

상기된 얼굴로 눈을 반짝이는 카나데를 가만히 마주보다가 마후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리라. 사선에 서 있는 자신을 그녀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어주는 날이. 그때가 되면, 아마 자신은 필사적으로 팔의 떨림을 숨기려 애쓰며 시위를 당길 테다. 겁이 날 정도로 까마득하게 멀리 놓인 과녁을 노려보면서, 하염없이 속으로 중얼거린다. 이 화살로 과녁을 꿰뚫을 수 있게 해주세요. 그녀의 앞에서, 카나데의 앞에서 멋지게 성공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 그렇게 불안감 속에 놓아준 화살이 허공을 가른다. 환호성이 터져나온다면, 그 속에는 분명 그녀의 목소리가 가장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겠지. 실망의 한숨이 새어나온다면, 괜찮았다고- 열심히 힘냈다고 위로해주는 그녀의 속삭임이 들릴 거고.

이 얼마나 한심하고 소박한......인간다운 기원인가.

“언젠가 꼭, 보여줄게.”

맹세하듯 힘주어 말하고서 마후유는 살풋 미소를 지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온기가 깃든 미소였다.


......아, 남은 이야기가 있다. 활과 화살의 신을 기리는 극에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그를 모시던 이들처럼 신은 가난한 사냥꾼이 되었다. 숲 속에서 살아가며 여름에는 풀잎을 덮고, 겨울에는 가죽을 누비며.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그를 찾아온다. 작은 유리 피리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숲을 찾아온 이는 한 때 음악의 신으로 불리던, 이제는 지상에서 살기를 선택한 소녀였다. 그녀는 거칠고 무례한 신들 사이에서 노래하는 대신, 자신을 지켜주었던 숲지기의 곁에서 그만을 위한 곡을 연주하길 택하였다. 두 신은, 아니 두 명의 인간은 그렇게 오래오래 함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래, 그런 이야기이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