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디 달링은 누구를 사랑했는가

프로젝트 세카이 에나 x 미즈키

가을이 이르게도 겨울의 스산함을 흉내내기 시작한 시기였다. 계절이 바뀌어도 공기가 차갑고 건조해질 뿐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는 그리 달라지지 않을 터였다. 언제나의 일상이 질리지 않을 만큼의 양념만을 곁들이며 하루하루 반복되리라. 그런 염세적인 예측은 깜짝 놀랄만한 대사건으로 인해 일부나마 깨어졌다. 대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시노노메 에나가 공모전에서 입상했다. 무려 두 번이나.

지금까지의 서러움을 단번에 씻어낼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건 아니었다. 도쿄 미드타운 아트 공모전에서 은상을 받았고, 홋카이도의 신치토세 공항에서 주최한 ‘설국으로의 문’ 공모전에서 주목 받은 작품상을 받았다. 말이 좋아 ‘주목 받은 작품’ 이라고는 하지만, 본격적인 상을 수여하기에는 다소 아쉬운 참여작에 듣기 좋을 명칭을 붙인 상을 줬을 뿐이긴 했다. 그럼에도 그게 어디인가. 소녀가 필사의 각오로 그려낸 작품들은 아쉽게나마 세간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 중 하나는 무려 공항의 한켠을, 볕이 들지 않는 구석이라도 작게나마 장식하게 되어 오고가는 사람들의 눈에 들게 되겠지.

시노노메 에나는 범재일지언정 시시한 인간은 아니다. 어중간한 결과에 만족하고 안주할 성격 또한 아니고. 그렇다고는 해도 그 나이대의 아이답게 에나는 자신이 이뤄낸 성과에 도취되어 한껏 들떴다. 소녀가 심적으로 가장 가까이에 두고 있는 친구들, 나이트코드의 멤버들은 에나의 소박한 달성감이 충족될 만큼 응원과 칭찬을 전해주었다. 페밀리 레스토랑에 모여 잔을 부딪치며 시노노메 에나의 작지만 큰 성공을 축하하고, 이번 일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의 첫걸음이 되기를 축복해준다. 그 중에서 가장 열렬하게 찬사를 쏟아냈던 게 아키야마 미즈키였다. 평소보다 한층 흥분해서 ‘미래의 대화백 시노노메 에나를 위하여!’, 호기롭게 선창을 하려는 미즈키를 에나 쪽에서 부끄러워하며 말렸을 정도였으니.

그래서, 한동안 에나는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얼마나 좋았는지 아사히나 마후유가 업로드된 그림을 보고 ‘이쪽은 색칠을 덜한 거 같은데’ 하는 말을 했을 때에도 아가씨는 화를 내지 않았다. ‘일부러 여백으로 남겨놓은 거야’ 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어조로 받아줬지. 거기에 더해 에나는 한동안 그림을 그릴 때마다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심야의 작업 시간 동안 마이크를 켜뒀다는 자각도 없이 몇 차례나 음성 채팅으로 그를 중계하기도 했다. ‘곡조가 조금 바뀌었네. 에나가 어레인지 한 거야?’ 하고는, 요이사키 카나데가 불쑥 말을 붙이지 않았다면 아마 며칠을 더 그렇게 했을지도.

마음의 여유는 사람의 성격을 바꾸는 모양이었다. 마후유의 무신경한 태도에도 짜증을 내는 빈도가 줄어들 정도이니, 미즈키가 다소 짓궂게 거는 장난에도 에나는 마치 한참 연상의 상대가 어린 아이를 다루듯 너그럽게 넘어가주었다. 그 점이 미즈키는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에나가 마음의 짐을 덜어내고 좀 더 밝은 성격이 되었다면, 나아가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기는 걸로 한층 성숙하게 되었다면 그건 물론 기쁜 일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었다면 괜시리 외로워진다. 혼자서 훌쩍 어른이 되어버리지 말란 말야. 에나는 에나답게 장난스럽게 쿡 찌르는 말에 금방 발끈하는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길 원해. 이쪽을 바라보며 새초롬하게 눈썹을 치켜세우는 너만의 그 귀여운 표정을 보고 싶은데. 아직은 아무 것도 몰라도 좋을 어린 아이로 남아있길 원하는 아키야마 미즈키와 함께, 하루라도 더 바보 같은 문답을 주고받거나 시답잖은 장난에 어울려줬으면 좋겠어.

에나가 변하지 않기를, 그리하여 자신과의 관계 또한 변함없기를 소망한다. 곁에 있어주길 원하는 마음은 친애의 감정이라고 이름붙여도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다가 미즈키는 피식 웃어버렸다. 욕심 많은 꼬맹이마냥 어찌나 이기적인지. 있는 힘껏 노력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를 뒤에서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주제에, 곁을 떠나지 말고 언제까지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있어주길 원하다니.

일방적으로 거리감을 느꼈던 걸지도 모른다. 이전처럼 별 영양가 없는 신변잡기적 연락을 보내려고 하다가도, 지금 에나는 미래의 꿈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거니까- 하는 생각에 미즈키는 단말을 내려두게 되었다. 사소한 주제로 떠들어줄 상대가 하나 줄어든 걸로 일상에 체감되는 공백이 생겨버린다. 비어버린 시간 동안 미즈키는 홀로 쓸쓸한 생각에 잠겨들었다. 언젠가 카나데도, 마후유도 각자의 문제를 딛고 올라서 어른이 되겠지. 모두가 어른이 되었을 그때에 자신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만약 혼자 뒤처지게 된다면. 더 이상 친구들이 아무래도 좋을 가벼운 이야기만 꺼내고 유치한 장난만을 일삼는 자신과 어울려주지 않게 된다면.

유독 하늘이 맑은 가을의 아침이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약간의 온기를 빼앗아가는 계절을 앞두고 미즈키는 남들보다 이르게 겨울의 쓸쓸함을 체감하였다. 아직 달력의 마지막 장으로 넘어가려면 몇 주가 남은 시점이었지만 몸도 마음도 벌써부터 겨울 바람에 얼어가는 기분이었다. 새삼스런 일은 아니었다. 아키야마 미즈키에게 있어 인생이란 계절과 무관하게 황폐한 겨울이 계속되는 시련과도 같았으니. 최근에는 그저 예상 이상으로 즐거운 일들이 많아서 잠시 잊고 있었던 거야. 한 주가 넘도록 인사 한 차례 보내지 못한 에나와의 대화창을 들여다보며 미즈키는 서글픔을 삼켰다.

그 순간, 갑자기 알림음이 울린다.

<미즈키. 지금 집에 있지? 오늘도 땡땡이 쳤을 거잖아.>

쳐다보고 있던 대화창에서 난데없이 에나로부터의 연락이 갱신되자 미즈키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단말기를 떨어뜨릴 뻔 하였다. 당황하여 잠시 손가락이 생각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대화창을 보고 있었으니 연락을 확인했다는 표시가 곧바로 에나에게 갔겠지. 에나가 그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이 들어서 미즈키는 울상을 지었다. ‘뭐야, 예전에 나눴던 대화 감상하던 중이었어?’ 놀리며 얄밉게 웃음짓는 에나를 상상해보고는 부끄러워졌다가, 동시에 묘하게 두근거리는 감각을 느낀다. 어찌된 일이든 에나가 연락을 줬다는 사실에 기뻐지고 마는 걸까.

폭신한 털을 가진 여우 캐릭터가 고개를 갸웃대며 물음표를 띄우는 스티커를 보낸 다음 미즈키는 머리를 굴렸다. 메신저로 사적인 연락이야 한동안 하지 않고 있었지만 나이트코드에서의 모임은 지난 밤에도 했었다. 전할 말이 있었다면 그때 말했을 건데, 지금 연락을 했다는 건 그 이후에 뭔가 일이 생겼단 거겠지. 슬쩍 책상의 디지털 시계를 쳐다보면 표시되고 있는 시각은 AM 10 : 27. 땡땡이 치지 않았다면 지금쯤 학교에서 착실하게 수업을 듣고 있을 시간이지만, 에나의 예측대로 오늘의 미즈키는 자택 경비 중이다.

<아닌데? 지금 학교야.>

<그러신가요? 학교에 있는 애가 수업 시간에 연락을 곧바로 확인하곤 답장도 하는구나?>

<뭐야, 명탐정 에나낭 모드? 들켰네.>

<지금 너희 집에 가도 될까? 혹시 가족들 있어?>

허리와 등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간다. 의자에서 반쯤 일어난 자세를 하고서 미즈키는 방금 읽은 문장을 재차 눈으로 훑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니, 집에 찾아가고 싶다는 문장은 읽을 수 있다만, 뭘 위해서? 시노노메 에나가 아키야마 미즈키의 집에 찾아오겠다는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모종의 사건으로 마후유가 요이사키 가에 신세를 지게 되었던 이후로 자신도 카나데에게 초대받고 싶다는 집념을 이글이글 불태우던 에나였다. 그러면서도 딱히 미즈키의 집에 찾아가고 싶단 티는 내지 않았었지. 이제와서 갑자기 관심이 생긴 건 아닐 터인데.

<나 뿐이긴 한데,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왜?>

곧바로 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미즈키는 초조함을 느꼈다. 난데없이 집에 찾아오겠다고 말하고, 거기에 더해 다른 가족들은 없는지 확인하다니. 에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뭔가 나쁜 일이라도 있는 거야? 연달아 상정 외의 전개를 맞닥뜨리다보니 상황판단력이 극도로 저하된 느낌이었다. 나름의 위트를 섞어 장난기 섞인 말을 던질 여유도 지금은 짜낼 수가 없다. 상대가 뭐라도 말을 던져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너 밖에 어울려줄 사람이 없어.>

이게 일종의 평정심 무너뜨리기 내기였다면 이 순간 미즈키는 패배를 인정하고 백기를 들었으리라. 너 밖에 없다는 그 한 문장에서 색채가 번져나와 미즈키가 마주하고 있던 모노톤의 세상을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덧칠해버린다. 무슨 일이냐는 물음에 대해 엉뚱한 답이 돌아온 셈이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도착하면 사정을 설명해주겠다며 주소를 알려달라는 에나에게 답을 보내고는 미즈키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에나가 이곳으로 온다. 자신 밖에 어울려줄 수 없는 어떠한 사건을 가지고. 방금 일어난 일임에도 현실감이 희박해서 미즈키는 헛웃음을 흘렸다.


초인종이 울리자마자 미즈키는 곧바로 현관문을 열었다. 한참 전부터 현관 앞을 왔다갔다 돌아다니고 있는 중이었으니. 문을 열면 예상대로 시노노메 에나가 있었다. 배낭 손잡이를 한쪽만 붙들고 뒤로 둘러맨 자세가 잘 꾸며입은 옷차림과는 달리 제법 와일드하다. 위로는 폭신한 스웨터에 밤색 코트를 챙겨입었으면서, 아래로는 무릎 위로 닿는- 한쪽 면으로만 장식천이 달린 깜찍한 스커트를 입은 모습이란. 보온이란 실용성보단 겉으로 보이는 귀여움을 중시한 코디는 에나에게 잘 어울리고, 미즈키적으로도 점수가 높다. 그대로 겉으로 드러낸 다리가 상당히 시리기는 하겠지만.

“그렇게 입을 거면 겨울용 스타킹도 챙기지 그랬어. 사둔 거 있는데 줄까?”

“뭐? 보자마자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이런, 실례. 좋은 아침이야, 에나!”

“그 말부터 했었어야지. 들어간다?”

툭 던지듯 묻고는 답을 듣지도 않고 스스럼없이 현관 안으로 들어선다. 그런 그녀를 맞이하며 상대가 정말 처음으로 여기에 오는 게 맞는지 미즈키는 잠시 생각하였다. 우리들, 이렇게 격식없는 사이였었나. 따지고보면 그랬던 듯도 싶다. 적어도 아키야마 미즈키의 인생에서 시노노메 에나만큼이나 곁에 가깝게 다가왔던 사람도 흔치 않으니.

“그래서, 나 말곤 어울려줄 사람이 없단 건 무슨 말인데?”

벗은 구두를 구석에 가지런히 놓아두고는 에나는 새초롬한 눈으로 말없이 미즈키를 쳐다보았다. 물음에 답은 해주지 않고 곁눈질로 집 안쪽을 살핀다. 현관은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왔으면서 이보다 안쪽은 멋대로 들어서기엔 신경쓰인단 건가. 변덕쟁이 고양이를 상대하는 기분에 피식 웃어버리고는 미즈키는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뒤를 따라 들어오고는 에나는 탐색하는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실과 부엌을 빠르게 훑고는 복도 쪽으로 향하는 눈길은 미즈키의 방이 어디있는지 찾는 티가 난다.

“아무도 없는 거 맞아?”

“없어. 왜 그렇게 경계하는 거야? 수상한데에- 뭔가 나쁜 일이라도 꾸미고 있는 중?”

“미즈키, 술 마셔본 경험 있어?”

“뭐?”

마찬가지로 고등학생인 입장에 뭘 물어보고 있는 거야. 학교 출석을 좀 빼먹고 있을 뿐이지 그렇다고 내가 그렇게까지 탈선할 불량 학생으로 보여? 깔깔 웃으며 그렇게 대꾸하려고 하다가, 말을 꺼낸 에나가 긴장감이 느껴질 지경으로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음을 보고서 미즈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에나가 둘러매고 있는 배낭으로 자연스레 눈길이 옮겨간다. 분홍색의 귀여운 배낭. 미스터리 투어라든가 피크닉이라든가 어딘가 나들이 갈 일이 생기면 에나가 늘 매고 다녔던 그 배낭이다. 아담해보이는 생김새에 비해 커다란 물병도 무리없이 들어가던 배낭 안에, 지금은 무엇이 들어있는가.

“......있을 리가 없잖아.”

“그렇겠지.”

“에나, 진심이야?”

“그럴만한 사정이 있거든.”

당혹스러움에 미간을 찌푸리는 미즈키에게 손을 내저어보이고는 에나는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한숨을 푹 내쉬고는 들고 있던 가방을 식탁 위에 올려두는 행동에 맥이 없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음주라는 금역을 건드려야만 하는 사정이란 게 무엇일지 알 수가 없어서, 미즈키는 조용히 에나의 설명을 기다렸다. 뭐가 되었든 간에 술에 손을 대는 건 너무하잖아- 같은 원론적인 말은 이야기를 듣고나서 꺼내도 충분하다.

나이트코드의 멤버들 중에서는 그나마 생활 반경이 넓은 편에 속한다곤 해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그럴 뿐, 만만치 않게 협소한 인간관계 속에 살아가는 에나였다. 소녀가 돌발적인 행동을 저지르게끔 영향을 행사할 상대는 몇 되지 않는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가족 간의 문제겠지. 미즈키의 짐작대로 에나의 입에서는 ‘그 인간’ 이라는 단어가 곧바로 튀어나왔다. 그게 에나가 자신의 아버지를 지칭할 때 쓰는 표현임을 미즈키는 알고 있다.

에나의 말에 따르면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건 그 사람 쪽이었다. 아침에 잔에 물을 채우러 부엌으로 나갔다가 그 사람과 맞닥뜨린 건 상정 외의 사고였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자리를 피하려는 에나를 그가 불러세웠다. 이름을 부르기만 했을 뿐인데도 성난 고양이마냥 날선 반응을 내보이는 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는 얼마 전 자신이 유명 공모전의 심사위원 역을 맡았었음을 말했다. 마치 일반적인 가정에서 가족끼리 근황 보고를 주고 받는 것마냥.

난 평가 당하기를 기다리는 쪽이고, 그 인간은 심사하는 쪽이라는 거지. 잘났어, 진짜. 재수없단 듯 짓씹은 말을 내뱉고는 에나는 잠시 침묵하였다. 한숨을 내쉬고는 다시 말을 잇는다. 평범한 가정의 착한 딸처럼 답해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냐고 대꾸하는 딸에게 아비가 말했다. 하나의 공모전에서 대상을 타내고 세간의 주목을 이끌어낸 신인 화가여도, 그 이후로 제대로 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 차례 광택을 내보인 재능조차 묻히게 되는 게 예술계의 현실이라고. 오로지 자신만의 힘으로 성공 가도에 오른다는 건 미담을 좋아하는 세상이 지어낸 서글픈 환상일 뿐이라고.

에나는 화를 냈다.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으나 어쨌든 불같이 화를 냈단다. 화가 치밀어오르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소녀가 주목 받지는 못했더라도 상을 받아서 왔던 날 아비라는 자는 칭찬 한 마디 해주지 않았었다. 애시당초 기대하는 마음조차 없었으나, 소식을 전해듣고서도 ‘그러냐’ 한 마디로 반응을 맺어버리는 게 영 탐탁치 않았던 터였다. 그런데 딸이 노력 끝에 이뤄낸 자그마한 성취조차 보잘것없고 무의미하단 식으로 말을 하다니.

한바탕 쏟아내고서 방에 돌아온 다음에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물건들을 집어던지거나 소리를 내질러봤자 득될 거 없이 스스로만 비참해질 뿐이다. 뭐가 그리 잘났는지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냉혹한 현실’ 운운하는 말을 해대는 아비에게 한 방 먹여주고만 싶었다. 뭐가 있지. 뭐가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 불쾌할 정도로 무덤덤한 표정이 난처함과 곤혹스러움으로 찌푸려지는 걸 볼 수 있을까. 이를 악물고 머리를 굴리다가 에나는 생각해냈다.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게 될 복수를.

“그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내걸고 전시회를 하게 되었던 때, 은사라고 했나, 어쨌든 지인이 축하 선물로 비싼 술 한 병을 줬었어.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아직까지 개봉도 안하고 모셔두고 있었거든. 마시는 걸로 소모해버릴 수 없는, 의미 있는 트로피나 기념품 그런 걸로 여기는 게 아니겠어. 흥, 그래봐야 고작 술일 뿐인데.”

“그런 거구나. 그렇다면, 굳이 마실 필요는 없겠네? 어디 숨겨두기만 해도 충분하잖아.”

“마실 거야! 내가 마셔서 없애버릴 거야. 미즈키, 저번에 날 위해 축배사를 해주려고 했었잖아? 이걸로 해줘. 이 따위 싸구려 술, 날 위한 소모품으로 써버리란 말야.”

으르릉거리며 말하고는 열이 올라 숨을 몰아쉬는 에나의 모습은 임전태세에 들어간 들짐승처럼 사납게 보였다. 아비의 성공을 기념하는 상징을 망가뜨려서 원망을 지워낼 복수를 이루고 그를 통해 위안을 얻겠다는 계획은 흡사 셰익스피어의 비극 한 편을 모사해서 써내려간 대본의 내용 같다. 억누르지 못할 감정으로 인해 휘둘리고 휘둘려서 결국에는 파국으로 치닫는 복수극. 극의 주인공을 맡게된 시노노메 에나가 아키야마 미즈키에게 또다른 주역을 맡아주길 부탁한다. 자신이 저지를 범행에 공범이 되어달라고, 이런 일에 어울려줄 상대는 너 밖에 없다고 말하며.

“너무하네, 에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술을 마시는 일에 어울려달라니, 소소하게 무단 결석 정도만 하고 지냈었는데 이래서야 명실공히 불량 학생이 되어버리잖아.”

“굳이 따라서 마실 필요는 없어. 그냥, 어울려주기만 해.”

“어떻게 하는 게 좋으려나. 나 밖에 어울려줄 사람이 없다고 하길래 ‘나, 신뢰받고 있네!’ 싶어서 쪼오금- 뿌듯했는데 말이지. 그치만 그게 이런 일이었을 줄이야. 조금 충격받았어.”

“......”

짐짓 상심했다는 듯 너스레를 떠는 미즈키를 노려보다가 에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무언가를 말할지 망설이다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믿고 있으니까 이런 짓에 어울려달라고 했던 거라고, 짜증 섞인 어조로 쏘아붙이려고 했겠지. 분명, 아키야마 미즈키 밖에 없었으리라. 좋은 면모만을 보이고 싶은 상대, 걱정 끼치고 싶지 않은 상대, 딱히 어울려줄 거라고 기대할 수 없는 상대를 하나씩 지워나가면, 시노노메 에나가 같이 못된 짓을 하자고 말할 수 있을 이는 이 세상에 한 명 밖에 남지 않게 되었을 거니까. 거기에 생각이 닿는 순간, 미즈키는 자신의 심장이 요란스레 뛰고 있음을 깨달았다.

평소의 관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쪽에서 바람을 넣기도 전에, 에나 쪽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는 게 조금 다른가. 못 이기는 척 넘어가서 저질러버려도 문제될 건 없으리라. 어른들이 보기에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일탈을 말이다. 용서받지 못할 정도로 굉장한 잘못을 저지르는 거도 아니잖아? 에나는 치기 어린 불효를 저지르고, 자신은 옆에서 그를 지켜볼 뿐. 그렇게, 아직 어른은 되지 못할 꼬마 둘이서 죄의 기억을 공유하게 되겠지.

“좋은 친구라면 여기서 어떻게든 말리려고 해야하려나. 아무리 그래도 그래선 안 돼, 라고 하면서. 그렇지?”

“그래서?”

“......난 좋은 친구보단 에나에게 필요한 친구가 되고 싶은데.”

말하고는 한쪽 눈을 찡긋- 해보인다.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세차게 뛰고 있던 심장이 한층 크게 박동하기 시작하여 미즈키는 약하게 현기증을 느꼈다. 항상 비밀을 숨긴 채 진솔하지 못한 모습으로 있는 주제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필요로 하는 친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그 필요가 못된 장난을 위한 거라고 해도, 공범 정도야 얼마든 되어줄 수 있어.

맵시 좋게 생긴 술병이었다. 필기체가 어지럽게 쓰여져 있는 라벨에선 1947 이라는 숫자만 알아볼 수 있었다.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알 수는 없어도, 에나네 아저씨에겐 그 이상으로 소중한 물건인 거겠지. 노을빛을 닮은 액체가 병목까지 차오른 모습을 살펴보다가 미즈키는 찬장에서 작은 머그컵 두 잔을 꺼내왔다. 술을 머그컵으로 마시는 경우가 어디있냐고 핀잔을 주면서도 에나는 잔을 하나 받아들었다. 모든 게 우스울 정도로 어설펐다. 코르크 마개를 뽑질 못해서 둘은 한참 동안 오프너를 번갈아 들며 낑낑거렸다. 고생 끝에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마개가 열린 순간 미즈키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고 에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그컵에 채워진 술은 담긴 용기가 그렇다보니 갓 우려낸 홍차처럼 보였다. 미심쩍은 눈으로 잔을 살피고 냄새를 킁킁 맡아보다가 에나는 눈썹을 찌푸렸다. 올라오는 술냄새에는 부드럽게 달짝지근하면서도 톡 쏘는 강렬함이 섞여있었다. 아버지의 소중한 기념품을 망쳐버릴 거라고 기세등등하게 말할 때는 언제고, 생전 처음 마주하는 술이라는 액체에 대해 마시기도 전부터 질려버렸는지 에나는 한풀 꺾인 모습이었다.

“미즈키, 빨리해.”

“아하하, 우리들 진짜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네.”

“됐으니까 어서.”

“그래. 그럼, 이 시대 최고의 화가 시노노메 에나가 날마다 도약하여 언젠가 누구보다 성공할 수 있기를.”

머그컵의 테두리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둔탁하다. 뒷풀이로 모여 축배를 나누던 때와 비슷한 감각으로 잔을 끌어와 한 모금을 마셨다가, 둘은 거의 동시에 콜록거리며 기침을 해댔다. 식히지 않은 음식을 급하게 삼켰을 때마냥 목 안쪽이 화끈거렸다. 공기 중에 감도는 향이 열기를 머금은 채 이제는 코 안쪽에서 휘몰아친다. ‘액체로 된 불을 삼키다’ 란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깨달으며 미즈키는 혀를 데었을 때마냥 숨을 할딱여댔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걸로 보아 에나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으읏, 뭐야 이거, 독하기만 하고......하나도 맛 없어.”

“아으, 혀가 얼얼해. 달달한 건지 쓴 건지 잘 모르겠어. 비싼 술일수록 향이 깊다고 하던데.”

“말도 안 돼. 이게 맛있다고 생각하는 쪽이 이상한 거 아냐?”

딱 잘라서 맛이 없다고 선언을 한 주제에 에나는 잔에 남아있는 술을 마저 들이마셨다. 하여간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긴. 독한 술을 모조리 마신다고 에나 자신이 이기는 것도 아닐 터인데. 몸서리치며 가쁜 숨을 내쉬는 에나를 바라보다가 미즈키는 고개를 내저었다. 술은 이제 고작 병목에 차 있던 분량이 없어졌을 뿐이다. 병아리 눈물만큼 마시고는 이렇게나 고전할 줄이야.

“마개 닫지 마. 좀 쉬었다가, 다시 마실 거야.”

“암만 봐도 무리거든요. 에나, 벌써 얼굴이 새빨갛게 되었거든.”

“......어쨌든 닫지 말고 둬. 못 마시면 버릴 생각이니까.”

“그건, 아깝네.”

“아까울 거 없어. 맛도 없는 싸구려 술 따위.”

뿌리깊은 적의가 스며나오는 말을 내뱉은 뒤 에나는 침묵했다. 식탁을 내려다보며 잔의 테두리를 만지작거린다. 익숙하지 않은 취기가 알근하게 감도는 적막 속에서 미즈키는 따라서 침묵을 지켰다. 말없이 맞은 편에 앉아있는 여자아이를 쳐다본다. 언제나처럼 한 가닥 귀엽게 땋아내린 벼머리, 누가 봐도 예쁘다고 할 이목구비 단정한 얼굴, 오늘의 일탈로 인해 벌겋게 달아올라버린 두 뺨, 술기운에 느슨하게 풀려버린 표정. 생전 처음으로 취기에 빠져든 채로 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미즈키가 멍하니 그런 생각을 떠올렸을 때였다.

“제대로 화났을까?”

“누가?”

“그 사람. 이거, 잘은 몰라도 어쨌든 비싼 술이겠지. 웬만한 직장인의 한 달 월급보다 비쌀지도 몰라.”

“걱정돼?”

“......상관없어. 어차피 처음부터 화나게 만드려고 한 거고. 그쪽에서 날 화나게 만든 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웃기지 않아? 대상을 탈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묻히는 세상이라고 하면, 내가 겁나서 벌벌 떨어야 하는 거야? 도대체 그런 말은 왜 하는 건데? 아무 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딸이 멋모르고 험한 판에 발을 들일 게 걱정되어서? 재수없어. 뭐가 닥치더라도 이 악물고 견뎌야 하는 건 나야. 어떻게든 해내겠다는 각오도 내가 하는 거고. 누가 대신 걱정해달라고 부탁이라도 했어? 그 딴 부탁 한 적 없으니까. 차라리 응원해주고 격려해주길 원했어. 그런데, 단 한 번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잖아.”

날이 섰던 목소리가 뒤로 갈수록 차츰 흐려진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슥 닦아내고는 에나는 술병을 들어올렸다. 잔 가득 술을 채우는 에나를 말려야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미즈키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괜찮겠지. 에나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둬도 좋을 듯 싶었다.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지경으로 선을 넘지만 않게끔 신경써주자. 그게 공범의 역할이다.

“......후으. 부끄러운 거겠지? 딸이 자기를 따라서 화가가 되겠다는데 기대만큼 능력이 되지 않아서는, 자기 얼굴에 먹칠하는 꼴이 될 거니까. 그러니 자꾸 겁주고 꺾으려고 드는 거야. 자기 이름값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그냥 적당히 포기하라고. 흥, 그러면서도 아버지 행세를.”

“......”

“내가 누구 때문에, 그림을 좋아하고,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게 된 건데. 그건 생각도 해주지 않고......”

맛 진짜 더럽게 없네. 불만을 토해내며 에나는 두 번째로 비운 잔을 식탁 위에 놓았다. 벼머리 앞으로 톡 튀어나온 귀가 홍옥처럼 붉다. 다시금 잔을 채우려는 듯 술병으로 손을 뻗다가 에나는 행동을 그만두었다. 두 잔 마신 걸로 이미 몸의 상태가 변했다는 걸 체감한 모양이었다. 잔을 밀어놓고 에나는 아까 전부터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미즈키와 시선을 맞췄다. 자못 엄숙한 표정으로 눈빛을 주고받다가 피식 웃는다. 그런 에나에게 미즈키는 따라서 살짝 웃어보였다.

시노노메 씨, 에나의 아버지, 그 아저씨에 대해 미즈키는 잘 알지 못한다. 대화를 나눠본 적도 없고, 그 이전에 직접 만난 적도 없으니. 에나에게 몇 차례에 걸쳐 투덜거림 섞인 편중된 정보들을 전해들은 게 전부다. 그럼에도 왠지 그 사람의 태도와 행동원리에 대해 알 거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은 도망치고 싶은 게 아닐지. 인정하고 마주하기에는 너무나 험난한 난관을 넘어설 자신이 없어서.

어느 이름난 도공의 아들이 말했던 바이다. 자신이 제대로 된 결과를 내지 못할 때는 세상 모두가 아비의 이름을 들먹거린다고. 자신이 충분히 납득할만한 결과를 냈을 때에는,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아비의 이름만을 입에 담는다고. 거장의 핏줄로 태어난 시점에서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실패한다면 거장의 이름에 먹칠한 못난 죄인이 될 뿐이고, 성공한다면 그저 거장이 세워둔 위업의 연장선상에 한 줄 덧붙이는 부속품이 될 뿐이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존재는 제대로 남지 않는다. 그건 저주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터.

두려운 거야. 자신이 쌓아올리고 이루어낸 삶의 궤적이, 평생에 걸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딸을 괴롭히는 족쇄로 작용할 거란 사실이. 만약 에나가 지난 번의 공모전 때 대상을 타게 되었다면 사람들은 에나라는 이름 대신 시노노메라는 성씨에 주목했을 게 분명하다. 그 사람의 딸이잖아. 누구든 그 말부터 하지 않았을까. 거장의 지도를 받으며 좋은 환경에서 연습을 했을 거라고 멋대로들 짐작하겠지. 그리고는 한층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 거다. 조금이라도 흠결이 잡힌다면, 그때부터 에나를 기다리는 건 부조리할 지경으로 쏟아지는 비난들이다. 아비의 명성을 등에 업었을 뿐이라고 헐뜯는 수군거림부터 부당한 특혜가 있었던 건 아닌지 뿌리도 없는 의혹까지 오고갈 거고, 이름난 화가의 딸을 향해 사소한 질투를 머금고 내뱉던 말들은 어느 순간 실체를 가진 음모마냥 사람들 입을 따라 굴러다니게 되리라. 화가로서 시노노메 에나가 걸어가야 하는 길은 결국 아비의 명예로부터 자라난 가시나무들로 엉망이 될 수밖에 없다.

이권보다 채무가 비교도 되지 않게 큰 상속이라면 차라리 포기하는 게 현명할지도 모른다. 시노노메 씨는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닐까. 지금 당장 딸에게 미움을 받더라도 언젠가 딸이 마음을 꺾고 달리 적당한 일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게 된다면, 힘들었던 시간을 추억으로 남긴 채 가족이 화목하게 지낼 수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평생에 걸쳐 자신의 그림자에 눌려 고통받으며 딸이 영영 원망을 품게 되는 거보다, 지금 당장 부녀 간의 관계가 서먹한 편이 나을 거라고 위안하며.

때가 되면 어떻게든 결론이 나게 되겠지. 그건 그때 되어서 고민하면 될 일. 당장은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리고 싶어. 그와 같은 논리를 중심에 두고 계속해서 도망치는 사람을, 미즈키는 잘 알고 있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이 마주하고 있는 ‘지금’ 에 대해 얼마나 염세적인 생각을 품는지, 동시에 얼마나 무기력한 태도를 보이는지 또한 미즈키는 이해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처럼 졸렬하게 행동하는 인간을 미워하는 이의 마음 또한......납득하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후우, 진짜 싫다. 그쪽이 화내길 원한 거였는데, 이래서야 늘 나만 손해보는 기분이야. 정말 최악.”

“그래그래, 항상 에나가 고생이 많네. 가끔씩은 화내지 말고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좋을지도.”

“누가 일부러 그러는 줄 아니. 나도 내가 귀찮은 성격이란 거 안다구. 상성이 안 좋은 거야. 으, 어지러워. 하아, 아무리 싫어하더라도 나중에 시간 지나면 자기 부모랑 똑같은 사람과 만나서 같이 살게 된다던데, 생각만 해도 끔찍해.”

“으응, 확실히 그런 말도 있었지.”

“......”

손깍지를 끼고는 그 위에 턱을 괸 채로 에나는 잠시 동안 미즈키를 빤히 쳐다보았다. 생애 처음으로 들이마신 술로 인해 흐릿하게 풀렸던 갈색 눈동자에 점차 초점이 돌아온다. 집요함마저 느껴지는 눈길에 당황하여 미즈키는 눈을 깜박거려댔다. 에나,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한 잔 마시고 보니 내가 평소보다 더 귀엽게 보여? 장난스레 말을 꺼내려고 생각하지만 이상하게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미즈키 너도 가끔 되게 짜증나게 말하거든. 제대로 본론을 꺼내지 않고, 말을 빙빙 돌려대면서 말야. 난 그런 게 엄청 싫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똑바로 해줬음 좋겠어.”

“뭐야? 왜 갑자기 내가 혼나는 흐름이 된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문득 생각나서. 네가 그럴 때마다 못 견디게 얄밉단 말이지.”

“너무해! 난 에나를 위해서 술까지 마셔버린 불량 학생이 되는 걸 감수했잖아. 잔소리 대신 고맙다는 말을 해줘야하는 거 아냐?”

“으응, 뭐, 그건 고맙긴 하네.”

“성의 없네-”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고는 툴툴대는 미즈키를 보고는 에나는 소리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조금 전까지 화내다가 한순간에 변모하여 지금은 기분좋게 웃는 게 딱 술에 취한 사람의 행동이다. 시노노메 에나가 취했을 때의 모습은 이런 느낌이구나. 쌓였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쏟아낸 다음, 이렇게나 맑게 웃어버리곤. 스스로에게 솔직하고 당당하며, 그래서 마주하는 감정에 깨끗할 수 있는 에나. 너의 그런 점이 좋아. 그녀의 취한 모습을 처음으로 본 사람이 자신이란 사실에 묘한 만족감을 느끼며 미즈키는 살풋 미소를 짓고 말았다.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다가 곧바로 미소를 보이다니, 이쪽도 취한 건 마찬가지일지도.

“그래, 그럼 성의 표시 제대로 해줄까. 내 억지에 어울려줘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니까 말야. 미즈키, 나한테 원하는 거 있어?”

“원하는 거라니?”

“소원 하나 들어줄게. 어때, 억지로 술 마신 값으로는 충분하지?”

“소원? 뭐든지 들어주는 거야?”

“들어줄 수 있는 거라면.”

말하고는 싱긋 웃는다. 여전히 턱을 괸 자세로 무엇을 말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도도하게 눈을 치켜뜨는 모습이 감도는 취기 때문인지 묘하게 야릇하다. 별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마냥 장난스레 쿡쿡 웃어보이면서도, 미즈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는 선언을 듣자마자 예의 이기적인 소망을 떠올리게 되어버린다. 자신을 뒤에 남겨둔 채 먼저 어른이 되어버리지 않기를. 함께 어리숙한 눈높이에 머물러주기를. 진지한 대화를 꺼내기 두려워하는 미숙아를 위해, 아무래도 좋은 가벼운 이야기만을 화제에 올리더라도 그에 어울려주기를. 그리하여 언제까지나 지금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기를.

......아무리 그래도 그처럼 흉한 억지를 말할 수 있을 리 없지.

“......으응, 어쩐담. 이번 주말 쇼핑에 어울려달라고 할까. 겨울 시즌 상품들이 입고될 예정이라고도 하고, 예전에 에나가 말해줬던 수제 장신구 가게에 꼭 가보고 싶었거든.”

“그건 그냥 언제나 말할 수 있는 내용이잖아. 굳이 소원이라고 하지 않아도 얼마든 같이 어울려줄 거라고.”

“에, 그럼......”

망설이며 말을 잇지 못하는 미즈키를 바라보며, 에나는 웃음기를 지우고 점차 뚱한 표정이 되었다. 하여간 겁쟁이라니까. 작게 중얼거리는 말이 희미하게 닿지만, 긴장한 탓에 미즈키는 그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시시하지 않으면서도 그리 이상하지 않을 적당한 소원이 뭐가 있지. 에나가 생색내는 거에 적당히 맞춰주면서 분위기도 흐리지 않는 그런 최적해가 있을 건데, 생각나지가 않아. 아랫입술을 씹으며 고민하다가 뾰족하게 노려보는 에나의 눈빛을 느끼고 미즈키는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아니, 그러니까......에나에게 뭐든 부탁할 수 있는 백지 수표라니, 엄청 레어하잖아? 함부로 정할 수가 없다고 해야하나.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모르고. 신중해지는 게 당연하지.”

“변명이 길어. 평소에 내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다면 곧바로 말했을 건데, 기대도 관심도 없었던 게 아닐까 싶어지네.”

“에나에게 괴롭힘 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라는 소원은 들어줄 수 있어?”

“괴롭힌 적 없거든. 너도 참, 만만치 않게 귀찮은 성격이야.”

안타깝다는 듯 혀 차는 소리를 쯧- 내고는 에나는 식탁 한 켠에 놓여있는 포스트잇 메모지로 손을 뻗었다. 펜촉이 얇은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가 흐른다. 메모지 위에 채워지고 있을 내용은 맞은 편 자리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미즈키는 에나가 그림을 그리고 있음을 알았다. 입술에 살짝 힘을 넣고 한껏 집중하여 눈을 빛내는 표정. 그림을 그릴 때 시노노메 에나는 그런 얼굴이 되니까.

“자, 받아.”

메모지 한 장을 뜯어내어 넘겨준다. 접착면을 손가락에 붙인 채 미즈키는 쪽지를 살펴보았다. 테두리 장식을 화려하게도 그려넣고서 그 안쪽으로 수표 양식을 흉내낸 게 꼭 어린애들 놀이에 쓰는 장난감 돈 같다. 백지 수표의 윗단에 고운 글씨체로 쓰여진 단어는 ‘소원권’. 수표의 측면에는 벼머리를 한 단발의 여자애가 그려져 있었는데, 어딜 봐도 에나 자신을 묘사한 그 아이가 강조선이 들어간 말풍선으로 엄숙히 선언하고 있었다. ‘잊지 말고 반드시 사용해!’.

“생각이 느린 미즈키를 위해 내가 배려했어. 고맙지?”

“......하, 하하하......뭐야 정말, 어린애 같아.”

“고맙지?”

“와, 와아- 진짜 기쁘다. 생일 선물을 미리 받은 기분이야. 배려심 깊은 에나낭 님께 감사드려요.”

“하여간에.”

펜을 돌려두고는 에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바보 같은 주제로 어린애들마냥 장난을 주고받은 게 머쓱한 건지 소녀는 뺨을 긁적였다. 술을 마신 이후로 계속해서 발갛게 달아있는 얼굴은 이제와서 좀 더 부끄러워하고 있는지는 티가 나지 않았다. 손가락에 붙은 소원권을 들여다보다가 미즈키는 그를 자신의 가슴께에 붙였다. 아까부터 뛰고 있는 심장과 가깝게.

“꼭 써야해. 만에 하나 잃어버리면 정말 화낸다?”

“응.”

“들어줄 수 있는 거만 들어주겠지만, 제대로 듣고 판단할 거니까.”

“응.”

“......그래.”

할 말은 다했다는 듯 에나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술병을 사이에 두고 어설프게 취해서 나누는 대화는 거기서 맺어진다.

남은 술을 버리지는 않았다. 마개가 꾹 닫힌 채 미즈키에게 떠넘겨졌을 뿐이다. 버리든 마시든 맘대로 해도 좋아. 선심 쓰듯 말하는 에나를 쳐다보며 미즈키는 어이없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실 생각은 당연히 없고, 그렇다고 버리기도 기분이 좀 그렇다. 결국 처분 곤란한 애물단지가 되겠지. 어디에 숨겨두는 게 좋을지부터 고민해야할 터였다.

“정말 오늘도 학교에 갈 거야?”

“가야지. 누구하고 다르게 난 출석은 꼬박꼬박 챙기는 성실한 사람이라서.”

“가서 술주정을 부릴 바엔 무단 결석하는 게 낫지 않을까.”

“술 다 깼거든. 별로 마시지도 않았고. 집 들어가서 씻고, 좀 쉬다가 학교 가면 문제없어. 아니면 뭐야. 이대로 땡땡이치고 여기에 눌러앉는 편이 좋아?”

“그렇게 말한 적은 없는데.”

“소원이라고 말하면 들어줄 수도 있어.”

미즈키의 가슴에 붙여놓은 소원권을 가리키며 에나는 장난스레 말했다. 상대가 대꾸해주지 않자 금방 뾰로통해져서 입술을 삐죽거렸지만. 재미없게. 중얼거리고는 소녀는 구두를 신었다. 이제는 안쪽이 빈 배낭을 제대로 챙겨맨다. 현관의 잠금 장치를 풀고는 미즈키는 문을 열어주었다. 그를 지나쳐서 밖으로 걸어나가고는 에나는 빙글 몸을 돌려 미즈키를 마주보았다.

“갈게.”

“조심해서 돌아가.”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에 있더라. 가끔 와도 되지?”

“으음, 경우에 따라서?”

“내가 오겠다고 하면 그 날은 거기에 경우를 맞춰. 그럼 간다.”

이미 오늘도 그랬거든요. 정말이지 에나낭은 제멋대로인 여자라니까. 말하려고 하다가 미즈키는 그냥 작게 웃어버렸다. 붙잡아줬으면, 하는 미련 따위 없다는 듯 가볍게 몸을 돌려 걸어가는 에나의 뒷모습을 지켜본다. 멀어지다가, 멀어지다가, 사라질 때까지. 미련의 감정이 자신의 안에 조금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우고는, 미즈키는 문을 닫았다.

방으로 돌아와 미즈키는 붙여뒀던 소원권을 떼어내었다. 방의 구석에 자리잡고 있는 토르소 마네킹의 가슴에 그를 붙인다. 옅은 굴곡을 그리는 몸통은 입기 원하는 옷들을 미리 걸쳐보는 일종의 분신과도 같았다. 이 집에서 거울만큼이나 자주 눈길을 주는 대상이기도 했다. 볼 때마다 떠올리게 되리라. 언젠가 에나에게 소원을 전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하아.”

나른한 숨을 내쉬며 미즈키는 침대에 몸을 맡겼다. 한 잔 안되게 마신 술의 여파가 이제서야 밀려드는 기분이었다. 잠을 부족하게 자고 일어났을 때처럼 의식과 감각이 둔해진 채로 내려앉는다. 어렵고 복잡한 건 생각하기 싫었다. 단순하고 알기 쉬운 걸 떠올리는 편이 마음 편하다. 조금 자고 일어나서, 그런 다음 별 거 아닌 이유로 에나에게 연락해도 괜찮겠지. 에나, 낮술 마신 다음 들은 수업은 어땠어? 하나도 이해 못한 거 아냐? 라든가. 에나의 반응을 상상해보고는 미즈키는 웃음을 삼켰다.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되지 못한 미숙한 아이인 걸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이를 떠올리기만 하여도 이렇게나 혼자 설레게 되어서는. 바보같기도 하지. 하염없이 애정을 품는 순간부터 그와의 인연은 포기할 수 없게 되어버릴 건데. 끊어질지도 모를 끈을 붙들고 매달리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미즈키는 이해하고 있다.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끈을 놓아버리는 일에 익숙해지려고 했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에나.”

작게 이름을 불러본다. 불렀어, 미즈키? 그렇게 물으며 뒤돌아보는 그 아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몽롱하게 잠겨드는 의식 속에서 미즈키는 약속받았던 백지 수표를 건넸다. 오래도 걸렸네. 그렇게 말해주며 쿡쿡 웃는 그 아이에게 가슴 속에 담아두기만 했던 말들을 꺼낸다. 아무리 길어져봤자 결국 하나의 마음을 변주해서 들려줄 뿐인 고백을. 에나. 한번 더 그 아이의 이름을 속삭이고는 미즈키는 살며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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