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 장대비의 천상변상도

프로젝트 세카이 에나 x 미즈키

“미즈키, 잠깐 여행 다녀오자.”

대화의 요령이란 발화된 말을 듣고는, 거기에 담긴 속뜻을 추정한 뒤 상황과 입장에 맞게 답하는 기교라 할 수 있겠다. 아키야마 미즈키는 생각한다. 방금 자신이 들은 여행이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일단은 유연하게 해석해본다. 오다이바 레인보우 브릿지 인근의 유명 디저트 가게에서 얼마 전 판매 개시 했다는 여름철 한정 특제 파르페- 그를 먹으러 가자는 제안을, 여행에 빗대어 말할 수도 있을까. 딱히 무엇을 살 건지 정해두지 않은 채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시부야 로드를 돌아다니는 게 낭만적으로 말해 또한 여행이려나. 혹은, 간만에 아트 트라이앵글을 순회하며 미술관에 가자는 제안인 건 아닐지. 예술 세계로의 여행이란 멋들어진 비유로.

“확인차 묻는 건데, 어떤 의미에서의 여행이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여행은 여행이지.”

“그, 그러신가요. 알기 쉽네. 갑자기 여행이라니, 어디로?”

잠깐의 침묵. 곱게 다물어진 입술이 진중함을 머금는다. 나름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보아 별 의미없이 가볍게 꺼내는 이야기는 아닐 터였다. 다만 생각하는 바를 어떤 형태로 표현하는 게 좋을지 고심하는 기색이 한껏 찌푸린 눈썹을 통해 전해진다. 단어를 고르고 고르는 신중함 끝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시노노메 에나는 입을 열었다.

“가능하면 인적 드물고, 외진 곳으로.”

조금 전보다 한층 길게 늘어지는 침묵. 미즈키의 표정 변화를 확인하고는 자신의 설명이 지나치게 간략했음을 자각했는지 에나는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혹여나 생길지도 모르는 오해를 부정하려는 모습이 다급하다. 에나,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었네. 흐린 눈을 하고서 시선을 피하는 척 행동하는 미즈키에게 그런 게 아니라며 짜증을 내다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아가씨는 테이블 아래로 상대의 발을 사정없이 꾸욱 밟았다. 그닥 아프진 않지만 아얏- 하고, 호되게 당한 척 반응해주는 게 여기서는 예의다.

시노노메 에나가 제법 명망 있는 예술 대학의 학생이 되고서 3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학교 재단의 주도로 재학생들의 작품을 모은 전시회가 연례 행사로 열린단 사실은 이제 익숙하다. 올해 열릴 전시회의 일정이 확정되었다고 발표된 건 얼마 전의 일이었다. 참가는 기본적으로 개인 자유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작품이 80년 전통의 대회랑에 걸릴 기회를 마다할 학생은 없다. 전시실은 크게 나뉘어 3 구역. 도화부터 조각, 설치 예술까지 분야에 따라 나뉘어진다. 해마다 다르게 제시되는 ‘테마’ 들이 이번에는 무엇일지, 공지가 올라온 직후 모두들 서둘러 확인했으리라.

“심상 풍경?”

“예술가로서 자신의 심상 풍경을 한 폭의 그림으로 표현하기. 알기 쉽지?”

“작년에 에나를 몇 달 동안 고생하게 만들었던 거에 비하면 이번엔 직관적으로 와닿는 주제이긴 하네. 그리는 사람마다 고유색도 한눈에 보일 거 같고. 그런데, 어째서 인적 드물고 외진 곳이야?”

“미즈키 네가 보기에도, 시노노메 에나의 예술 세계란 화려하다거나, 총천연색으로 아름답다거나, 활기 가득하다거나 하지는 않잖아. 개선문이라든지, 메이지 신궁이라든지, 에비스 가든이라든지, 사람들이 잔뜩 모여드는 명소를 참고해서야 의미없겠지. 그렇다면 아예 정반대 지점에서부터 더듬어나가는 게 어떨까, 하고.”

말하고는, 듣기에 제법 재밌는 자기 평가를 내렸다는 듯이 빙긋 미소를 짓는다. 그늘 하나 없이 맑은 기색으로 웃음짓는 에나의 얼굴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미즈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몇 년의 세월 동안 화가 지망생으로서 시노노메 에나가 걸어온 길은 장절하고도 장엄했다. 세상은 냉혹하고도 비열해서 있는 힘껏 노력하고 있는 자신을 제대로 봐주지 않는다며 울부짖던 소녀는 이를 악물고 그림을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려나갔다. 붓이 하나 부러지고, 캔버스 하나가 찢어진다. 차마 다음 화구를 집어들지 못하고 망설이던 끝에 울음을 터뜨리지만, 결국에는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낸 뒤 새로 그림을 그려나간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잖아, 란 위안과 해봤자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마음 속에서 물결을 이루었던가. ‘그래도 그려야만 한다’ 란 결론 속에 소녀는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을 유일한 수단을 택했다. 사용한 끝에 모가 빠져버린 붓이 모여 언덕을 이루고, 간신히 완성한 그림을 담은 캔버스가 그만의 회랑을 빈틈없이 채울 때까지.

목표로 삼은 예술 대학의 입시 시험을 앞두었을 무렵, 에나의 눈빛은 주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친구로서 시노노메 에나가 달라진 건 그리 없었다. 변함없이 달달한 간식을 좋아하고, 짓궂게 놀리는 말에는 알기 쉽게 반응하고, 친애 섞인 칭찬에는 쉬울 정도로 간단하게 배시시 웃음 짓는 얼굴이 되어버리니. 하지만 화가를 목표로 하는 지망생으로의 시노노메 에나는, 흘러간 세월 동안 많이도 바뀌었던 터였다.

합격 통지서를 받아들었던 날, 아가씨는 그간 의도적으로 피하려고 했던 자신의 아버지를 마주하였다. 마침내 이겼다고, 보란 듯이 뽐내며 그토록 고대하던 복수를 이루지는 않는다. 대신에, 에나는 하염없이 야속하게 여겼던 사람의 앞에서 작게 목례를 하였다. 아버지처럼 유명하고 성공한 화가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제가 될 수 있는 모습으로 화가가 될 거에요. 응원해달라고 하지는 않을게요. 다만 지켜봐주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물러서지 않고 또박또박 말하는 딸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너라면 뭐라도 그려낼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말하는 입은 보기 드물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고 했던가.

대학생이 되고서 3년, 시노노메 에나는 이제 어엿한 성인이다. 성년식을 올렸음에도 변하지 않은 부분은 물론 많다. 예나 지금이나 같은 집에 살고 있는 남동생과 바보 같을 정도로 사소한 문제로 다투고는 ‘넌 언제쯤 어엿하게 독립할 거냐고’ 짜증을 부려서 가족들로부터 어처구니 없단 시선을 받기도 하는 그녀다. 기분이 별로인 날에는 맥락없이 자신의 사진을 찍어 SNS에 공유하고는 반응을 즐기는 면모도 여전하다. 유명 디저트 가게의 계절 한정 메뉴? 지갑에 여유가 한층 생긴 지금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딱히 용건없이 미즈키를 불러내 물에 물탄 듯 싱거운 문답이나 주고받는 일상도 달라진 게 없다. 그럼에도, 시노노메 에나는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에나가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어른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될 때마다, 미즈키는 생경함을 느꼈다. 아마도 동경, 혹은 쓸쓸함. 한 단어로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는 감정인 걸까. 어째서인지- 가슴이 떨려서.

“그래서, 시간 괜찮지?”

“아니, 잠깐. 전혀 괜찮지 않거든요. 곧 런웨이 콘테스트라고. 개인 과제도 아니라서 맡은 부분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간 광역으로 어마어마하게 민폐라 곤란해.”

“뭐야, 디자인 잡는다고 한참 전부터 호들갑 떨었으면서, 아직 끝내지 못한 거니?”

“디자인만 하고 끝나는 게 아니거든. 과제 하나로 한참 끌게 되는 건 에나 쪽도 마찬가지잖아. 아직 여유가 없는 건 아닌데, 여행은 아무래도 아웃이야. 무리무리, 저얼대 무리.”

“흐응......”

두 팔을 교차해 X자를 만들면서 완강하게 고개를 흔드는 미즈키를 불퉁하게 노려보다가, 에나는 자신이 주문했던 카라멜 마키아토를 한 모금 마셨다. 마시고는, 한숨. 나직하게 내뻗는 숨이 얇다. 곁으로 살며시 돌리는 시선이 쓸쓸하게 보인다.

“그럼 어쩔 수 없지. 혼자 다녀오는 수밖에.”

“뭐? 진심으로 하는 말?”

인적 드물고 외진 곳을 찾아갈 거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 장소로 혼자 여행이라니 질나쁜 농담도 되지 않는다. 부탁할만한 사람이 주변에 나 밖에 없는 건 아닐 거잖아. 대학 친구도 있을 거고, 달리 여유 있는 사람을 구해서 동행하면 될 건데. 조언마냥 덧붙이려다가, 미즈키는 스스로의 혀를 붙들었다. 무책임하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일까. 그녀가 미즈키 자신은 알지도 못하는, 혹은 이미 알고 있는 누군가와 단둘이서 여행을 떠난다면.

고장난 영사기가 멋대로 돌아가듯 머리 속에 껄끄러운 상상이 늘어뜨려진 필름처럼 나열된다. 두 사람 분의 기차표를 끊는다. 두 사람 분의 식사를 주문한다. 두 사람 분의 숙소를 예약한다. 목적지에 도착한 에나가 상대와 기념 사진을 찍는다. 남겨진 사진은 영원히 추억으로 장식된다. 상상 속의 에나가 누군가를 향해 다정하게 말한다. 너하고 오길 잘했어.

“......당일치기로 가능한 일정이야?”

그렇게 묻는 목소리에 은은하게 노기가 묻어나고 있음을 미즈키는 자각했다. 아무래도 좋다는 듯 가볍고 장난스런 태도를 어째서인지 지금은 꾸며낼 수 없었다. 겉으로는 티를 내기 싫어서, 보이지 않게 주먹을 꾸욱 움켜쥔다. 무리무리, 절대 무리. 내게도 해야할 일이 있으니까. 새침하다 싶은 태도로 말했으면서- 자신이 마음 속 저울에 관련된 사안들을 하나하나 올리고 무게를 달아보기 시작했음을 미즈키는, 또한 자각했다.

“어디, 최소한 1박 2일 일정이겠네.”

저울의 반대편에 올라선 그녀가 답한다. 시선이 마주치자, 생긋 웃어보인다. 저울의 눈금이 크게 흔들린다. 괜찮지? 이틀 정도는. 이런 부탁, 아무에게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숨기는 패는 없다는 듯 쾌활한 어조로 던지는 말이 한없이 달콤하다. 미즈키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껏 모아온 무게추 중 그 무엇도 그녀의 존재만큼 무게를 가지지는 못할 거라고.

무게를 잴 수 없는 감정에 저울을 들이미는 건 괜한 억지 밖에 되지 않는다.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고개를 끄덕였는지 미즈키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시점이든, 고개를 끄덕이긴 했겠지만.

그저 인적 뜸한 쓸쓸한 장소를 답사하는 게 목표가 아니다. 예술적 감각을 끌어낼 수 있을 독특한 분위기를 갖춘 곳이어야만 하겠지. 미즈키에게 여행 권유를 하기 전부터 에나는 이미 후보지들을 점찍어둔 모양이었다. 여름날 눈 내리는 풍경이 판화로 남았다는 시즈오카의 어느 촌락, 호쿠사이가 파도를 그렸다는 카나가와의 외진 해안, 과거 위세가 대단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영락하여 지역 주민들만이 찾는다는 오야마 산의 신사까지.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 후보지의 수를 줄인다. 미즈키가 다음 달까지의 스케쥴을 확인하고 주변에 연락을 돌려서 간신히 ‘주말 끼고 1박 2일 여행은 가능할’ 여유를 만들어낸 참이었다. 그보다 일정이 더 걸릴 듯 싶은 장소는 제외한다. 근처 경유지에 굉장한 관광 명소가 있어 괜히 숙박비 포함 여행 경비가 비싸질 듯 싶은 장소도 제외한다. 어찌저찌 목적지를 정한 다음, 에나는 어딘가 즐거운 기색으로 말을 덧붙였다. 기차표는 내가 끊어줄게. 고맙게 생각해.

아니, 애시당초 난 에나가 멋대로 정한 여행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입장이라구? 그런 식으로 생색내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떠올린 말을 괜히 꺼내지는 않고, 미즈키는 먼저 자리를 뜨는 에나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하루 잘 보내. 응, 또 연락할게. 웃으며 말하며 손을 살래살래 흔들다가, 흔들다가, 흔들다가......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다음에야 천천히 팔을 내린다.

예정에 없던 여행 계획이 생겨버린 날, 귀가 직후 미즈키는 옷장 앞에 섰다. 지금의 학과로 진학한 이후 ‘예쁘고 귀여운 옷’ 은 다소 질려버릴 지경으로 봐왔던 터였다. 그럼에도 한참 동안 어떤 옷이 어울릴지, 거울 앞에서 혼자만의 런웨이를 거닐게 된다. 어떤 옷이든 저라면 충분히 귀엽게 소화시킬 자신이 있어서요. 과제로 제출한 디자인에 대해 다소 무리수가 있지 않겠느냐는 반응이 돌아올 때마다 스스럼없이 대답했던 미즈키였다. 여름 여행을 떠올리며 얇은 옷을 가슴 앞에 대어보는 지금은, 약간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에나와 여행을 떠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요이사키 카나데, 아사히나 마후유와 함께, 나이트코드의 멤버 넷이서 여행을 다닌 기록이 이제는 제법 되었다. 장기간에 걸쳐 멀리 떠나는 여행은 아직 시도해본 적이 없긴 하지만, 다들 대학 졸업을 앞두게 되었을 무렵에 한번쯤 이야기를 꺼내봐도 좋겠지. 그 외에도, 남동생 군을 껴서 남매와 함께 캠핑을 갔던 적도 있었다. 이틀 간의 일정 동안 자신의 누나에게 잔뜩 시달린 시노노메 아키토가 돌아오는 길에 성가시단 표정을 하고서 미즈키 자신에게 던졌던 말도 기억한다. 다음 번엔 아키야마 네가 저 녀석을 데리고 둘이 알아서 다녀오든가 하라고 했던가.

“......어라.”

......그러고 보니, 둘이서만 여행을 갔던 적은 여태껏 없었지 않았나.

옷을 대어보고 있던 손이 아래로 슬쩍 내려간다. 거울 속 자신의 시선이 문득 신경쓰여 미즈키는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에나와는 ‘여행 같이 가자’ 는 제안 정도는 당연히 꺼낼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에나 쪽도 마찬가지다. 어쩜 그리 자연스럽게 ‘여행 가자’ 고 이야기를 꺼낸 걸까. 도통 거리감을 알 수 없는 관계네, 우리들. 생각하고는, 미즈키는 희미하게 웃었다.


돌발적으로 잡힌 여행 계획이었다. ‘둘이서만 여행을 간다’ 는 사실을 길게 의식할 여유도 없이 약속한 날이 찾아오고 만다. 도쿄는 맑겠지만 지역에 따라서 비가 내릴지도 모른다는 예보에 미즈키는 분홍색 접이식 작은 우산을 챙겼다. 집을 나서기 전 현관의 거울 앞에서 마지막으로 차림새를 확인한다. 화려하지는 않은 심플한 배꽃 무늬 헤어 리본, 옷감 얇은 린넨 시스루 블라우스, 제법 길지만 통풍이 잘되는 여름 치마, 이번에 처음으로 개시하는 패션 운동화. 이 정도면 적당하다. 딱히 의식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미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차분하게, 언제나 그랬듯 가볍고 쾌활하게,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기차역으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 주문을 외우듯 되뇐다. 혼자 의식한 끝에 잔뜩 긴장하여 여행 도중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진 않았다. 에나가 자신의 예술 세계를 발견하고 한층 확장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었다. 아키야마 미즈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동행으로 곁을 지켜주는 것. 무엇이든 간에 착각해서는 곤란하다. 반복해서 그를 생각하다가, 약속 장소에서 익숙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미즈키는 총총히 걸음을 옮겼다.

“야호, 좋은 아침!”

“늦었어.”

“어라? 시간 엄수했는데?”

“나보다 늦었잖아. 바보.”

들여다보고 있던 휴대폰을 넣고는, 미즈키에게로 몸을 돌리며 에나는 짐짓 뾰족하게 말했다. 약속했던 기차표를 한 장 내민다. 역시 에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태연한 느낌이네. 표를 받아들며 미즈키는 생각했다. 민소매 나시에 팔에 걸치는 얇은 겉옷, 활동적인 반바지 차림. 계절에도 맞고 여행 목적에도 부합하는 깔끔한 코디. 오늘 찾을 장소를 생각한다면 이쪽이 맞다. 그렇긴 한데.

“예쁘게 입고 나왔네.”

“그게, 일종의 직업병이라고 할까......”

“뭐 어때. 잘 어울려.”

가볍게 평하고는 에나는 곁에 내려두었던 배낭을 챙겨들었다. 앞서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미즈키는 급히 따라붙었다.

목적지는 그리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사찰. 향하는 길목에 길게 뻗은 계단과 규모는 크지만 허름한 관문 누각이 있다고 한다. 인터넷 상의 정보에 따르면 한때 영화 나생문의 촬영지로 거론되기도 했다는 모양이었다. 물론, 최종적으로 촬영지가 되지 못했기에 인적 뜸하고 그리 유명하지 않은 곳으로 남아버린 거겠지만. 답사 후기담도 그리 찾아볼 수 없는 검색창을 들여다보다가, 미즈키는 입을 열었다.

“이제와서지만, 굳이 현실에서 이런 곳을 찾아갈 필요가 있어?”

“응?”

“그러니까, 있잖아. 우리들만의 비밀.”

창문 바깥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멍하게 바라보던 에나가 시선을 돌리자, 미즈키는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고 살짝 흔들어보였다. 말하고자 하는 걸 금방 이해하고는 에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작게 내젓고는 다시 창밖으로 눈길을 향한다. 출발하던 때에 비해 흐려진 하늘 아래로 넓게 펼쳐진 들판이 흘러간다.

“그건 편법이지. 고민없이 답안지를 그대로 베껴쓰는 기분은 느끼고 싶지 않아.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결론에 나다움이 있지도 않을 거고. 참고로 하는 거라면 지금까지 봐온 걸로도 충분해.”

“그렇구나.”

“그리고 이제와서, 딱히 외롭고 쓸쓸한 곳도 아니지 않을까. 미즈키 네가 가져다둔 물건들만 해도 산을 이루고 있을 건데. 극과 극의 예시로 삼기엔 별로야.”

게다가. 무언가 말을 덧붙이려다 생각이 바뀐 듯 입을 다문다. 어딘가 느긋하게 느껴지는 표정으로 풍경을 감상하는 에나를 바라보다가 미즈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로 이어질 내용이 무엇이었을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예의 심상 세계의 주인도 시간이 흐른 지금, 그 시절과 비교해 여러 면에서 바뀌었으니.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장소는 그럴만한 위치에 있는 법이다. 도쿄에서 기차를 타고 3시간, 거기에서 띄엄띄엄 운행하는 버스를 타고 적어도 40분, 그 이후에는 두 다리로 걸어서 한참. 기차역에 도착한 다음, 갈아탈 버스가 들어오기까지 시간이 남아 둘은 인근 식당에서 가볍게 식사를 했다. 기차에서 내릴 때부터 습도 높게 느껴지던 공기는 우동을 먹고 나온 직후엔 한층 무겁게 느껴졌다. 에나가 휴대폰으로 예약해둔 숙소 정보를 확인하는 동안, 미즈키는 식당 옆에 붙어있는 구멍가게의 가판대를 살폈다. 입가심할 게 필요하냔 말에 눈길도 주지 않고 대충 고개를 내젓는 에나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미즈키는 자기 몫의 막대사탕을 하나 샀다. 체리소다맛 롤리팝으로.

목가적인 풍경으로 가득 들어찬 장소였다. 낡아서 흔들리는 버스에서는 먼지와 기름내가 났고, 그런 버스가 달리는 길은 투박하게 세워진 목제 울타리가 가드레일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굳이 목적지인 사찰까지 도달하지 않아도 예술적 자극이라 할만한 감성으로 가득찬 시골이었다. 도쿄의 대로를 달리는 버스와 비교해 크기가 한참 작은 버스에서 내린 뒤, 눈앞에 나타난 광경에 미즈키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버스가 정차한다는 걸 알리는 철제 안내판 뒤로 벤치 하나가 간신히 들어가는 정류소가 있었다. 목재와 슬레이트판으로 지어진 버스 정류장은 그야말로 소박했다. 뒤로는 아오키가하라 수해처럼 깊게 펼쳐진 숲이 있어서, 목제 정류장은 세계의 끝자락에 위치한 쉼터처럼 보였다. 토토로의 숲에 있다는 낡은 버스 정류장이 이와 같은 느낌인 걸지도 모른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가야하네.”

“게다가 중간에 나생문에 나올 법한 계단이 있다고 했지.”

“하아.”

막막하다는 듯 한숨짓는 에나의 태도에 미즈키는 묘한 즐거움을 느꼈다. 괜히 예술가 느낌나는 체험을 해보겠답시고 사서 고생을 하게 되었단 후회가 생기기 시작했더라도 에나의 성격상 대놓고 말하진 못하겠지. 어쨌든 오기로라도 목표로 한 사찰의 문턱은 밟아야만 하는 거다. 우리들에겐 역시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두근거림 속에 흘러가는 여행보단, 엉망진창 의미를 알 수 없는 모험이 어울리는 걸지도 몰라. 그 옛날 막무가내로 미스터리 투어를 갔던 때처럼.

숲 사이로 뻗은 오솔길은 인적이 드문 곳치고는 그래도 나름 정비된 상태였다. 아무렇게나 뻗어나온 풀이 다리를 마구 찌르는 일도,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얼굴에 들러붙는 일도 없다. 습기가 느껴지기는 해도 숲의 공기는 푸르름이 느껴지게끔 맑았다. 나무들이 높게 자라기는 했으나 햇빛을 가리지는 않는다. 쾌청하게 맑은 날씨였다면 잘 갖춰진 휴양림을 걷는 기분이 들었을지도.

예의 계단은 생각보다 금방 등장했다. 올려다보면 멀리 계단 끝에 사찰로 이어지는 누각 관문이 보였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이긴 사람이 층계 한 칸씩 올라가자는 미즈키의 제안을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란 말로 일축하고는, 에나는 길게 뻗은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에나의 뒤를 따라가며 미즈키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숲 어디선가 휘파람에 화답하듯 산비둘기 우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 중턱에서 한 차례 휴식. 뭔가 예술적인 깨달음이 오는 게 있냐고 장난스럽게 묻는 미즈키를 조용히 흘겨볼 뿐 에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직하게 숨을 고른다. 이 정도라면 시노노메 에나 기준 한 달치 운동은 될 거니 한동안 다이어트 걱정 없이 이것저것 먹어도 되겠다는 깐족거림은 아무래도 짜증났는지, 아가씨는 건방진 녀석의 귓불을 붙들고 꽈악 잡아당겼다. 항복하겠다며 파닥대는 손짓이나 괜히 무섭게 쏘아보는 눈빛이나 엇비슷하게 어린애들 장난의 범주를 벗어나진 않는다.

“도착!”

계단의 마지막 단을 미즈키는 폴짝 뛰듯 올라섰다. 한 걸음 뒤로 상당히 지친 얼굴의 에나가 따라서 올라온다. 비바람에 붉은 칠이 벗겨진 낡은 관문 안으로 수호신상들이 계단을 올라선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폴짝거리며 행동하는 게 경망스럽게 보였을까. 딱히 신을 믿지는 않지만 세상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신앙을 무시할 생각은 없어서, 관문을 통과하는 동안 미즈키는 의식적으로 걸음걸이를 다소곳하게 하였다.

사찰은 작았고, 볼만한 구석은 딱히 없었다. 그럼에도 작은 터에 정갈하게 자리잡은 모습에서는 가지런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세월을 맞아 낡았음에도 손질되어 유지되고 있는 신당은 그만의 신성함을 품고 있었다. 호젓함과 쓸쓸함으로 이루어진 풍경을 에나가 묵상하듯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동안, 미즈키는 신당 앞의 작은 함 앞에 다가갔다. 쌀이 담긴 작은 주머니들이 놓여있었다. 약간의 시주금을 내고 대신 가호가 내려진 쌀을 조금씩 받아가는 방식인 모양이었다. 작은 목함은 텅 비어있었다. 지폐를 넣고는 미즈키는 주머니 하나를 집어들었다.

사찰 내부에 수행인들의 모습은 언뜻 보였으나, 애시당초 참배객들의 시주에만 의존해 운영되는 곳은 아닌지 모처럼 찾아온 방문객의 존재를 나서서 반기는 기색은 없었다. 장사를 하는 게 주가 되는 관광지가 아니란 점이 명확하다. 정숙하게 신을 모시는 공간. 바깥 세계와 완벽하게 유리된 듯한 분위기는 물리적 고요함을 한층 깊게 만든다. 누군가의 심상 세계가 이와 같다면, 그는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다가 미즈키는 에나를 쳐다보았다.

“아름다운 곳인데,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왠지 쓸쓸하다. 영화 촬영지로 정해졌었다면 제법 유명한 관광 명소가 되었을 건데.”

“그랬다면 지금의 분위기는 없었겠지.”

“그도 그런가.”

“그리고 딱히 유명하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잖아. 영속 불변하는 가치란 오히려 그런 지점에서 나오게 되는 걸지도 몰라.”

“......예전의 에나였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법한 말이네.”

작게 중얼거린 평을 듣고는 웃음을 터뜨린다. 응, 그러네. 확실히 그럴지도. 옛날의 나였다면 말이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에나는 미즈키를 돌아보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친다. 한때, 인정받지 못할 노력을 언제까지 해야만 하냐고 괴로워하며 한없이 눈물로 젖어들던 갈색 눈동자는, 지금 이 순간 맑은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예전엔, 그랬었지. 신기하네. 몇 년 되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옛날처럼 느껴지는 걸까.”

“그런 거치곤 작년에도 전시회 직전엔 온갖 말을 했었지만. 이걸 왜 몰라주냐고, 관짝에 들어간 다음에야 알아봐줄 거냐고, 생전 안 마시던 술까지 입에 대고는 잔뜩 취해선 아무 잘못 없는 날 붙들고 한참을 소리치기도 했던 건 기억나려나.”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거든? 마감 앞두고 죽는 소리 내는 건 다를 거 하나 없이 너도 똑같으면서. 화가란 평생에 걸쳐 자신을 불안하게 만드는 그 묵직한 감정을 마주하며 나아가야만 하는 거라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즈키 넌 그 기분을 이해해줘야지.”

“과연 에나 대선생님! 연륜이 느껴지는 말씀이에요.”

“하여간에, 진지하게 말하는데 곧바로 장난치기나 하고.”

눈을 흘기고는, 에나는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입술은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다. 그녀와 이런 식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게 즐거워 미즈키 또한 따라서 작게 웃는다. 그렇게 잠시 동안의 공백. 살짝 들뜬 분위기가 사찰의 경건함 속에 고요히 가라앉을 정도의 시간이 흐른다. 에나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 아버지랑 이래저래 화해하고 말이지, 한 수 배우러 그 사람의 아틀리에에 갔을 때였어. 자기가 무명이었던 시절에 그렸던 그림을 꺼내서 보여주더라고. 지금이야 자기 이름을 걸고 그림을 내놓으면 여기저기서 부끄러울 지경으로 칭찬부터 쏟아내지만, 그때에 그렸던 그림은 어디에서도 좋은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대. 선이 거칠다느니, 색이 번졌다느니, 트집잡는 느낌으로 험담만 하면서. 그렇지만, 스스로는 여전히 그때의 그림을 좋아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어. 그 시절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지금에 이르지 못했을 거라고. 으음, 이 이야기, 이미 했었던가?”

“아니, 처음 들어.”

미즈키의 대답에 에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며시 감았다가 뜨는 갈색 눈동자에 조금 전까지의 웃음기 대신 차분함이 감돌았다.

“내 눈으로 보기에도 못 그린 그림은 아니었어. 단지, 유독 자기색이 강한 그림이라고 할까. 남들은 그리 알아주지 않는, 자기만의 색이 강한 그림. 다른 사람들에겐 유명 화가의 옛 시절 실패작으로 여겨질 그 그림을, 아버지는 언제까지나 보관하고 있었던 거지. 그게 그 사람의 기준점이었던 거야.”

“기준점......”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결을 읽어내서, 보다 많이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줄 아는 눈치가 어쩔 수 없이 필요한 거겠지. 하지만 동시에,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더라도 포기해서는 안될 자신만의 색이 있는 거니까. 누가 좋게 말해주기만 하면 기준도 없이 좀 더 칭찬받겠다고 남의 의견에 따르기 급급했던 그 시절의 나를 향해 아버지가 냉담하게 대했던 거도, 그 때문이었을 거야. 그렇다곤 해도 말을 그런 식으로 한 건 지금 생각해도 너무하다고 생각하지만. 꽉 막힌 답답한 사람 같으니.”

“......”

“뭐, 이렇게 말은 하지만 아직은 화가로서 내 기준점이 뭔지, 정확히 이거다! 하고 내세우진 못하겠어. 이번에 이렇게 자아찾기 여행마냥 오려고 했던 거도, 어쩌면 초조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래도, 찾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 남들이 보기에 화려하고 반짝반짝하진 않을지 몰라도, 제대로 내 기준점이 되어줄 작품을.”

말을 마치고는, 답지않게 무게감 있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는 듯 아가씨는 가볍게 웃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미즈키는 작게 숨을 들이삼켰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지 못해 울먹이며 헤매던 여자아이는 이제 자기가 믿는 길을 찾아내 나아갈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누군가를 모방하는 걸로 손쉽게 베껴내지 않은, 제대로 고민한 끝에 완성해낸 답안지를 품에 안고서 활짝 웃는다. 그 모습이 눈부시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솔직하고 당당한 에나. 마지막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는 에나.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수록, 동경이란 단어 하나에 밀어넣기에는 너무나 비좁을 감정이 가슴을 가득 채우게 되어버려서.

질투로 번지지 못할 선망의 감정이란, 결국에는 ‘좋아함’ 이 되어버린다. 시시할 정도로 당연한 이야기. 기본적인 감정의 사칙연산. 물론, 알고 있었지만.

“그래서- 고마워, 미즈키.”

“......응?”

“여러 모로 억지를 써서 여행가자고 했는데, 일정까지 맞춰가며 따라와줘서. 무리한 요구를 했다고 자각은 하고 있어.”

“뭐야, 새삼스럽게. 그거야 어쩔 수 없지. 언제나 그랬잖아. 에나는 다소, 아니 상당히- 귀찮은 구석이 있는 여자니까. 나야 적응해서 익숙해졌지만.”

“완전히 부정하진 않겠는데 말이 좀 그렇다? 너 말야, 조금은 기분 맞춰주려고 하면 순식간에 기어오르고.”

얄미워서 그냥 둘 수가 없다는 듯 뺨을 손가락으로 붙들고는 꾸욱 잡아당긴다. 하나도 아프지 않지만 아야얏- 호되게 당하는 척 소리를 내는 게, 역시 여기서는 나름의 예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이런 어린애 장난을 나눌 수 있는 관계란, 소중한 거겠지. 힘껏 아픈 척 해야하는 와중임에도 미즈키는 반쯤 웃어버리고 말았다. 이도저도 아닌 어중간한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건방진 말을 해서 도중에 끊어졌잖아. 사람이 모처럼 좋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죄송합니다. 경청하겠습니다.”

“어쨌든, 이번 일 외에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도 많은 부분에서 미즈키 덕분이었다고 생각해. 좋아하는 게 있다면 누가 뭐라고 하든 포기하지 않고 관철하기. 은근히 묘한 지점에서 고집 꺾지 않고 자기주장을 하는 면, 가까이 지내다보니 영향받게 되었거든.”

“그건, 에나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고집불통......”

“그러니까 내 말은.”

톡. 이마가 젖어드는 감각에 말을 멈춘다. 갑작스런 물기에 두 사람은 동시에 하늘을 쳐다보았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실틈처럼 보이는 하늘은 이미 완연한 먹색이었다. 툭. 발치에 물방울 튀는 소리가 깊게 누른 건반음처럼 선명하다. 투둑. 공기 중의 물내음이 한층 짙어진다. 짧은 간격으로 튀어오르며 화음을 이루는 빗소리는 알기 쉬운 전조.

두 사람이 길게 뻗은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다급한 손길로 미즈키는 챙겨왔던 접이식 우산을 펼쳤다. 분홍색 우산막 아래로 만들어지는 공간은 손바닥만해서, 거친 장대비 속에서 옷이 어깨부터 젖어드는 걸 막아주지는 못했다. 옷이 젖는다고 하여 좁은 산길을 뛰어서 내려갈 수는 없는 일이다. 좁은 우산 아래에서 서로 어깨를 맞댄 채로, 에나와 미즈키는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갔다.

“하아, 잔뜩 젖었네.”

숲의 입구에, 예의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한 차례 물에 빠졌다가 건져진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미덥지 못한 슬레이트판 지붕이 만들어주는 피난처 아래에서, 반쯤 젖은 손수건으로 머리카락을 닦고 옷의 물기를 짜낸다. 이래서야 갈아입을 옷을 넣어둔 가방도 무사하진 못할 일이었다. 각자 배낭을 확인해보고는,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에나가 한숨을 폭 내쉬고, 미즈키는 작게 웃어버린다.

“우산 챙겨올 생각을 전혀 못했어. 아침까지만 해도 쨍쨍 맑았는데.”

“혹시나 싶어 챙겨오길 잘했다. 뭐, 그래도 다 젖어버리긴 했지만.”

“여기, 버스도 가끔 온다고 하지 않았었나.”

정거장 안쪽 벽면에 엉성하게 코팅되어 붙어있는 시간표를 확인하고는, 에나는 질린단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다음 버스가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만 하는지 물어볼 엄두가 차마 나지 않아서, 미즈키는 말을 아꼈다. 팔을 내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세찬 소리를 내며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빗방울 튀는 소리가 겹치고 겹치고 겹친 끝에, 오히려 고요하게 가라앉게 되어버린다. 후두둑- 하는 소리가 묵음으로 잠겨드는 공간에서, 둘은 나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장대비 쏟아지는 풍경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풍경이라고 할까, 빗줄기에 가려서 눈앞의 도로도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하얀 빗줄기 가림막 삼아 창을 닫으면, 들리는 건 그대의 숨소리- 라고 했던가. 빗소리로 단절된 세계에 자신들만이 있다. 언젠가 버스가 오기 전까지는 외따로 떨어진 채 표류하는 지상의 섬. 한순간 상황을 의식하게 되어 미즈키는 앉은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래놓고는, 의식했다는 사실을 곁에 앉은 에나가 알아차릴까 싶어 바로잡았던 자세를 부러 느슨하게 만든다.

태연함이란 위장하려고 할수록 흐트러지는 법이다. 고요하던 사찰의 풍경 속에서 고맙다고 말하던 에나의 모습을 떠올린다. 언제나 새침한 기색이 감도는, 그렇지만 친애하는 이를 마주했을 때는 더없이 다정하게 웃어보일 줄 아는 그녀.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를 채워서, 혹여나 그게 들릴까 싶어 미즈키는 에나가 있는 반대편으로 조금 움직였다. 애시당초 작은 나무 벤치 위에서, 고작 한뼘도 되지 않을 거리를.

배차 간격이 어마어마한 시골 버스가 언제쯤 장대비를 가르고 도착할지 알 수 없다. 한참의 시간 동안 태연하게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생각하다가 미즈키는 가방에서 막대사탕을 꺼냈다. 체리소다맛 롤리팝. 입가심을 하겠다며 샀던 물건이었다. 이거라도 물고 있는다면 다소 차분해질 수 있을지도. 포장지를 벗겨낸 뒤 미즈키는 둥근 사탕을 입에 넣었다. 비냄새에 감각이 예민해진 걸까. 찐득한 달달함이 혓바닥 가득 퍼졌다.

“나도 줘.”

“없거든? 에나 꺼도 살까 물었을 때 필요없다며.”

“내가 언제.”

“어쨌든 하나 밖에 없어.”

“그럼 그거 하나로 나눠먹으면 되지. 쪼잔하게.”

어이없어 숨을 되삼키는 소리를 반사적으로 흘린다. 짐짓 흘겨보는 눈빛을 이쪽으로 향하는 에나를 돌아보고는 미즈키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롤리팝이라는 건 콩 한쪽이 아니다. 쪼개어서 갈라먹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이다. 이미 입안에 들어간, 타액이 묻어버린 사탕인데. 비를 맞아 지친 에나가 살짝 심술을 부리는 거니까. 뾰로통해져서, 먹던 막대사탕을 빼내 손에 들고 미즈키는 낮게 꽁알거렸다.

“무리라는 거 에나도 알잖아.”

“왜? 간접 키스가 되어서?”

빗소리가 굵어진다. 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미즈키는 입술을 달싹였다. 간접 키스라는 건 도대체 어떤 개념이었지. 대놓고 말하기에는, 분명 말도 못하게 부끄러운 거였는데. 명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 어깨를 통해 온기를 느낀다. 좁다란 피난소에 간신히 들어갈만한 작고 볼품없는 나무 벤치에, 서로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가깝게. 소리없이 다가와서는, 조금 더 가까이.

손에 힘이 풀려서, 들고 있던 막대를 놓쳐버린다. 바닥에 떨어진 사탕이 깨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쏟아지는 비에 살갗이 젖어, 감각 또한 예민해진 걸까. 입술에 닿는 따스함이 뜨겁게 느껴졌다. 겁쟁이가 뒤로 도망칠 수 없게끔 블라우스의 옷깃을 꾸욱 붙든 손이 따뜻하다. 물러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받아들인다. 입술과 입술이 부드럽게 스쳐서, 그러다가 차츰 맞닿아서.

좋은 향이 피어오른다. 체리향, 물빛 내음, 풀 냄새, 살짝 흘러내린 눈물, 이름 모를 꽃의 향기, 그보다 훨씬 짙고 다정한 체취. 약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몸을 안쪽부터 떨리게 만든다. 찰나란 의식에 새겨진 순간부터 영원이 되는 걸까. 쏟아지는 장대비가 흐르는 먹물이 되어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으로 차오르는 감정을 기록한다. 너를 제외한 만물이 묵음이 되어서, 짧게 차오르는 숨소리만이 의미를 가지고.

“......둘이서만 여행 오는 사이잖아, 이제.”

바보야. 귓가에 작게 속삭이는 말에 답할 말은 여전히 떠올리지 못한다. 수긍하는 침묵 또한 답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며, 미즈키는 살며시 기대어오는 이를 끌어안았다. 축축하게 젖은 옷을 통해 전달되는 체온이 조금도 불쾌하지 않았다.

쏟아지는 비는 그칠 기미가 없었다. 두 번째 입맞춤은, 첫 번째보다는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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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근하는 너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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