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nade In Miyajoland

프로젝트 세카이 마후유 x 카나데

1.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실로폰 건반 두드리듯 울린다. 장마가 시작되기에 앞서 빗물받이 배수관을 한 차례 정비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하였다. 배수관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처마 아래로 뻗은 빗물길이 비스듬하게 설치된 걸지도 모른다. 기울어져서 높이가 달라진 이음매마다 빗물이 고이고, 아래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들은 각기 다른 위치 에너지를 가진 채 툭 뻗어나온 알루미늄 창틀 덮개 위로 튀어오르는 거다. 떨어지는 거리가 짧은 지점에서는 톡, 그보다 높게 떨어진 지점으로부터는 투욱. 그렇게 무게감 다른 소리들이 화음을 이루고.

비 내리는 날은 도서실에서 공부하기 좋다는 이야기를 주변 애들은 종종 꺼내곤 했다. 어지러운 듯 싶으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리는 빗방울 소리가 집중력을 높여준다나? 그랬던 것치고는 오늘 도서실에 자리를 잡은 학생은 거의 없어보이지만. 약간 이른 감이 있기는 해도, 이제 슬슬 중간고사를 염두에 둬야만 하는 시기였다. 평소에도 공부해두기는 하지만,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시험 공부를 시작하는 거야. 그렇게 결정을 내린 아사히나 마후유와는 달리,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직까지는 아슬아슬한 유예를 두고 싶은 모양이었다. 뭐, 경쟁자는 없을수록 좋은 법. 도서실이 학구열 넘치는 학생들로 붐비는 편보다는, 쓸쓸하게 비어있는 편이 이용하기에도 편하다.

후두둑, 후두둑, 톡톡. 난간과 유리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를 배경으로 삼아 마후유는 현대 문학과 고전을 시험 범위까지 쭉 훑어보려고 하였다. 문학과 고전은 아가씨에게 있어 나름 특기 과목. 수업 중에도 난해하게 막히는 부분이 생기는 과목은 아니었다. 필요한 순간에 집중력을 발휘할 줄 아는 마후유라면 중간에 손이 멈출 일은 딱히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교과서를 5페이지도 넘기지 못한 채 마후유는 시선을 돌렸다.

“......”

마후유의 집중력이 바닥난 건 아니다. 그보다는, 함께하고 있는 이의 집중력이 다른 방향으로 옮겨간 거라고 말해야만 하겠지. 도서실의 원목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맞은 편에 앉아있는 아이. 일단은 펼쳐두었던 교과서는 아까 전부터 한 장도 넘어가지 않았다. 시선은 이미 교과서가 아닌 창문 쪽을 향한 상태. 고개를 끄덕이는 몸짓에서는 운율감이 느껴진다. 소리없는 흥얼거림을 읽게 되는 리듬은, 빗방울 소리에 영향을 받은 거겠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단정하게 쓸어내린 하얀색 머리카락이 찰랑찰랑 흔들린다.

“카나데.”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면,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언뜻 보이는 옆얼굴은 느슨하게 풀어진 상태에, 청아한 푸른빛 눈동자는 이미 몽상에 잠겨있다. 자신들 외에는 다른 사람이라고는 입구 쪽 데스크에 앉아있는 도서부원 한 명이 전부인 텅 빈 도서실에서, 빗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전당에서 어떤 곡을 상상하여 듣고 있는 걸까. 빗방울 연탄곡 제 2 악장, 작곡가 요이사키 카나데, 연주자 요이사키 카나데, 청중 또한 요이사키 카나데인 연주회, 라든가. 실없는 생각을 떠올렸다가 마후유는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언제나 붙어서 다니다보니 이쪽도 영향을 받아버리는 걸지도 모른다.

미야마스자카 여학원에 재학 중인 요이사키 카나데는, 아무래도 동급생이자 절친인 아사히나 마후유만큼의 우등생은 아닌 편이다. 학업에 뜻이 없는 편은 아니고, 공부할 능력과 요령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틈만 나면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버린단 점이 문제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청각적 자극들이 소녀로 하여금 새로운 곡조를 떠올리게 만드는 기폭제로 작용하였다. 여름날 산들바람이 스쳐간 직후의 잔향, 체육 수업을 맞이해 운동장을 달리며 여자애들이 맑게 터뜨리는 웃음소리, 수업 중 필기가 진행되는 동안 분필이 칠판에 맞닿으며 내는 또각또각 끊어지는 소리까지. 어느 과목의 필기 노트였던 간에 카나데의 손에서는 곧바로 음계를 표시하는 작곡 노트가 되어버리니, 음악을 제외한 과목에서 성적이 우수하게 나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애시당초 시험 공부를 같이 하자고 말을 꺼낸 게 카나데 쪽이었던 터였다. 수업 중간중간 몽상에 빠질 때마다 놓쳐버린 필기가 제법 되어서, 비어있는 부분이 나올 때마다 마후유에게 확인을 구하고 도움을 받는다는 게 원래의 목표였다. 이 이상 성적이 떨어지면 아무리 관대한 편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엄마도 걱정하실지 몰라. 부탁해, 마후유. 반쯤 울먹이는 얼굴로 두 손을 모으고 간청하는 카나데를 마주하고 마후유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네가 그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난 어쩔 수가 없게 되어버리니. 그런 생각을 하며.

그랬었는데, 역시 이렇게 되어버리는 거다. 감정을 내색하는 일이 드문 마후유라고는 해도,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뾰로통한 심정이 겉으로 드러나고 만다. 입술을 삐죽하게 살짝 내민 얼굴로 마후유는 카나데를 빤히 쳐다보았다. 도끼자루 썩어가는 줄 모르고 천계의 악곡놀음에 빠져있는 몽상가에게 현실감을 깨우쳐주려면, 약간의 자극이 가해지는 방법 밖에 없다. 아사히나 마후유가 애용하는 방안은 친구의 뺨을 검지로 콕 찌르는 쪽이다. 뺨이 꾸욱 눌러지면 넋을 놓고 있던 아가씨는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며 이쪽을 쳐다보곤 하였다. 마후유. 뺨이 눌려 살짝 웅얼대는 발음으로 이름을 부르고는 부끄러워하며 눈을 깜박여대는 반응이란.

하지만 지금은 서로 간에 거리가 멀다. 도서실의 책상을 사이에 둔 상태로는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린 채 딴 생각에 빠져있는 아이의 뺨을 콕 찌르기가 애매해진다. 자리에서 일어나 곁으로 다가간다면 언제나처럼 뺨을 콕 찌를 수 있기야 하겠지. 그렇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 건 다소 귀찮다. 의자 끌리는 소리에 카나데가 제풀에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고. 그래서야 재미없으니. 현대 문학과 고전에 대한 건 잊어버린 채로 마후유는 생각에 잠겼다. 후두둑, 후두둑, 톡톡. 빗방울 소리가 잠시 작은 세계를 적막하게 채운다.

“......흐응.”

어지러운 듯 싶으면서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들리는 빗방울 소리는 뜬금없는 발상을 끌어낼 수 있을 정도로 집중력을 높여주는 걸지도 모른다. 떠올린 생각이 과연 그만한 의미가 있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마후유는 마음을 정했다. 허리를 살짝 움직여 앉은 자세를 고친 뒤, 아가씨는 발을 움직였다. 신고 있던 구두가 낡은 허물이 떨어지듯 간단하게 벗겨져 바닥에 남겨진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움직여보면, 신고 있는 스타킹 특유의 촉감이 발끝에 느껴졌다. 어쩐지 묘하게 예민해져서는.

언젠가 체육 시간에 유연성 체조를 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둘이서 짝을 지은 채로, 손바닥이 바닥에 닿지 않아 버둥거리는 카나데의 곁에서 마후유는 느긋하게 팔과 다리를 쫙 펼쳤었다. 그때의 감각과 비슷하게, 마치 신체가 무게감 없는 깃털이 된 것마냥 가볍게- 멀리. 쭉 내뻗는 다리가 책상 아래의 어둑한 공간을 뻗어나간다. 그러다가, 톡. 소녀의 발끝이 다른 소녀의 다리에 닿는다. 방심하고 있는 바로 그 순간.

“흐읏?”

“카나데.”

“마, 마후유. 놀랐잖아.”

“이번엔 어떤 곡을 상상했어? 응? 같이 공부하기로 해놓고, 날 앞에 앉혀두고는.”

웃음기 없는 말에 카나데는 뜨끔한 표정으로 어깨를 움찔거렸다. 시험 성적이 더 떨어졌다간 큰일난다며 매달린 게 어느 쪽이었는지 생각난 모양이었다. 뒤늦게 만회하려는 듯 후다닥 교과서를 한 페이지 넘기고는 공부하려는 자세를 잡은 다음, 아가씨는 풀죽은 얼굴로 친구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지 않아도 순한 눈매가 한층 아래로 쳐져서 겁이라도 먹은 듯 연약한 형태가 되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버릴 뻔 했다가, 마후유는 고개를 까닥 기울였다.

“카나데가 부탁해서, 시간을 내서 도서실로 왔던 건데.”

“그, 그러게. 열심히 할게.”

“난 굳이 시험 공부, 이렇게 따로 하진 않아도 되었고......중간고사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궁도부 활동이 있는 걸 포기하고 왔는데.”

“미, 미안.”

“약간, 손해보는 기분일지도.”

길게 뻗었던 발을 거둬들이지 않는다. 상대의 정강이에 닿았던 발끝을, 마후유는 살짝 위아래로 움직였다. 서로의 다리를 감싸고 있는 스타킹의 면이 맞물려 비벼지며 까슬한 촉감을 일으켰다. 가벼운 마찰일 뿐이었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지 카나데는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간지럽다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느낌이 기묘한 걸까. 묘한 재미를 느끼며 마후유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카나데, 구두 벗어봐.”

“여기서?”

“그래.”

어째서 구두를 벗으라는 건지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으나,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인지 카나데는 순순히 시키는 대로 구두를 벗었다. 정강이를 건드리던 발끝이 아래로 쓰윽 움직였다. 얇은 직물 너머로 형태 선명하게 움직이는 발가락이 서서히 더듬어나가듯 발목 부근을 쓰다듬는다. 카나데의 발목, 그녀의 몸 구석구석이 모두 그러하듯 가늘고 얇아서는. 발끝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촉감에 집중하며 마후유는 상상했다. 카나데의 가늘고 예쁜 다리가 쭉 뻗어있는 자태를. 얇은 검은색 스타킹에 감싸인 다리가 단정한 교복 치마 아래로 나와 지금 여기, 책상 아래로 수줍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친구가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뺨이 발갛게 물들어가는 걸로 보아 지금의 행위가 어떤 암시를 품고 있는지는 어렴풋이 깨닫고는 있는 모양이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카나데를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다시금 발끝에 힘을 실었다. 서로의 발가락이 엉키듯 마주 닿았다. 마치 손가락 씨름 같은 장난을 걸듯, 자신의 발가락으로 상대의 발가락을 가볍게 붙들었다가 놓아주기를 반복한다. 책상을 앞에 두고 앉아있는 상태에서는 보이지 않는 장소에서 이뤄지는 밀담. 부드럽게 엉켜드는 움직임에 리듬감이 생긴다. 후두둑, 후두둑, 톡톡. 그와 비슷한 박자로.

작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열에 달뜬 호흡이 흘러나와서, 그를 들은 순간 마후유는 ‘장난’ 을 멈췄다. 그저 발가락끼리 맞닿았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카나데는 옅게 몸을 떨며 깊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 세상 만물이 만들어내는 소리에 민감한 아가씨에게는, 직물과 직물이 맞닿은 채 만들어내는 진득하게 쓸리는 소리 또한 강렬한 자극이 되는 걸지도 모른다. 방금의 체험으로는 어떤 음악을 떠올렸으려나. 떠올린 곡을 허밍으로라도 들려달라고 짓궂게 말을 걸고 싶은 충동을 가라앉히고는, 마후유는 호흡을 가라앉혔다. 일단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 ‘약간 손해보는 기분’ 은 보상받고도 남았으니.

“이제 집중할 수 있겠어?”

“......응.”

고개를 끄덕이고는 카나데는 아직도 살짝 떨리고 있는 손으로 펜을 쥐었다. 반쯤 울먹이는 기색이 남은 얼굴로 교과서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정말이지, 네가 그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난 어쩔 수가 없게 되어버리니. 생각하고는, 마후유는 따라서 펜을 들어올렸다.


2.

여학교에서 유행이란 건 일주일도 가지 못하는 단명종이다. 오늘의 화젯거리가 내일에 가서는 진부한 소재가 되어버리는 건 일상다반사. 발언권 강한 누군가가 새롭게 재미난 걸 찾아냈다고 화두를 던지면 소문은 들불처럼 번져 하루도 지나지 않아 교내에서 학생들 상당수가 같은 이야기를 떠들게 되어버린다. 가볍달까, 단순하달까. 주변의 호들갑스런 잡담에 딱히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몇몇 아이들만이 외딴 섬의 등대지기마냥 무감한 얼굴로 자기 일에 집중할 뿐이다.

아사히나 마후유는 표면적으로는 급우들이 꺼내는 주제에 흥미를 보이는 듯 행동하는 편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 누구보다 등대지기의 성향에 가까운 사람이니. 무게감도 없이 날마다 휙휙 바뀌는 그들의 잡다한 관심사에 성실하게 어울려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해야할 일에만 집중해도 부족한 게 시간이었고, 인생이었다. 마후유에게는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상대들이 이래저래 많았다. 부모와 담임 선생의 기대에 맞춰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싶었고, 부활동 고문 선생의 기대에 따라 궁도에서도 괜찮은 실적을 내고 싶었다. 그리고- 소중한 친구의 마음에 맞춰, 작곡 활동 또한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었고. 그러니, ‘누가 간식을 살 건지 내기하기에 딱 적당한 게임’ 같은 게 있다며 너도나도 그를 가지고 노는 분위기가 되었다고 하여, 따라서 그에 발을 들일 이유는 아무래도 없었다.

“요즘 이게 인기인가 봐. 마후유, 같이 해볼래?”

“......”

잡다한 놀이에 관심을 가질 여유는 딱히 없다. 액정을 두드리는 걸로 올라가는 점수란 어차피 허상. ‘게임을 한다’ 는 행위에서 상당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입장이라면 경우가 다르겠지만, 자신과 같은 사람에게는 잠깐의 즐거움을 위한 시간 낭비에 불과할 뿐이겠지. 하지만, 그런 시간 낭비를 ‘너’ 와 함께하는 거라면. 상대의 제안에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마후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이란 그런 법이다. 마냥 흘려보낼 뿐이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세월에, 어떤 형태로 의미를 새겨넣을지가 중요한 거니까.

방과 후의 교실에서 당번 작업 도중에, 아사히나 마후유와 요이사키 카나데가 유행한다는 게임을 시작한 계기는 그와 같았다. 어플을 기동하기 전에 가벼운 내기를 더하는 게 어떨지 카나데 쪽에서 제안한다. 대답을 꺼내지 않고, 마후유는 잠시 동안 물끄러미 카나데를 바라보았다. 나서서 괜히 리스크를 올리는 행동은 매사 얌전한 그녀답지 않다. 눈치를 살피는 기색 없이 순둥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로 보아 딱히 내기를 통해 뭔가 요구하고 싶은 거도 아니겠지. 유행한다는 소재로 친구의 관심을 끌었단 점이 기뻐서, 그저 조금 들떴을 뿐일지도.

승자가 패자에게 뭘 요구할 건지는 나중에 정하고 일단은 해보자는 말에 수긍하여 시작된 게임은, 곧바로 요이사키 카나데의 패배로 끝나버렸다. 첫판은 연습, 그러니 무효- 라는 암묵적인 규칙에 따라 한번은 넘어가고, 본격적인 승부는 그 다음부터. 나름 진지한 표정을 짓고서 임하기는 했으나, 다시금 순식간에 카나데가 패배한다. 그 다음 판은, 요이사키 카나데의 패배. 그리고는 요이사키 카나데의 패배. 연달아 요이사키 카나데의 패배......

“7 : 0이네. 아직도 더 하고 싶어?”

“하, 항복......”

“그럼, 일곱 번이나 내기에서 진 카나데에게, 일곱 번에 걸쳐 무언가 요구해도 되는 거지? 그럴 권리가 생긴 거잖아?”

“으, 으으......”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후유는 딱히 ‘내기’ 란 형태에 걸맞는 무언가를 요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애시당초 카나데의 게임 실력이 형편없는 탓에 이겼다는 기분도 그다지 들지 않는다. 어린애 손목을 붙든 채 팔씨름을 해놓고는 내기에 이겼다며 뭔가 상당한 요구를 하기도 민망한 법이지. 그렇다고 적당히 없던 일로 퉁치고 넘어가는 쪽도 곤란하다. 만약 내기 상대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 같은 반의 약아빠진 애들이었다면 카나데의 처지는 제법 난감해졌을 게 뻔했다. 누가 내기를 하자고 보채면 딱 끊고 잘 빠져나올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고. 눈 뜨고 코 베이는 수준의 실력으로 함부로 내기에 발을 들이는 경솔함에 대해 따끔하게 교훈을 남겨줄 필요가 있는 셈이다.

“뭘 요구할 건지는, 내일 정해서 올게. 제대로 일곱 번 요구할 거니까. 알겠지, 앞으로는 내기하자는 말 쉽게 꺼내지 않는 게 좋아.”

“알겠어. 마후유가 이겼으니, 시키는 건 뭐든지 할게.”

“......그러니까.”

착해빠져서 노려지기 쉬운 주제에 경솔하게 말해버리지 말란 말이야. 순하고 상냥하다는 점이 약점이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게 세상인데. 울컥 솟아오르는 말을 목 아래로 삼키고서 마후유는 대신 떠오른 단어를 혀 위에서 굴렸다. 뭐든지, 뭐든지인가.

그날 밤, 침대에 누운 채 마후유는 잠들지 못했다. 일곱 개나 되는 소원을 무엇으로 정하면 좋을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동화책에 종종 나오는 교훈적인 이야기였다면 단순하면서도 현명함이 느껴지는 일곱 문단의 지혜가 제시되었을 터였다. 상대가 누구든 대화 몇 마디 주고받기만 하면 그대로 경계를 풀고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는 카나데의 나쁜 버릇을 그를 통해 확실히 고쳐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성격 좋고 순하다는 걸로 학급의 누구나 쉽게 카나데에게 말을 걸어버리곤 하니까. 곁에 마후유 자신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에도.

달관한 현명함을 갖춘 이야기 속 현인처럼 행동하기에는, 아사히나 마후유는 아직 어리고 미숙한 존재다.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욕망이 불순물처럼 고뇌에 스며든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다고 말하고는, 그 선언을 확정하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빙긋 웃어보이던 그 아이의 모습을 떠올린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제대로 깨닫지도 못하면서, 바보같으니라고. 가슴 부근에서 간질간질하게 열기가 번진다. 묘하게 약이 오르는 기분 같기도 하고, 기대감에 몸이 떨리는 감각 같기도 하고.

일견 쉽지만, 간단하게 해결할 수는 없을 난제를 던져주리라. 쉽사리 이행할 수 없는 조건을 걸어 당혹감을 느끼게 만들고, 망설이는 시간 동안 지난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보게끔 만드는 거다. 경계를 풀고 상대에게 선택권을 덥썩 맡기는 짓을 하면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단 걸 이번 기회에 깨닫게 해줘야지. 생각에 잠기며 아가씨는 누운 자리에서 살짝 몸을 웅크렸다.

자세가 불편했던 탓이었을까. 밤새도록 얕은 잠 속에서 같은 생각을 반복해서 떠올린 기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등교 준비를 하는 도중에도 마후유의 의식은 어딘가 다른 곳에 집중된 상태였다. 약한 졸음기 때문인지 현실감이 다소 탁해져서, 제대로 깨어있는 와중에도 몽롱해진다. 외부 세계에 대한 인지가 희박해져서, 그 공백을 아가씨 내면의 몽상이 채워버린다. 오늘의 아사히나 마후유는, 평소와는 약간 다르다. 차분하고 의젓하고 타인의 눈길을 예민하게 신경쓰는 아가씨는, 지금만큼은 날이 무뎌져서 시야가 좁아져버리고 만다. 딱 한 사람만이 눈에 들어올 정도로.

“마후유, 좋은 아침.”

“카나데.”

그랬기에 등교길에서 지난 밤부터 계속해서 떠올리던 상대와 마주친 순간, 마후유는 저도 모르게 친구의 손을 답싹 붙들었다. 갑작스런 행동에 놀라 토끼눈이 된 카나데를 바라보다가, 마후유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제 약속했던 거 기억하지?”

“으, 으응.”

“오늘 하루, 쉬는 시간마다 나한테 입맞춤 해줘. 학교 마칠 때까지 합쳐서 일곱 번.”

“뭐?”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다고 한 건, 카나데였어.”

말에는 나름의 무게가 있으니, 약속을 했다면 지켜야만 하는 법이다. 그런 요구는 아무래도 무리- 라고 생각은 하겠지만, 이쪽에서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카나데는 분명 나름의 방식으로 약속을 지키려고 하겠지. 말도 되지 않는다며 화내며 거부해도 그만이겠지만, 그런 길은 선택하지 못하는 게 요이사키 카나데란 아이니까. 고작 입술 끝이 간신히 맞닿는 버드 키스로 넘어가려고 하더라도 상관없다. 학교에서 타인의 눈길을 피해 입을 맞춰야 한단 건 어마어마하게 긴장될 수밖에 없는 일이니. 이런 경험을 한 차례 한다면 그녀도 말의 무게감에 대해 깨닫는 바가 있으리라.

“할 수 있겠어, 카나데?”


1교시는 고전. 지난 시간 배우던 ‘겐지모노가타리’ 를 이어서 공부한다. 선생의 지목에 따라 카나데의 바로 앞 자리에 앉은 아이가 일어나 지정된 부분을 낭독했다. ‘산벚꽃 닮은 그대 모습이 내게서 떠나지 않네. 내 마음을 온통 그 산에 놓아두고 왔기에.’. 무라사키노우에를 향한 연심 담긴 시구가 낭독되는 와중에도 카나데는 멍한 얼굴이었다. 고전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속삭이는 밀담 따위 지금의 그녀에겐 그리 와닿지 않는 건지.

1교시 쉬는 시간. 자리를 지키며 다음 수업에 필요한 교과서를 꺼내드는 마후유에게로 카나데는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한참 동안 주변의 아이들이 이쪽을 쳐다보는 건 아닌지 불안함 섞인 눈길로 두리번거리다가, 뭔가 비밀 이야기를 하려는 듯 손을 들어 벽을 세우고는 고개를 들이민다. 그리고는 가벼운 접촉. 엄밀히 따지자면, 그건 입맞춤이라고 하기엔 지독하게 어설펐다. 뺨으로 이어지는 입가에 아주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을 뿐. 그 순간 수업 예비종이 울려서, 이마까지 달아오른 소녀는 도망치듯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일단은 한 번으로 카운트해주는 게 맞을까, 마후유는 생각했다.

2교시는 윤리. 칠판에 고대 서양 철학의 계보를 판서한 선생이 ‘스토아 학파’ 에 밑줄을 긋는다. 인간 이성과 금욕을 중시한 걸로 유명한 학파라는 말과 함께, 흔히 스토익하다는 표현이 여기서 왔다고 덧붙이며 선생은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이 학급에서 누가 제일 스토익한 편이니? 하는 물음에 학생들 대다수가 약속이라도 한 듯 마후유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아사히나는 확실히 금욕적이란 인상이지. 칭찬인지 모를 선생의 말에 멋쩍게 웃으며, 아가씨는 일방적으로 자신에게 금욕적이란 꼬리표를 붙이는 흐름에 기묘함을 느꼈다.

2교시 쉬는 시간. 아까보다 가벼운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카나데에게, 마후유는 퉁명스레 말했다. 편법은 더 이상 인정 안해줄 거니까. 허를 찔린 기색으로 당혹스러워하다가, 곧 체념했는지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를 살피느라 주변을 둘러보면, 학급에 사람은 몇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3교시는 가정 수업이라, 실습실로 이동해야만 했었지. 그렇게 말하고는, 카나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재빠르게 다가와서는 아까보다는 제대로 입술을 훔쳐간다. 끝만 살짝 맞닿는 입맞춤이긴 했지만.

3교시는 가정. 달걀말이를 필두로 각자 자신 있는 달걀 요리를 만드는 실습이 과제로 주어진다. 평가를 받은 다음엔 만든 걸 먹어도 좋단 설명에 작게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애매한 시간이라 제일 배가 고플 시점이기도 하니. 조를 만드는 건 개인 자유여서, 마후유는 당연하게도 카나데와 조를 이뤘다. 재료 손질은 마후유가 맡아서 하고, 카나데는 양념을 만들어 간을 맞춘다. 뒤집을 때 약간의 실수가 있어 비뚤어진 달팽이 껍질 같은 형태가 되어버리기는 했지만, 둘의 합작품은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3교시 쉬는 시간. 목 관리에는 제법 신경을 쓰는 터라 카나데는 늘 가글액을 챙겨다녔다. 실습동의 화장실에서 둘은 입을 헹궜다. 달걀말이 특유의 달짝지근한 기름기가 씻겨나가고 상큼한 스피아민트 내음이 코에 감돈다. 화장실을 나선 다음 카나데는 목캔디를 꺼내 입에 넣고는, 하나 더 꺼내 마후유에게 건넸다. 그 전에, 해야할 게 있지 않아? 나지막히 속삭인 말을 듣고는 뺨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잠깐 머뭇거리다가, 카나데는 고개를 내밀었다. 사탕에서는 레몬향이 났다.

4교시는 영어. 발음이 정확하고 유창하다는 이유로 매번 마후유가 본문을 읽도록 지목당하는 과목이었다. 오늘은 거기에 더해 수업 시간에 입에 사탕을 굴리고 있는 게 들킨 탓에 벌칙으로 카나데가 합류한다. 일정을 묻고 약속을 잡는 표현으로 구성된 대본은, 남자가 여자에게 은근슬쩍 데이트를 하고 싶단 티를 내며 예정을 묻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속내가 뻔히 보이는 남자의 수작에 여자 쪽이 새침하게 반응하며 빠져나가는 구도였을 대화는, 남자 역을 카나데가 맡는 걸로 순식간에 애절한 순정 드라마의 한 장면이 되어버렸다. 더듬더듬 영어 문장을 말하고는 슬쩍 이쪽을 쳐다보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정말로 네가 데이트 신청을 해준다면 기쁠 건데.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가, 마후유는 차분한 어조로 여자 쪽의 대사를 따라 읽었다.

점심 시간. 각자 도시락을 들고 책상을 붙여 앉는다. 2학년이 되어 같은 반에 배정된 이후로 둘은 거의 날마다 같이 점심 식사를 했다. 가끔씩 카나데와 친한 1학년 후배들이 찾아와 합석을 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그런 경우에도 카나데의 옆자리는 마후유의 차지였다. 자연스럽게 서로의 도시락 반찬 사정에도 익숙해진다. 마후유는 카나데의 어머니가 만들어주는 반찬들이 좋았다. 겉보기에 화려하지는 않아도 하나하나 깊은 맛이 있었다.

언젠가 어머니와 함께 장을 보는 카나데와 마주쳤던 적을 떠올린다. 친한 친구라는 딸의 소개에 환하게 웃으며 인사하는 여사님의 모습은 카나데와 판박이로 닮아서, 마후유는 편안함을 느꼈었다. 견적을 내는 것마냥 상대를 훑어보는 일 없이, 순수하게 호의를 보일 줄 아는 다정함과 상냥함을 카나데도 물려받은 거겠지. 혼자 생각에 잠겨있으면, 자기 도시락에 담긴 미니 햄버그 스테이크 중 하나를 카나데가 건네준다. 동글동글 모양새 예쁜 반찬 중 유독 못생긴 게 몇 개 있어 그를 바라보고 있자, 머뭇거리던 카나데가 작은 목소리로 고해를 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만들었는데, 볼품없는 건 자기가 만든 거라고. 카나데가 건네줬던 동그란 스테이크를 되돌려놓고, 마후유는 그 중 가장 못생긴 것 하나를 집어들었다.

다음 수업은 체육, 그를 앞두고 점심 시간 내에 준비를 해둬야만 한다. 날이 더워지기 시작하면 바깥 활동은 아무래도 하기 싫어진단 잡담을 나누는 아이들을 지나쳐서, 둘은 탈의실 안쪽에 위치한 관물함 앞에 섰다. 관물함 문을 연 카나데가 마후유에게 작게 손짓을 했다. 교복 상의를 벗으려다가, 리본만 풀어내린 채 마후유는 친구에게로 다가갔다. 열어둔 관물함 문이 만들어내는 그늘 아래에서, 입술이 입술을 훑는 소리가 희미하게 울렸다.

5교시는 체육. 수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있는 카나데를 보고는 선생이 몸 상태가 나쁘면 보건실로 가도 좋다는 말을 건넸다. 수긍하고는 본관으로 돌아가려는 꾀병 환자의 손목을 붙들고는, 마후유가 밝게 웃는다. 체력 증진을 위한 운동장 구보도, 몸풀기 체조도, 오늘의 수업 주제인 철봉 훈련도 카나데로선 달갑지 않겠지만, 하기 싫단 이유로 피해서야 성장하지 못하는 법이니.

5교시 쉬는 시간. 교보재 뒷정리를 맡게된 마후유에게 선생이 체육창고 열쇠를 건네준다. 요이사키, 무리하지는 마라.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함께 남은 카나데에게 한 마디를 남기고 선생은 자리를 떴다. 그리 무겁지 않은 교보재를 한쪽씩 나눠들고는 둘은 창고로 향했다. 걸어가는 동안 둘 다 의미심장한 침묵을 지킨다. 나름 관리는 되고 있는 편이지만 어쩔 수 없이 건조한 먼지 냄새가 나는 창고에 들어선 다음, 마후유는 문을 닫았다. 누군가에게 보일 염려가 전혀 없단 사실에 안심한 걸까.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카나데가 다가왔다. 아까 달리기를 하던 도중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혔던 그녀의 얼굴을 떠올린다. 타인의 체취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건 좋아하는 상대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몇 차례나 반복해서 입술을 맞대고 있는 시점에서 상대를 좋아하는지를 따지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6교시는 생물 심화. 과학은 기초 과목으로 수강하는 카나데와는 이동 수업을 할 때의 반이 갈리게 된다. 수업에 집중해야하는 동안은 친구가 곁에 있는지 없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겠지만, 허전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쩌지 못한다. 펼쳐둔 교과서의 지면 위로 인간의 침샘 기관 해부도가 그려져 있었다. ‘침의 성분은 99% 이상이 수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로 시작되는 문장을 눈으로 훑다가, 마후유는 입가를 쓰다듬었다.

종례 전. 이동 수업에서 돌아오는 카나데를 데리고 마후유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센서 달린 방향제가 움직임을 감지하고 치익- 향균제를 허공에 흩뿌렸다. 이걸로 여섯 번째인 거지? 묻고는, 딱히 답을 필요로 하는 물음은 아니었는지 카나데는 살짝 발돋움을 하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서로의 입술이 접해서, 천천히 문질러진다. 맞닿은 살결에서 체온이 뒤섞이다가 희미해지기를 반복한다. 몇 차례나.

방과 후. 카나데는 음악실의 문을 열었다. 아직 정식 동아리를 만들 요건은 갖추지 못했으나 이미 고등학교 입학 전부터 대회에서 실적을 냈다는 점 때문에 특별히 방과 후 활동 자체는 인정받은 케이스였다. 미야마스자카 여학원에 음악의 길을 걷는 학생들이 달리 없는 건 아니었으나, 대부분 학점제 반에 속한 탓에 방과 후까지 학교에 남아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어째서 학점제 반으로 가지 않았냔 말을 들을 때마다 카나데는 수줍게 웃으며 답하곤 했다. 부모님과의 상의 끝에 직접 정한 길이라고.

공식적으로는 궁도부에 몸담고 있는 마후유였으나, 잠깐이나마 여유가 생길 때마다 방과 후의 음악실을 찾고는 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이미 방과 후 음악실 요정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카나데였다. 맑은 피아노 음색에 이끌려 호기심에 음악실 주변을 기웃거리는 학생들도 종종 있었다. 그런 애들이 보일 때마다 마후유는 보란 듯이 성큼성큼 걸어가 음악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입성하고는 했다. 마치 자신에게만 방과 후 음악실에 초대받을 권한이 있다는 것마냥.

“이걸로 마지막이지?”

“일곱 번. 응, 그러네.”

요정님과 방과 후의 음악실이란 세계를 공유하는 인간은 한 명으로 충분하다. 그 이상은 방해일 뿐이다. 함께 작곡을 하고, 가사를 생각해주고, 피아노로 연탄곡을 연주하고, 곡에 대한 감상을 나누는 역할은 진즉에 아사히나 마후유가 맡고 있으니.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을 마음이 끓어오를 때마다 소녀는 소녀가 연주해주는 곡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곤 했다.

지금도, 또한 그랬다. 다만 곡을 연주하는 게 피아노가 아닐 뿐이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 마주 보고 앉은 자세를 하고 있으면, 수많은 음색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네가 호흡하는 소리, 네가 긴장하여 침을 삼키는 소리, 길고 예쁜 머리카락이 흔들리며 내는 미세한 소리, 그리고 어쩌면, 네 심장이 강하게 뛰고 있는 소리.

입술과 입술이 포개어진다. 일곱 번의 입맞춤. 농담도 되지 않을 억지에 어울려줘서는, 결국에는 나름의 방식으로 서로 간의 약속을 지키는 게 요이사키 카나데란 아이가 지니고 있는 진중함이니. 세계를 공유하고 있는 절친한 친구의, 더없이 소중한 이의 어리광을 가능한 받아주고자 하는 상냥함이기도 하고.

“......나 외에 다른 사람하곤 함부로 내기 같은 거 해선 안 돼.”

“응.”

“뭐든 들어주겠단 말도 해선 안되구.”

“알겠어.”

“......알았다면 됐어.”

사실은 알고 있다. 상대가 아사히나 마후유이기에 아무래도 좋을 게임을 같이 하자고 말을 꺼냈단 점을. 상대가 아사히나 마후유이기에 뭐든 들어주겠단 말을 했었단 점을. 그리고 상대가 아사히나 마후유이기에......일곱 차례나 입맞춤을 나눴다는 점을. 애시당초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면서 억지를 부린 쪽이 성격이 나쁠 뿐이겠지. 어째서 늘 너에게 응석을 부리게 되는 걸까. 생각하면서, 마후유는 카나데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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